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며 섬기는 교회 (렘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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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
설교날짜 2018.3.11
설교자 박동찬 목사
본문말씀 마태복음 8 : 18 - 22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



말씀 요 16:32-33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교회는 이 세상 가운데 빛이 되고 소망이 되어야 됩니다. 어둠을 밝히는 희망의 등대가 되어야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세상에서는 교회가 필요 없는 곳이라고 합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하며 욕을 하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도대체 어쩌다가 교회가 이런 모습을 하게 되었을까요? 지도자들의 잘못이었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다른 원인을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기도교인으로서 기도교인 됨을 포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어떤 경우에 선배 목사님들에게 “우리 박 목사님은 목회를 참 잘하세요.”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참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저는 ‘저 분이 나를 칭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도대체 목회를 잘 한다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합니다. 목회를 잘 한다는 것이 어떤 무엇일까요? 설교를 잘 하는 것이 목회를 잘 하는 것일까요? 교회를 성장시키고 건물을 짓는 등 남들에게 보여질만한 것이 있으면 목회를 잘 하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직이나 교육시스템이나 프로그램을 잘 하는 하는 것이 목회를 잘 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답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어느 순간엔가 알게 되었습니다.
 진짜 목회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자들이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던 성도님들이 진짜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이제는 내가 세상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돌아서서 “진짜 주님이 가신 그 길. 예수님의 제자의 길을 가겠습니다.”라고 결단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목회를 잘 하는 것입니다. 목회의 목적과 목회를 하는 방향이 바로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의 뜻이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에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해 사는 존재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방식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보여주신 삶의 본을 따라, 그 방법을 따라 살겠습니다.”라는 것이 크리스천이라는 말의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님은 이 세상을 살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보다는 남들보다 잘 먹고 잘 사는 쪽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세상의 리더가 되는 쪽에 더 관심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번도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리더가 돼라.”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따르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목사님들을 많이 가르치는데 목사님들이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가장 많이 쓰고자 하는 주제가 리더쉽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저는 그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리더쉽을 쓴다고 하면 “제자도에 대해서 쓰세요. 예수님의 제자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써야지 리더쉽에 대해 써서 무엇 하겠습니까?”라고 합니다.
 세상은 리더를 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의 리더가 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르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이 본질을 잃어버리고,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제자의 삶을 살기 보다는 세상에서 남들보다 앞서가고 축복받는 삶을 살기 원한다는 마음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즉 내가 기독교인이 되기를 포기했기 때문에 오늘 날 세상은 이 어둠을 밝히는 희망의 등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세상이 교회 안을 들여다보아도 빛이 아니라 어둠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이제는 더 이상 교회가 필요하지 않다.”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사순절 네 번째 주일을 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 사순절을 통해서 ‘고난을 왜 받으셨는지?’, ‘고난의 길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그 고난의 길에서 승리하셨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우리는 그 예수님의 승리의 모습을 묵상합니다. 사순절을 지나며 예수님이 보여 주신 제자의 삶. ‘제자들은 이렇게 세상을 살아야 한다.’라는 것을 보여주심으로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을 매 순간 의지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매 순간 하나님을 의지해야 된다는 것을 철저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가 된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가르쳐 주신 것이었습니다.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지 않으면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다.”라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진액, 에너지, 힘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뿌리에서부터 공급된 영양분이 가지에 이르러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잘났다고 하며 혼자 살면 아무 것도 될 수 없습니다. 줄기에 붙어있지 않은 가지는 지금은 살아있는 것 같지만 얼마 지나지 않으면 말라서 죽지 않습니까? 그것이 우리 인생과 같습니다.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누구를 의지하고 사는가?’, ‘누구와 동행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내가 동행하는 사람 때문에 기쁘고 행복할 수도 있고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이 희망 가운데 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사람을 의지하는 일을 통해 내 인생이 망가지고 절망적이 되고 낙심하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 누구를 의지하는 가에 따라 놀라운 일을 행하는 사람도 볼 수 있습니다.
 에릭 바이헨마이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2001년도에 에베레스트산 정복에 도전하여 성공한 사람입니다. 에베레스트산은 1953년 이후에는 아무도 올라갈 수 없는 산이었습니다. 수 백 명의 사람이 목숨을 빼앗긴 곳이 에베레스트산입니다. 그 산은 높이가 8800m가 넘습니다. 8800미터가 넘는 산은 ‘높다.’ 정도로의 생각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 보신 분은 알 것입니다. 백두산이 2774미터인데 그 곳에만 올라가도 호흡이 잘 안 됩니다. 3000미터만 올라가도 숨이 답답해오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8000미터라고 하면 고산병으로 머리가 아프고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산을 정복했습니다. 요즈음에는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요즈음에는 그 산을 정복하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에릭 바이엔 마이어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 분은 시각장애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분인데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놀랍습니다. 우리가 등산을 하다보면 크레바스라는 것이 있습니다. 눈으로 덮여 있어서 땅인 줄 알지만, 절벽이어서 잘못 밟으면 밑으로 떨어집니다. 대부분의 등산객들이 이 크레바스에 빠져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밖에도 산소 부족으로 인해 뇌손상이 올 수도 있는데다 보통 사람은 7시간을 올라가는 등산길을 에릭 바이헨마이어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13시간 14시간이 걸려 올라가야 했습니다. 2배, 3배 이상의 시간이 걸려 올라가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얼음산이라 동상에 걸리고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 속에서 모든 악조건을 넘어 그 산을 정복했습니다. 그래서 2001년도에 타임지가 선정한 올해의 최고의 선수라고 하면 이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은 그에게 초점을 맞추지만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에베레스트산을 정복한 비결은 루이스 베니테즈라는 동료가 있었습니다. 그가 앞에서 이끌어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방울 소리를 듣게 만들어 그 소리를 따라오게 한 것입니다. “여기 크레바스가 있으니 뛰어야 된다.”, “이 곳은 폭이 1m 정도 되니 힘껏 뛰어야 된다.”라고 하며 밧줄로 잡아당기니 뛰어넘고 또 뛰어넘었습니다. 잘 하고 있다고 응원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결국은 루이스 베니테즈라는 사람의 응원과 협력 때문에 앞을 볼 수 없었던 에릭 바이헨마이어는 에베레스트 산까지도 정복하는 놀라운 일을 해 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구와 동행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많은 사람은 결국 약해서 다 넘어집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누구와 동행해야 되고 누구를 의지해야 될지 알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정답이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사람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법은 바로 기도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의지할 때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가르치시고 또 가르치셨습니다. 기도도 한번 잠깐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기도할 때마다 어떻게 되셨습니까? 땀이 핏방울처럼 변하도록 진을 다 쏟으며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런 기도 때문에 예수님은 승리하는 인생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망과 권세까지도 깨트리는 놀라운 일을 행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본받으려고 할 때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어려울까요? 세상을 사는 것이 어려울까요? 세상사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많은 분은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은 많이 들어서 알고 있는데 하나님을 의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사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치열하게 사는지 모릅니다. 남자들은 새벽이면 벌떡 일어나 승진하기 위해 밤낮을 뜁니다. 직장이 끝난 후에는 학원에까지 가 공부를 해 승진을 하겠다고 합니다. 애쓰는 그 모습을 보면 눈물겹습니다. 우리 자녀들은 아침부터 공부를 하겠다고 일어나 학교에 가고 아파도 결석을 하지 못합니다. 일류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주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왜 그렇게 집 안 일은 할 것이 많습니까? 세상사는 것을 보면 치열하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억울한 것은 그렇게 치열하게 살면 잘 되어야 되는데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치열하게 사는 것의 반의, 반의 반 정도만이라도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산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을 의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보면 모세는 가진 것이 지팡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조롱했을 것입니다. “너는 평생 지도자가 되어 지팡이 하나밖에 없느냐?”라고 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지팡이 하나가지고 못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지팡이 하나를 가지고 반석을 치니 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지팡이 하나 들고 홍해 앞에 서게 되었을 때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여호수아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여리고성을 무너트리는 놀라운 일을 행했습니다. 다윗은 어린 목동이었습니다. 진짜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골리앗이라는 거인이 왔을 때 조약돌 몇 개를 가지고도 그 거인을 쓰러트렸습니다. 그러면서 다윗이 고백하는 것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가 되시니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보면 부족한 것투성이입니다. “너는 집도 없고 옷도 별로 없고 가진 것이 없는데 뭐가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사는 방법입니다.
 세상에서는 칼과 창과 단창을 가져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이 없어도 이깁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칼과 단창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고 나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기 위해 애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진 것이 없으셨습니다. “여우도 누울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나 머리 둘 곳이 없었던 인자는 사망과 권세를 깨트리고 놀라운 승리의 역사를 가지고 오셔서 우리에게 구원의 역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비결은 하나님을 끝까지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시면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기도하는 모습을 통해 너희도 하나님을 이와 같이 의지해라. 그러면 이긴다.”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비결은 세상적인 것을 갖추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할 때만이 세상을 이기고 세상을 축복하는 존재로 살아가게 됩니다.
 
 둘째, 사람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라

 예수님의 생애는 인간과 함께 하신 생애였습니다. 이 땅에 오신 이유도 우리 인간을 구워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만날 때 “내가 저 사람을 만나면 어떤 도움이 될까?”, “내가 저 사람을 통해 무엇을 받을 수가 있을까?”, “내가 저 사람을 사귀면 나에게 무슨 유익이 될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가진 것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마음이 아픈 자는 위로하고 병든 자는 치유하셨습니다. 필요한 것을 감찰하시고 채워주셨습니다. 우리도 이런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무언가를 받아내고 유익을 얻어내려고 할 때, 그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겪는 많은 과정을 보면 결국은 인간관계입니다. 그런데 인간관계의 문제를 가만히 보면 내가 무언가를 주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받아내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손해를 보지 않고 이득을 보려는 마음 때문에 경쟁이 되고 싸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누군가가 “예수님, 율법이 많은데 그 율법 중에 제일 첫 번째 되는 계명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하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라.”라고 하셨습니다. 한 가지를 알려 달라고 했는데 두 가지를 대답하셨습니다. 그런 이 두 가지는 두 가지가 아니라 동전의 양면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증거 할 때 사도 요한은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거짓말이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는 곧 이웃사랑으로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라는 것은 조건이 없어야 합니다. “내가 너에게 100을 줄 테니 다음 날 당신이 나에게 100을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조건 없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생명까지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 어떠한 사랑인지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따르는 제자라고 한다면 우리도 누군가에게 유익을 구하기 이전에 그들을 사랑하는 존재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사람을 돕다 보면 때로는 얄미운 사람도 있습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어려운 사람이 많이 찾아옵니다. 많은 사람을 도왔지만 그 중에 기억에 남는 한 청년이 있습니다. 고아였습니다. 일을 하라고 하면 “목사님,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그걸 날 시키십니까?”라고 합니다. 고아인데 늘 구걸을 하고 하니 “언제까지 그러고 다닐래? 주유소에서 일을 해라.”라고 하면 “주유소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세요?”라고 합니다. “슈퍼마켓에서 알바해라.”라고 하면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세요?”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무 것도 안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너무도 답답해 “군대라도 가라. 군대에 가면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승진하면 장교도 될 수 있고 하니 군대에 가면 아주 좋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어려운 것을 시킨다고 저를 째려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와서 돈을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화가 나서 어느 순간엔가 ‘이게 마지막이다. 다시는 오지 마라.’라는 마음으로 주었습니다. 50번 100번은 온 것 같습니다. 잠만 자려고 하면 전화가 오고는 했습니다. 참 약이 많이 올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는 자기가 군대에 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할렐루야!”라고 했습니다. “정말 잘 했다. 네 인생은 이제 그 곳에서 핀다. 열심히 살아서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돈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이제는 오지도 않고 돈을 부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군대에 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제가 군대에 가보았기 때문에 알 수 있었습니다. 전화할 수 없는 시간인데 전화를 하는 것입니다. 저는 “너 지금 어떻게 전화하니?”라고 하니 잠깐 나와서 전화한다는 것입니다. 군대에 가보지 않았으니 군대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군대가 자유롭게 들어갔다 나갔다 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군대에 가지도 않았으면서 군대에 갔다고 한다고 하니 “사실은 안 갔어요. 거짓말을 좀 할 수도 있지. 뭘 그러세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화가 얼마나 나는지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님께서 제 마음속에 “너도 똑같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 하나님 앞에 거짓말을 하고 속이고 “안 그럴게요.”라고 하고는 또 그런 일을 반복합니다. 그런 저의 모습을 깨달으면서 ‘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불쌍하고 긍휼히 여김 받기에 마땅한 것이 우리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났다고 분개하는 이유를 생각하니, 하나님 앞에 선 나의 모습이 말이 안 되었습니다. 그때부터는 하나님께서 부족한 종에게 긍휼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사람을 보면 다 불쌍해 보이는 것입니다. 부자는 불쌍하지 않을까요? 재산을 가진 사람도 마음속에 아픔이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에게도 아픔이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멀쩡해 보여도 저에게 상담을 받으러 와서는 기도 받은 후에 다 울고 가십니다. 다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부자가 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부자가 되어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고급 승용차를 타고 무인도에서 살라고 하면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오픈카를 타고 무인도에서 달리면 신날 것 같습니까? 사람이 신이 날 때는 누군가 나를 부러워해 줄 때입니다.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누가 보아주지 않으면 그런 것을 가져봐야 기쁠 것도 없습니다. 영화배우 같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사람들이 박수를 쳐 주니 그것이 신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집에 와서 박수 쳐 주는 사람도 없고 하면 허탈합니다. ‘인생을 산다는 것이 뭔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집에서 온갖 못된 짓을 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길을 가다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다 불쌍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셨습니다. 누가 잘난 척을 하면 그 잘남 속에 있는 공허함을 하나님은 보시는 것입니다. 다 불쌍하고 긍휼히 여김을 받기에 마땅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허세까지도 용납하시며 “그래, 내가 안다.” 하시며 칭찬하시고 붙들어 주십니다. 저에게도 어느 날 그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잘난 척을 하면 할수록 ‘속이 비어 있구나! 공허하구나! 그래서 자기 좀 봐 달라고 자꾸 저러는구나!’라는 것이 보입니다. 아이에서부터 어른까지 불쌍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사람은 불쌍하지 않을 것 같습니까? 다 불쌍합니다. 결혼해서 아이를 안고 와 “목사님, 우리 애 한 달 되었는데 교회 처음 나왔어요. 기도해 주세요.”라고 하면 그 아이가 얼마나 불쌍해 보이는지 모릅니다. 지금 아무 것도 몰라 엄마 품에서 꼬물꼬물 할 때가 행복한 때입니다. 이제 조금 커서 걸어 다니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쥐어 박히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너는 왜 그렇게 속을 썩여?”, “하지 말라는데 왜 해?”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가방을 턱 매주면 가방을 왜 매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학교에 갑니다. 학교에 가면 공부 못한다고 쥐어 박힙니다. 친구 사이에서 왕따를 당하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서 목표하는 대학에 가면 끝이 납니까? 졸업할 때 되면 무엇을 해야 될지 모릅니다. 대학을 다닐 때는 그 안에서 경쟁하지만 나오면 무한 경쟁입니다. 나보다 잘난 사람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직장에 가야될 지부터 해서. 또 결혼하다고 결혼을 해서 애를 낳으면 아이를 키워야 한다고 아침부터 밤까지 뛰어 다니며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내가 지금 워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사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불쌍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불쌍한 너희 인간들끼리 사랑하고 살아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옆에서 잘난 척을 하면 “잘났습니다.” 하고는 사랑하고 인정해주면 됩니다. 칭찬이 필요한 사람이 칭찬을 해 달라고 하면 칭찬해 주면 됩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오면 그 사람을 돕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얼마나 속이 상하셨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쫓아다니는 무리들이 많았습니다. 제자들은 신이 났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스타다. 예수님이 한번 뜨면 많은 사람이 몰려와 말씀 듣고.”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키신 다음에 수많은 사람이 쫓아오니 제자들이 신이 나서 “예수님, 예수님을 보려고 수많은 사람이 쫓아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저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고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의 말씀을 듣고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만나면 복 받고 먹을 것이 생기기 때문에 그것을 찾아서 예수님께 나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무엇을 먹는가?’, ‘어떤 축복을 받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리를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 진리를 추구하는 인생을 사는 것인데, 떡 좀 더 얻어먹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나는 너희들에게 이제 더 이상 가르칠 것도 없고 가르치고 싶지도 않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치료해 주셨습니다.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그러셨을까요?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빈속. 공허함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 속에서 그런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졌기 때문에 그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말로라도 위로해 주고 함께 해 주고 격려해 주고 인정해 주는 일을 통해 죽으려는 사람을 살리는 역할이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이 되어야 합니다.
 요즈음에 세상을 보면 마녀사냥을 하듯이 누가 이랬고 저랬고 하며 공격을 합니다. 앞으로 자살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늘어갈 것입니다. 수치감 속에 견딜 수가 엇어서 자살하는 사람이 생겨나지 않습니까? 교회는 누구의 잘못을 캐내 “그 사람이 이것을 잘못했습니다. 저것을 잘못했습니다.”라고 하는 곳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나의 뒤를 캐면 잘못한 것이 없을 것 같습니까? 얼마든지 이러저러한 명분을 달아 못된 사람으로 죽을 사람으로 매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잘못을 회개하고 다시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이끌어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될 역할입니다.
 우리 그리도인들은 세상에 나가 누구를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 축복해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 축복해야 합니다. ‘그 분의 과거가 그랬구나!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런 실수를 했구나!’라는 것을 알았으면, “주여 저들도 예수님을 믿고 자살하지 않고 예수님께로 돌아와 회개하고 바른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정죄하기 이전에 먼저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죄와 타협하지 않고 죄의 유혹을 이기라

 왜 우리는 죄지은 사람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정작 우리는 죄를 짓고 죄와 타협합니까? 죄라고 하는 것은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법을 어기는 것이 죄입니까? 우주의 말씀인 우주의 법. 하나님의 말씀이 법입니다.
 법정에 가면 판사 앞에 서서 변호사가 변론을 합니다. 변론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감정이나 자기의 의견이나 자기의 느낌을 가지고 변론하지 않습니다. 법을 가지고 변론을 합니다. 법대에 다니는 학생은 공부를 할 때 법을 달달 외웁니다. 그리고 법정신을 배우고 판례를 배웁니다. 그것을 많이 알고 있어야 나중에 재판정에서 싸워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꼭 알아야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세상 법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가 세상에서 “이제 하나님의 말씀은 한물간 구시대적인 가치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해도 영원부터 영원까지 변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지 세상의 법이 아닙니다. 세상 법보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며 지켜 나갈 수 있는 결단이 우리에게는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따르는 인생을 살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법을 만듭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 필요 없다. 다 틀렸다.”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살아있는 말씀이고 마지막 날 우리를 평가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악과 타협하지도 않으시고 쉬운 길을 가지도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가야할 길이라고 하면 그 길이 아무리 어렵고 힘든 길이라 할지라도 그 길을 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 길을 가라고 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는 자가 되어라. 내가 십자가의 길을 간 것처럼 너희도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십자가의 길이 쉬운 길일까요? 어려운 길이고 힘든 길입니다. 누구도 그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져야 한다면 그 십자가를 지고 나아가는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내가 그 십자가를 지고 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이 40일을 금식하고 배가 고프시니 쉬운 길을 제시했습니다. “배고프지?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니 이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먹어. 얼마나 쉬워?”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두 번째가 예수님에게 “나에게 딱 한 번만 절하면 내가 이 천하만국을 다 너에게 줄게.”라고 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모든 것을 다스릴 권세를 아담에게 주셨는데 아담이 사탄에게 속아 사탄에게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부여해 주신 그 모든 권리를 사탄에게 모두 넘겨주었습니다. 그것을 다시 회복하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사탄은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길을 가지 말고 나에게 눈 한 번 딱 감고 절 한 번만 해. 그러면 내가 쉽게 이거 다 줄게.”라고 했습니다. 물론 거짓말입니다. 속임수입니다.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은 “쉬운 길이 있네. 그 길로 갈까?”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경배하면 안 된다. 내가 가야 될 길인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 쉬운 길을 제시하지 마라.”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에 보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요즈음에 수많은 사람은 좁은 길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큰 길로 들어서려고 하고 큰 문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큰 집을 사서 큰 문을 달기를 원하지 좁은 문을 달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세상의 길이 넓고 편해 보이고 좋아 보여도 좋은 길이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너희들은 빛의 자녀다. 어둠의 자녀가 아니니 빛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모든 빛의 열매는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다. 이것을 가치로 삼고 살아가는 자가 되어라. 부귀와 영화와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을 가치관으로 삼고 살지 마라. 그것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아무 것도 없다. 멸망의 길이다. 진짜 인생을 가치 있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너희는 알아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엘리에게 두 자녀가 있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였습니다. 그들은 아버지가 제사장이니 그 힘을 믿고 온갖 나쁜 짓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그 당시 제물인 소나 양을 드리려고 가지고 오면 좋은 부위는 도려내어 하나님 앞에 드리기도 전에 자기들이 먼저 끓여 먹었습니다. 회막에서 여인들을 건드리며 성추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그 범죄 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이 홉니와 비느하스를 심판하시는가 하면 심판하시지 않습니다.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블레셋과 전쟁을 치르게 될 때 대적의 손에 비참하게 죽게 만드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의 신앙이 이렇게 형식적이 되어 있으면 위험하구나! 무신론자로 사는 것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어떤 면에 있어서는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실 것이다. 나는 교회에 잘 다니고 예배를 잘 드리니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는 착각 속에 사는 것이 더 위험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라고 하면 회개하고 돌아서서 예수님을 잘 믿습니다. 그러나 그저 오래 평범하게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던 분들은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왔다 갔다 하면서 욕심을 따라 인생을 삽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나가면 세상의 화려함을 좇아 삽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엔가 ‘그 길이 아니고 좁은 길로 들어가는 노력이 없이는 안 되는 것이었구나!’라는 것을 깨달아도 이미 하나님이 늦었다고 하시면 늦은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예수님은 너무나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권면하셨습니다. 깨어 있는 자는 압니다. 잠들어 있는 자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릅니다. 세상의 화려함에 넘어져서는 안 됩니다.
 제가 LA에서 그랜드캐년에 후배가 있어 가는데 그 길이 멉니다. 그래서 가는 도중에 해가 떨어져 멈췄는데 그 곳이 라스베가스라는 곳이었습니다. 그 곳에 가보셨습니까? 유명한 도시입니다. 밤에 숙소를 한 군데 정해놓고 밤거리를 나왔더니 얼마나 휘황찬란한지 입이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분수 쇼를 하는데 음악에 맞추어 물방울이 춤을 추었습니다. ‘야, 어떻게 이런 세상이 있나?’ 조명이 얼마나 알록달록하게 화려한지 세상의 좋은 것은 모두 그 곳에 가져다 놓은 것 같았습니다. 숙소로 돌아 와 잠을 자고 그 다음 날 그 도시를 빠져나가려고 하니 얼마나 황량한지, 밝은 대낮에 보니 간밤의 화려함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네온사인의 빛도 햇빛에 가려 빛을 발하지 못했습니다. 먼지가 날리고 쓰레기들이 굴러 다녔습니다.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 사는 도시가 아니라 죽은 도시 같아 보였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며 기도를 하며 그 도시를 빠져 나왔습니다. ‘세상의 화려함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우리를 속이는 것이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가 뜨고 진짜 빛이 비추니 우리가 화려하게 보았던, 좋아 보였던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는 것이 비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세상의 화려함을 좇아 살아갑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으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볼 때 분별하게 됩니다. 그르다고 분별되었을 때에는 돌아서야 합니다. 내 마음에 세상이 좋고 화려한 것이 좋고 네온사인의 빛이 좋아 보인다 할지라도, 성경 말씀에 아니라고 하면 그것을 끊어 버리고 돌아서는 용기와 결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고자 하는 결단이 없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의 길을 가지 못합니다. 듣고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자리에서 멈추지 말고 돌아서서 정말 주님이 가신 그 길을 걸어가는 믿음의 용사들, 주님의 제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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