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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설교날짜 2018.3.25
설교자 박동찬목사
본문말씀 요한복음 12 : 12 - 15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종려주일-



말씀 요 12:12-15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오늘은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인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마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었던 예루살렘 성안에 살던 사람들이 팜트리라고 하는 종려나무를 들고 나와 아래위로 흔들면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이처럼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고 해서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도 자기의 앞날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기쁘면 기쁜 것이고 슬프면 슬퍼합니다. 기쁨이 변하여 슬픔이 되기도 하고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앞날을 예측하지 못합니다. 지금 내 감정이 어떠하고 내 상황 속에 벌어진 일이 어떠한가에 따라 울고 웃으며 슬퍼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앞날을 아시는 주님입니다. 그래서 우리처럼 지금 슬프다고 해서 슬퍼하시지 않고 지금 좋은 일이 있다고 해서 마냥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모든 상황을 이미 헤아려 아시는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2장 12절에서 15절 말씀에서 예루살렘 거민들은 종려나무를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연호를 하며 “우리가 당신을 환영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같으면 그런 환영을 받으면 기뻤을 것입니다. ‘환영을 해 주는구나! 예루살렘에서는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라는 생각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지금 저 사람들이 지금은 저렇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나를 환영해 주며 영접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이들 중 대다수가 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며 분노하며 소리치는 사람들로 바뀔 거야.’라는 것을 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오시옵소서.”라고 할 때 그 모습을 보시면서 기쁘셨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잠시 후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라.”라고 하며 주님을 모욕하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로 바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예수님, 어서 오십시오.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이라고 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든다고 해서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었을까요?
 예수님은 이미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가 조변석개하고 상황에 따라 생각이 달라진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그런 사실을 알았다면, 그 사람들이 우리를 환영할 때 “이런 거 하지 마세요.”라고 하며 역정을 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들이 환영을 하든 안 하든 당신이 가야할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마치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이유는 이제 모든 공생애를 내려놓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길이 그렇게 환영받을 만한 길인가?’, ‘칭찬받고 즐거운 길인가?’ 하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들어가야 하는, 어떻게 보면 무거운 발걸음으로 들어가야 되는 그 자리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주님이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으셨을까요? 우리는 ‘사람들이 나를 환영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따라 기뻐하고 슬퍼하신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이 어떠하든지 나는 내가 감당해야 될 책임을 다 한다. 내가 가야할 길을 가야 한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들어가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려 보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그 동안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우리가 종려주일에 배우고 교훈으로 삼아야 될 3가지는 무엇일까요? 

 

 첫째, 고난과 죽음을 피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책임감을 배워야 한다


 고난과 죽음까지도 감수하시는 예수님의 책임감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저는 종려 주일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사야 53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53장 6절과 7절에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 모두의 죄악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전가시키신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에서는 어린 양을 끌고 와서 그 양에게 내 손을 얹었습니다. 그러면 내 죄가 양에게 전가되었습니다. 그런 뒤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나 대신 나의 죄를 짊어진 양이 죽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의 죄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죽으셔야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비유합니다. 그 이유는 죄가 없으신 순결한 우리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를 친히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어린 양은 내 죄를 다 짊어지고 죽으러 갈 때 버티지 않고 고삐를 잡고 끌면 순순히 끌려갑니다. 자기의 죽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지만 끌면 바로 끌려가지 저항을 하지 않습니다. 잠잠히 끌려 가 죽임을 당합니다. 양이 죽임 당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 사함을 받게 되는 것이 구약 제사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시고 마지막에 어린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는 모습이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같다고 하며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500년 전, 600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예언을 한 것입니다. 예언의 말씀처럼 그렇게 순순히 어린 양처럼 우리 모두의 죄를 짊어지고 죽음의 자리로 나아가시는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게 어린 양처럼 연약한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사자처럼 당당하게 입성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종묘 주일에 떠 올려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죽음과 희생의 자리를 마주하게 되면 그 자리를 피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내가 감당 못합니다.”라고 합니다. 평소에 아무리 당당했던 사람이라도 위기 상황을 맞이하게 되면 두려워서 떨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모습과는 달리 두려움과 죽음과 고통의 자리였지만, 피하려고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길을 당신 스스로 걸어가셨습니다. 또 사람들이 환영하고 사랑해 준다고 해서 좋아하시지 않고, 또 사람들이 배신한다고 해서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않으셨습니다. 외적인 상황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시고 당신이 가야할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책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죽어야 너희들이 살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죽어야 구원의 길이 열리기 때문에 이 길을 가야 한다.”라고 하시며 우리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 길을 당당하게, 이를 악 물고 나아가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사람이 책임감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습니다.
 요즈음 세상은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늘 누군가를 탓합니다. “누가 시켜서 그랬습니다.”, “그건 내 책임이 아닙니다.”라고 합니다.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바로 그자체가 미성숙한 모습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책임을 지려고 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 사회가 서로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 모습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미성숙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런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책임지라고 하지 않습니다. “책임지면 큰 일 난다. 피해야 된다.”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르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오늘교회와 성경과 예수님은 책임을 지라고 가르칩니다. 책임을 질 줄 아는 존재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세상이 책임지는 사회로 변화되고 성숙한 사회가 되려고 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이 책임을 지신 것처럼 우리도 책임을 지려고 하는 마음과 자세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책임을 지는 자리는 쉬운 자리는 아닙니다. 때로는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하고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 그다지 유쾌한 자리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책임을 지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오래 전에 보았던 영화 중에 패션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신 일을 2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볼 수 있도록 만든 영화입니다. 참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 영화에 대해 옳다 그르다는 이야기가 많지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가 느끼는 것이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장면 중에 잊지 못하는 장면이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을 향해 나아가시는데, 채찍에 맞아 이미 진이 다 빠지셨습니다. 일어설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큰 숨을 깊이 몰아쉬면서 다시 이를 악물고 일어나셨습니다. 안 일어나도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일어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해 가다, 지쳐 쓰러져도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나면서 골고다 언덕까지 가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책임을 지는 존재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책임을 지겠습니다.”라고 했다가도 조금 귀찮아지면 내팽개쳐 버리는 것이 책임감인가?’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아닙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내 생명을 다하는 그 자리까지 나아가기 위해서 책임을 다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예수님의 모습이 매우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이런 책임감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책임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향한 당신의 책임을 다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다가 생명이 다해 하나님께서 오라고 하시면 무엇을 했든지 그것을 다 놓고 가야 합니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도 하나님이 오라고 하시면 가야 합니다. 집에서 설거지를 하다가도 주님이 오라고 하시면 가야 합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우리는 가야 합니다. 그때 내 책임을 다 하고 “주님, 내 책임을 다 했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는 복된 자입니다. 책임을 다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모습입니다.


 둘째, 배신하는 사람들까지도 사랑으로 용납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라
 
 배신하는 사람들까지도 사랑으로 용납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너무 어려워서 못 해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님을 따르는 크리스천이 되기로 작정했다면 힘들어도 그 길을 가야합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따라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크리스천으로 살기로 작정했다면 세상의 방법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길을 따라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때마다 또 하나 깨닫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입니다. 한쪽은 책임감이고 한쪽은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책임과 사랑은 둘로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하면 그저 감정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좋으면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 감정은 지극히 어린 아이 수준의 사랑이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사탕 하나를 갖더라도 그것을 사랑합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탕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아이들은 그것을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 없으면 못 살아.’라고 생각하며 안 주면 때를 쓰고 웁니다. 그렇게 울다가도 그거 하나를 받으면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울음을 멈추고 웃습니다. 미성숙한 어린 아이들의 모습입니다. 성숙한 성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녀가 만나서 사랑을 할 때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 심장이라도 꺼내줄 것처럼 사랑한다고 고백하다가 얼마 못 가 그 감정이 식으니 원수가 되고 서로를 아프게 하고 “이제는 사랑하지 않으니 헤어져야 한다.”라고 하고는 무책임하게 헤어져 버립니다. 이런 모습을 매우 많이 봅니다. 며칠 전에도 뉴스를 보니 여자가 헤어지자고 하니 그 여자를 폭행하고 머리채를 잡아끌고 나가는 것이 CCTV에 찍혔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증거로 또 고소를 했습니다. 언제는 사랑해서 서로 죽고 못 산다고 하더니, 얼마나 되었다고 그렇게 돌아섭니까? 그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입니까?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의 사랑이라는 것이 고작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 버리는 사랑의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해서 부부가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부가 되어 서약을 할 때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사랑하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아플 때도 서로 사랑하고 책임을 지겠는가?”라고 하면 다 “예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엔가 사람이 약하기 때문에 남편이 실수할 수도 있고 아내가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더 사랑 안 한다.”라고 합니다. 오히려 그럴 때 사랑이 더 필요합니다. 더 붙잡아주고 세워주어야 하는 때가 아닙니까? 그런데 나 몰라라 하고 이제 감정도 식어졌으니 헤어져야 된다고 하며 처음 결혼할 때의 서약을 지키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대단한 사랑꾼인 것처럼 이야기하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종려주일에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길가에서 많은 사람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모습을 보면서 기쁘셨을까요? 마냥 좋으셨을까요? 아닙니다. 이들 중 많은 사람이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된다.”라고 하며 예수님을 배신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들은 왜 그랬을까요? 왜 그렇게 예수님을 환영했다가 한순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된다고 분노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오셔서 이제는 그들의 소망과 욕망 뜻 그리고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실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런 예수님은 그들에게 필요 없었습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것입니다. 그들 딴에는 배신감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합니다. 메시아라고 하셨으면 로마 군인들을 쫓아내고 우리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자유국가를 만들어 주셔야 되는데 그런 것을 안 하고 계시니 메시아라고 라는 말은 거짓말 아닙니까? 신성모독입니다. 이런 사람은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됩니다.”라고 분노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가만히 보면서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르면 나에게 유익을 주시고 축복을 주셔야 되는데 그런 것이 없으니 많은 성도님이 상담을 하는 가운데 “그러면 내가 예수님을 왜 믿어야 합니까?”라고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당시 사람들이나 내 뜻대로 내 욕망대로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으면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의 모습이나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죄 값을 치르기 위해 생명까지 내어주시며 죽임 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것을 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예수님께서 내 소원을 이루어주시지 않았으니 그것을 답답히 여기면서 예수님은 내 인생에 불필요한 분이시라고 오해를 하고 돌아섭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그런 우리들을 향해서 “내가 너희를 위해서 죽었던 것이 정말 어리석게 여겨진다.”라고 한탄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우리를 보시면서도 사랑으로 품으시고 용서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너희들의 그런 마음을 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다 용서하셨습니다. 당신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사람조차도 “주님, 용서해 주세요. 알지 못해서 저럽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이면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라고 손가락질 하고 조롱한 사람들을 향해서도 “저들도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해서 그럽니다. 용서해 주세요.”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세 번 부인하고 배반했던 베드로에게도 예수님은 친히 찾아가셔서 베드로의 허물을 다 덮어주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을 들추어내시는 분이 아니라 다 덮으시고 용납하시는 분입니다. 성경 베드로전서 4장 8절에서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죄를 들추어내는 것이 아니라 덮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녀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식은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 자녀에게 문제가 있을 때 그 자녀의 문제를 들추어내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덮고 막으려고 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그 사랑으로 오늘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덮으십니다. 그러시면서 우리에게 그 사랑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이런 사랑이다.”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의 죄를 덮어주셨으니 우리도 그렇게 죄를 덮어주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에, 우리의 죄가 예수님에 의해 용서함 받았듯이 우리도 우리 주변에 원한 가진 사람이 있거든 다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하라고 하면 “못 해요.”라고 합니다. 사람이 참 용서를 못 합니다. “내가 목사님이 시키는 건 다 하겠는데 그 사람 용서하라는 이야기만은 하지 마세요. 그 사람 내가 절대 용서 못 합니다. 그 사람 생각만 하면 분노가 치밀어 올라 평생 그렇게 살 것 같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보면 그것을 즐거워하는 것 같습니다. 누구를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재미로 사는 것 같습니다. “이걸 놓으라구요? 이걸 놓으면 내가 무슨 재미로 살아가요.”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내가 그것을 용서할 때 하늘로부터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영적인 신비가 우리의 삶 가운데 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시려고 해도 내가 문고리를 꼭 잡고 있어서 그렇게 하시지 못합니다. “절대로 예수님 우리 집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용서해 주신 그 사랑을 깨닫고 나도 누군가를 용서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삶에 하늘의 기쁨이 임합니다. 천국의 기쁨이 임하고 하늘의 능력이 임하는 것을 경험하며 삽니다. 우리가 용서받을 만한 그런 공로가 있기 때문에 용서 받은 존재들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순절 기간. 특별히 고난 주간에 주님이 나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변 사람들의 허물을 덮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줄 아는 멋진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말없이 예언의 성취를 도운 나귀 주인의 헌신


 나귀 주인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예언의 성취가 이루어졌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 제자들 둘을 보내시며 “건너편 마을에 가면 어린 나귀가 묶여 있는 것을 볼 것이다. 그 나귀를 풀어 가지고 오라. 그때 주인이 왜 나귀를 가져가느냐고 하면 주께서 쓰시겠다고 대답하고 가지고 와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건너편 마을에 들어가 보니 진짜 어린 나귀가 묶여 있었습니다. 그것을 풀어 가지고 오려고 하니 주인이 “아니 왜 남의 나귀를 가지고 가느냐?”라고 하니 제자들이 예수님께 배운 대로 “주님께서 쓰실 것입니다.”라고 하니 가지고 가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나귀 주인은 한마디도 없이 그 나귀를 내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묵상하다 보면 참 어이없는, 황당한 상황입니다.
 제가 어느 날 김 집사님 집이나 박 권사님 집에 들어가 아무 것이나 귀한 것을 집어 옵니다. “목사님, 뭐하세요?”라고 하면 “이거 주님께서 쓰실 거예요.”라고 하고 가지고 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면 “아이고, 목사님. 농담이 지나치십니다.”라고 하며 뺏을 것입니다. 또 가지고 갔다고 꽁해 있다가 교회를 옮기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어떤 분은 가지고 가는 저를 보시고 그 자리에서 경찰에 전화로 신고하기고 할 것입니다. 그만큼 말이 안 되는 상황입니다. 말이 안 되는 상황이라고 하는 것은 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귀 주인은 그것을 그냥 허용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에 있는 이야기니 쉽게 넘어가서 그렇지 만약 누가 우리 집에 들어 와 무엇을 가지고 가면서 “주님께서 쓰실 것입니다.”라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생각해 보면 정말 말이 안 되는 상황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나귀 주인은 아무 말도 않고 나귀를 내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아무리 성경을 찾아보아도 그 뒤에 나귀 주인이 은혜를 받았다거나 축복을 받았다거나 잘 되었다거나 자녀들이 어떻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습니다. 나귀만 뺏기고 만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억울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저는 사순절 기간 종려주일을 맞고 고난주간을 지날 때마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참 부러운 사람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바로 구레네 시몬입니다. 그는 구레네라는 지역에서 온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에 무슨 일이 있어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사람들이 웅성웅성해서 보니 한 남자가 쓰러지고 맞기도 합니다. 그럴 때 한 쪽에서는 그 사람을 조롱하고 야유했습니다. 반면에 눈물을 흘리며 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진풍경이 펼쳐지는 상황 속에서 구레네 시몬은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는 돌아서서 가려고 하는데 로마 군인이 불러 세우더니 “이리로 와서 이 사람 십자가 네가 대신 지고 가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구경하지 않고 갔으면 좋았을 것을 잠시 머뭇거리다가 가려고 하는데 자기를 붙잡아서 십자가를 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니 왜 이 사람의 십자가를 내가 져야 돼요? 나도 바쁜 사람인데.”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대신 올라갔습니다. 그 분이 예수님인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구레네 시몬이 알았겠습니까? ‘아니 내가 오늘 뭐가 안 좋은 날이구나!’라고 생각하며 기분도 나빴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우리의 죄를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울까요? 저는 여태까지 세상에서 인류역사상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가치 있는 일을 한 사람은 구레네 시몬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당신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대신 져 준 사람이 구레네 시몬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럽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또 한 사람이 바로 오늘 나귀 주인입니다. 나귀 주인이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소개되지 않습니다. 성경 지식이 탁월해서 예언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이고 나귀를 내어 드림으로 인해 스가랴서 9장 9절의 말씀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다는 예언의 말씀이 성취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재산이 많아 나귀 한 마리를 주어도 티도 안 날만큼 부자였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쓰신다고 하니 ‘무슨 일이 있나보다!’ 하며 순순히 내어주는 순수성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적인 것에 욕심이 없고 마음이 그저 넉넉한 사람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나귀 주인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조금 순수하게, 플러스 마이너스를 따져서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하면 내어주는 것입니다. 이런 넉넉한 마음을 가지면 됩니다. 요란하게 “예수님, 환영합니다.”라고 하며 예루살렘 입구에 서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 필요도 없습니다. 또 베드로처럼 조금 있다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할 사람이면서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죽을 수 있습니다.”라고 호들갑을 떨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나귀 주인처럼 겸손히 자신의 것을 주님을 위해 내어드리면 됩니다. 어쩌면 그런 자신의 행동이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나귀 주인의 헌신되고 순수한, 넉넉한 그 마음으로 인해 구약의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구레네 시몬과 나귀 주인의 모습을 볼 때마다 부러운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우리의 삶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질 수 있습니다. 나귀 주인처럼 오늘도 내가 누군가를 위해 내 나귀를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어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기회는 오늘 우리에게도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나를 써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 능력도 주시고.”라고 기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내가 가진 것 안에서 “하나님, 내가 바르게 살겠습니다. 주님 따르며 살겠습니다. 넉넉한 마음 가지고 살겠습니다.”라고 하며 누군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은 아니라 할지라도 “저 사람이 지고 가는 십자가로 힘들어하니 내가 대신 지겠습니다.”라고 하며 질 때 그 십자가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을 위해서 때로는 구레네 시몬처럼 때로는 어린 나귀 주인처럼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매우 많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면서 종려나무를 흔들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작은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시간과 재능과 그밖에 내가 드릴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 일을 자원해서 감당하고, 주변에 어려운 이들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 “내가 지금 가진 것이 힘밖에 없으니 저 십자가를 대신 져 드리겠습니다.” 하는 넉넉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넉넉한 마음 가운데 하나님은 넉넉한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주님에게서 책임감과 사랑을 배우고 어린 나귀 주인에게서 헌신을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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