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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
설교날짜 2016.9.18
설교자 박동찬 목사
본문말씀 디모데후서 3 :13-17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
1. 성경 말씀은 우리 삶의 척도가 된다.
 2. 성경 말씀은 영의 양식이 된다.
 3. 성경 말씀은 강력한 영적 무기가 된다.


말씀 딤후 3:13-17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세상을 살다 보면, 우리는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어느 시인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라는 시구에 무척 공감하기도 하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일 것입니다. 때로는 너무 흔들려서 우리의 인생이 송두리 채 망가질 때도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인생 가운데 흔들리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이라고 할까요? 이것을 한 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구약은 옛 언약이고 신약은 새로운 언약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언약이라고 하는 말은 영어로 카비넌트라고 합니다. 카비넌트라는 단어의 어원은 다음과 같습니다. 옛날에 뱃사람들은 배를 타고 나가 풍랑을 만날 때면, 배가 균형을 잡지 못해 자칫 잘못하다가는 갑판에 있던 선원이 파도에 휩쓸려 물에 떠내려갔습니다. 그래서 풍랑이 오면, 선원들은 살기 위해 돛에다가 자기 몸을 묶었습니다. 그러면 배가 아무리 요동을 쳐도 휩쓸려가지 않고 살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돛에 묶는다는 말에서 유래된 단어가 카비넌트입니다. 경찰이 죄인들을 잡아와 채우는 수갑도 어원이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생각했을 때 '성경을 왜 언약의 책이라고 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큽니다.
 사람은 세상을 살 때 세파에 흔들립니다. 그래서 쓰러지고 넘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심하게 세파를 맞아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무너집니다. 돈을 많이 번 사람이든 아니든,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든 아니든, 성공한 사람이든 아니든 상관없습니다. 세파라는 인생의 문제에 한 번 부딪히게 되면, 고위관직에 있던 사람들도 생명을 포기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신문지상이나 매스컴을 통해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나를 묶어 두는 것입니다. 그런 자만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귀한 것은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붙잡고 있어야 우리가 살기 때문입니다. 돈을 붙잡아야 살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을 붙잡아야 삽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이 최고라고 하지만,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귀합니다. 위기 가운데 승리하고 일어서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자입니다.
 찬송 199장은 제가 유년 주일학교 때부터 불렀던 찬송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헤어졌으나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 말 그때 일을 지금도 내가 잊지 않고 기억 합니다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 합니다 옛날 용맹스럽던 다니엘의 경험과 유대 임금 다윗 왕의 역사와 주의 선지 엘리야 바람 타고 하늘에 올라가던 일을 기억합니다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 당한 일 어머니가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그때 일은 지나고 나의 눈에 환하오 어머니의 말씀 기억하면서 나도 시시때때로 성경 말씀 읽으며 주의 뜻을 따라 살려합니다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 합니다"라는 가사의 찬송입니다.
 저희가 어렸을 때는 동화책이 많지 않다 보니, 교회 학교 선생님이 구연동화를 하면서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이야기,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 등을 해주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일주일 동안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머릿속에 기억했습니다. 50대 중반이 된 제 머리 속에도 아직 그 교회 학교 선생님의 말씀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제 인생에서 가장 귀하고 기억에 남는 순간이 어떤 순간인가를 물으면 교회 학교에서 말씀을 듣던 순간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또한 어머니가 시시때때로 읽어주시며 해 주셨던 이야기가 제 마음 속에 남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았고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지금도 성경의 말씀을 통해 유혹과 시험을 이깁니다. 성경 속 말씀을 통해서 기도에 힘을 얻고, 그 말씀을 힘입어서 기도할 때 기적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정말 감격스러운 일은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었지만, 태어나 보니 기독교 가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성장했습니다. 대단히 귀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성경 말씀이 귀하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말씀을 아는 것이 대기업에 입사하고 성공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특히나 요즘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시대 속에 살아갑니다. 세상의 화려함에 비하면 성경 말씀을 읽는 것은 너무나 하잘 것 없고 보잘 것 없이 보입니다. 그래서 귀한 줄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성경이야말로 나에게 축복을 가져다주고 영원한 만족을 주고 내 생명을 보존시켜줄 가장 귀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평생 함께 해야 할 가장 좋은 책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책이라고만 부르는 것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말씀에 있는 것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무엇이며, 어떤 유익이 있고, 어떤 책으로 받아야 할까요?

 첫째, 성경 말씀은 우리 삶의 척도가 된다

 우리가 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 무게를 달려면 저울이 필요하고 크기를 재려고 하면 자가 필요합니다. 저울이 없으면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가 없으면 막연해서, 길고 짧음을 알 수 없습니다. 저울과 자가 있어야 무게와 길이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에 대한 척도가 없으면, 어떤 사람은 악한 일을 하면서도 “뭐 그 정도를 가지고 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선인가 악인가 하는 척도가 필요한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삶의 무게를 재는 저울이기도 하고 자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불변하는 진리입니다. 변하면 진리가 아닙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바뀌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내가 살던 고향도 바뀌었고 어릴 때 순수했던 아이들도 이제는 기성세대가 되어 순수하지 않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는 옳고 그름이 분명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합니다. 예전에는 악이고 죄던 것이 지금은 죄가 아닌 것이 되어 버린 경우도 많습니다. 세상에서는 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변합니다. 오직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질문하기를 “목사님, 요즘은 성숙한 시대에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도 우리는 우리 안에 주관적인 도덕성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고 굳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서도 선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야 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라비자카리어스라는 학자가 “사람들마다 자기가 하고 실은 대로 하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됩니다. 요즘에 경찰이 있어야 되는 이유가 뭐고 법이 있어야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참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사랑해서 결혼한 사람들이 이혼을 하려고 법정에 섰는데, 원수도 그런 원수가 없습니다. 서로를 헐뜯고 공격하는 모습을 보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서로 간에 상처를 주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또 돈의 문제가 얽혀서 법정에 선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찰이 있어야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옛날에는 경찰에게 호루라기 하나만 있으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중무장을 합니다. 총에 실탄 그리고 전기충격기까지 구비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점점 악해졌기 때문입니다.
 주관적 도덕성을 신뢰할 수 있다고 하면, 이 세상 가운데 법은 없어져야 합니다. 경찰이라는 존재도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문을 왜 잠그고 자야 합니까? 열어 놓고 자도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문을 한 겹, 두 겹, 세 겹으로 잠그는 이유는 주관적 도덕성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나에게 총을 겨누고는 “당신 같은 사람은 더 이상 살아있을 가치가 없습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주관적인 판단입니다. 그러면 무어라고 할 것입니까? “그것은 저 사람의 주관적 도덕성이니 인정해야 한다.” 하며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세상은 점점 악해져 가고 세상은 점점 어려워져 가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관적인 도덕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은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모순의 시대입니다.
 과거 히틀러라는 독재자의 주관적 도덕성 때문에 아이와 어른에 상관없이 6백만 명의 유태인들이 학살 되었습니다. 스탈린이라는 구소련의 독재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1500만 명이라는 러시아 사람들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한 사람의 주관적인 도덕성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사태입니다.
 사람은 힘과 권력을 얻으면 마음대로 법도 바꿉니다. 그리고 그 법을 지키라고 합니다. 이것이 과연 타당할까요? 그래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필요한 것은 세상의 법을 초월하는, 진짜 가치가 담겨있는, 가장 바르고 치우치지 않는 영원한 진리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평가받아야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3절과 14절에는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해야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무어라고 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넘어지지 않고, 영원한 가치를 가지고 바르게 인생을 사는 존재가 됩니다.

둘째, 성경 말씀은 영의 양식이 된다

 사람은 밥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은 영혼의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요즘에 많은 TV프로그램이나 매스컴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는 소식은 건강에 관한 것이 많습니다. ‘건강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고 건강을 회복하는 비결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항상 중요한 것이 음식입니다. 옛날에는 노비들이나 노예들과 종들의 음식을 하찮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현재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우리의 건강을 지키는 비결이라고 합니다. 푸성귀를 먹어야 한다고 합니다. 음식을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서 건강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건강하지 못한 이유는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을 먹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혼에도 건강한 영혼이 있고 건강하지 못한 영혼이 있습니다. 영혼이 건강해지려면,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늘 섭취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잘못된 가치관과 쾌락과 정보를 자꾸 담게 되면, 우리의 영혼은 피폐해지고 망가지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이 건강해지면, 사람은 항상 속에 있는 것이 겉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늘 기쁨과 감사가 입에서 흘러넘칩니다. 세상을 살아갈 때도 쳐져 있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밝게 웃고, 희망을 이야기하고, 건강하게 사는 사람들은 그 영에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내 영 속에 살아있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것을 먹고 아무리 좋은 것을 입어도 속은 늘 공허합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유명해진 사람들도 어느 한 순간에 자기의 목숨을 끊는 것을 보며 ‘왜 저랬을까?’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겉으로 화려해 보이고 좋아 보일뿐 속이 공허한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영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세상적인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으로 채울 때에만 우리 영의 속사람이 강건해지고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머슬로우라고 하는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의 욕구충족이론이라고 하는 것은 1943년에 소개된 이래 마치 고전처럼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관심의 대상이 됩니다. 이 이론은 심리학뿐만 아니라 경영학 그리고 경제학에서도 많이 이용되는 이론입니다. 그는 한 사람의 욕구가 채워지면 그 사람은 한층 더 높은 단계의 욕구를 채워야 하고, 그 욕구가 채워지면 또 한층 더 높은 단계의 욕구를 채워야 한다고 하며, 사람의 욕구를 5단계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어떻게 채워지는지 설명했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도 인간관계를 맺는 것을 비롯해 여러 학문이나 다양한 분야에서 굉장히 유용한 도구로 사용되는 욕구충족이론입니다. 5단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는 생리의 욕구입니다. 의식주의 문제인 것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먹고 입고 자는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합니다. 6·25 전쟁 이후에는 이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구걸을 하거나, 남의 것을 훔쳐서라도 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에는 도둑도 많았고 거지도 많았습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생리의 욕구가 충족되면 두 번째로 안전의 욕구가 생깁니다. 안전하게 자신의 삶이 보장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60년대와 70년대에는 집집마다 담을 아주 높이 쌓았습니다. 그래서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담에다가 깨진 사이다병과 콜라병을 꽂아 놓았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제가 어렸을 때 뛰어놀다 보면, 모든 담에 사이다 병과 콜라병이 꽂혀져 있었습니다. 들어오면 찔리니 들어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좀 잘 사는 집은 깨진 콜라병이나 사이다병 대신에 쇠꼬챙이를 해 놓았습니다. 그것을 보면 끔찍했습니다. 이러한 가정을 지키려는 안전에 대한 욕구가 채워지면 소속감에 대한 욕구가 생깁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어딘가에 소속되기 원하는 것입니다. 한동안 우리나라에는 라이온스나 로터리 같은 클럽이 많았습니다. 그런 곳에 소속되어 자기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존경의 단계입니다. 자신이 속한 곳에서 존경받고 싶은 것입니다.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습니다. 그 다음 다섯 번째 단계가 자아실현의 욕구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높아지고 성공한 사람들이 말년에 자아실현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젤을 갖다 놓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잘 못 그려도 그리려고 하고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 합니다. 도자기를 배우는 것도 스스로 만든 작품 하나를 남기고 싶은 이유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봉사 단체에 들어가서 봉사를 하며 살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머슬로의 탁월한 5단계 욕구충족이론에서 5단계를 다 충족하면 사람은 만족할까요? 만족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갈급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 채워진 것 같지만, 속은 공허합니다. 우리의 공허한 속을 채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는 없습니다.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 교회에 와서 트리니티 성경공부를 하며 말씀을 들을 때 만족이 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채울 때 ‘아, 그렇구나! 감사하구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말씀이 채워지면서 ‘내가 왜 진작 이걸 몰랐던가!’ 하는 깨달음이 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채워질 때 마음에 만족과 기쁨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 풍요를 주고 진정한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옛날에 산에 있는 약수터에 가면 약수터에 물이 있어서, 한바가지를 떠서 마시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약수터에 갔더니 사람들이 다 퍼가서 약수가 말랐습니다. 참 쓸쓸해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채워지지 않은 인생은 이와 같은 인생이 됩니다. 약수터의 형태만 갖추었을 뿐 약수는 없는, 가련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시편 1편 2절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복입니까?”라고 할 때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축복해주시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는 대답은 맞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우리에게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섭취하는 자는 생명으로 충만해집니다. 기쁨과 충만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축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든 원하면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열심히 달려가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는 것에는 그렇지 못합니다. 이것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껏 소유하고 생명과 기쁨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셋째, 성경 말씀은 강력한 영적 무기가 된다

 우리는 싸움에서 무기가 있어야 싸울 수 있고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영적인 전쟁터입니다. 악한 마귀 사탄은, 베드로저서 5장에서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있는 힘을 다해 나를 죽이고 내 가정을 무너트리려고 하는 악한 영의 공격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가만히 있는 것입니까? 권투 시합을 하는데 가만히 있다고 이길 수는 없습니다. 방어만 한다고 해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다가는 결국 쓰러지게 됩니다. 맞더라도 공격을 해야 이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기를 가져야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매우 귀한 무기를 주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6장 17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검을 들고 싸워야 합니다.
 현대적으로 전쟁의 원리를 설명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이면서 곧 우리의 삶에 있어서 법입니다. 법치국가에서는 제일 중요한 것이 법입니다. 법을 아는 사람은 잘 살 수 있고, 법을 모르는 사람은 실수하고 넘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법입니다. 마귀와 사탄은 사기꾼 같아서 법을 자꾸 속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범죄 하게 만들어 죄인이 되게 해 고난을 당하게 합니다. 이것이 악한 영의 공격입니다.
 성경에 보면 최초의 사람인 아담이 선악과를 먹어 범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법입니다. 법은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분석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먹어도 안 죽어.”라고 합리적인 것으로 공격했습니다. “생각해봐. 그거 먹는다고 죽겠어? 그리고 그거 먹는 게 뭐 그렇게 큰 죄야?”라고 한 것입니다. 게다가 “저거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거야. 진짜 맛있어.”라고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의 말을 보탰습니다. 아담은 사탄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는 “죽을 때 죽더라도 먹어나 보자.” 하고는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래서 넘어지게 되었습니다. 법은 법입니다. 내가 납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차를 타고 가다 교통신호등에 걸렸는데, ‘저기 왜 신호등이 있어야 하지? 여기 사람들도 없는데.’라고 생각하며 지나치면 교통법규를 위반했기 때문에 과태료 고지서를 받습니다. 과태료 고지서를 받고는 “왜 여기다가 신호등을 달았습니까?”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법은 지키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예수님까지 공격한 사탄이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한 사탄의 공격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우리가 경각심을 가지고 배워야 할 내용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공격할 때 첫 번째로 합리적인 것으로 공격했습니다. 40일을 금식하셨으니 매우 배가 고프셨을 것입니다. 그때 사탄이 나타나 “배고프지? 넌 하나님의 아들이잖아?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먹으면 되겠네. 금식까지 했겠다. 그 정도는 보상받아도 되는 거 아니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포인트는 ‘예수님이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 수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포인트는 ‘사탄의 말에 순종하는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아담에게도 가서 아담을 위하는 척 했습니다. “그거 먹으면 좋아.”라고 한 것입니다. 사탄은 넘어트리기 위해 하는 말인데, 사람은 그 말을 자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악한 영은 우리를 위하는 것처럼 합니다. “주일 한 번 빠지고 나가면 편하게 잘 살 수 있어.”라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를 넘어트리려는 것이지, 우리를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탄의 유혹에 대해서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으로 답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합리적인 말에 속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합리적인 말에 속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야 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라고 하시며 사탄을 무안하게 만드셨습니다. 사탄은 배고프니 먹으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먹고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한 거야.” 하시며 사탄을 무색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쯤 되면 무안해서 도망갈 것 같은데, 사탄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또 공격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공격했습니다. 사탄은 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공격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잘 알아야 합니다. 이단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거기에 다 속아서 넘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바르게, 전체의 맥락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탄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고 했습니다. 시편 91편에서는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자기에게 순복시키려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격을 한 것입니다. 거기에 예수님은 신명기 6장 16절의 말씀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어. 내가 못 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왜 시험해? 하나님이 그렇다고 하셨으면 그런 거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하셨기 때문에 정답이 무엇인지 아셨고 그것으로 사탄의 공격을 이기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진짜 뛰어봐? 뛰어서 진짜 천사가 내 발을 붙들어 주면 어떻게 할 거야?”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는 “뛴다.” 하고 뛰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를 입증하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사탄의 말에 속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자 사탄은 다음으로 쉬운 길을 제시했습니다. 처음에는 합리적인 것으로,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지막에는 쉬운 길로 시험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신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자기에게 속아서 가졌던 모든 권리를 넘겨주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세상의 주인이 되어, 신처럼 세상을 다스렸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빼앗겼던 것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쉬운 길을 제시합니다. “십자가지지 말고 나에게 눈 딱 한 번 감고 절해. 절하면 이 모든 것 다 줄게. 천하만국은 내가 물려받았거든. 이거 다 줄게. 십자가 지려고 하면 힘들잖아. 제자들도 키워야 하고. 그러니 나에게 절만 해.”라고 했습니다. 물론 자기 말에 순종하도록 만들기 위한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쉬운 길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신명기 6장 13절 말씀으로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만 섬기지, 너한테 절 안 해.” 하시며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사탄은 항상 우리의 생각을 공격합니다. 자기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합리적인 것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해서 공격합니다. 또 쉬운 길을 제시해서 우리를 공격합니다. 우리는 이런 것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가지고 사탄은 늘 공격합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돈을 가지고, 이성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성으로, 성공을 좋아하는 사람은 성공으로 공격합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은 한 번 속았어도 또 속고 넘어집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를 할 때, 같이 공부하던 친구 하나가 낚시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낚시를 가자고 했습니다. 하루는 저에게 낚시를 가자고 해서 할 줄 모른다고 했더니, 재미있다고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아무렇게나 던지면 잡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따라갔습니다. 그랬더니 차 안에서 조그만 낚싯대를 꺼내 저에게 하나를 주고, 자기가 하나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던지라고 해서 던졌습니다. 조금 지나자 정말 메기가 잡혔습니다. 캣피쉬라고 하는데 미국 사람들이 매우 좋아해서 잘 튀겨 먹습니다. 그런데 미국 사람들은 낚시를 스포츠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기를 잡으면 놔 줍니다. 그런데 제가 전문가가 아니다 보니 메기입에서 낚시 바늘을 빼다가 메기의 입이 찢어졌습니다. 그렇다고 가지고 갈 수도 없어 놔 주었습니다. 조금 있다 또 한 마리가 잡혔는데, 그 메기였습니다. ‘어리서은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고생을 했으면 정신을 차려야하는데, 낚싯밥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또 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고기를 놔주면서 “바보 같은 녀석. 한 번만 더 잡혀 봐라.”라고 했습니다. 메기를 보며 ‘어쩜 이렇게 인간과 똑같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탄이 미끼를 가지고 넘어트리면, 그 다음에는 넘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또 넘어집니다. 미끼를 10번을 주면 10번 모두 뭅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고,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탄이 속이면 계속해서 속아 넘어가며 괴로워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왜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매여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일어난 일입니다. 먹지 말라고 한 것을 먹고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요즘 사탄은 정면으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성경은 틀린 말이다. 2천 년 전에 있었던 가치관에 불과하다.”라고 이야기합니다. “2천 년 전 낡은, 시대에 뒤떨어진 가치관을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라!”라고 합니다. 이런 말을 듣고 많은 사람이 “맞아. 100년도 아니고 2천 년 가까이 된 말을 아직까지 믿으라고 해?”라고 합니다. 이단들은 엉터리로 성경을 풀면서 교주가 하나님이고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 정확하게 알고 그 법을 지켜야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우리가 위기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붙잡습니다.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도,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도 그랬습니다. 노예 해방의 선봉에 섰던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기에 그런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태초의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몰라서 넘어졌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서 넘어지지 않고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도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하므로 우리 안에 기쁨이 충만할 뿐 아니라, 사탄의 공격 속에서 넘어지지 않고 승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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