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소파 방정환 선생님이 1923년에 어린이들이 우리의 미래니 귀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취지 속에서 제정한 날입니다. 과거에는 어린아이들이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무시당하고 학대받던 시절이 있었지요. 자라나는 새싹을 밟아버리면 거기서 꽃이 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 아이들이 커서 우리의 미래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고 귀중하고 소중히 여기자는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어린이날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린이들이 과거처럼 무시당하고 그러는 것이 아닌 받들어 모시는 수준에 이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정사나 모든 것에 있어서 모든 것의 우선권은 자녀들에게 두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녀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맹목적인 것이 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자녀에게 바라는 것들이 있습니다. 대체로 ‘잘 되는 것’ 이 한 가지를 많은 부모님들이 공통적으로 원합니다. ‘잘 된다’라는 것의 뚜껑을 열어보면 일반적으로 남보다 좀 앞서고, 부족함이 없었으면 좋겠고, 건강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신앙도 좋았으면 좋겠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아무리 원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노력해서 된다고 하면 좋겠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노력해서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노력이 중요합니다. 지도자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송아지는 가만히 내버려 둬도 소가 됩니다. 망아지도 내버려 두면 말이 되지요. 그러나 사림은 내버려 두면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다워진다고 하는 것에는 반드시 어떤 노력이 필요합니다.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기 때문에 꼭 필요합니다. 저는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아 우리 자녀들이 잘 되게 하기 위해 부모들이 감당해야 하는 두 가지 중요한 역할에 대해 잠시 말씀을 전하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게 해야 합니다.
오늘 읽은 신명기 6장 4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은 <쉐마>라고 표현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하는 말씀은 현재 이스라엘 헌법의 기초가 되기도 하고 모든 문화와 정신적인 영역에 있어 기본이 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보면 유대교를 잘 믿는 사람들 집에는 우리 옛날 문패처럼 작은 기둥 같은 것이 달려있습니다. 그 뚜껑을 열어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있지요.
오늘 신명기 6장 4절-9절의 말씀은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우리가 자녀들을 교육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첫 번째 사명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명에 따라 자녀를 교육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지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내 맘대로, 내 뜻대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만약 우리의 자녀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녀로 살아간다고 하면 우리는 자녀 교육에 있어서 부모가 책임져야 할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책임을 놓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녀가 형통했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형통이라는 것은 모든 일이 잘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모든 사람들이 다 형통하기 바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쉽게도 모든 사람이 형통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중에도 어떤 사람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모든 것이 형통하게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을 형통의 축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형통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 간다면 안 되는 일도 되는 일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에 좋은 예가 있습니다.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갔습니다. 노예가 어떻게 정치인이 되고 어떻게 고위 관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노예로 팔려 갔던 요셉이지만 성경의 창세기에도 보면 하나님이 요셉을 형통케 하셨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형통해지니 노예로 팔려 간 집에서 집주인의 사랑을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됐지만 간수장의 사랑과 신뢰를 받게 되고 결국에는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왕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니엘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벨론에 의해 이스라엘이 망하고 유대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가게 될 때 다니엘 또한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도 다니엘은 모든 왕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100세까지 살아갈 만큼 장수의 축복도 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신임을 받은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앞으로 되어질 일들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시고 당신의 계획을 나누기 원하실 만큼 사랑받았습니다. 세상에 잘났다는 사람,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졌다는 사람도 하나님과 그런 긴밀한 관계를 가질 수가 없는데 이 다니엘은 그런 축복을 누렸던 사람입니다
또 페르시아 제국의 왕비가 됐던 에스더라는 여인이 있습니다. 에스더는 망국의 딸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었고 또 성공해보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사람을 만나고 경력을 쌓던 사람도 아니었지요. 에스더는 그저 집에서 조용히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는 세상 물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페르시아의 왕비가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멸망의 위기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유대의 민족들을 다 살리는 귀한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경 속의 인물들을 보며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형통의 축복을 누리는 자들은 하는 일 마다 자동 문 열리듯 일들이 풀리게 됩니다. 열려라 참깨를 외칠 필요도 없고, 자물쇠를 부수고 뚫고 들어가 보려고 애쓸 필요도 없이 그 앞에 서면 문이 열립니다. 이런 형통의 축복을 누리게 된 사람들에는 한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항상 어느곳에서든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삶의 첫번째 목표로 두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범사가 형통케 되는 비결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120년의 인생을 살았던 모세는 죽음을 앞두고 다음 세대들을 광야에 모아놓은 뒤 신신당부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께 모든 것이 달려있다.”
우리는 삶에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지 않고 우리 자녀들에게도 그것을 가르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녀를 맡겨주신 첫 번째 이유는 너희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자녀들에게 억만금의 유산을 물려주는 것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유혹을 물려주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이걸 정말 믿었으면 좋겠는데 믿는다고 말씀들은 하시는데 잘 안믿으시더라구요. 이것보다는 돈이 더 좋죠. 하나님을 믿는 이유도 돈 좀 있었으면 좋겠어서 믿는 건데 그것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기가 참 힘들겠습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한 번 질문을 해봐야 합니다. 나는 지금 우리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게 하려고 힘쓰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내가 지금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다 허사가 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목사님 그렇게 하고 싶은데 사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경외하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솔직한 고백일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자녀들을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만들겠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해야한다고 이야기하면 그렇게 되나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나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데 어떻게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으라 이야기한다고 그들이 정말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런것들이 이제 목회자로서의 고민입니다.
요즘은 세대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우리 때는 그저 부모님이 교회에 가라고 하면 순종하고 밥 먹으라고 하면 순종하고 말씀 암송하라고 하면 순종했지요. 우리가 그렇게 살았던 세대를 모더니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요즘은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를 살아요. 모더니즘 시대에는 옳고 그름이 있었습니다. 진리와 비진리가 있어서 옳은 것과 틀린 것을 구분하고 틀린 일에는 벌을 주곤 했습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에는 옳고 그름이 아닌 다름이 있습니다. 다른 것이 있을 뿐, 틀린 것이 아닙니다. 다 옳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당신의 이야기이며 나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것을 틀렸다고 이야기 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생각과 다른 것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포스트 모더니즘의 특징입니다. 절대의 진리와 비진리가 있던 시대에 비해서 오늘날 포스트 모더니즘, 상대주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속에서 우리가 고백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받는다는 복음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말로 전해야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이전 모더니즘 시대의 사람들은 그렇군요. 예수님이 진리군요. 하고 받아들였지만 상대주의를 신봉하는 지금 이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서는 당신만 옳습니까? 나는 기독교가 싫습니다. 편협합니다. 독선적입니다. 이런 답변을 듣게 됩니다. 이것이 지금 세상이 교회에 대해 말하고 있는 답변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시대에 오늘 우리가 어떻게 이들에게 절대자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것인지 고민하고 말이 아닌 행함으로 전도해야합니다. 내가 아무리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이야기 해도 세상은 더이상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사랑에 대해서도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행함으로, 섬김으로 다가가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말이라는 것은 참 특이합니다. 옳은 말은 별로 효과가 없지요. 옳은 말 100마디를 별로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이야기, 남을 죽이는 이야기는 100%, 200%의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주하고 욕하고 비난하면 분열이 일어나고 하나를 심으면 100개가 생기는 것이 부정적인 말의 효과입니다. 그러나 좋은 이야기는 아무리 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죠. 결국 말에 대해서 갖게 되는 결론은 많이 할수록 손해라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자녀 교육을 말로 했습니다. 아무리 칭찬을 해도 달라지지 않던 아이가 욕 한마디에 삐뚤어지고 가출해버리곤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끝까지 자녀를 말로 교육하려고 하지요. 아무런 효과를 볼 수 없습니다.
어제 파주에서 교사 세미나를 할 때에 제가 세 가지를 말씀드렸는데 이것이 오늘의 핵심입니다. 자녀를 교육할 때에는 말보다 경청해야합니다. 어떻게 하는 거냐하면 일단 얼굴을 바라보고 미소를 띈 얼굴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이야기를 할 때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여줍니다. 감탄사가 들어가면 더 좋습니다. 중간에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들어야합니다. 이것만 잘 해도 아이들은 자기가 존중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듣는 것이 경청인데 이것이 사실 한국인에게는 쉽지 않습니다. 마음이 조급해서 끝까지 듣지를 않습니다. 첫 이야기만 들으면 다 아는 것처럼 알아, 너 무슨 말 하려고 그러는지 아니까 얘기하지 마. 이제 엄마 아빠 말 들어 하고 딱딱 끊어버려요. 본론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알아 끊어 그렇게 되지요. 우리는 경청에 대한 기술이 너무 없습니다. 저도 그거 사실 잘 못합니다. 그냥 척 보면 알겠는데 끝까지 들어주려니까 속이 답답하고 그렇게 끝까지 들어줄 수가 없는 거예요.
근데 이걸 하는 것이 경청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손을 잡아주는 것, 이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자녀같은 경우는 안아주고 등을 두드려주고 따뜻하게 온기가 전달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대화를 할 때도 손을 잡고 얼굴을 바라보고 미소를 띄면서 사랑한다고 한마디 해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 그게 또 어색하지요. 한국인들은 잘 못합니다. 어제 세미나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교사들의 역할은 자꾸 말로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주일에 나오는 아이들을 보면 얼굴을 마주보고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한 주간 동안 너 보고 싶었어 이 이야기를 해주면 된다. 그럼 그 아이는 평생 교회를 나온다. 자기를 존중해주고 자기를 인정해 주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에 평생 교회에 나온다. 그 아이의 이름을 따뜻하게 불러줘라.
선생님들이 절대 하면 안되는 것은 “너 이름이 뭐니?” 이런 질문입니다. 이름을 알아야합니다. 지난주에도 이름이 뭐냐고 묻고 이번주에도 이름을 묻고 다음주에도 이름을 물으면 이 아이는 더이상 교회에 나오고 싶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이야기해도 나라는 사람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구나. 나는 아직도 이름 없는 그런 사람이구나. 하고 실족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절대로 먼저 이름을 묻고 그 아이를 만났을 때는 따뜻하게 아이의 이름을 불러줘야 합니다. 틀리게 부르는 것 또한 안 됩니다. 이 작은 것들이 아이들에게는 큰 상처가 됩니다.
중고등부 아이들을 비전트립에 데리고 가면 가기 일주일 전부터 아이들 사진과 이름을 대조해 외웁니다.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아도 일주일간 열심히 외우고 그 다음에 공항에 가서 아이들을 만나면 실물과 외운 사진, 이름을 머릿속에서 대조합니다. 사진과 실물이 많이 다른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그것을 보며 외웁니다. 어느 정도 외워지면 아이들의 이름과 사진을 가지고 다니며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기 전 다시 확인합니다. 아, 쟤가 누구구나. 그러면 그 적어둔 것을 집어넣고 “누구야.” 불러주면 깜짝 놀랍니다. 목사님이 나를 어떻게 알지? 하고 깜짝 놀라요. 그럼 3박 4일 내내 그 아이들과 친구가 되어줍니다.
이름을 불렀을 때 반응을 보면 특징이 있습니다. “네~” 하고 반갑게 오는 아이가 있는 반면에 화들짝 놀라는 아이가 있습니다. 놀라는 아이들은 대부분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입니다. 평소에 항상 구박받고 문제아로 있던 아이들은 이름을 부르면 화들짝 놀랍니다. 그걸 알아채고 가서 어깨동무하고 “누구야, 잘 지내니? 너 활발해서 참 좋아.” 칭찬을 몇 마디 해주고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너 공부 못하지?” 이러면 고개를 푹 숙이죠. 그러면 제가 그때부터 작업이 들어가는데 바로 공부 못한 사람 중에 성공한 케이스를 수도 없이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3박4일 내내 공부 잘하고 망한 케이스도 수두룩하게 이야기해 주죠. 그러면서 3박 4일이 지나면 이 아이는 공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게 됩니다. 굉장한 가능성이 있는 아이처럼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어느 날 한 권사님이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이 비전트립에서 우리 애한테 무슨 얘기를 했길래 공부를 안 해도 된다고 했다, 담임 목사님이 안 해도 된다고 그랬다며 공부하지 않겠다고 했답니다. 저보고 대체 무슨 얘기를 해서 그러냐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니 애가 죽는 것보다 낫지 뭘 그러냐, 공부해라 공부해라 소리 듣다가 아이가 죽었으면 좋겠냐, 일단 살리고 보자. 하나님이 역사하실 거다. 기도해라.” 그러며 아이의 자존감을 세워줬습니다. 아이들 손을 잡고 들어주고 칭찬해 주며 자존감을 살리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자존감이 살아난 아이는 세상에 나가서 막 살지 않습니다. 자기의 신분을 지키고 본분을 지키고 결국은 그런 아이들이 나중에 세상에 나가서 지도자가 됩니다. 자기를 다스릴 줄 아는 것이지요. 반면 가정에서부터 자존감이 무너지고 자기를 존귀히 여길 줄 모르는 아이들은 결코 세상에 나가서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편법을 사용하려다 되려 어려워지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내가 사랑받고 있고 그것으로 인해 자기는 존귀한 존재라고 하는 것을 깨닫고 배우는 것은 가정과 교회입니다. 그러면 가정과 교회는 그 자녀들에게 있어서 고향과 같은 곳, 늘 가야 하는 곳, 가고 싶은 곳이 되는 거예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게 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성장해 가게 되는 줄 믿습니다.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관심이란 이해하려는 노력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판단해 버릴 때가 많습니다. “딱 보면 알아, 너는 이런 아이야. 너는 안 돼. 너는 돼.” 우리는 이해하려는 노력 대신 어떤 행동이 있으면 그것에 대해 왜 그럴까 생각하지 않고 조급한 마음만 가지고 판단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해서 반응을 할 때 충동적인 반응이 있고 통제된 반응이 있습니다. 충동적인 반응은 “야!” 그러면 “왜!” 그러고 화에 화로 부딪히는 것입니다. 반면 통제되고 조절된 반응을 하는 사람들은 안좋은 이야기를 들으면 일단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뭔가 삭혀요. 생각을 하고 기승전결을 새로 만들어내고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 한 후에 감정을 내보냅니다. 조절된 행동입니다. 그래서 분을 내지 않는것이지요. 이것을 성숙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날 보면 많은 동양인들의 경우, 특별히 한국인들의 경우에 성숙되지 못한 그런 행동을 보일 때가 많아요. 성격이 급하다 보니까 그냥 이쪽에서 어떤 반응이 오면 나도 바로 반응을 내보내고 화내고 분내고 싸우는 경우가 생깁니다. 내가 성숙하지 못한데 자녀들을 어떻게 성숙한 자녀로 길러낼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자녀들이 잘 되는 집의 특징을 보면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자녀가 잘 되는 집은 그 부모가 자녀에 대해서 한심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런 자녀들은 잘 됩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한심하다고, 우리아이는 남다른 한심함이 있다고, 너는 안 된 다고 이런 자녀에 대한 한심한 마음을 갖고 있는 집은 절대로 그 자녀가 잘 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자녀가 잘 된 집의 특징은 자녀가 어떻게 하더라도 자녀를 믿어주고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너는 존귀한 자라고 하는 마음을 심어줍니다. 그런 자녀들은 잘 됩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한심하다고 말하고 행동으로 한심하다고 자녀들에게 표출합니다. 집에서 사는 것은 이 아이들에게 학대입니다. 당연히 잘될 수가 없지요. 지나온 날들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자녀들에 대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아이들을 사랑으로 존중하며 웃으며 우리 가정에서는 너를 환영한다는 마음을 심어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가정에서 이 아이들이 사회성을 배울 때까지, 자기의 자존감이 세워질 때까지 가정에서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란다면 자녀들은 나중에 세상에 나가서도 지도자의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반듯한 삶을 살고 자기를 통제하며 살고 자기를 절제하며 살아가는 자가 되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존재가 되어서 교회를 열심히 나가고 기도의 자리에 나가도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경청하지도 않고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여주고 윽박지르고 입장을 이해해주지도 않는다면 자녀들은 교회다니는 사람들은 다 겉과 속이 다르구나, 외식하는 자들이로구나 생각하고 교회에 가지 않기로 결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삶과 행동을 통해서 우리 엄마 아빠가 하나님을 만나고 달라졌구나, 하나님이 살아계신가보다, 나도 교회에 가야겠다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녀들은 부모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마음을 느낍니다. 우리는 그 통로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 뿐만 아니고 부부 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간에도 경청을 하고 서로 손을 잡아주고 서로를 존귀하게 여겨주는 가정은 건강한 가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에 대해서 반응이 안 좋아서, 그럼 나도 이제 안 좋게 대해야지 하는 가정은 깨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정은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 우리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귀한 자녀이지 않습니까? 세상에 가장 귀한 보물 1호가 있다면 뭐겠어요? 자녀들 아닙니까? 보물 1호라고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그 보물 1호를 보물 다루듯이 안다루고 돌멩이 다루듯이 그렇게 다루면 안 된다는 거예요. 오늘 우리 자녀들을 향해 이전의 판단하는 말과 행동들을 버리고 경청하는 행동으로 달라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두 번째, 자녀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경청하고 손 잡아주는 것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기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아이의 성장 과정은 영적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바른 길로, 선한 길로 이끌어주셔야 영적 전쟁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자가 돼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떻게 기도할 것입니까? 무엇을 기도할 것입니까? 바로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게 해 주옵소서 기도해야합니다. 대체적으로 자녀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면 대학 합격이나 승진, 돈을 많이 벌고 이 일 저 일 잘 되게 해달라는 세상적인 요구를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6장 30절-32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을 구하지 말란 이야기입니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니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구하는 기도, 비나이다 비나이다의 기도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어느 목사님이 너무 힘이 들어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힘이 들 때에는 기도도 잘 안 나오거든요. 5분 기도를 하니가 더 이상 할 기도도 없고 힘이 들어서 기도를 못하겠어서 주기도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주기도문,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죠. 단순하고 우리가 매번 하는 기도지만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기도가 주기도문입니다. 첫 문장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를 하자마자 눈물이 터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시라는 것이 느껴지고 그 믿음이 왔습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시면 내가 걱정하고 염려할 것이 무엇인가 하며 근심 걱정이 사라지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믿노라 하지만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는 그분의 자녀라고 고백하지만 그것이 그저 지식적인 고백이냐 아니면 이 마음으로 느껴지는 고백이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님들,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든, 우리의 처지 형편이 어떠하든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처럼 다른 것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모든 것을 책임지십니다. 기도할 때 구체적인 결과를 원하는 기도를 드리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한 것을 간구해야합니다. 합격, 승진 이런 것들은 다 결과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하나님께 달린 것이지요. 우리가 기도하면 결과는 어떤 결과로 나오든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이지 내가 요구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해 기도하면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게 하시고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위기의 상황을 만나더라도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며 승리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기도처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나를 구하여 주시옵소서.
자녀를 위한 기도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도록 기도해야합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어떤 유혹이 오더라도 옳고 그름을 분별하게 하여 주옵시고, 유혹에 넘어지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성경 말씀 위에 서 있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항상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지혜로운 우리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온유한 성품과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두렵다고 해서 거짓을 말하지 않고 끝까지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을 비난하거나 정죄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말, 희망의 말을 전하는 우리의 자녀들이 되게 해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할 때 이런 저런 방해가 오곤 합니다. 그렇게 되니까 이런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로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해결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데 그런 거 구하지 않아도 됩니까? 다시 한 번 마태복음의 말씀을 생각하십시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미 우리의 처지와 형편을 아버지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자꾸 상기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내 상황이 이렇든 저렇든 끝까지 믿음을 지켜 나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속에서 서 있는 나의 믿음의 자세를 중요하게 여기고,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에도 '신앙과 성품에 대한 기도를 많이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원수까지라도 품어안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다니엘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 되게 해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어떤 모양으로 있든지 하나님이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기는 우리의 자녀된 줄 믿으시길 축원합니다. 우리의 눈으로 볼 때는 다소 부족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 성도님들 모두, 성도님들의 자녀 모두가 존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해 우리의 자녀를 소중히 여기고 우리의 삶 속에서 자녀들에게 가르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고 너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가르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된다면 오늘 우리의 자녀를 향한 말이 달라지는 것이고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고 그럴 때 우리의 자녀가 어디에 있든지, 다니엘처럼, 요셉처럼, 에스더처럼 범사에 형통케 하시는 은혜와 축복이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자녀를 형통케 하는 부모의 역할>>
신명기 6장 4-9절
250504 박동찬목사님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소파 방정환 선생님이 1923년에 어린이들이 우리의 미래니 귀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취지 속에서 제정한 날입니다. 과거에는 어린아이들이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무시당하고 학대받던 시절이 있었지요. 자라나는 새싹을 밟아버리면 거기서 꽃이 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 아이들이 커서 우리의 미래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고 귀중하고 소중히 여기자는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어린이날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린이들이 과거처럼 무시당하고 그러는 것이 아닌 받들어 모시는 수준에 이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정사나 모든 것에 있어서 모든 것의 우선권은 자녀들에게 두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녀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맹목적인 것이 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자녀에게 바라는 것들이 있습니다. 대체로 ‘잘 되는 것’ 이 한 가지를 많은 부모님들이 공통적으로 원합니다. ‘잘 된다’라는 것의 뚜껑을 열어보면 일반적으로 남보다 좀 앞서고, 부족함이 없었으면 좋겠고, 건강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신앙도 좋았으면 좋겠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아무리 원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노력해서 된다고 하면 좋겠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노력해서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노력이 중요합니다. 지도자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송아지는 가만히 내버려 둬도 소가 됩니다. 망아지도 내버려 두면 말이 되지요. 그러나 사림은 내버려 두면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다워진다고 하는 것에는 반드시 어떤 노력이 필요합니다.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기 때문에 꼭 필요합니다. 저는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아 우리 자녀들이 잘 되게 하기 위해 부모들이 감당해야 하는 두 가지 중요한 역할에 대해 잠시 말씀을 전하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게 해야 합니다.
오늘 읽은 신명기 6장 4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은 <쉐마>라고 표현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하는 말씀은 현재 이스라엘 헌법의 기초가 되기도 하고 모든 문화와 정신적인 영역에 있어 기본이 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보면 유대교를 잘 믿는 사람들 집에는 우리 옛날 문패처럼 작은 기둥 같은 것이 달려있습니다. 그 뚜껑을 열어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있지요.
오늘 신명기 6장 4절-9절의 말씀은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우리가 자녀들을 교육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첫 번째 사명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명에 따라 자녀를 교육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지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내 맘대로, 내 뜻대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만약 우리의 자녀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녀로 살아간다고 하면 우리는 자녀 교육에 있어서 부모가 책임져야 할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책임을 놓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녀가 형통했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형통이라는 것은 모든 일이 잘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모든 사람들이 다 형통하기 바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쉽게도 모든 사람이 형통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중에도 어떤 사람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모든 것이 형통하게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을 형통의 축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형통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 간다면 안 되는 일도 되는 일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에 좋은 예가 있습니다.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갔습니다. 노예가 어떻게 정치인이 되고 어떻게 고위 관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노예로 팔려 갔던 요셉이지만 성경의 창세기에도 보면 하나님이 요셉을 형통케 하셨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형통해지니 노예로 팔려 간 집에서 집주인의 사랑을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됐지만 간수장의 사랑과 신뢰를 받게 되고 결국에는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왕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니엘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벨론에 의해 이스라엘이 망하고 유대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가게 될 때 다니엘 또한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도 다니엘은 모든 왕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100세까지 살아갈 만큼 장수의 축복도 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신임을 받은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앞으로 되어질 일들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시고 당신의 계획을 나누기 원하실 만큼 사랑받았습니다. 세상에 잘났다는 사람,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졌다는 사람도 하나님과 그런 긴밀한 관계를 가질 수가 없는데 이 다니엘은 그런 축복을 누렸던 사람입니다
또 페르시아 제국의 왕비가 됐던 에스더라는 여인이 있습니다. 에스더는 망국의 딸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었고 또 성공해보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사람을 만나고 경력을 쌓던 사람도 아니었지요. 에스더는 그저 집에서 조용히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는 세상 물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페르시아의 왕비가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멸망의 위기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유대의 민족들을 다 살리는 귀한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경 속의 인물들을 보며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형통의 축복을 누리는 자들은 하는 일 마다 자동 문 열리듯 일들이 풀리게 됩니다. 열려라 참깨를 외칠 필요도 없고, 자물쇠를 부수고 뚫고 들어가 보려고 애쓸 필요도 없이 그 앞에 서면 문이 열립니다. 이런 형통의 축복을 누리게 된 사람들에는 한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항상 어느곳에서든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삶의 첫번째 목표로 두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범사가 형통케 되는 비결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120년의 인생을 살았던 모세는 죽음을 앞두고 다음 세대들을 광야에 모아놓은 뒤 신신당부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께 모든 것이 달려있다.”
우리는 삶에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지 않고 우리 자녀들에게도 그것을 가르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녀를 맡겨주신 첫 번째 이유는 너희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자녀들에게 억만금의 유산을 물려주는 것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유혹을 물려주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이걸 정말 믿었으면 좋겠는데 믿는다고 말씀들은 하시는데 잘 안믿으시더라구요. 이것보다는 돈이 더 좋죠. 하나님을 믿는 이유도 돈 좀 있었으면 좋겠어서 믿는 건데 그것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기가 참 힘들겠습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한 번 질문을 해봐야 합니다. 나는 지금 우리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게 하려고 힘쓰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내가 지금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다 허사가 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목사님 그렇게 하고 싶은데 사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경외하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솔직한 고백일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자녀들을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만들겠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해야한다고 이야기하면 그렇게 되나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나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데 어떻게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으라 이야기한다고 그들이 정말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런것들이 이제 목회자로서의 고민입니다.
요즘은 세대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우리 때는 그저 부모님이 교회에 가라고 하면 순종하고 밥 먹으라고 하면 순종하고 말씀 암송하라고 하면 순종했지요. 우리가 그렇게 살았던 세대를 모더니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요즘은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를 살아요. 모더니즘 시대에는 옳고 그름이 있었습니다. 진리와 비진리가 있어서 옳은 것과 틀린 것을 구분하고 틀린 일에는 벌을 주곤 했습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에는 옳고 그름이 아닌 다름이 있습니다. 다른 것이 있을 뿐, 틀린 것이 아닙니다. 다 옳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당신의 이야기이며 나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것을 틀렸다고 이야기 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생각과 다른 것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포스트 모더니즘의 특징입니다. 절대의 진리와 비진리가 있던 시대에 비해서 오늘날 포스트 모더니즘, 상대주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속에서 우리가 고백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받는다는 복음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말로 전해야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이전 모더니즘 시대의 사람들은 그렇군요. 예수님이 진리군요. 하고 받아들였지만 상대주의를 신봉하는 지금 이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서는 당신만 옳습니까? 나는 기독교가 싫습니다. 편협합니다. 독선적입니다. 이런 답변을 듣게 됩니다. 이것이 지금 세상이 교회에 대해 말하고 있는 답변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시대에 오늘 우리가 어떻게 이들에게 절대자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것인지 고민하고 말이 아닌 행함으로 전도해야합니다. 내가 아무리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이야기 해도 세상은 더이상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사랑에 대해서도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행함으로, 섬김으로 다가가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말이라는 것은 참 특이합니다. 옳은 말은 별로 효과가 없지요. 옳은 말 100마디를 별로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이야기, 남을 죽이는 이야기는 100%, 200%의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주하고 욕하고 비난하면 분열이 일어나고 하나를 심으면 100개가 생기는 것이 부정적인 말의 효과입니다. 그러나 좋은 이야기는 아무리 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죠. 결국 말에 대해서 갖게 되는 결론은 많이 할수록 손해라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자녀 교육을 말로 했습니다. 아무리 칭찬을 해도 달라지지 않던 아이가 욕 한마디에 삐뚤어지고 가출해버리곤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끝까지 자녀를 말로 교육하려고 하지요. 아무런 효과를 볼 수 없습니다.
어제 파주에서 교사 세미나를 할 때에 제가 세 가지를 말씀드렸는데 이것이 오늘의 핵심입니다. 자녀를 교육할 때에는 말보다 경청해야합니다. 어떻게 하는 거냐하면 일단 얼굴을 바라보고 미소를 띈 얼굴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이야기를 할 때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여줍니다. 감탄사가 들어가면 더 좋습니다. 중간에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들어야합니다. 이것만 잘 해도 아이들은 자기가 존중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듣는 것이 경청인데 이것이 사실 한국인에게는 쉽지 않습니다. 마음이 조급해서 끝까지 듣지를 않습니다. 첫 이야기만 들으면 다 아는 것처럼 알아, 너 무슨 말 하려고 그러는지 아니까 얘기하지 마. 이제 엄마 아빠 말 들어 하고 딱딱 끊어버려요. 본론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알아 끊어 그렇게 되지요. 우리는 경청에 대한 기술이 너무 없습니다. 저도 그거 사실 잘 못합니다. 그냥 척 보면 알겠는데 끝까지 들어주려니까 속이 답답하고 그렇게 끝까지 들어줄 수가 없는 거예요.
근데 이걸 하는 것이 경청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손을 잡아주는 것, 이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자녀같은 경우는 안아주고 등을 두드려주고 따뜻하게 온기가 전달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대화를 할 때도 손을 잡고 얼굴을 바라보고 미소를 띄면서 사랑한다고 한마디 해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 그게 또 어색하지요. 한국인들은 잘 못합니다. 어제 세미나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교사들의 역할은 자꾸 말로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주일에 나오는 아이들을 보면 얼굴을 마주보고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한 주간 동안 너 보고 싶었어 이 이야기를 해주면 된다. 그럼 그 아이는 평생 교회를 나온다. 자기를 존중해주고 자기를 인정해 주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에 평생 교회에 나온다. 그 아이의 이름을 따뜻하게 불러줘라.
선생님들이 절대 하면 안되는 것은 “너 이름이 뭐니?” 이런 질문입니다. 이름을 알아야합니다. 지난주에도 이름이 뭐냐고 묻고 이번주에도 이름을 묻고 다음주에도 이름을 물으면 이 아이는 더이상 교회에 나오고 싶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이야기해도 나라는 사람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구나. 나는 아직도 이름 없는 그런 사람이구나. 하고 실족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절대로 먼저 이름을 묻고 그 아이를 만났을 때는 따뜻하게 아이의 이름을 불러줘야 합니다. 틀리게 부르는 것 또한 안 됩니다. 이 작은 것들이 아이들에게는 큰 상처가 됩니다.
중고등부 아이들을 비전트립에 데리고 가면 가기 일주일 전부터 아이들 사진과 이름을 대조해 외웁니다.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아도 일주일간 열심히 외우고 그 다음에 공항에 가서 아이들을 만나면 실물과 외운 사진, 이름을 머릿속에서 대조합니다. 사진과 실물이 많이 다른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그것을 보며 외웁니다. 어느 정도 외워지면 아이들의 이름과 사진을 가지고 다니며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기 전 다시 확인합니다. 아, 쟤가 누구구나. 그러면 그 적어둔 것을 집어넣고 “누구야.” 불러주면 깜짝 놀랍니다. 목사님이 나를 어떻게 알지? 하고 깜짝 놀라요. 그럼 3박 4일 내내 그 아이들과 친구가 되어줍니다.
이름을 불렀을 때 반응을 보면 특징이 있습니다. “네~” 하고 반갑게 오는 아이가 있는 반면에 화들짝 놀라는 아이가 있습니다. 놀라는 아이들은 대부분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입니다. 평소에 항상 구박받고 문제아로 있던 아이들은 이름을 부르면 화들짝 놀랍니다. 그걸 알아채고 가서 어깨동무하고 “누구야, 잘 지내니? 너 활발해서 참 좋아.” 칭찬을 몇 마디 해주고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너 공부 못하지?” 이러면 고개를 푹 숙이죠. 그러면 제가 그때부터 작업이 들어가는데 바로 공부 못한 사람 중에 성공한 케이스를 수도 없이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3박4일 내내 공부 잘하고 망한 케이스도 수두룩하게 이야기해 주죠. 그러면서 3박 4일이 지나면 이 아이는 공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게 됩니다. 굉장한 가능성이 있는 아이처럼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어느 날 한 권사님이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이 비전트립에서 우리 애한테 무슨 얘기를 했길래 공부를 안 해도 된다고 했다, 담임 목사님이 안 해도 된다고 그랬다며 공부하지 않겠다고 했답니다. 저보고 대체 무슨 얘기를 해서 그러냐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니 애가 죽는 것보다 낫지 뭘 그러냐, 공부해라 공부해라 소리 듣다가 아이가 죽었으면 좋겠냐, 일단 살리고 보자. 하나님이 역사하실 거다. 기도해라.” 그러며 아이의 자존감을 세워줬습니다. 아이들 손을 잡고 들어주고 칭찬해 주며 자존감을 살리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자존감이 살아난 아이는 세상에 나가서 막 살지 않습니다. 자기의 신분을 지키고 본분을 지키고 결국은 그런 아이들이 나중에 세상에 나가서 지도자가 됩니다. 자기를 다스릴 줄 아는 것이지요. 반면 가정에서부터 자존감이 무너지고 자기를 존귀히 여길 줄 모르는 아이들은 결코 세상에 나가서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편법을 사용하려다 되려 어려워지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내가 사랑받고 있고 그것으로 인해 자기는 존귀한 존재라고 하는 것을 깨닫고 배우는 것은 가정과 교회입니다. 그러면 가정과 교회는 그 자녀들에게 있어서 고향과 같은 곳, 늘 가야 하는 곳, 가고 싶은 곳이 되는 거예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게 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성장해 가게 되는 줄 믿습니다.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관심이란 이해하려는 노력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판단해 버릴 때가 많습니다. “딱 보면 알아, 너는 이런 아이야. 너는 안 돼. 너는 돼.” 우리는 이해하려는 노력 대신 어떤 행동이 있으면 그것에 대해 왜 그럴까 생각하지 않고 조급한 마음만 가지고 판단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해서 반응을 할 때 충동적인 반응이 있고 통제된 반응이 있습니다. 충동적인 반응은 “야!” 그러면 “왜!” 그러고 화에 화로 부딪히는 것입니다. 반면 통제되고 조절된 반응을 하는 사람들은 안좋은 이야기를 들으면 일단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뭔가 삭혀요. 생각을 하고 기승전결을 새로 만들어내고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 한 후에 감정을 내보냅니다. 조절된 행동입니다. 그래서 분을 내지 않는것이지요. 이것을 성숙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날 보면 많은 동양인들의 경우, 특별히 한국인들의 경우에 성숙되지 못한 그런 행동을 보일 때가 많아요. 성격이 급하다 보니까 그냥 이쪽에서 어떤 반응이 오면 나도 바로 반응을 내보내고 화내고 분내고 싸우는 경우가 생깁니다. 내가 성숙하지 못한데 자녀들을 어떻게 성숙한 자녀로 길러낼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자녀들이 잘 되는 집의 특징을 보면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자녀가 잘 되는 집은 그 부모가 자녀에 대해서 한심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런 자녀들은 잘 됩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한심하다고, 우리아이는 남다른 한심함이 있다고, 너는 안 된 다고 이런 자녀에 대한 한심한 마음을 갖고 있는 집은 절대로 그 자녀가 잘 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자녀가 잘 된 집의 특징은 자녀가 어떻게 하더라도 자녀를 믿어주고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너는 존귀한 자라고 하는 마음을 심어줍니다. 그런 자녀들은 잘 됩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한심하다고 말하고 행동으로 한심하다고 자녀들에게 표출합니다. 집에서 사는 것은 이 아이들에게 학대입니다. 당연히 잘될 수가 없지요. 지나온 날들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자녀들에 대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아이들을 사랑으로 존중하며 웃으며 우리 가정에서는 너를 환영한다는 마음을 심어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가정에서 이 아이들이 사회성을 배울 때까지, 자기의 자존감이 세워질 때까지 가정에서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란다면 자녀들은 나중에 세상에 나가서도 지도자의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반듯한 삶을 살고 자기를 통제하며 살고 자기를 절제하며 살아가는 자가 되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존재가 되어서 교회를 열심히 나가고 기도의 자리에 나가도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경청하지도 않고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여주고 윽박지르고 입장을 이해해주지도 않는다면 자녀들은 교회다니는 사람들은 다 겉과 속이 다르구나, 외식하는 자들이로구나 생각하고 교회에 가지 않기로 결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삶과 행동을 통해서 우리 엄마 아빠가 하나님을 만나고 달라졌구나, 하나님이 살아계신가보다, 나도 교회에 가야겠다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녀들은 부모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마음을 느낍니다. 우리는 그 통로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 뿐만 아니고 부부 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간에도 경청을 하고 서로 손을 잡아주고 서로를 존귀하게 여겨주는 가정은 건강한 가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에 대해서 반응이 안 좋아서, 그럼 나도 이제 안 좋게 대해야지 하는 가정은 깨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정은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 우리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귀한 자녀이지 않습니까? 세상에 가장 귀한 보물 1호가 있다면 뭐겠어요? 자녀들 아닙니까? 보물 1호라고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그 보물 1호를 보물 다루듯이 안다루고 돌멩이 다루듯이 그렇게 다루면 안 된다는 거예요. 오늘 우리 자녀들을 향해 이전의 판단하는 말과 행동들을 버리고 경청하는 행동으로 달라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두 번째, 자녀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경청하고 손 잡아주는 것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기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아이의 성장 과정은 영적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바른 길로, 선한 길로 이끌어주셔야 영적 전쟁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자가 돼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떻게 기도할 것입니까? 무엇을 기도할 것입니까? 바로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게 해 주옵소서 기도해야합니다. 대체적으로 자녀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면 대학 합격이나 승진, 돈을 많이 벌고 이 일 저 일 잘 되게 해달라는 세상적인 요구를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6장 30절-32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을 구하지 말란 이야기입니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니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구하는 기도, 비나이다 비나이다의 기도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어느 목사님이 너무 힘이 들어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힘이 들 때에는 기도도 잘 안 나오거든요. 5분 기도를 하니가 더 이상 할 기도도 없고 힘이 들어서 기도를 못하겠어서 주기도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주기도문,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죠. 단순하고 우리가 매번 하는 기도지만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기도가 주기도문입니다. 첫 문장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를 하자마자 눈물이 터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시라는 것이 느껴지고 그 믿음이 왔습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시면 내가 걱정하고 염려할 것이 무엇인가 하며 근심 걱정이 사라지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믿노라 하지만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는 그분의 자녀라고 고백하지만 그것이 그저 지식적인 고백이냐 아니면 이 마음으로 느껴지는 고백이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님들,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든, 우리의 처지 형편이 어떠하든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처럼 다른 것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모든 것을 책임지십니다. 기도할 때 구체적인 결과를 원하는 기도를 드리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한 것을 간구해야합니다. 합격, 승진 이런 것들은 다 결과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하나님께 달린 것이지요. 우리가 기도하면 결과는 어떤 결과로 나오든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이지 내가 요구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해 기도하면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게 하시고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위기의 상황을 만나더라도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며 승리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기도처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나를 구하여 주시옵소서.
자녀를 위한 기도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도록 기도해야합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어떤 유혹이 오더라도 옳고 그름을 분별하게 하여 주옵시고, 유혹에 넘어지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성경 말씀 위에 서 있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항상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지혜로운 우리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온유한 성품과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두렵다고 해서 거짓을 말하지 않고 끝까지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을 비난하거나 정죄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말, 희망의 말을 전하는 우리의 자녀들이 되게 해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할 때 이런 저런 방해가 오곤 합니다. 그렇게 되니까 이런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로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해결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데 그런 거 구하지 않아도 됩니까? 다시 한 번 마태복음의 말씀을 생각하십시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미 우리의 처지와 형편을 아버지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자꾸 상기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내 상황이 이렇든 저렇든 끝까지 믿음을 지켜 나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속에서 서 있는 나의 믿음의 자세를 중요하게 여기고,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에도 '신앙과 성품에 대한 기도를 많이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원수까지라도 품어안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다니엘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 되게 해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어떤 모양으로 있든지 하나님이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기는 우리의 자녀된 줄 믿으시길 축원합니다. 우리의 눈으로 볼 때는 다소 부족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 성도님들 모두, 성도님들의 자녀 모두가 존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해 우리의 자녀를 소중히 여기고 우리의 삶 속에서 자녀들에게 가르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고 너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가르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된다면 오늘 우리의 자녀를 향한 말이 달라지는 것이고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고 그럴 때 우리의 자녀가 어디에 있든지, 다니엘처럼, 요셉처럼, 에스더처럼 범사에 형통케 하시는 은혜와 축복이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