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역사를 일으키는 교회 (살후 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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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설교날짜 2018.8.26
설교자 박동찬 목사
본문말씀 빌립보서 2 : 12 - 18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1. 구원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구원의 길이다.
 3. 삶에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말씀 빌 2:12-18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사람들마다 세상을 사는 모습은 참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열심히 꿈을 향해 달려가고 어떤 사람들은 느긋하게 삽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이러다 보면 뭐라도 되겠지.’라는 막연한 꿈을 가지고 삽니다. 인생을 살아갈 때는 열심히 사는 것이 맞습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목표가 있다는 것입니다. 목표가 있는 사람은 열심히 살게 됩니다. 그런데 그 목표가 허황된 경우도 있고 소박한 경우도 있고 크고 원대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을 사는데 어떤 목표를 가지고 사는 것이 옳을까요?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는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지 못한다고 하면 세상의 천하 만물을 가진다고 해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성경도 이와 같이 말합니다.

 누군가 나에게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주겠습니다. 그런데 그 대신 내일 당신의 생명을 나에게 주어야 됩니다.”라고 한다면 그 계약조건에 “예스.”라고 하며 사인(sign)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천하를 다 준다고 해도 내 생명이 내일 끝난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더 귀하다고 했습니다. 그 한 영혼은 나입니다. 내가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면 성공하고 부귀영화를 누리고 남들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고 이름이 유명해진다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사람은 “목사님, 구원받는 것 쉽잖아요? 그냥 믿으면 되는 것 아닌가요? 내가 예수님 믿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내가 그 분의 자녀가 된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 아니에요? 그렇게 쉽게 구원을 받는데 구원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야 되는 이유가 무엇이죠?”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이런 의문이 있다면 우리는 구원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고 복음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는 증거입니다.
 구원파에 대해서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구원파는 정통 교단에서 목회를 하던 분이 장로교에서 제명을 당하면서 독단적인 교파를 만든 것입니다. 그 구원파 권신찬 목사의 사위가 세월호 사건과 연관된 유병언입니다. 유병언이라는 분은 도피 중 사망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구원파에는 특별한 교리가 있는데 그 교리 때문에 구원파를 이단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한번 구원을 받으면 그 구원이 영원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구원파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부산에서 제주도로 가기 위해 배를 탔습니다. 배를 타고 가다 보면 넘어지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밥을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배 안에서 내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 배는 제주도로 갑니다. 구원파에 속해서 한번 구원을 받으면 그 이후의 삶이 어떻든지 구원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파에서는 “당신이 언제, 몇 날 며칠 몇 시에 구원을 받았습니까?”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에게 구원은 한 번에 이루어지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주장입니다. 이 말이 맞다면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너희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라고 이야기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을 비롯해 많은 놀라운 능력을 행하고 천국에도 입신을 해서 다녀올 정도로 대단한 능력이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빌립보서 3장 12절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라고 했습니다. 또 그는 빌립보서 3장 13절에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능력이 있었던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구원이 한 순간에 이루어졌으면 “이제 나는 됐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습니까? 고생하면서 살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4절에서 이렇게 또 말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포기하지 않고 쉼 없이 끝까지 간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한 번에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구원이 한 번에 이루어지는 사건이라면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가 왜 멸망당하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런데 구원파에서는 한 번 회개하고 죄로부터 자유해지면 그 다음에는 회개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원파를 이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실수합니다. 베드로도 실수했습니다. 예수님을 저주하면서까지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돈을 받고 팔았습니다. 사실 베드로의 죄나 유다의 죄나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회개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돌아섰고 가룟 유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멸망의 길로 걸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의 죄를 사해주셨다 할지라도 우리는 또 실수합니다. 그 실수하는 가운데 회개하고 돌이켜 내 자신을 돌아보며 우리는 자신도 알 수 없는 사이에 점점 성화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파를 거론하는 것은 이단을 비난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구원파의 교리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단이라고 이야기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믿는 구원의 교리가 이단이라고 하는 구원파의 교리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오늘 우리도 ‘한 번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면 내가 어떻게 살든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지는 않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의 교리는 구원파의 교리와는 다릅니다. 오늘 우리가 오해하고 있다면 지금 돌아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구원의 교리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첫째, 구원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일생을 두고 구원의 길을 걸어가야 됩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은혜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 나의 구원은 끝났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결코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다음으로 베스트 셀러가 되어 많이 팔리는 책이 있는데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라는 책입니다. 원 제목은 ‘순례자의 전진’이라는 뜻으로 ‘필그림스 프로그래스’(The Pilgram’s Progress)라는 제목을 가졌습니다. 이 책이 지금까지도 성경 다음으로 잘 팔리는 책이 된 이유는 그 책의 내용이 우리의 삶을 매우 공감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 책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죄의 짐을 지고 살던 한 사람이 어느 날 자기가 진 죄의 짐이 너무나도 무겁다는 것과 자신이 망하게 될 것이라고 스스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괴로워하며 ‘어떻게 할까?’라는 걱정을 하다 전도자를 만나 복음을 듣게 되고 구원을 받고 크리스천으로 이름이 바뀌게 됩니다. 멸망자가 예수님을 알게 됨으로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크리스천이 되었기 때문에 이야기가 끝났을까요? 세상에 살다가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이 되는 것에서부터 천로역정의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그리고 크리스천으로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며 구원의 여정, 순례의 여정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갈등을 자세히 소개하는 것이 천로역정입니다. 그 여정 가운데 크리스천은 정욕과 인내, 이기심, 우울, 거짓이라는 수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살면서 정욕이나 이기심 게으름 같은 것이 우리를 얼마나 괴롭힙니까? 그것을 의인화시켜 관계 속에서 신앙의 여정을 소개해주는 것이 바로 천로역정입니다.
 정욕이라는 어린 아이를 만나보니 무엇을 해도 불만스러운 표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내라는 소년을 만나보니 그 소년을 천사가 칭찬하면서 “저런 소년을 위한 천국이 예비 되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또 길을 가다 보니 사탄이 은혜의 불을 끄기 위해서 계속해서 물을 붓습니다. 그래도 은혜의 불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아니 저렇게 사탄이 물을 붓는데도 은혜의 불이 꺼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벽난로 뒤로 돌아가 보아라.”라는 대답에 그 뒤로 가 보았습니다. 그 곳에는 예수님이 계속해서 성령의 기름을 붓고 있었습니다. 크리스천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면서 은혜의 불이 꺼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구나!’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순례의 길. 구원을 향한, 천성을 향한 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가다 보니 어떤 한 사람이 음부에 갇혀 있었습니다. 크리스천은 철창에 갇혀 슬피 울고 있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여기에 왜 갇혔습니까?”그러자 그는 자신은 원래 교회에서 봉사도 많이 하고 성령의 은사도 체험했지만, 죄에 대해 각성하지 않고 영적인 무지함도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살다보니 나중에는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서 떨어지는 신세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오늘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되는지에 대해 매우 잘 안내해줍니다. 그는 또 게으름뱅이도 만나고 미련한 자도 만나고 형식주의자도 만났습니다. 형식주의자는 형식적으로는 거룩한 척했지만 위기가 오니 금방 구원의 자리를 벗어 버리고 달아나 버린 자입니다. 그밖에도 위선자와 겁쟁이 그리고 의심을 만났고 바람둥이라고 하는 여인도 만났습니다. 이런 만남을 통해 크리스천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잡고 구원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 하는 내 안에서의 투쟁을 소개합니다. 그런 투쟁 가운데 넘어진 그의 앞에 희망이라는 친구가 와서 손을 잡아 일으키고 다시 구원의 길을 가도록 세워줍니다.
 이런 모든 내용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매우 공감하게 만듭니다. 그런 중에서도 구원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한다는 것에 가장 공감하게 됩니다. 천로역정은 넘어야 할 산을 다 넘어야 하고 실수하고 쓰러지기도 하지만 그 과정들을 겪어내고 이겨 나가면서 천성을 향한 걸음을 매일 걷는, 구원을 향한 우리의 여정인 순례자의 길을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막 살아도 됩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막 살아도 됩니까? 아닙니다.

구원파에서는 한 번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는 세상적인 부귀영화를 위해서 살아도 된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내 욕심을 채우게 되고 세월호 사건과도 같은 일이 터지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크리스천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마음대로 살아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빛의 자녀가 되었으니 어둠을 벗어 버리고 빛의 자녀처럼 살아야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구원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을 두고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구원의 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내가 구원의 길을 걷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책으로 태권도를 공부해 태권도 고수가 된 사람은 없습니다. 수영을 잘 하는 사람이 책을 보고 지식으로 ‘아, 이렇게 하는 것이 수영을 잘 하는 것이로구나!’라고 생각하고 수영을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물속에 뛰어 들어 물을 먹어 가며 연습을 해야 합니다. 가기 싫고 하기도 싫고 생각대로 잘 되지도 않습니다. 생각으로는 벌써 선수가 된 것 같지만 실제로 들어가 보면 아닙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반복하고 또 반복합니다. 오늘 수영을 배우러 가기 싫지만 가는 것입니다. 태권도를 하기 싫지만 하는 것입니다. 가다 보면 또 힘들고 어려워서 ‘내일은 가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지만 또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다가 세월이 지나면 어느 순간엔가 전문가가 되어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나가서 크리스천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산다는 것이 부담스럽고 힘이 듭니다. 그래서 가기 싫고 말씀 따라 살기가 싫습니다. 그렇지만 또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씨름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그 삶을 반복하다 보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 노력과 몸부림이 세상 속에서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너무 은혜를 강조하다 보니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살아야 된다고 착각하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면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에서 21절에서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정확하게 행함을 이야기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깜짝 놀란 사람들이 “주여 우리가 선지자 노릇을 했어요.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했어요.”라고 했습니다. 이 정도면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예수님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

라고 하셨습니다.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진짜 메시아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얼마나 무릎을 꿇고 기도했는지 낙타 무릎이라는 별명이 생겼습니다. 무릎이 낙타처럼 되도록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그러고 나서 쓴 서신서가 야고보서입니다. 야고보서의 핵심내용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어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는 것입니다. 씨앗을 땅에 심고 아무리 정성스럽게 가꾸어도 그 씨앗에서 싹이 나지 않습니다. 열매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살아 있어야 구원에 이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죽은 믿음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구원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야고보는 “우리의 믿음이 살아있는지 죽어 있는지 구분하는 척도인 행위가 우리의 삶 속에 있는가?”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오해하지 말 것은 율법이나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행위가 뒷받침이 되어 내 진짜 믿음을 증명해 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다가 깊이 각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성도님의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에 갔는데, 아버님이 평생 안 믿으시다가 마지막 돌아가시기 전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병상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하며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구원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 유족들이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장례식 설교를 하는 중에 제 마음에 “툭”하고 성령님이 주시는 마음이 있었는데 “네가 어떻게 아느냐? 네가 하나님이냐? 네가 어떻게 알고 구원을 받았다 안 받았다 하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집에 가 기도를 하며 가만히 엎드려서 “하나님, 낮에 예배 때 주신 말씀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맞지만 바른 믿음, 살아 있는 믿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거지. 죄의 각성도 없이 주변에서 믿으라고, 빨리 ‘아멘.’하라고 강요해서 부르짖는 고백은 진짜 믿음의 고백이 아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중세시대 카톨릭 교회가 타락할 때 면죄부를 팔았던 것처럼 믿음을 사용하고 있다. 오늘 날 너희 믿음이 중세 카톨릭 교회의 믿음과 뭐가 다르냐?”라는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면죄부가 무엇입니까? 논을 팔고 집을 팔아 면죄부를 사는 것입니다. 그 면죄부를 사면 구원파에서 이야기하는 구원과도 같이 사람들은 ‘면죄부를 샀으니 이제 나는 면죄를 받았다. 이 면죄부가 나의 보험증서가 되어 무슨 짓을 하든지 상관없이 구원에 이르게 할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면죄부 사건입니다. 그래서 마틴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킵니다. 그것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는 “말씀으로 돌아가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말씀을 깨달아 알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말씀대로 살아라.”라는 의미입니다.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깨닫고 난 다음부터는 주일 설교를 하는데 1부부터 4부까지 성도님들의 얼굴을 쳐다보며 설교하기가 두려워졌습니다. ‘내가 설교를 잘못하면 저 분들이 다 지옥에 갈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임감이 생겼습니다. ‘교인들에게 듣기 좋은 말, 듣기 원하는 말을 해 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목회자의 사명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분명히 가르쳐야 하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구원에 대해서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또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할까요? 착각에서 벗어나야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생각을 한다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매일의 삶이 어떠한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죄의 각성 가운데 돌아섬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는 의지가 있는가? 없는가?’를 생각할 때 그런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의 길을 정말 가고 있는지를 증거 해 주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은 감리교 목사님이라 그래요. 장로교에서는 그렇게 안 가르칩니다. 장로교에서는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행위가 아닙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들으려고는 하지 않고 장로교인지 감리교인지는 왜 구분을 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제가 어느 날 하나님 앞에 그것을 놓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자 정확하게 보여 주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옥한흠 목사님이었습니다. 고 옥한흠 목사님은 장로교 합동측의 목사님입니다. 참 많은 분이 존경하는 분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구원에 대해 설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분은 오늘 날 한국 교회는 구원 인플레이션 현상에 빠져 있다고 했습니다. 교회에서 구원을 너무 손쉽게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으셨습니까?”라고 물어서 “예. 믿습니다.”라고 하면 “아, 그러면 당신은 구원을 받았군요.”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되며 겉모습은 크리스천이지만 정말 과거의 죄를 다 회개하고 새 삶을 시작했는지에 대한 증거를 점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점검이 없이 입술로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하면 구원 받은 줄 알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원, 기독교의 은혜를 너무 쉽게 받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자기는 신앙이 좋으며 구원을 받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집니다. 그런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라고 가슴을 치며 설교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독일인의 양심이라고 하는 본 훼퍼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나치 정권에 대항해서 싸웠던 분입니다. 이 분은 윤리성이 결여된 은혜는 너무 값싼 은혜라고 했습니다. 지나치게 은혜 중심적으로 살다 보니 하나님이 생명을 바쳐서 주신 은혜를 싸구려 취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 얼마나 해악이 되는지 모른다는 것이 본회퍼의 주장입니다. 마틴 루터도 “말씀으로 돌아가자.”라고 했습니다. 말씀대로 살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이었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개신교로 개신교는 프로테스탄트라고 합니다.
 또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야 되는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사탄은 늘 우리를 유혹하고 넘어트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얼마나 교묘한지 우리 마음과 귀에 속삭이는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을 극심하게 뒤흔들어 놓습니다. 이런 사탄의 이야기가 진짜라고 믿고 사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가짜입니다.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한 속삭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과 사탄의 속삭임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입니다. 척도인 것입니다. 30cm 자로 무엇인가를 재면 그것이 30cm가 넘는지 모자라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을 측량할 수 있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해야 되는 이유는 사탄이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해서 우리를 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고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선악과를 먹게 할 때도 아담과 하와는 먹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뱀의 형상을 한 사탄은 먹어도 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반대로 이야기했습니다. 오히려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하며 호기심을 자극하고 욕망을 자극했습니다. 그러자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맙니다. 죄의 길 가운데 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이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라고 하면 세상은 사탄의 속임수 가운데 빠져 “필요 없다. 요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아마 목사님도 안 지키며 살 거다. 너희들이 뭔데 그것을 지키려고 하느냐? 아무 짝에도 소용없다. 그냥 살던 대로 살고 교회에 출석하면 구원을 받는다.”라고 합니다. 사탄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도 선악과를 먹게 했던 사탄은 똑같은 논리를 가지고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은혜의 교리를 잘못 가르쳐 세상의 길로 죄악의 길로 멸망의 길로 빠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내 생각보다 세상의 가르침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내게 이런 의지가 있다면 나는 구원의 길을 가고 있는 성도가 맞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행위가 없는 구원의 논리는 자칫 우리를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치명적인 독이 됩니다. 더 나아가 한국교회의 부패 지수를 높입니다. 사회 속에서 힘없는 기독교를 만들고 있고 사회에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기독교 더 나아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기독교로 전락시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고 하는 의지가 있는가?’를 항상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 안에 그런 의지가 있다면 나는 올바른 구원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고 그 의지가 없다면 오늘 우리는 그 구원의 길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이거나 아니면 애당초 구원의 길을 걷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셋째, 삶에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우리의 실수는 죄는 회개하기만 하면 되고 구원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선포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즈음에 살기가 힘드니 좋은 말만 듣고 싶습니다. “실수해도 괜찮아.”라는 말만 듣고 싶습니다. “좀 모자라도 괜찮아.”, “넘어졌어도 괜찮아.”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합니다.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친구가 되시고 위로자가 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괜찮아.”였습니다. 그래서 목사인 제게 “다 괜찮다고 하면 되지 안 괜찮다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는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도 보면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여인을 다 돌로 치려는 분위기였습니다. 이 여인은 자포자기하고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라고 하셨습니다. 생각해 보니 모두 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돌을 놓고 갔습니다. 예수님과 여인 둘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여인은 “없습니다. 다 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가라.”라고 하셨습니다. “괜찮아. 가.”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이 용서해 주셨구나! 괜찮다고 하셨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전반전과 후반전이 있습니다. 앞부분만 듣고 ‘아, 이것이 복음이로구나!’라고 하면 착각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괜찮아.”라고 하신 것이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라는 이야기는 아닌 것입니다. 자녀들이 실수를 하면 “괜찮아.”라고 하지만 그 이야기가 “앞으로 더 실수해도 되고 앞으로 더 엉망으로 살아도 된다.”라는 이야기는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괜찮아.”라고 하신 다음에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마라.”라고 하셨습니다. “달라져라.”,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라.”, “변화되어야 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삶이 달라져야 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삶이 달라지는 성도님들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기쁩니다. 목사님이 어떻게 아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보면 압니다. 첫 단계가 말씀을 들으면 수면제를 뿌린 것처럼 그렇게 졸던 분이 어느 날 눈을 말똥말똥 뜨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아, 달라지고 있구나. 성령님이 저 분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는구나!’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두 번째는 은혜를 받습니다. 설교를 듣다가 웁니다. 기도를 하다가 눈물을 흘리고 몸부림을 칩니다. 달라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성령님이 저 분을 붙잡고 역사하고 계시는구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다음 단계가 죄와 싸워 이기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변화됩니다. 어느 순간부터 교만하던 삶이 겸손해지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던 모습에서 사랑하려고 애쓰는 모습으로 바뀝니다. 세상에서 욕망하던 것을 얻기 위해 매일 몸부림치던 내가 이제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몸부림을 칩니다. 이것이 구원의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제가 요즈음에 자꾸 이런 이야기를 하니 성도님들이 힘들어 하는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이러다가 다 나를 미워하면 어떻게 하지?’라는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 열심히 사는데도 더 열심히 살라고 하고, 그러면 안 된다고 합니다. 구원도 확신가지고 살았는데 가짜라고 하고 하니 힘듭니다. 그래서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이번 주에는 위로하는 설교를 해야 하겠다.’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되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하나님은 참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사모가 성경을 보면서 저에게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면 안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 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모가 그냥 “툭”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기를 원합니다. 제가 “그런 말씀이 성경 있어?”라고 물었습니다. 찾아보니 누가복음 6장 26절에 예수님이 산상수훈 이야기를 하시다가 끝부분에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은 말씀을 떠나 불의하게 삽니다. 그런 그들에게 칭찬을 받는다는 것은 나도 그렇게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다 보면 적들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너는 왜 그 모양이야?”, “너는 왜 그런 소리를 해?”라고 하겠지만 그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따라 살 때 모든 사람이 칭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당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위로가 되고 힘이 났습니다. ‘아, 사람이 좋아하는 설교 하지 말고 이런 설교 계속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로구나!’, ‘하나님이 내 마음 속까지 다 헤아리고 계시는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도가 되었으면 그 다음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멸망으로 이르는 문은 넓다고 합니다. 넓어서 좋지만 그 길의 끝에는 멸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를 어떻게 속입니까? 은혜는 넓은 길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모든 것이 다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살아도 되고 저렇게 살아도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길은 넓으니 넓은 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은혜라는 것을 포장해 우리가 멸망의 길을 걷게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길은 결코 넓지 않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힘겨운 싸움이지만, 꺾어 버려야 될 부분은 꺾어야 하고 깎아 버려야 할 부분은 깎아야 합니다. 이것인 진정 그리스도인의 구원을 향한 삶입니다. 매일매일 세상을 향해서 나가기보다 구원의 길인, 성화의 삶을 살고 제자의 삶을 살고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살고자 세상 속에서 몸부림치면서 그렇게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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