하나님이 사랑한 다니엘 / 다니엘 1장 8 - 16절

영상팀
2022-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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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10 박동찬목사님


다니엘 1장 8-16절


<<하나님이 사랑한 다니엘>>




성경에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을 합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다니엘이라고 하는 사람이 또 등장을 하는데 이 다니엘은 참 그 삶을 돌아볼 때 축복받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한 사람이었고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 존귀히 여김을 받았던 그런 사람이 바로 이 다니엘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이 살던 시절이 뭐 그렇게 좋았던 시절이냐 하면 그렇지 않았어요. 바벨론에게 이스라엘이 망하고 포로로 끌려가 있는 그런 아주 이 풍전등화와 같이 이스라엘은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었고 이 다니엘은 어린 나이에 중고등학생 나이, 청소년기에 이 바벨론의 포로로 그렇게 끌려갔던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일생을 보면 그 모든 왕들이 이 다니엘을 너무나도 존귀하게 그렇게 사랑하고 그렇게 또 그를 의지했던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나라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바뀌고 왕이 바뀌고 그러다가 결국 이 바벨론이라고 하는 거대한 제국이 페르시아에게 망하게 되죠. 이 나라가 바벨론에서 페르시아로 그렇게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여전히 사랑받는 존귀 여김 받는 그런 총리 대신의 자리를 지키고 고위 관리직을 지나면서 그렇게 왔던 사람이 이 다니엘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또한 이 다니엘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존귀한 자로 만들어주셨어요. 그래서 다니엘이 기도만 하면 하나님께서 바로 응답을 하시고 그 응답하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것까지도 하나님께서는 계시에 보여주심으로 인해서 다니엘을 위로하셨던 그런 하나님인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다니엘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존귀히 여김받을 뿐만 아니라 많은 왕들로부터 세상에 많은 사람들로부터도 그렇게 존귀여김 받았던 사람 그의 어려서부터 나이가 90이 되기까지 늘기까지 그렇게 계속해서 이렇게 한결같이 사랑을 받았던 사람이 바로 이 다니엘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우리 자녀들 축복할 때 다니엘 같은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근데 그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다니엘이 그렇게 존귀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는 도대체 이 다니엘이 이렇게 존귀한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얘기하기를 원합니다. 다니엘의 특징 두 가지를 말씀을 잠시 전하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는 다니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뜻을 세운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뜻을 세웠어요.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한 뜻을 세우죠 뜻을 세운다는 건 뭐 목표를 세운다 이렇게 봐도 뭐 틀린 얘기가 아니겠습니다만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한 목표를 세우고 뜻을 세웁니다. 어떻게 하면 성공할지, 나는 돈을 많이 벌 것이다. 나는 높은 자리에 올라갈 것이다. 이렇게 자기 자신의 어떤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세우는데 다니엘은 그런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겠습니다. 하나님 영광을 나타내는 그런 삶을 살기로 결단을 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8절에도 보면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어요.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뜻을 정하였다 그래요. 근데 뜻을 정해서 뭘 했느냐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부탁을 했다는 거 우리는 왕의 음식 야 그거 한번 참 먹어보고 싶다. 왕이 마시는 포도주 야 나도 그거 한번 먹어보고 죽으면 소원이 없겠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다니엘은 그런 것으로 인해서 자기를 더럽히지 않도록 환관장에게 구했어요. 왜 환관장에게 구하느냐? 바벨론의 포로로 다니엘은 끌려가기 때문에 그 왕의 궁전에서 주는 거를 그냥 먹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주면은 먹어야 되는 건데 그것을 왜 그냥 그러지 않고 "나는 채소만 주세요. 야채만 주세요." 이렇게 얘기를 한 거죠. 오늘 본문에 읽어보니까 음식법에 관한 것도 레위기 11장과 22장에 보면 음식법에 대한 것도 나와 있어요. 먹어도 되는 음식이 있고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 이것을 구분한단 말이에요. 그걸 이제 코셔라고 얘기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요즘에 세계 나가보면 할랄 푸드라는 얘기를 많이 듣죠. 할랄 푸드 할랄 음식 그래서 그거는 참 믿을 수 있어요. 깨끗한 음식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할랄이라고 하는 게 어디서부터 나온 거냐 하면 이슬람의 음식을 할랄 푸드라고 얘기를 하거든요.그런데 이슬람에서 그 할랄 푸드 모든 것을 정결하게 잡고 규례대로 잡고 그냥 막 더럽게 이렇게 음식을 하는 게 아니라 깨끗하게 하는데 그 전통이 어디서부터 왔느냐 유대교회 코셔에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가 요즘에는 한날 음식은 많이 알지만 코셔 음식은 잘 몰라요 그런데 그 할랄 음식의 기원이 코셔에서부터 왔다. 유대교회 코셔 음식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이제 음식을 정한 음식과 부정한 것으로 나누는데 육식을 할 때는 이 발굽이 갈라진 것을 먹어야 돼요 발굽이 갈라진 거 소라든지 양이라든지 이렇게 발굽이 갈라진 것 그러면서 되새김질을 해야 돼요 소가 이렇게 계속 뭐를 씹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되새김질을 하는 건데 소는 위가 4개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 음식을 또 끌어올려서 되새김질하고 또 넘기고 또 되새김질해서 넘기고 이런단 말이 그런데 돼지 같은 경우는 이 되새김질을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성경에서는 돼지는 부정한 음식이다. 그러니까 할랄 푸드에서도 돼지는 부정한 걸로 그렇게 얘기를 하고 이슬람에서는 돼지를 먹지를 않죠. 


그런데 유대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돼지라든지 낙타라든지 이런 것은 먹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리고 또 피를 먹으면 안 돼요. 그 피를 완전히 다 제거를 하고 먹도록 그렇게 돼 있어요. 모든 생명의 근원이 피에 있기 때문에 피를 먹지 말아라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거예요. 어류 같은 경우도 지느러미가 있어야 돼요 비늘이 있어야 되고요. 그런데 우리가 좋아하는 장어 같은 거 미꾸라지 이런 건 비늘이 없거든요. 이거 성경에 의하면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이라는 거예요. 


또 우리가 좋아하는 뭐 새우 문어 오징어 이런 거 다 먹으면 안 되는 슬프죠 먹으면 안 되는 걸로 그렇게 정해져 있단 말이에요. 유대교에서는 그런 거를 먹지를 않아요. 또 육식 음식을 먹을 때는 이 어미와 새끼를 존중해요. 그래서 이 암소나 암양을 막론하고 어미와 새끼를 죽일 때 같은 날에 죽이지를 못하게 돼 있어요. 그리고 어미의 젖에서 나오는 그 젖을 새끼가 먹는데 그 젖과 새끼를 같이 삶아버리는 거 이런 것들을 못하게 금지를 하고 있다면 그래서 지금도 이 코셔 음식을 먹는 사람들은 보면 이 접시에다가 고기랑 우유 제품들 이거를 같이 올려놓지를 않아요. 따로 분리를 합니다. 설거지를 할 때도 이 육류 제품을 담은 접시와 유제품 담은 것을 싱크대를 두 개로 나가지고 아예 섞이지 않도록 분리를 해서 이렇게 설거지를 할 정도로 그렇게 철저한 거예요. 그래서 육류를 먹었는데 내가 유제품 요구르트 같은 게 먹고 싶으면 6시간 기다렸다가 먹어야 돼 배 속에서도 섞이지 않도록 하는 그런 철저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다니엘이 이 먹는 음식을 나는 채소만 주세요. 그랬던 이유는 그냥 이 채식주의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법은 내가 다 지킬 수가 있는데 이 음식이 나오는 거는 모든 접시에 섞여서 나오는 걸 안 먹을 수는 없잖아요. 결국은 이 코셔 음식법을 내가 어기는 것이 되니 그러니 그냥 채소만 주세요. 내 접시에는 채소만 담아서 주세요. 그러면 이게 뭐 코셔 음식법을 어길 이유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나는 그렇게라도 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것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다 지키며 살겠습니다. 이런 결단이 이 다니엘의 마음속에는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나라가 망한 마당에 무슨 그런 법을 지킬 건 뭐 있느냐 예루살렘 성도 다 무너졌고 나라가 망했는데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지만 이 다니엘의 마음속에는 무슨 마음이 있었냐 하면 '나라는 망했어도 하나님은 망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세계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니 나는 지금 이스라엘에 살다가 지금 바벨론으로 와서 살고는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어느 곳에 있든지 지켜야 된다.' 이 뜻을 세웠다는 거예요. 그 뜻을 세워서 처음부터 끝까지 마지막 순간까지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나는 철저하게 다 지키겠습니다. 이것이 다니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다니엘의 마음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참 귀감이 되는 그런 모습이에요. 


오늘 우리는 세상 유혹이 참 많죠. 우리에게도 유혹이 되는 건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세상 나가서 살아갈 때는 "둥글게 둥글게 사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지금 얘기하잖아요. 그러면 안 된다 그건 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살아야 됩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유별을 떠십니까?" 그렇게 광신도적으로 그렇게 신앙생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런 얘기를 한단 말이에요. 우리는 늘 이 합리화를 시키는 거예요. 자기 편의대로 합리화를 시켜 하나님의 말씀을 내 편의대로 합리화를 시키면서 그 말씀을 자꾸 변개시켜버리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때로는 너무 종교적이어서 안 된다 광신도처럼 그렇게 살지 말아라 아니 하나님의 말씀 지키면서 사는 것이 어떻게 광신도라고 얘기를 합니까? 그것이 바른 거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그저 상황이 펼쳐지는 때로 때로는 이렇게 살고 때로는 저렇게 살고 그것이 바른 신앙생활이라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까? 잘못됐다는 거죠. 


오늘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해석을 하려고 그래요 거기서부터 실수가 빚어지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거 사탄은 그런 점을 노리는 거예요. 사탄이 제일 잘 사용하는 것이 뭐냐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거예요. 호기심을 자극하면 그걸 어떻게 해서든지 하고 싶어 먹고 싶고 가지고 싶고 그랬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보니까 그러지 말래 어떡합니까 너무 하고 싶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내 나름대로 해석을 해가지고 결국은 그 잘못을 저지르고 마는 거죠. 그래서 이 사탄의 이 유혹 논리 이런 거에 의하면 우리가 성경을 붙잡고 신앙생활하면서도 지금 상황이 어렵지 않으냐 그러니까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는 것이 옳지 않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지금 꼭 그렇게 유별을 떨어야 되느냐 뭐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면서 우리는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탄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니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법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그 말씀을 지켜야 되는 거예요. 이해가 되든 이해가 되지 않든 하나님의 말씀이 법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교과서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갈 때 우리는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줄 믿습니다. 다니엘은 그런 철저함이 있었다는 거예요. 


오늘 다니엘의 신앙과 우리의 신앙의 차이가 뭐냐 하면 그런 철저함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라는 그런데 그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더라도 그런 철저함이 있는 사람은 승리해요. 그러나 그런 철저함이 없는 사람은 결국 또 넘어지고 넘어지고 넘어지고 그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사탄은 이런 논리를 가지고 이런 합리성을 가지고 예수님도 공격을 했어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40일을 금식하고 나왔는데 그다음에 이 사탄이 유혹을 하잖아요. 예수님에게 슬그머니 나타나서 예수님을 위하는 척하면서 얘기를 하는 거예요. "지금 배고프잖아. 40일 금식했으니까 얼마나 배가 고파? 그런데 너 능력 있잖아. 이 돌을 가지고 떡을 떡이 되도록 만들어서 먹으면 그 문제 해결될 거 아니야? 이게 뭐 죄는 아니잖아." 얼마나 그럴 듯합니까? 능력이 있겠다. 돌을 가지고 떡이 되도록 만들어서 그거를 내가 먹으면 배부를 거잖아요. 근데 그게 뭐 죄도 아니란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그 얘기를 들으면서 "그래 니 말이 옳다. 뭐 이거 죄 짓는 거 아니니까 이렇게 하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까 내가 그렇게 할게." 그러고 사탄의 얘기를 들었느냐 듣지 않았단 말입니다. 예수님 말씀 말씀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짐승하고 다른 존재다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을 먹고 살아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얘기를 하신 것이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을 대적했다면 사탄이 물러가지 않고 두 번째 또 공격하잖아요. 너라는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이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가라. 그러면 세상 모든 사람이 니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야 저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로구나 저 사람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로구나 그리고 너의 말을 믿을 텐데 한 번 너의 존재를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서 존재를 입증을 하면 될 거 아니냐?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세 번째 또 나타나서 나에게 경고해라 나에게 경비하면 이 모든 세상 만국의 영광을 다 너에게 줄게. 너 지금 이 땅에 온 거 이 잃어버린 이 세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온 거 아니야? 뭐 십자가 지고 고난 당할 거 뭐 있어. 그냥 나한테 절 한 번 딱 하고 경배하면 내가 이 모든 건 너한테 줄게. 얼마나 쉬운 길입니까? 예수님은 그러나 그런 유혹에 넘어지지 않았단 말이에요. 십자가를 지고 가야 되는 것이 당신의 사명이라고 하면 그렇게 가야 된다 이 마음이 있었던 거예요. 


여러분 운전할 때 빨간 불에 서야 되는 거잖아요. 그죠? 운전을 할 때 빨간 불에 서야 되는데, 새벽에 말이죠. 이 새벽길에 빨간 불에 섰어요. 근데 차가 하나도 없고 그런데 서 있어야 되는 겁니까? 나는 지금 시간이 급한데. 여러분 서야 됩니까? 가야 됩니까?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가는 게 맞아요. 아니 뭐 지금 저 교통 신호가 우리를 위해서 있는 거지 뭐 우리가 교통신호를 위해 있는 건가 그냥 가지 뭐 그러고 아무도 없는데 사고만 안 내면 되는 거 아니야? 이렇게 차도 한 대도 없는데 내가 서 있어야 될 이유가 뭐야? 그러고 휙 지나가 버렸단 말이에요. 얼마나 잘한 일입니까?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빨간 불이 이렇게 왔다. 갔다 하면서 차 서라 그러고 당신 교통 위반했다. 그러면 그 경찰한테 뭐라 그래요 아니 왜 경찰이 돼가지고 그렇게 융통성이 없어요. 내가 사고 낸 것도 아니고 어이 급할 땐 갈 수도 있지 저 신호가 우리를 위해서 있는 거지 우리가 신호를 위해서 있는 겁니까 그러고 따지면 뭐라 그래요 시끄럽다고 면허증 내놓으라 그러잖아 달리 방법이 없는 거예요. 


합리적인 것으로 우리가 살아간다. 그러면 우리 세상법 많이 어기고 살아요. 그게 편하고 좋은 것 같지만 결국 그것이 우리에게 또 해가 된다는 말이죠. 법은요 지키는 거예요. 근데 하나님의 말씀은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그런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법이란 말이에요. 다니엘은 그 마음이 있었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지켜야 되는 법이다. 이런 마음이 있으니 다니엘은 본인이 뜻을 세우고 그런 유혹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승리하는 자가 되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어떤 뜻을 세우고 살고 계십니까 내가 인생을 바르게 사느냐 아니냐는 내가 어떤 법을 세우고 어떤 뜻을 세우고 사느냐 여기에 달려 있다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항상 철저하려고 애썼던 다니엘의 모습 그 모습을 볼 때 하나님이 감동하시는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들도 다니엘처럼 뜻을 세우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부터라도 뜻을 새롭게 세우세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가 지향해야 될 내 삶의 지침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내 삶의 지침 그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고자 하는 그 지침을 우리 성도님들 다시금 분명히 세우시고 세상에서 뭐라 그러든 거기에 흔들리지 말고 그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다니엘이 이렇게 존귀하게 된 두 번째 이유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세운 그 뜻을 지킨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뜻을 세우는 건 어렵지 않아요. 금방 세워요. 그렇게 살아야 되겠다. 은혜만 받으면 그런 고백이 막 절로 나오잖아요. 오늘 예배를 드리다 은혜받았으면 아 나 그렇게 살아야 되겠다. 뜻을 세우는 건 순식간에 세워요. 어렵지 않아요. 나도 그렇게 살고 싶어요. 나도 저렇게 살고 싶어요. 나 오늘부터 이렇게 살 거예요. 그런데 저 문 밖에 나가면서 다 잊어버리고 가는 거잖아 그렇죠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 그렇게 사느냐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론 우리가 은혜받고 나서 "하나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백하는 거, 그 부분도 귀한 부분이에요. 세상 나가서 그냥 자기 마음대로 정욕대로 그렇게 사는 것보다 그래도 성전에서 은혜받고 감사하다고 고백하는 게 훨씬 낫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을 진짜 감동시키는 부분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가 지키고자 한 것을 삶의 현장 속에서 몸부림 치면서 지켜나갈 때 그것이 하나님을 더 귀하게 감동시키는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그런 사람이었다는 거예요. 


다니엘의 기쁨은 내가 세상적으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높아지고 뭔가 잘되고 칭찬받고 여기에 다니엘의 기쁨이 있지 않았어요. 다니엘의 기쁨은 세상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고 철저히 지켜나가는 것이 오히려 다니엘에게는 기쁨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내가 세상에서 기도해서 뭔가 열매를 맺고 뭔가 열심히 노력했더니 뭔가 얻는 기쁨이 더 큽니까? 아니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죄와 타협하지 않고 세상 속에서도 내가 그 말씀대로 살아간 거 그럴 수 있었던 것 이것이 더 기쁩니까? 


요셉도 마찬가지였잖아요. 감옥에 들어가도 내가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감옥에 온 것이, 죄 짓고 죄와 타협하고 보디발의 집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었던 사람이 요셉이었어요. 다니엘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존귀하게 만드신다는 거예요. 오늘 우리 자녀들에게도 신앙 교육을 해야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하면, 지식을 많이 넣는 게 아니라 다니엘처럼 요셉처럼 정말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사는 것이 나의 기쁨이 되고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길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만드는 것 이것이 신앙 교육에 있어서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의 기쁨이 그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해서 내가 남들보다 높아지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목표로 둔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은 결국에 가서는 망하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러나 나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그 여건 속에서 "그저 부하든 가난하든 그거와 상관없이 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 붙잡고 삽니다. 내가 오늘도 이 말씀을 지켰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돼야 되는 거예요. 그것이 하루하루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라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만약 다니엘의 기쁨이 또 그의 삶의 목표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라 그러면 다니엘은 이렇게 존귀한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어요. 다니엘서 6장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페르시아의 위대한 왕, 다리오 왕이 나옵니다. 세상 역사에서 서는 다리우스라고 얘기를 하죠. 다리우스는 역사 속에 나오는 그런 위대한 왕입니다. 이 다리오 왕이 이 페르시아 전국을 다스리는데 얼마나 큰 나라를 다스렸는지요. 모든 그 영역 페르시아가 다스린 영역이 얼마나 광대한 지역입니까? 그래서 총리를 두는데 한 명을 두는 게 아니라 3명을 뒀단 말이에요. 총리 3명은 총리 셋을 뒀는데 그중에 하나가 다니엘이었어요. 다니엘은 바벨론 시절에 끌려갔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고 페르시아가 이제 바벨론을 점령을 한 그 순간에도 여전히 총리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사람이 엘이에요. 참 다니엘은 대단한 사람 아니겠습니까? 


다니엘서 6장 3절에 보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고관들 위해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 그러니까 질투하는 사람들이 보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모함을 해가지고 다니엘을 죽이고 싶은데 지금 잡을 데가 없는 거예요. 그 묘책을 마련을 하는데 어떤 묘책을 마련하냐 하면 '왕이요 지금부터 금령을 하나 세우는데 한 달 동안 어떤 신에게나 어떤 사람에게나 무엇을 구하면 그 사람은 그냥 사자굴 속에 집어넣으십니다. 오직 왕만이 왕에게만 구하도록 그렇게 합시다.' 왕이 들을 때 얼마나 자기한테 충성하겠다는 거니까 얼마나 신통하고 좋습니까? 그래서 그러자 그러고 조서에다가 도장을 꽝 찍었어요. 오늘부터 30일 동안은 어떤 신에게도 절하지 말고 어떤 사람에게도 뭘 구하지 말아라 그러고 도장을 조서를 찍은 거예요. 번복할 수 없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때 다니엘의 반응이 어땠느냐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다니엘서 6장 10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이 돼 있어요.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알았다는 거예요.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이런 행동이 쉬운 행동이지요. 하지마 왕의 조서에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죽음의 위협 사자굴에 던져놓는 그런 끔찍한 상황에서도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왕이 조서를 내렸으니까 한 달은 쉽시다." 그러지 않겠어요? 우리는 뭐 고민도 하지 않고 한 달을 쉬어버린단 말이에요. 그런데 뜻을 세운 다니엘은 죽음 앞에서도 왕의 지금 조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다.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살기로 내가 뜻을 세우고 결단을 했어요. 그럼 어떻게 합니까? 그것을 지키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경배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다니엘을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다니엘을 어떻게 세상에서는 "저런 맹꽁이 같이 저렇게 속 좁게 왜 저러고 사는지 몰라" 이렇게 얘기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이런 다니엘의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웠겠느냐는 거예요. 어떻게 이런 다니엘을 축복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도대체 누구를 축복하겠습니까 다니엘은 왕에게 충성하는 것보다 세상 명예에 충성, 돈에 충성, 또 세상적인 어떤 칭찬에 충성하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충성합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다니엘이었다는 거예요. 


결국 이 이야기의 결론이 어떻게 끝이 나게 됩니까? 결국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지게 되잖아요. 다니엘은 죽음을 각오하고 그런 일을 한 거예요. 그렇게 될 줄 알았어요. 성경을 보니까 이 다리오 왕이 이 세계를 지배하던 그 대단한 다리오 왕이 안절부절을 못하는 거예요. 얼마나 정말 다니엘을 사랑했으면 안절부절을 못하는 거예요. 그리고 새벽에 바로 사자굴로 달려갔어요. 죽었겠지 하는 마음으로 사자굴에 달려가가지고 슬피 울면서 소리를 질러서 외치는 거예요. "다니엘아, 너희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였느냐? 너 아직 살아있느냐?" 이런 얘기 참 어떻게 이렇게 왕에게 존귀히 여김을 받을 수가 있겠어요. 


너무 안타까운 거예요. 아니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수많은 사람 중에 또 이제 또 등용하면 되는 건데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진 거 너무 안타까워서 죽었으려나 싶어가지고 가서 슬피 울면서, 하나님을 믿지도 않았지만 이렇게 외치는 거예요. "다니엘아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원했느냐? 너가 그렇게 기도한 그 하나님이 너를 구원했느냐" 그런데 다니엘이 뭐라고 그래요? "내가 살아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이 사자의 입을 다 봉해줬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뛸듯이 기뻐하는 거예요. 


다니엘서 6장 23절에 보면 [다리오 왕이 심히 기뻐했다]라고 나와있습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 '다니엘은 도대체 어떤 존재였기에 바벨론의 왕들이 다 사랑하고 페르시아 왕들이 또 이렇게 사랑하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이 다니엘을 너무 사랑하셔서 보호하시고 사자의 입까지 막아버리셨을까?' 생각합니다.


반면에 도장을 찍은 조서가 다니엘을 죽이기 위한 계략이었다는 것을 안 다리오 왕의 분노로 다니엘을 대적하고 죽이려고 했던 그 사람들과 그의 처자들까지 다 그 사자굴에다 집어던졌더니 그들의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사자들이 다 움켜서 죽었다. 이렇게 기록이 돼 있어요.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어떤 질투심에 누구 끌어내리려고 그러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다고 끌어내려지지도 않고 내가 하나님 앞에 말씀 붙잡고 서 있으면 하나님이 나를 높이시는 거지 그 상대방 끌어내리려고 그렇게 꾀를 부리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에요. 자기 스스로를 저주하는 일이라고 얘기를 해도 틀린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다니엘 참 부럽죠. 세상 왕들에게도 이렇게 존귀히 여김받고 하나님께도 사랑받았던 다니엘, 얼마나 부럽습니까? 문제는 우리들이라는 거예요.우리가 세상을 사는 모습은 어떠합니까? 다니엘처럼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늘 상황에 따라 되는 대로 그냥 물 흐르듯이 그렇게 세상과 타협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믿음도 접어버려야 될 때가 왔다고 하면 그냥 주저하지 않고 접어버리고 그렇게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얘기 하면 "목사님 세상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알아요. 왜 모르겠어요. 다니엘도 다니엘은 지금보다 더 어려운 세상 속에 살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잖아요. 그것이 다니엘과 우리의 차이라는 거예요. 


다니엘은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거기 있었다는 거예요. 우리는 늘 세상 편에 살면서 세상에 휩쓸려 살면서 그러면서 왜 하나님 다니엘에게 주신 축복을 나누어달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얘기잖아요. "하나님 다니엘에게 은혜 주신 거 나에게도 주세요." 조건이 다르단 말이에요.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 철저하려고 이렇게 사자굴 속에 들어간다. 그래도 굽히지 않고 철저함이 있었다는 거예요. 오늘 우리의 삶 속에 이런 철저함이 있느냐 이걸 우린 돌아봐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나는 지금 다니엘처럼 살고 있는가, 또 앞으로도 나도 다니엘처럼 이렇게 살아갈 수가 있을까 한번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젊은 시절에는 나도 정말 다니엘처럼 하나님의 사람처럼 이렇게 살고자 하는 그런 결단도 있었고 그런 열정도 있었고 그렇게 또 도전도 해보고 그런 분들도 많이 계실 거예요. 그런데 살다 보니까 어느 순간에 사는 게 너무 바빠요 가족을 이루고 이렇게 살다 보니까 바빠요. 그런 거 다 그냥 옛날 얘기로 치부하고 지금은 그냥 세상에 그냥 죽은 물고기가 물을 떠내려가듯이 그렇게 그냥 물 흐르는 대로 그렇게 떠내려가면서 지금 살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여러분들 소망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꿈이 어딨습니까? 여러분들의 미래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빠진 인생은 허무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붙들지 아니하는 인생은 허무한 인생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세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그런 삶을 살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다니엘처럼 어떻게 살 것인지 오늘 뜻을 세우세요. 그리고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 앞에 약속한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사는 그렇게 살려고 이 세상 속에서 몸부림 치면서 사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돼야 되는 거예요. 그런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는 붙드시고 인도하시고 때로 위기가 온다. 할지라도 그 위기를 넉넉히 이기게 하시고 정말 하나님을 경유하는 자로서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되기에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경의 인물을 볼 때마다 부러워하지 마시고 오늘 우리도 그들처럼 사는 것을 통해서 정말 그들이 누렸던 은혜와 축복을 우리도 누리며 살아가는 그런 복된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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