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제가 설교하면서 아마 제일 많이 인용하고 얘기하는 사람이 이 요셉이 아닐까 싶습니다. 네 그렇게 얘기를 많이 하는 이유는 이 요셉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있어서 모델이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의 삶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온전하고 순전하고 또 그 살아가는 모든 모습들이 정말 우리 그리스도인이 본받아야 될 그런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요셉이라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요셉은 가장 드라마틱한 그런 인생을 살았어요. 그러면서 많은 위기와 역경에 세월을 보냈지만 그것을 다 믿음으로 이겨냈던 사람입니다. 그냥 그 위기를 이겨낼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듣고 존귀히 여김을 받았던 그런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요셉의 이야기를 읽을 때 단순하게 그저 뭐 성경 속의 인물이니까 그러려니 이렇게 생각을 할 때가 많아요. 그런데 요셉을 우리의 자녀라고 생각을 하고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어려서 형들에 의해서 노예로 팔려 갔어요.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는 인신매매범에 의해서 우리 아들을 잃어 버린 거죠. 팔려 갔다는 말이에요.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또 형들에게 배신당한 요셉의 마음은 또 얼마나 힘이 들고 아팠겠습니까? 그저 인생을 절망하고 좌절하고 그저 자기의 목숨을 끊을 수도 있고 그런 상황이라 이렇게 얘기할 수가 있습니다.
노예로 팔려 가서도 이 여주인이 자꾸 자기를 성희롱을 하고 자꾸 그러는거에요. 얼마나 힘들어요. 그러는 사이에서 정말 자기는 바르게 진리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온전하게 살아야 되겠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있는데, 어느날 강간 미수범으로 재판을 받아서 감옥에 가게 됐다는 말이에요. 얼마나 억울합니까? 정말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고, 애쓰고, 힘쓰고. 참 억울한 인생을 그렇게 누명을 쓰면서 살았던 사람이 바로 이 요셉이라는 존재예요. 어찌보면 이 세상 말로, 하면 세상 말로는 이런 사람을 뭐라고 얘기하냐면 참 팔자가 사납다 던지 기구한 팔자 라든지 아니면 전생에 죄가 많아서 그렇다던지. 이게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아십니까? 운명론을 얘기하고 전생을 얘기하고 왜 이런 얘기를 하냐면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죠. 뭐 어떻게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는게. 우리는 어려서부터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사람이 하면 권선징악 그저 착한 사람은 나중에 잘 되고 악한 사람은 반드시 징벌을 받게 된다. 이 권선징악이라고 하는 이게 모든 소설이나 드라마나 모든 영화의 내용에 보면 주제가 권선징악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살아보니까 그렇지 않다는거에요. 바르게 살고 열심히 살았는데 그렇게 열심히만 살다가 바르게만 살다가 망했더라, 어려워졌더라, 보니까 악인들은 왜 저렇게 잘 먹고 잘 사는지 악인의 형통함.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려는 사람들 너무나도 힘들게 살고. 아니 이게 무슨 권선징악입니까? 이렇게 얘기할 수가 있는 거죠. 우리의 삶의 문제를 도무지 납득이 안되고 설명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거를 인문학적으로 뭐라고 얘기 하냐면 '삶의 부조리' 라고 얘기하는 거에요. 인생의 부조리다. 맞지가 않는다. 이런 것들이 우리를 참 힘들게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요셉의 이야기를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되면 이렇게 착하게 바르게 살려했던 요셉이 그 인생의 끝이 억울하게 끝나지가 않더라는 거예요. 성경은 요셉처럼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 왜 그렇게 어려움을 당해야 했는지 왜 그런 과정을 거쳐야 됐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삶의 부조리 때문에 억울해하고, 원통해하고 그러지만 요셉이 이야기를 통해서 보니까 억울할 거 없다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고, 하나님이 인도하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마지막에 최고의 심판자가 되시고, 또 살아가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억울함을 당했던 이유도 없고 영문도 없이 어려움을 당했던 그런 요셉을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시고, 그 요새 글 존귀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이시다! 라고 하는 것을 성경은 오늘 얘기 해주고 있습니다.
결국 요셉은 어려운 역경을 이길 뿐만 아니라 탁월한 지도자로 섰어요. 예수님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믿음이 없는 이 이집트 바로왕의 입을 통해서도 칭찬을 받는 그런 존재가 되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약속한 것 '너의 후손들로 하여금 큰 나라를 이루게 할 것이다' 이 약속을 이루는 데 있어서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바로 이 요셉이라는 존재입니다.
특별히 이집트의 바로 왕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잖아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그가 이 요셉이 자기의 꿈 얘기에 대해서 해몽을 해주는 걸 들으면서 뭐라고 얘기하냐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다.이렇게 이야기 해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요셉을 보면서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다. 꿈을 꿨는데 그 애굽의 술사들이 그 누구도 이 꿈을 해석하지를 못하는 거예요. 나일 강에서 살찐 암소가 일곱마리가 올라오는데 그 뒤에 파리하게 마르고 야윈 그 암소 일곱이 올라와 가지고 있고 살찐 7마리 암소를 다 잡아먹어 버리는 거예요. 그 이게 도대체 무슨 꿈이야 아무도 이해를 못해요. 근데 요셉이 그거를 설명을 해주는 거에요. 7년 동안 풍년이 될 건데 그 뒤에 이어서 7년 동안 흉년이 올겁니다. 근데 7년 흉년이 얼마나 심각한지 앞에 있었던 7년 풍요는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어려움을 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면서 꿈 얘기 해몽만 하는게 아니라 거기에 대한 답도 주는 거예요. 그러기에 왕은 이제 그 풍년이 있을때 곡식을 성마다 잘 비축을 해놔야 됩니다. 그래서 이 다가오는 흉년을 대비해야 됩니다. 이 얘기를 들으니까 바로 왕이 정말 무릎을 치는 거예요. 어떻게 이런 지혜를 가진 사람이 있는가 꿈만 해몽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흉년을 이길 수 있는 답변까지 내놓고 있는 이런 요셉을 보니까 정말 이거는 세상이 줄 수 있는 그런 지혜가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이 요셉을 향해서 정말 하나님의 감동으로만 된 사람이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다. 이렇게 칭찬을 하는 거에요. 오늘 본문 39절에도 보니까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있는 자가 없도다. 이렇게 얘기한단 말이에요. 이런 놀라운 칭찬을 하는데 이 요셉이 뭐라 그러냐면 그래서 이런 모든 것들을 잘 대비할 수 있는 그런 지도자를 세워서 이 위기를 막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바로가 니가 해라 그러는 거에요. 너같은 사람 없다. 니가 해라. 하루아침에 죄수의 몸으로 그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하던 이 요셉이 하루아침에 애굽의 전국을 다스리는 총리가 됐어요. 왕이 뭐라 그래요?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그저 지위 하나다! 나처럼 하라는 거에요. 왕처럼 이 모든 나라를 다스려라. 요셉에게 정권을 주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는거죠.
저는 이 말씀을 가만히 생각할 때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믿지 않는 바로가 그저 작아보이고 모자라 보이는 요셉을 볼 때 무릎을 친 거예요. 하나님의 지혜가 있고 하나님의 영의 감동된 사람이다. 칭송하게 되고 그를 존귀히 여기잖아요? 오늘 우리는 기독교인들이 오늘날 세상을 살아갈 때 보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믿는 사람들 손가락질 하고 뒤에서 수근수근하고 욕을 하고. 이건 우리가 뭔가 그리스도인답게 바르게 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거에요.
오늘 우리가 요셉처럼 정말 세상을 살아간다고 할 때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칭찬하게 되어 있어요.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구나 지혜롭구나 세상에서 배운 그런 지식대로가 아니라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것 같고 그리고 세상의 지혜로는 풀리지 않는 것이 저 사람이 얘기를 하면 어쩜 그렇게 모든 것들이 순리대로 풀려가는지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요셉처럼 살아가게 될 때 그것이 바르게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가는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런 인생을 사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을 오늘 우리가 알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성도님들도 모두 요셉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근데 그렇게 살아 간다는 것이 뭔가 오늘 저는 두 가지 말씀을 잠시 전하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는 요셉은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했던 사람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만을 의지했던 사람이 요셉입니다. 뭐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요셉의 상황을 보면 노예로 살았어요. 노예로 살면서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누가 있습니까? 노예의 신분이었을 때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주인 한 사람이에요. 그 주인을 의지하려고 했는데 그 여주인이 자꾸 와서 어렵게 하고 힘들게 하니 도대체 믿을 수가 없는거예요. 그리고 그 주인도 여주인 말을 듣겠습니까? 자기 말을 듣겠습니까? 자기의 사정을 얘기해도 들어 줄 데가 없는 거예요. 여러가지로 힘이 드는 거죠. 그래서 오해를 받고 죄수가 돼서 감옥에 들어갔어요.
감옥에 들어가니까 그 죄수를 누가 돌보겠습니까? 그 죄수의 몸으로 있으면서 자기가 믿고 신뢰하고 따를 수 있는 사람,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거예요. 그니까 요셉의 일생을 볼 때 이렇던 저렇던 요셉의 주변에는 요셉이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러니 참 그것이 어떻게 보면 안타까운 일이고 안쓰러운 일처럼 생각이 될지 모르지만 그것이 오히려 축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요셉은 누구를 의지합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광야로 나왔을 때 광야에 먹을 것도 없어요. 비도 안와요. 곡식을 심을 수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지 않으면 자신들의 힘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 이것이 광야 생활이란 말이에요. 그 광야 생활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시킨 그 훈련의 내용이 무엇이냐면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거예요. 너희들 먹고 살게 하고 너희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가게도 하고, 서게도 만들고, 먹게도 하고, 쉬게도 만들고 하나님이시라는거죠. 하나님만을 의지해라. 요셉은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주변에서 가끔 대화를 하다보면 어떤 분들이 그래요. "목사님, 저는 참 외로워요. 인생의 믿을 사람 아무도 없어요. 저를 지지해 주는 사람도 없고요. 저는 외톨이 입니다. 힘이 듭니다. 어렵습니다." 이런 얘기를 해요. 그러면 제가 속으로 하는 말이 있어요. 그런 얘기를 들을 때 속으로 하는 얘기. 그게 축복입니다. 겉으로는 드러내 놓고 못하죠. 그게 축복입니다. 왜?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요.
여러분 우리 주변에 목사님 나는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요. 나는 사람이 많아요. 내 주변에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도 많아요. 이 사람도 내가 좋고, 저 사람도 좋고, 나는 참 그래서 행복합니다. 착각하지 말아야해요. 사람은 어려움 당하면 자기가 우선이에요. 결국은 나를 버리고 내가 어려움 당할 때 배신하게 되있는거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주고 마는 것이지 내가 그렇게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당신도 생명을 걸고 나를 사랑해라? 이럴 수 있는 관계가 아니란말이에요.
사람은 다 연약해요.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배신할 수밖에 없고 돌아설 수밖에 없고 결국에는 자신을 위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에요. 그런 사람을 믿었는데 그런 모습을 보니까 내가 실망했습니다, 상처 받았습니다. 상처받는 그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는 거에요. 오직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는데 나는 주변에 보니까 내 주변에 나를 도와주거나 나를 이렇게 위로 해주는 사람이 없어요! 감사한 거에요.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 힘든 역경에 세월을 이겼는데 어떻게 이겼느냐? 그 비결 한 가지를 얘기해라! 그 비결이 뭡니까? 요셉은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거에요. 하나님만을 바라봤다는 거예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붙드신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는 나를 찾으라 내가 응답한다 그러잖아요?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난다 라고 얘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을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그 인생을 붙드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그럼 요셉이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 비결은 뭡니까? 그 비결은 단순해요. 그 주변에 사람이 없었어요. 그를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요셉은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다보면 외로운 순간, 절망의 순간을 직면하게 될 때가 있잖아요? 의지할 사람이 없다고 좌절하거나, 탄식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위를 바라보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간을 헬라어로 안드로포스 라고 얘기해요. 안드로포스(ανθρωπειος)라고 해요. 그 말의 뜻이 뭐냐면 위를 바라보는 존재라는 거에요. 오직 사람만이 위기를 당하면 위를 바라보는 거에요.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하는 존재. 왜 사람만이 그런 존재 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는거예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기억해요.
그래서 저 아프리카 오지를 가도 가보면 저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신에게 예배를 하고 자기들의 방식으로 경배를 하고 그렇게 어떤 신을 의지하는 모습을 보지 않습니까? 우리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심어 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찾을 수 밖에 없는 존재에요. 위를 바라보는 존재에요. 오늘 우리 성도님들 살다가 어려움을 당하면 주변을 두리번 거리지 마시고 위를 바라 보시라는 거에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9세기 영국의 최고의 설교가 찰스 스펄전 이라고 하는 목사님이 있어요. 이 분이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믿음에 대해서 얘기 하면서 좋은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인생이 어두움 속에 있을 때 그 때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이것이 진짜 믿음이다.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위기 속에서, 절망 속에서, 어려움 속에서, 고난 속에서 그 때 "하나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이것이 진짜 믿음이라는 거에요.
우리는 반대에요. 좋을 때는 우리가 하나님 찬양하고 예배하다가 나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그리고 목사님 기도 해주세요. 당신이 기도하세요 그러면 저는 기도가 안 됩니다 이렇게 얘기해요. 위기속에서 기도할 줄 알아야 되는 거에요. 위기 속에서 감사할 줄 알아야 되고, 위기 속에서 찬양할 줄 알아야 돼요. 그게 진짜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 좋을 때 뿐만 아니라 어려운 인생의 위기의 순간을 만날 때도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노래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만을 바라봐야 되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이 무엇이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힘과 용기를 주시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지혜를 주시는 거에요. 세상이 줄 수 없는 기회를 만들어 주세요.
이 지혜라고 하는 게 참 중요하죠. 바로가 꿈을 꿨는데 아무도 해석을 못했단 말이에요. 그 때 바로의 술 관원이 갑자기 생각이 나는 거예요. 자기가 감옥에 갇혔을 때 자기의 꿈을 해석해 준 그 요셉이 얼마나 정확하게 해석을 했는지 요셉의 말대로 그대로 됐잖아요. 그 바로 왕을 찾아가서 당신의 꿈을 바로 왕이시여 왕의 꿈을 해석해 줄 사람이 있습니다.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데리고 오라 해서 데리고 왔어요. 얘길 하니까 그 꿈을 얼마나 상세하게 해석을 해주는지 그 해석 뿐만 아니라 대처하는 방법까지 다 얘기를 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지혜가 어디서부터 왔냐는 거에요.
이런 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거죠. 저는 이 요셉의 이야기를 볼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얼마나 섬세한지 몰라요. 왜 감옥에 가게 만들었어요? 어떻게 보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간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다 계획이 있는데 처음에 노예로 팔려 올때부터 요셉은 애굽의 감옥에 들어가야 되는 그런 상황이었던 거죠. 왜 거기서 술관원을 만나야 되고 그 술관원을 통해서 애굽의 총리 대신을 애굽의 왕을 만나야 되는 그 과정을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설계를 해 놓으신 거 아니겠습니까? 모든 것이 너무나도 정확하게 그 감옥에서 술 관원을 만남을 통해서 애굽의 바로 왕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리고 그 꿈을 해석을 하게 될 때 한순간에 요셉의 운명이 죄수의 몸에서 애굽을, 전국을 다스리는 총리대신의 자리로 올라가게 되었다는 것이죠.
오늘 우리도 요셉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어떤 상황이 되던지 하나님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 때 하늘로부터 이렇게 지혜가 주어지는 거에요. 필요할 때 용기를 더하시고, 힘을 더 하시고, 믿음을 더 하시고, 지혜를 더 하시고, 세상의 지혜로운 풀리지 않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면 엉뚱한 것 같아도 그것이 해답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게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살면서 가정 속에 풀리지 않는 문제들, 부모와 자녀의 관계, 또 세상 살아가는데 내 인생에 있어서 풀리지 않는 문제들 이런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어요? 이것을 푸는 지혜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에게 있다는 거에요. 그럼 그 하나님께서 그 지혜를 누구에게 주시느냐?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그 지혜를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의 편에 머물러 있기로 결단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이 함께 하시고 지혜를 더 하셔서 세상을 이기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요셉이 요셉되고 요셉이 세상을 다스리는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만을 의지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요셉에게 배워야 될 것은 요셉은 위기를 배움의 기회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위기가 오더라도 그것을 배움의 기회로 삼았던 사람이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이 그의 일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 아버지의 집에서 사랑받는 아들로만 있었더라고 한다면 결국 요셉은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을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너무나도 험난한 그런 인생을 살았어요. 영화를 제작한다고 하면 말도 안된다, 어떻게 이렇게 어려울 수가 있냐, 적당히 해라, 아마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를만큼 그렇게 딱 하고 어려운 그런 상황을 맞았던 사람이 요셉이란 말이에요.
근데 요셉이 어떻게 한순간에 애굽의 총리대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운 반전이죠. 우리가 쉽게 얘기하는 인생역전이란 말이에요. 이렇게 한순간에 반전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근데 그 비결이 뭡니까? 그 비결이 말씀드린 것처럼 첫 번째는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했기 때문이라는 거에요. 근데 더 중요한 것은 요셉이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두 번째로 나아가는 데 그게 뭐냐면 하나님을 진짜로 의지했기 때문에 내 지금 처지, 형편이 어떠하든지 거기서 최선을 다했다는 거에요. 오늘 우리 성도님들이 신앙생활 할 때 믿음의 자리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돼요. 내가 진짜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면 내가 오늘 처한 그 상황 속에서 내 지금 처지 형편이 어떠하든지 내가 여기서 최선을 다 해야 되는거에요.
요셉은 노예로 있을 때 최선을 다했어요. 보디발의 인정을 받았어요. 죄수로 있을 때 최선을 다했어요. 그 감옥에 있던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거예요. 결국 애굽의 총리대신이 됐어도 그는 최선을 다하는 걸 통해서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그런 인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한다라고 하는 것은 이게 내가 진짜 믿음의 사람이라는 증거인 거에요. 그래서 최선을 다한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성장을 하게 되고 지도자가 되는 거죠.
요셉이 그 아버지 야곱의 집에서 사랑받는 아들로만 있었어봐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었을 거에요. 근데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 생활을 해요. 노예 생활을 하니까 곡식은 어떻게 심어야 되는지 다 배우는 거죠. 또 관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 이것을 다 이제 배우는 거예요. 아는 거죠. 하나님께선 실제로 니가 해봐라. 도 나중에 애굽의 총리대신이 돼야 되니까 그러려고 그러면 이 농사 짓는 것부터 관리하는 것부터 이것 알아야 된다. 또 이론으로 배우지 말고 네가 실제로 해봐라.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론과 현실이 어떻게 다른지, 이거를 몸소 다 체험하도록 하나니 훈련시키고 있는 과정이죠. 요셉은 그걸 알았는지 몰랐는지 모르겠지만 몰랐겠지요.
그렇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 이걸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요셉은 거기서 대충하지 않았어요. 만약에 요셉이 노예로 끌려 갔는데 그 집에서 대충대충 하고 노예로 그냥 인생 마감해야 되겠다고 생각헤서 설렁설렁 했더라면 하나님께서 그 요셉을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게 했겠느냐? 이 말이죠. 그럴 수 없다는 거에요.
최선을 다하는 그 모습을 볼 때 그에게 그런 어떤 과정을 통해서 교육을 시키는 것 아니겠습니까? 진짜 믿음의 사람은 그래서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되요. 나는 지금 노예다 가 아니라 나는 지금 하나님이 훈련 하시는 과정 가운데 있다. 이 생각을 하게 될 때 우리는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인생이 되어지는 줄 믿습니다.
감옥에 죄수로 있을 때도 이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에요.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려고 하는데 곡식 어떻게 심고 어떻게 관리하느냐? 이것만 알아서 어떻게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감옥에 넣는데 그냥 일반 죄수들의 감옥이 아니라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곳에 가둬 놓은거에요. 왕의 죄수, 관리인들, 정치인, 경제인 이런 사람들만 가두는 특별한 감옥 속에 노예였던 요셉을 가두시는 거예요. 왕의 죄수들이 모이는 곳이 되다 보니까 거기서 듣고 배우는 게 얼마나 많겠어요. 정치경제 다 듣고 배우는 거예요.
요셉이 나는 이제 지도자가 돼야지 그래서 따로 시간 떼어놓고 공부 했느냐? 아니에요. 그냥 삶 속에서 노예의 삶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구요. 또 죄수의 몸으로 있으면서 거기서 살면서 모든 인생의 지식, 사회, 문화, 정치, 경제 그 모든 죄수들의 이야기를 다 들으면서 거기서 공부하는 시간이 되는 거죠. 지나고 보니까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요셉을 애굽의 총리 대신으로 세울 때 꼭 알아야 될 필요한 교육들, 훈련들 이걸 다 받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요셉을 섬세하게 정확하게 인도하시고 훈련시키시고, 다듬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직접 교육을 시키고 훈련시킨 것 아닙니까?
지난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여러분 그 모든 고난과 고통의 과정을 하나님의 심판이나 죄의 결과로 보지 않았어요.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하나님의 단련으로 봤다는 말이에요. 죄의 심판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에요. 저주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나를 단련시킨다고 봤기 때문에 그 모든 상황을 이겨 나가잖아요? 요셉도 마찬가지라는 걸 내가 노예, 죄수 이 모든 것들을 그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하심이있다.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신다. 임마누엘의 믿음이 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어떤 좋은 처지든, 나쁜 처지든, 좋은 형편이든, 나쁜 형편이든, 어디든 나는 최선을 다할 수가 있는 거예요.
여러분들의 나이가 어떠하든지, 내가 있는 곳이 어떠하든지 그것이 아니라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그러면 그랬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른 것이 아니에요. 그저 최선을 다하는 일이에요.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들이 이루어진다 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운동하는 사람들 올림픽의 메달을 따기 위해서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제일 중요한 게 뭡니까? 물어봤더니 멘탈이라고 얘기하더라고요. 멘탈, 정신, 의지 한번 더 해야 된다. 남들이 다 하다가 쉬니까 나도 남들만큼 했으니 오늘은 쉬자. 그 사람은 메달을 딸 수 가 없다는 거게요. 남들이 쉬고 있을 때 일어나서 한번 더 해야 된다. 내가 피곤해서 지금 지쳐 죽을 상황이 됐지만 한번 더 해야 된다. 이 정도면 됐지 하면 그 정도에서 머무르는 되는거예요. 더 나아갈 수가 없는거에요. 메달을 딸 수 없이 똑같은 사람들 되는 거죠. 남들보다 내가 금메달을 하나를 더 얻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땀방울 한번 더 흘려야 된다는거에요. 자신과의 싸움이고 멘탈 싸움이라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는데 그게 최선을 다하는 거예요. 남들이 하는 만큼 하는 건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내가 어떤 상황 속에 든 지 한번 더 하는 거죠. 제가 운동을 했을 때 남들이 계속 운동! 운동하자 그래가지고 운동을 하려고 갔더니 근육이 성장하려 그러면 이 역기를 들어야 되고 뭐 이게 뭐 이 근육은 운동을 해야 되는데요. 저 못하겠어요 그랬더니 한번 더 해야 되는데 그 못할 때 한번 더 하는 게 운동이 되는 거예요. 왜 그러냐 그랬더니 그 한계에서 한번 더 들면서 근육이 찢어진다는 거예요.
근육이 찢어지는데 그게 다시 회복이 되면서 근육이 점점 커진다는거에요. 자꾸 근육을 찢어야 된다는게 얼마나 힘들고 아픈 일입니까? 그걸 아는 사람들은 막 힘든거 하면서 웃으면서 한단 말이에요. 왜 그게 자기한테 유익이 된다는 걸 아니까요. 지금 나의 근육이 찢어지고 있구나! 이게 신나가지고 막 웃고 있는 거에요. 별 사람들 다 있더라고요. 저같은 사람은 이해를 못하지만 그 운동의 정말 최선을 다하는 분들은 그게 기쁨이라는 거예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역경에 힘든 그런 어떤 세월을 거친 사람들은 제가 이렇게 만나보면 벌써 말하는 품새가 달라요. 인품이 얼마나 깊은지 몰라요. 인생을 달관했어요. 그릇이 커졌어요. 용서하고 용납하는 이 용량이 엄청 커져있는 거에요. 힘든 세월을 살아 가면서도 웃을 수 있구요. 감사할 수 있구요. 허허 웃으면서 대수롭지 않게 고통을 넘어가는 그런 분들. 저분은 인생을 달관하신분이라고. 대화를 해보면 그 분에게서 인생의 향기가 나오는 거에요. 깊이가 나오는 거죠.
근데 고통의 세월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여전히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 밖의 모른다는 말이에요. 죽겠다고 그러고 억울하다 그러고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때로 어려움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의 향기가 나오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 성도님들 이제 인생 살면서 어떤 고난이 오더라도 두려워하지 마세요. 웃을 수 있어야 되는 거에요. 찬양할 수 있어야 돼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죽게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 그랬어요. 시험당할 만큼 시험을 주시고 시험 당하지 못할 거면 피할 길을 열어 주신다는 거예요. 이게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인 줄 믿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역경의 순간이 온다고 할지라도 그 상황 속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라면 우리 인생의 비가 불면, 비가 내리치면 그 비를 견디고 이길 수 있는 힘과 지혜를 하나님이 주신다는 거예요. 태풍이 몰아닥치면 그 태풍을 견딜 수 있는 힘을 또한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논에서 자라는 벼를 보세요. 벼가 얼마나 약합니까? 모내기를 할 때 이렇게 심으면 뿌리도 제대로 내리지 못하고 올라오는 그 연약한 논에 심기어 지는 벼를 보시라구요. 약해요. 그런데 비가 오면 비를 맞아야 돼요. 태풍이 어무 태풍을 견뎌야 돼요. 가뭄이 오면 그 가뭄 속에서도 살아남아야 되는 거예요. 그렇게 비도 맞고 태풍도 맞고 가뭄도 겪으면서 그러면서 가을이 되면 점점 벼가 익어서 고개를 숙이잖아요? 황금 들녘에 이 황금빛 물결로 가득한 그 벼의 그 밭을 보면 말이죠. 벼농사의 그 현장을 보세요. 가보면 거기 쌀알이 얼마나 실하게 열매 맺혀 있는지 몰라요. 그런 비와 가뭄과 태풍과 다 견디잖아요? 그리고 결국에는 열매를 맺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성장에는 아픔이 있어요. 우린 그걸 성장통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런 아픔을 통해서 성장이 있고 삶을 이겨나가는 힘도 얻게 된다는 거에요. 위기의 순간을 당하고 보니까 믿음의 눈이 열리는 거에요. 하나님이 보이는 거죠. 역경의 세월을 보내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단단한 영적 근육이 생기는 거에요. 이제는 어떤 위기가 와도 그것을 능히 이겨나가는 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고 보니까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건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의 현장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훈련장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우리 성도님들 우리의 인생을 한번 돌아보세요. 우리의 과거를 한번 돌아보세요. 여러분들 과거보다 많이 강해지지 않았습니까? 많이 예전보다 성숙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자라는 것 같지 않아도 우리의 믿음이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깊은 경륜을 배워 가기 시작하고 믿음이 힘이 생기기를 시작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한 순간도 고아처럼 버려두신 적이 없으세요. 지금 어떤 상황이 우리 앞길을 막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나를 도우시고 요셉의 그 길과 걸음을 인도하셨던 것처럼 내 삶의 그 길과 걸음도 하나님은 인도하고 계신다. 그래서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고, 찬양하고, 그리고 그저 잠잠히 불평, 원망이 아니라 지금 내가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최선을 다해서 하실때.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고 승리자가 되고 칭찬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우리도 요셉처럼 하나님만을 의지하세요. 근데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그렇기 때문에 내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세요.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최선을 다하세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지 못할 수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나를 지켜 보신다는 거예요. 그리고 나를 통해서 계획을 또 다른 계획을 세우시고 또 다른 일 가운데 쓰임 받는 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 사용 하시는 줄 믿습니다. 요셉처럼 사람들과 사람들 앞에 존귀히 여김 받고 하나님 앞에 칭찬 받는 귀한 믿음의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20828 박동찬목사님
창세기 41장 37-43절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
오늘 본문은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제가 설교하면서 아마 제일 많이 인용하고 얘기하는 사람이 이 요셉이 아닐까 싶습니다. 네 그렇게 얘기를 많이 하는 이유는 이 요셉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있어서 모델이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의 삶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온전하고 순전하고 또 그 살아가는 모든 모습들이 정말 우리 그리스도인이 본받아야 될 그런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요셉이라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요셉은 가장 드라마틱한 그런 인생을 살았어요. 그러면서 많은 위기와 역경에 세월을 보냈지만 그것을 다 믿음으로 이겨냈던 사람입니다. 그냥 그 위기를 이겨낼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듣고 존귀히 여김을 받았던 그런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요셉의 이야기를 읽을 때 단순하게 그저 뭐 성경 속의 인물이니까 그러려니 이렇게 생각을 할 때가 많아요. 그런데 요셉을 우리의 자녀라고 생각을 하고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어려서 형들에 의해서 노예로 팔려 갔어요.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는 인신매매범에 의해서 우리 아들을 잃어 버린 거죠. 팔려 갔다는 말이에요.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또 형들에게 배신당한 요셉의 마음은 또 얼마나 힘이 들고 아팠겠습니까? 그저 인생을 절망하고 좌절하고 그저 자기의 목숨을 끊을 수도 있고 그런 상황이라 이렇게 얘기할 수가 있습니다.
노예로 팔려 가서도 이 여주인이 자꾸 자기를 성희롱을 하고 자꾸 그러는거에요. 얼마나 힘들어요. 그러는 사이에서 정말 자기는 바르게 진리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온전하게 살아야 되겠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있는데, 어느날 강간 미수범으로 재판을 받아서 감옥에 가게 됐다는 말이에요. 얼마나 억울합니까? 정말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고, 애쓰고, 힘쓰고. 참 억울한 인생을 그렇게 누명을 쓰면서 살았던 사람이 바로 이 요셉이라는 존재예요. 어찌보면 이 세상 말로, 하면 세상 말로는 이런 사람을 뭐라고 얘기하냐면 참 팔자가 사납다 던지 기구한 팔자 라든지 아니면 전생에 죄가 많아서 그렇다던지. 이게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아십니까? 운명론을 얘기하고 전생을 얘기하고 왜 이런 얘기를 하냐면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죠. 뭐 어떻게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는게. 우리는 어려서부터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사람이 하면 권선징악 그저 착한 사람은 나중에 잘 되고 악한 사람은 반드시 징벌을 받게 된다. 이 권선징악이라고 하는 이게 모든 소설이나 드라마나 모든 영화의 내용에 보면 주제가 권선징악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살아보니까 그렇지 않다는거에요. 바르게 살고 열심히 살았는데 그렇게 열심히만 살다가 바르게만 살다가 망했더라, 어려워졌더라, 보니까 악인들은 왜 저렇게 잘 먹고 잘 사는지 악인의 형통함.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려는 사람들 너무나도 힘들게 살고. 아니 이게 무슨 권선징악입니까? 이렇게 얘기할 수가 있는 거죠. 우리의 삶의 문제를 도무지 납득이 안되고 설명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거를 인문학적으로 뭐라고 얘기 하냐면 '삶의 부조리' 라고 얘기하는 거에요. 인생의 부조리다. 맞지가 않는다. 이런 것들이 우리를 참 힘들게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요셉의 이야기를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되면 이렇게 착하게 바르게 살려했던 요셉이 그 인생의 끝이 억울하게 끝나지가 않더라는 거예요. 성경은 요셉처럼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 왜 그렇게 어려움을 당해야 했는지 왜 그런 과정을 거쳐야 됐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삶의 부조리 때문에 억울해하고, 원통해하고 그러지만 요셉이 이야기를 통해서 보니까 억울할 거 없다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고, 하나님이 인도하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마지막에 최고의 심판자가 되시고, 또 살아가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억울함을 당했던 이유도 없고 영문도 없이 어려움을 당했던 그런 요셉을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시고, 그 요새 글 존귀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이시다! 라고 하는 것을 성경은 오늘 얘기 해주고 있습니다.
결국 요셉은 어려운 역경을 이길 뿐만 아니라 탁월한 지도자로 섰어요. 예수님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믿음이 없는 이 이집트 바로왕의 입을 통해서도 칭찬을 받는 그런 존재가 되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약속한 것 '너의 후손들로 하여금 큰 나라를 이루게 할 것이다' 이 약속을 이루는 데 있어서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바로 이 요셉이라는 존재입니다.
특별히 이집트의 바로 왕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잖아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그가 이 요셉이 자기의 꿈 얘기에 대해서 해몽을 해주는 걸 들으면서 뭐라고 얘기하냐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다.이렇게 이야기 해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요셉을 보면서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다. 꿈을 꿨는데 그 애굽의 술사들이 그 누구도 이 꿈을 해석하지를 못하는 거예요. 나일 강에서 살찐 암소가 일곱마리가 올라오는데 그 뒤에 파리하게 마르고 야윈 그 암소 일곱이 올라와 가지고 있고 살찐 7마리 암소를 다 잡아먹어 버리는 거예요. 그 이게 도대체 무슨 꿈이야 아무도 이해를 못해요. 근데 요셉이 그거를 설명을 해주는 거에요. 7년 동안 풍년이 될 건데 그 뒤에 이어서 7년 동안 흉년이 올겁니다. 근데 7년 흉년이 얼마나 심각한지 앞에 있었던 7년 풍요는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어려움을 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면서 꿈 얘기 해몽만 하는게 아니라 거기에 대한 답도 주는 거예요. 그러기에 왕은 이제 그 풍년이 있을때 곡식을 성마다 잘 비축을 해놔야 됩니다. 그래서 이 다가오는 흉년을 대비해야 됩니다. 이 얘기를 들으니까 바로 왕이 정말 무릎을 치는 거예요. 어떻게 이런 지혜를 가진 사람이 있는가 꿈만 해몽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흉년을 이길 수 있는 답변까지 내놓고 있는 이런 요셉을 보니까 정말 이거는 세상이 줄 수 있는 그런 지혜가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이 요셉을 향해서 정말 하나님의 감동으로만 된 사람이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다. 이렇게 칭찬을 하는 거에요. 오늘 본문 39절에도 보니까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있는 자가 없도다. 이렇게 얘기한단 말이에요. 이런 놀라운 칭찬을 하는데 이 요셉이 뭐라 그러냐면 그래서 이런 모든 것들을 잘 대비할 수 있는 그런 지도자를 세워서 이 위기를 막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바로가 니가 해라 그러는 거에요. 너같은 사람 없다. 니가 해라. 하루아침에 죄수의 몸으로 그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하던 이 요셉이 하루아침에 애굽의 전국을 다스리는 총리가 됐어요. 왕이 뭐라 그래요?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그저 지위 하나다! 나처럼 하라는 거에요. 왕처럼 이 모든 나라를 다스려라. 요셉에게 정권을 주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는거죠.
저는 이 말씀을 가만히 생각할 때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믿지 않는 바로가 그저 작아보이고 모자라 보이는 요셉을 볼 때 무릎을 친 거예요. 하나님의 지혜가 있고 하나님의 영의 감동된 사람이다. 칭송하게 되고 그를 존귀히 여기잖아요? 오늘 우리는 기독교인들이 오늘날 세상을 살아갈 때 보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믿는 사람들 손가락질 하고 뒤에서 수근수근하고 욕을 하고. 이건 우리가 뭔가 그리스도인답게 바르게 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거에요.
오늘 우리가 요셉처럼 정말 세상을 살아간다고 할 때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칭찬하게 되어 있어요.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구나 지혜롭구나 세상에서 배운 그런 지식대로가 아니라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것 같고 그리고 세상의 지혜로는 풀리지 않는 것이 저 사람이 얘기를 하면 어쩜 그렇게 모든 것들이 순리대로 풀려가는지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요셉처럼 살아가게 될 때 그것이 바르게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가는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런 인생을 사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을 오늘 우리가 알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성도님들도 모두 요셉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근데 그렇게 살아 간다는 것이 뭔가 오늘 저는 두 가지 말씀을 잠시 전하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는 요셉은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했던 사람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만을 의지했던 사람이 요셉입니다. 뭐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요셉의 상황을 보면 노예로 살았어요. 노예로 살면서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누가 있습니까? 노예의 신분이었을 때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주인 한 사람이에요. 그 주인을 의지하려고 했는데 그 여주인이 자꾸 와서 어렵게 하고 힘들게 하니 도대체 믿을 수가 없는거예요. 그리고 그 주인도 여주인 말을 듣겠습니까? 자기 말을 듣겠습니까? 자기의 사정을 얘기해도 들어 줄 데가 없는 거예요. 여러가지로 힘이 드는 거죠. 그래서 오해를 받고 죄수가 돼서 감옥에 들어갔어요.
감옥에 들어가니까 그 죄수를 누가 돌보겠습니까? 그 죄수의 몸으로 있으면서 자기가 믿고 신뢰하고 따를 수 있는 사람,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거예요. 그니까 요셉의 일생을 볼 때 이렇던 저렇던 요셉의 주변에는 요셉이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러니 참 그것이 어떻게 보면 안타까운 일이고 안쓰러운 일처럼 생각이 될지 모르지만 그것이 오히려 축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요셉은 누구를 의지합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광야로 나왔을 때 광야에 먹을 것도 없어요. 비도 안와요. 곡식을 심을 수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지 않으면 자신들의 힘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 이것이 광야 생활이란 말이에요. 그 광야 생활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시킨 그 훈련의 내용이 무엇이냐면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거예요. 너희들 먹고 살게 하고 너희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가게도 하고, 서게도 만들고, 먹게도 하고, 쉬게도 만들고 하나님이시라는거죠. 하나님만을 의지해라. 요셉은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주변에서 가끔 대화를 하다보면 어떤 분들이 그래요. "목사님, 저는 참 외로워요. 인생의 믿을 사람 아무도 없어요. 저를 지지해 주는 사람도 없고요. 저는 외톨이 입니다. 힘이 듭니다. 어렵습니다." 이런 얘기를 해요. 그러면 제가 속으로 하는 말이 있어요. 그런 얘기를 들을 때 속으로 하는 얘기. 그게 축복입니다. 겉으로는 드러내 놓고 못하죠. 그게 축복입니다. 왜?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요.
여러분 우리 주변에 목사님 나는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요. 나는 사람이 많아요. 내 주변에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도 많아요. 이 사람도 내가 좋고, 저 사람도 좋고, 나는 참 그래서 행복합니다. 착각하지 말아야해요. 사람은 어려움 당하면 자기가 우선이에요. 결국은 나를 버리고 내가 어려움 당할 때 배신하게 되있는거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주고 마는 것이지 내가 그렇게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당신도 생명을 걸고 나를 사랑해라? 이럴 수 있는 관계가 아니란말이에요.
사람은 다 연약해요.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배신할 수밖에 없고 돌아설 수밖에 없고 결국에는 자신을 위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에요. 그런 사람을 믿었는데 그런 모습을 보니까 내가 실망했습니다, 상처 받았습니다. 상처받는 그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는 거에요. 오직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는데 나는 주변에 보니까 내 주변에 나를 도와주거나 나를 이렇게 위로 해주는 사람이 없어요! 감사한 거에요.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 힘든 역경에 세월을 이겼는데 어떻게 이겼느냐? 그 비결 한 가지를 얘기해라! 그 비결이 뭡니까? 요셉은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거에요. 하나님만을 바라봤다는 거예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붙드신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는 나를 찾으라 내가 응답한다 그러잖아요?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난다 라고 얘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을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그 인생을 붙드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그럼 요셉이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 비결은 뭡니까? 그 비결은 단순해요. 그 주변에 사람이 없었어요. 그를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요셉은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다보면 외로운 순간, 절망의 순간을 직면하게 될 때가 있잖아요? 의지할 사람이 없다고 좌절하거나, 탄식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위를 바라보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간을 헬라어로 안드로포스 라고 얘기해요. 안드로포스(ανθρωπειος)라고 해요. 그 말의 뜻이 뭐냐면 위를 바라보는 존재라는 거에요. 오직 사람만이 위기를 당하면 위를 바라보는 거에요.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하는 존재. 왜 사람만이 그런 존재 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는거예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기억해요.
그래서 저 아프리카 오지를 가도 가보면 저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신에게 예배를 하고 자기들의 방식으로 경배를 하고 그렇게 어떤 신을 의지하는 모습을 보지 않습니까? 우리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심어 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찾을 수 밖에 없는 존재에요. 위를 바라보는 존재에요. 오늘 우리 성도님들 살다가 어려움을 당하면 주변을 두리번 거리지 마시고 위를 바라 보시라는 거에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9세기 영국의 최고의 설교가 찰스 스펄전 이라고 하는 목사님이 있어요. 이 분이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믿음에 대해서 얘기 하면서 좋은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인생이 어두움 속에 있을 때 그 때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이것이 진짜 믿음이다.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위기 속에서, 절망 속에서, 어려움 속에서, 고난 속에서 그 때 "하나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이것이 진짜 믿음이라는 거에요.
우리는 반대에요. 좋을 때는 우리가 하나님 찬양하고 예배하다가 나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그리고 목사님 기도 해주세요. 당신이 기도하세요 그러면 저는 기도가 안 됩니다 이렇게 얘기해요. 위기속에서 기도할 줄 알아야 되는 거에요. 위기 속에서 감사할 줄 알아야 되고, 위기 속에서 찬양할 줄 알아야 돼요. 그게 진짜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 좋을 때 뿐만 아니라 어려운 인생의 위기의 순간을 만날 때도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노래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만을 바라봐야 되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이 무엇이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힘과 용기를 주시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지혜를 주시는 거에요. 세상이 줄 수 없는 기회를 만들어 주세요.
이 지혜라고 하는 게 참 중요하죠. 바로가 꿈을 꿨는데 아무도 해석을 못했단 말이에요. 그 때 바로의 술 관원이 갑자기 생각이 나는 거예요. 자기가 감옥에 갇혔을 때 자기의 꿈을 해석해 준 그 요셉이 얼마나 정확하게 해석을 했는지 요셉의 말대로 그대로 됐잖아요. 그 바로 왕을 찾아가서 당신의 꿈을 바로 왕이시여 왕의 꿈을 해석해 줄 사람이 있습니다.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데리고 오라 해서 데리고 왔어요. 얘길 하니까 그 꿈을 얼마나 상세하게 해석을 해주는지 그 해석 뿐만 아니라 대처하는 방법까지 다 얘기를 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지혜가 어디서부터 왔냐는 거에요.
이런 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거죠. 저는 이 요셉의 이야기를 볼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얼마나 섬세한지 몰라요. 왜 감옥에 가게 만들었어요? 어떻게 보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간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다 계획이 있는데 처음에 노예로 팔려 올때부터 요셉은 애굽의 감옥에 들어가야 되는 그런 상황이었던 거죠. 왜 거기서 술관원을 만나야 되고 그 술관원을 통해서 애굽의 총리 대신을 애굽의 왕을 만나야 되는 그 과정을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설계를 해 놓으신 거 아니겠습니까? 모든 것이 너무나도 정확하게 그 감옥에서 술 관원을 만남을 통해서 애굽의 바로 왕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리고 그 꿈을 해석을 하게 될 때 한순간에 요셉의 운명이 죄수의 몸에서 애굽을, 전국을 다스리는 총리대신의 자리로 올라가게 되었다는 것이죠.
오늘 우리도 요셉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어떤 상황이 되던지 하나님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 때 하늘로부터 이렇게 지혜가 주어지는 거에요. 필요할 때 용기를 더하시고, 힘을 더 하시고, 믿음을 더 하시고, 지혜를 더 하시고, 세상의 지혜로운 풀리지 않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면 엉뚱한 것 같아도 그것이 해답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게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살면서 가정 속에 풀리지 않는 문제들, 부모와 자녀의 관계, 또 세상 살아가는데 내 인생에 있어서 풀리지 않는 문제들 이런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어요? 이것을 푸는 지혜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에게 있다는 거에요. 그럼 그 하나님께서 그 지혜를 누구에게 주시느냐?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그 지혜를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의 편에 머물러 있기로 결단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이 함께 하시고 지혜를 더 하셔서 세상을 이기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요셉이 요셉되고 요셉이 세상을 다스리는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만을 의지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요셉에게 배워야 될 것은 요셉은 위기를 배움의 기회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위기가 오더라도 그것을 배움의 기회로 삼았던 사람이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이 그의 일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 아버지의 집에서 사랑받는 아들로만 있었더라고 한다면 결국 요셉은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을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너무나도 험난한 그런 인생을 살았어요. 영화를 제작한다고 하면 말도 안된다, 어떻게 이렇게 어려울 수가 있냐, 적당히 해라, 아마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를만큼 그렇게 딱 하고 어려운 그런 상황을 맞았던 사람이 요셉이란 말이에요.
근데 요셉이 어떻게 한순간에 애굽의 총리대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운 반전이죠. 우리가 쉽게 얘기하는 인생역전이란 말이에요. 이렇게 한순간에 반전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근데 그 비결이 뭡니까? 그 비결이 말씀드린 것처럼 첫 번째는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했기 때문이라는 거에요. 근데 더 중요한 것은 요셉이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두 번째로 나아가는 데 그게 뭐냐면 하나님을 진짜로 의지했기 때문에 내 지금 처지, 형편이 어떠하든지 거기서 최선을 다했다는 거에요. 오늘 우리 성도님들이 신앙생활 할 때 믿음의 자리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돼요. 내가 진짜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면 내가 오늘 처한 그 상황 속에서 내 지금 처지 형편이 어떠하든지 내가 여기서 최선을 다 해야 되는거에요.
요셉은 노예로 있을 때 최선을 다했어요. 보디발의 인정을 받았어요. 죄수로 있을 때 최선을 다했어요. 그 감옥에 있던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거예요. 결국 애굽의 총리대신이 됐어도 그는 최선을 다하는 걸 통해서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그런 인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한다라고 하는 것은 이게 내가 진짜 믿음의 사람이라는 증거인 거에요. 그래서 최선을 다한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성장을 하게 되고 지도자가 되는 거죠.
요셉이 그 아버지 야곱의 집에서 사랑받는 아들로만 있었어봐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었을 거에요. 근데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 생활을 해요. 노예 생활을 하니까 곡식은 어떻게 심어야 되는지 다 배우는 거죠. 또 관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 이것을 다 이제 배우는 거예요. 아는 거죠. 하나님께선 실제로 니가 해봐라. 도 나중에 애굽의 총리대신이 돼야 되니까 그러려고 그러면 이 농사 짓는 것부터 관리하는 것부터 이것 알아야 된다. 또 이론으로 배우지 말고 네가 실제로 해봐라.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론과 현실이 어떻게 다른지, 이거를 몸소 다 체험하도록 하나니 훈련시키고 있는 과정이죠. 요셉은 그걸 알았는지 몰랐는지 모르겠지만 몰랐겠지요.
그렇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 이걸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요셉은 거기서 대충하지 않았어요. 만약에 요셉이 노예로 끌려 갔는데 그 집에서 대충대충 하고 노예로 그냥 인생 마감해야 되겠다고 생각헤서 설렁설렁 했더라면 하나님께서 그 요셉을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게 했겠느냐? 이 말이죠. 그럴 수 없다는 거에요.
최선을 다하는 그 모습을 볼 때 그에게 그런 어떤 과정을 통해서 교육을 시키는 것 아니겠습니까? 진짜 믿음의 사람은 그래서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되요. 나는 지금 노예다 가 아니라 나는 지금 하나님이 훈련 하시는 과정 가운데 있다. 이 생각을 하게 될 때 우리는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인생이 되어지는 줄 믿습니다.
감옥에 죄수로 있을 때도 이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에요.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려고 하는데 곡식 어떻게 심고 어떻게 관리하느냐? 이것만 알아서 어떻게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감옥에 넣는데 그냥 일반 죄수들의 감옥이 아니라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곳에 가둬 놓은거에요. 왕의 죄수, 관리인들, 정치인, 경제인 이런 사람들만 가두는 특별한 감옥 속에 노예였던 요셉을 가두시는 거예요. 왕의 죄수들이 모이는 곳이 되다 보니까 거기서 듣고 배우는 게 얼마나 많겠어요. 정치경제 다 듣고 배우는 거예요.
요셉이 나는 이제 지도자가 돼야지 그래서 따로 시간 떼어놓고 공부 했느냐? 아니에요. 그냥 삶 속에서 노예의 삶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구요. 또 죄수의 몸으로 있으면서 거기서 살면서 모든 인생의 지식, 사회, 문화, 정치, 경제 그 모든 죄수들의 이야기를 다 들으면서 거기서 공부하는 시간이 되는 거죠. 지나고 보니까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요셉을 애굽의 총리 대신으로 세울 때 꼭 알아야 될 필요한 교육들, 훈련들 이걸 다 받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요셉을 섬세하게 정확하게 인도하시고 훈련시키시고, 다듬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직접 교육을 시키고 훈련시킨 것 아닙니까?
지난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여러분 그 모든 고난과 고통의 과정을 하나님의 심판이나 죄의 결과로 보지 않았어요.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하나님의 단련으로 봤다는 말이에요. 죄의 심판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에요. 저주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나를 단련시킨다고 봤기 때문에 그 모든 상황을 이겨 나가잖아요? 요셉도 마찬가지라는 걸 내가 노예, 죄수 이 모든 것들을 그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하심이있다.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신다. 임마누엘의 믿음이 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어떤 좋은 처지든, 나쁜 처지든, 좋은 형편이든, 나쁜 형편이든, 어디든 나는 최선을 다할 수가 있는 거예요.
여러분들의 나이가 어떠하든지, 내가 있는 곳이 어떠하든지 그것이 아니라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그러면 그랬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른 것이 아니에요. 그저 최선을 다하는 일이에요.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들이 이루어진다 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운동하는 사람들 올림픽의 메달을 따기 위해서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제일 중요한 게 뭡니까? 물어봤더니 멘탈이라고 얘기하더라고요. 멘탈, 정신, 의지 한번 더 해야 된다. 남들이 다 하다가 쉬니까 나도 남들만큼 했으니 오늘은 쉬자. 그 사람은 메달을 딸 수 가 없다는 거게요. 남들이 쉬고 있을 때 일어나서 한번 더 해야 된다. 내가 피곤해서 지금 지쳐 죽을 상황이 됐지만 한번 더 해야 된다. 이 정도면 됐지 하면 그 정도에서 머무르는 되는거예요. 더 나아갈 수가 없는거에요. 메달을 딸 수 없이 똑같은 사람들 되는 거죠. 남들보다 내가 금메달을 하나를 더 얻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땀방울 한번 더 흘려야 된다는거에요. 자신과의 싸움이고 멘탈 싸움이라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는데 그게 최선을 다하는 거예요. 남들이 하는 만큼 하는 건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내가 어떤 상황 속에 든 지 한번 더 하는 거죠. 제가 운동을 했을 때 남들이 계속 운동! 운동하자 그래가지고 운동을 하려고 갔더니 근육이 성장하려 그러면 이 역기를 들어야 되고 뭐 이게 뭐 이 근육은 운동을 해야 되는데요. 저 못하겠어요 그랬더니 한번 더 해야 되는데 그 못할 때 한번 더 하는 게 운동이 되는 거예요. 왜 그러냐 그랬더니 그 한계에서 한번 더 들면서 근육이 찢어진다는 거예요.
근육이 찢어지는데 그게 다시 회복이 되면서 근육이 점점 커진다는거에요. 자꾸 근육을 찢어야 된다는게 얼마나 힘들고 아픈 일입니까? 그걸 아는 사람들은 막 힘든거 하면서 웃으면서 한단 말이에요. 왜 그게 자기한테 유익이 된다는 걸 아니까요. 지금 나의 근육이 찢어지고 있구나! 이게 신나가지고 막 웃고 있는 거에요. 별 사람들 다 있더라고요. 저같은 사람은 이해를 못하지만 그 운동의 정말 최선을 다하는 분들은 그게 기쁨이라는 거예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역경에 힘든 그런 어떤 세월을 거친 사람들은 제가 이렇게 만나보면 벌써 말하는 품새가 달라요. 인품이 얼마나 깊은지 몰라요. 인생을 달관했어요. 그릇이 커졌어요. 용서하고 용납하는 이 용량이 엄청 커져있는 거에요. 힘든 세월을 살아 가면서도 웃을 수 있구요. 감사할 수 있구요. 허허 웃으면서 대수롭지 않게 고통을 넘어가는 그런 분들. 저분은 인생을 달관하신분이라고. 대화를 해보면 그 분에게서 인생의 향기가 나오는 거에요. 깊이가 나오는 거죠.
근데 고통의 세월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여전히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 밖의 모른다는 말이에요. 죽겠다고 그러고 억울하다 그러고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때로 어려움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의 향기가 나오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 성도님들 이제 인생 살면서 어떤 고난이 오더라도 두려워하지 마세요. 웃을 수 있어야 되는 거에요. 찬양할 수 있어야 돼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죽게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 그랬어요. 시험당할 만큼 시험을 주시고 시험 당하지 못할 거면 피할 길을 열어 주신다는 거예요. 이게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인 줄 믿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역경의 순간이 온다고 할지라도 그 상황 속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라면 우리 인생의 비가 불면, 비가 내리치면 그 비를 견디고 이길 수 있는 힘과 지혜를 하나님이 주신다는 거예요. 태풍이 몰아닥치면 그 태풍을 견딜 수 있는 힘을 또한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논에서 자라는 벼를 보세요. 벼가 얼마나 약합니까? 모내기를 할 때 이렇게 심으면 뿌리도 제대로 내리지 못하고 올라오는 그 연약한 논에 심기어 지는 벼를 보시라구요. 약해요. 그런데 비가 오면 비를 맞아야 돼요. 태풍이 어무 태풍을 견뎌야 돼요. 가뭄이 오면 그 가뭄 속에서도 살아남아야 되는 거예요. 그렇게 비도 맞고 태풍도 맞고 가뭄도 겪으면서 그러면서 가을이 되면 점점 벼가 익어서 고개를 숙이잖아요? 황금 들녘에 이 황금빛 물결로 가득한 그 벼의 그 밭을 보면 말이죠. 벼농사의 그 현장을 보세요. 가보면 거기 쌀알이 얼마나 실하게 열매 맺혀 있는지 몰라요. 그런 비와 가뭄과 태풍과 다 견디잖아요? 그리고 결국에는 열매를 맺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성장에는 아픔이 있어요. 우린 그걸 성장통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런 아픔을 통해서 성장이 있고 삶을 이겨나가는 힘도 얻게 된다는 거에요. 위기의 순간을 당하고 보니까 믿음의 눈이 열리는 거에요. 하나님이 보이는 거죠. 역경의 세월을 보내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단단한 영적 근육이 생기는 거에요. 이제는 어떤 위기가 와도 그것을 능히 이겨나가는 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고 보니까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건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의 현장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훈련장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우리 성도님들 우리의 인생을 한번 돌아보세요. 우리의 과거를 한번 돌아보세요. 여러분들 과거보다 많이 강해지지 않았습니까? 많이 예전보다 성숙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자라는 것 같지 않아도 우리의 믿음이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깊은 경륜을 배워 가기 시작하고 믿음이 힘이 생기기를 시작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한 순간도 고아처럼 버려두신 적이 없으세요. 지금 어떤 상황이 우리 앞길을 막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나를 도우시고 요셉의 그 길과 걸음을 인도하셨던 것처럼 내 삶의 그 길과 걸음도 하나님은 인도하고 계신다. 그래서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고, 찬양하고, 그리고 그저 잠잠히 불평, 원망이 아니라 지금 내가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최선을 다해서 하실때.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고 승리자가 되고 칭찬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우리도 요셉처럼 하나님만을 의지하세요. 근데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그렇기 때문에 내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세요.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최선을 다하세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지 못할 수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나를 지켜 보신다는 거예요. 그리고 나를 통해서 계획을 또 다른 계획을 세우시고 또 다른 일 가운데 쓰임 받는 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 사용 하시는 줄 믿습니다. 요셉처럼 사람들과 사람들 앞에 존귀히 여김 받고 하나님 앞에 칭찬 받는 귀한 믿음의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