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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을 진정 사랑하는가?  
 
예수님을 진정 사랑하는가?
설교날짜 2018.9.2
설교자 박동찬 목사
본문말씀 요한복음 21 : 15 - 17
 

                                           예수님을 진정 사랑하는가?  

 

                               1.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이 나에게 있는가

                               2. 예수님이 싫어하시는 일은 하지 않는다

                               3. 예수님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가

 

 

 

■ 말씀 요 21:15-17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21장 15절에서 17절 말씀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절망과 좌절감 가운데 ‘다시 고기나 잡자.’라고 생각하고 다시 갈릴리 바다로 가서 고기를 잡는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대화를 하는 장면입니다.베드로는 자기가 사랑하는 예수님을 배신했다는 생각에 참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물을 던져서 고기가 많이 잡힌들 기뻤을까요? 예수님을 위해서 죽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고백까지 했는데 정작 어려운 상황이 닥치니 나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저주까지 하면서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자기의 실체를 보았을 때 얼마나 마음이 상했을까요?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주의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마음으로 갈릴리 바다로 가서 그물질을 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은 아십니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한 번의 질문으로 끝내시는 것이 아니라 세 번을 질문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하자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은 아시나이다.”라고 한글로 된 성경에는 단순하게 번역되었는데, 사실 헬라어 원전을 보면 조금 다릅니다.

 

우리는 사랑이라고 하면 똑같은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 철학에는 사랑의 종류가 있고 각각의 사랑마다 표현하는 방법도 다릅니다. 먼저 아가페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가페는 신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 사랑이 아가페입니다. 두 번째는 필레오로 친구들 간의 우정적인 사랑입니다. 세 번째는 스톨게로 부모와 자녀간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에로스로 연인간의 열정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하셨을 때 헬라어 원전 성경에 보면 “아가페스 메?”입니다. “네가 나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하시는 이유는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 밤에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위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아가페의 사랑입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닭 울기 전 새벽에 아가페는 커녕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하신 첫 질문이 “네가 나를 아가페하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참 짖궂은 질문일 수 있습니다. “네가 나를 위해서 아가페 한다고 했는데 부인했지? 지금도 아가페 한다고 할 수 있느냐?”라는 의미로 “아가페스 메?”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 질문에 대해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은 아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원전에서는 “나이뀌리에.”라고 합니다. “네. 주님.”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필로세.”입니다. “내가 당신을 필레오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당신을 아가페하는 존재가 못된다고 하는 것을 당신은 아십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저 친구로서 좋아하는 정도이지. 이번 경험을 해 보니 내가 죽을 만큼 당신을 사랑하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가페 하느냐?”라고 물으시니 “필레오합니다.” 즉 “친구간의 우정으로 당신을 좋아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도 동일하게 “아가페스 메?”라고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분명히 베드로는 필레오라고 했는데, 또 그렇게 질문을 하시니 베드로가 고민을 하다 “주님, 내가 당신을 필레오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줄 당신이 아십니다. 나보다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이 “필레이스 메?”라고 질문하십니다. “그러면 네가 나를 필레오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근심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아가페를 한다고 했는데 예수님이 “너는 그렇게 못해.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할 거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가페 하느냐고 물으시는데 계속 친구간의 우정으로 사랑한다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 번째로 질문을 하시면서는 “필레오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라고 하시니 ‘이거 내가 또 틀린 건가?’ 싶지 않겠습니까?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아가페 하지 못하고 필레오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고백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정도가 어느 정도일까요? 정말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합니까? 아니면 필레오의 사랑으로 사랑합니까? 어떤 종류의 사랑이고 어느 정도까지 깊이 있게 사랑합니까? 때로 “예수님을 위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위해서 순교할 수도 있습니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상황이 닥쳐 보아야 아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늘 불평하고 원망하고 김 집사도 보기 싫고 이집사도 박 집사도 보기 싫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위해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내 신앙의 실체를 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마음이 뜨거울 때는 무슨 소리를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실체를 접하고 나면 내 모습이 다 드러납니다.베드로는 정말 예수님을 위해서 죽고 싶었을 것입니다. “내가 정말 예수님을 사랑합니다.”라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만으로 “나는 예수님을 위해 이 정도는 할 수 있어. 내 신앙은 이 정도야.”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 실체를 보면 그렇지 못합니다. ‘내 신앙이라는 것이 이 정도였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마음이 무너져 내립니다. 그런데 그런 내 실체를 바라보면서 마음이 무너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나의 실체를 보며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진짜 자기가 죄인이라는 자각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우리 다 죄인이죠.”라고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죄인이로구나!’ 하는 것을 자각한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러한 자각이 있을 때 죄의 각성이 일어나며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깊고 넓고 큰 것인가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말 주님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었다는 진정한 신앙고백이 우리 안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어디 가서 내가 잘났다고 할 수 없습니다. 겸손해 질 수밖에 없고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을 위로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아도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에 대한 자각 없이 “내 신앙은 좋다.”라는 착각에 빠져 삽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풍선 터지듯이 터져 버리고 나면 남는 것이 하나도 없어진 나의 모습을 보게 되고 스스로 실망하고 넘어집니다.

 

베드로는 이런 경험을 통해 자기의 실체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이야기를 통해 ‘내가 진짜 예수님을 사랑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나는 진짜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이렇게 물으면 예전 같으면 “아멘.”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요한복음 21장 15절에서 21절 말씀을 원전에 바탕으로 내 삶에 비추어 보니 아무 말도 못합니다. 내가 진짜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아닌지는 말씀을 통해 다음의 세 가지에 비추어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이 나에게 있는가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 나타나는 첫 번째 현상은 기쁨입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을 생각만 해도 기쁩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씀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구약에서 하나 신약에서 하나를 뽑으라고 한다면 스바냐서 3장 11절과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으로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매우 좋아합니다.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나를 살리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스바냐서 3장 16절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 좋아서 웃음이 멈추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바라보실 때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집니까? 오늘 우리가 얼마나 고약한 존재입니까? 얼마나 괘씸하고 하나님이 보실 때 얼마나 죄악으로 가득합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보시며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주일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울면서 “바르게 살겠습니다.”라고 하고 가서는 싸우고 넘어지고 또 와서는 “하나님, 나를 살려 주세요.”라고 하는 우리를 너무나도 귀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가늠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에서 아기를 출산하면 “한 달이 되었어요.”, “두 달이 되었어요.” 하고는 아기를 안고 와 “목사님, 안수 기도 해 주세요.”라고 합니다. 아기를 안고 오는 엄마들을 보면 결혼하기 전에는 공주님처럼 하고 다니더니 아기를 낳은 후에는 그만큼 신경 쓰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고 다니는지는 본인의 자유니 뭐라고 할 수는 없으나 그만큼 주위를 의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해 주세요.”라고 할 때 엄마의 표정을 보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아이 하나로 말미암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생각하고 기도를 해 달라고 합니다. 꼼지락 대며 말도 잘 못하는 아이가 “엄마, 내가 커서 엄마 호강시켜줄게.”라는 약속을 한 것도 아닙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떤 희망을 준 것도 아닙니다. 그냥 엄마 품에 안겨 있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품에 안긴 아기를 세상의 누구보다도 기쁜 표정으로 쳐다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아이가 엄마에게 차를 사준 것도 아니고 효도를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가 기쁨을 견디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사랑을 하면 기쁨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그 엄마가 젖먹이를 잊는다 할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겠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토록 대단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의 증거가 기쁨입니다. “나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입장을 바꾸어서 우리는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생각할 때 그런 기쁨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너무 좋아서 웃거나 울어 본 적이 있습니까?

 

제가 지난 주간에 베트남 선교사님을 만나 사랑하는 동생 목사님과 셋이서 식사를 했습니다. 저를 보고 기도해 달라고 해서 두 사람을 축복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식기도니 길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도 도중 베트남 선교사님이 울었습니다. 식사 기도를 하다 우는 것은 처음 본 저는 “아니 왜 울고 그래? 내 기도가 그렇게 감동이 될 만큼 은혜가 되었어?”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민망해 하면서 눈물을 닦으며 “그러게요. 그냥 눈물이 나네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며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아, 이 선교사님이 진짜 예수님을 사랑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낼 수 있는 기도이지만 진짜 예수님을 생각하며 울 수 있다는 것이 연약하고 옥토 같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할 때 이런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예수님을 생각할 때 기쁨이 있습니까?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는 노래를 썼던 성프란시스는 자기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텅 빈 방 안에서 가만히 있다가도 길거리로 뛰어 나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미치게 하는구나!”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생각하면 기뻐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을 생각할 때 기뻐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라고 뛰쳐나가 외쳤던 것이 성프란시스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오늘 “내가 진짜 예수님을 사랑한다.”, “나는 예수님을 위해서 죽을 수 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면 내 가슴이 뛰는가?’, ‘예수님을 생각하면 기쁨이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기쁨이 있을 때 세상을 살다가 무언가가 잘못되었을지라도 안타깝지 않은 것입니다. “나에게는 예수님이 있으니 그래도 나는 기쁩니다.”라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기쁨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이 싫어하는 것은 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끊어버릴 수 있는 용기가 나에게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징은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은 안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이 이타적인 것입니다. 내 욕심을 채우고 욕망을 채우면서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필요를 채우는 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사랑은 내 욕구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요즈음에는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면서 물고 뜯고 싸우며 상처를 받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상대를 위해서 희생하기보다는 상대방을 내 욕구를 충족시키는 도구로 삼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고 싶고 갖고 싶고 채우고 싶은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오히려 하기 싫어도 책임을 다 하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책임이 따릅니다.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했는데 그 사랑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피를 흘리면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습니다. 올라 가다가 지쳐서 쓰러지면 이를 악물고 일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벌떡 일어나셨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실 때는 신성을 무장해제 시키시고 인간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고 물을 마시지 않으면 목이 말랐습니다. 추운 곳에서 잠을 자면 오들오들 떠는 우리와 똑같은 몸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와 같은 분이 “죄 없는 내가 너희를 위해 대신 죽어야 된다.”고 하시며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습니다. 넘어지면 일어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악물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셔서 십자가에 누우셔 손과 발에 못이 박히신 분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사랑한다는 증거가 무엇이냐?”라고 하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얼마 전에 한 청년이 와서 “목사님, 상담 좀 해 주세요.”라고 해서 “그래 해 봐라.”라고 했더니 골자는 “부모님이 사이가 안 좋아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집에 들어가면 부모님이 싸우니 분위기가 썰렁하고 집에 들어가고 싶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아요?”라고 묻는 것입니다. 참 답이 없었습니다. 제가 그 부부를 불러 그러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또 교회를 떠난다고 난리를 칠 것입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드는 생각이 ‘참 나이만 먹었지. 어른이 어른이 아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른 구실을 못하고 여전히 이기적인 모습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것이 현대인이로구나! 어른이 되었으면 자녀를 생각해서라도 그러면 안 됩니다. 결혼식을 할 때 서약하면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서로를 위해주고 돌보아 주고...”라고 하면 “네.”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으면 다 잊어버립니다. 그저 내 욕구나 욕망이나 욕심만 채우려고 합니다. 남들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자녀를 낳아도 자녀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은 자기 몫을 살겠지.’라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원래 인간은 부족한 존재입니다. 부족한 사람이 부족한 사람을 만나서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며 온전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가정이고 결혼입니다. 처음에는 이런 마음으로 만났는데 시간이 지나 상대방의 부족한 점이 보이니 ‘이렇게 부족한 사람인지 알았으면 내가 결혼을 안 했을 텐데.’라고 생각하고 돌아섭니다. 그 다음부터는 사랑 같은 건 안 하고 되는 대로 삽니다. 그래서 가정이 무너집니다. 가정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성장하는 자녀들이 얼마나 상처가 나고 병이 듭니까? 그런 자녀들은 성장하면 결혼을 꺼려합니다. 그리고 결혼을 하더라도 서로 믿지 못하고 똑같이 반복적인 생활을 하다 또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 되면 상처를 받고 가정이 깨집니다. 가장 사랑한다고 만나 결국은 천국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장 큰 원수를 만듭니다. 서로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린다고 합니다. 처음에 서로 사랑한다고 만난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사랑을 이타적인 것이 아니라 이기적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내가 오늘 예수님을 만나야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복을 주고 잘 되고 병이 치유된다고 하니 ‘예수님이라는 존재는 믿어서 나쁠 것이 없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보다는 그런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께 나오면 뺏기는 것보다 얻는 것이 많구나!’라는 생각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이제는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해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싫다고 하면 끊어 버려야 합니다.두 부부가 만나서 결혼을 해 가정을 이루면 상대방이 싫다고 하는 것은 끊어버리려고 애를 쓰는 것이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노력이 있을 때 가정은 천국으로 변화됩니다. 

 

제가 미국에 살 때 보면 미국은 가정마다 앞마당이 있고 정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집은 늘 정원이 가꾸어져 있고 잔디가 깨끗이 깎여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집은 잔디밭이 아니라 쑥대밭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한 가정은 피곤하고 힘들어도 늘 가꾸니 아름다운 가정을 만드는 것이고 한 가정은 피곤하고 힘들다고 내팽겨 쳐 두니 쑥대밭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감정만 아름답게 해서 천국이 이루어지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부부간에 노력이 필요합니다. 서로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약함을 보면 메워 나가려고 해야 합니다. 이런 관계가 있을 때 아름다운, 천국 같은 가정이 형성됩니다.오늘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우리의 신랑이 되시고 우리는 그 분의 신부가 된다고 합니다. 결혼으로 비유하는 것입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이 오실 때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가 신랑을 맞이했습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고 살아야 합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 있다면 끊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의 모습은 욕망가운데 죄 짓는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 내 삶에 관여하지 마세요, 나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주세요. 다음 주에 와서 예배드려 줄게요.”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진정한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아무리 내가 사랑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끊어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예수님의 더욱 더 자랑스러운 성도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난 몰라. 예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나는 내 마음과 내 뜻대로 살아갈 거야.’라는 마음으로 산다면 어떻게 그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존재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아니라고 하시면 끊어 버리려고 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너무 원하는 것이고 내 욕심을 채우고 싶어서 “예수님, 이번 한 번만 눈 감아 주세요.”라는 마음으로 여전히 죄의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됩니다.

 

셋째, 예수님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가

 

오늘 예수님 앞은 베드로가 자기의 부족함을 고백하고 있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이 “너는 나를 아가페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예. 예수님, 내가 예수님을 아가페 하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죽을 정도의 신앙은 됩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요. 그렇게 못합니다. 예전에는 할 수 있다고 했지만 실상을 돌아보니 그런 것은 못하는 존재라는 거 이미 예수님 아시지 않아요? 나는 부족합니다. 못합니다.”라는 고백을 계속하는 것이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21장 15절에서 17절 말씀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베드로의 말에 예수님은 “그래. 네가 부족하구나! 그러면 네가 조금 더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 줄게.”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내가 예수님을 아가페 하는 존재가 아님을 예수님이 아십니다.”라고 하니 “내 양을 먹이라.”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라고 하셨을 때 베드로가 또 “내가 당신을 필레오 하는 줄 당신이 아십니다.”라고 하니 “내 양을 먹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네가 나를 필레오 하느냐?”라고 물으셨고 그렇다고 대답하는 베드로에게 첫 번째와 두 번째에 말씀 하셨듯이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아가페이든 필레오이든 상관없이 예수님은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아니, 부족한데 왜 사명을 주십니까?”라고 할 수 있지만 예수님은 부족하든 부족하지 않든 상관없이 사명을 주시고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사명을 이야기하면 많이 부담스러워 합니다. “바쁘고 할 일도 많은데 목사님은 교회에서까지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합니다. 또 베드로처럼 “사명을 감당할 능력도 없는데, 하고는 싶지만 부족해서 못합니다.” 내지는 “가진 것이 없어서 못합니다.”라는 이야기를 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내 능력이나 가진 것과 상관없이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야 합니다. 교회 밖에서든 안에서든 이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사명이라고 여겨지면 그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직장을 비롯해 어느 곳에서든 사명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하게 되면 그것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이 채워주시고 능력을 주십니다. 돕는 손길을 통해서라도 그 일을 이루게 하십니다.

 

며칠 전에 한 목사님이 저를 찾아와 “목사님, 상담 좀 해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얘기해 보세요.”라고 했더니 교인이 70-80명 정도 되는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데 목회가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사명을 잘못 찾은 건 아닌가 싶었습니다. 너무 힘들고 기쁨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이 아니라 다른 일을 했어야 했는데 하나님이 나를 잘못 부르셨거나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자리가 다른 곳인데 내가 이 길을 가겠다고 고집 부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목사님을 부르시고 크건 작건 목회의 사명을 맡겨 주신 것은 가문의 영광인지 아세요.”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일할 사람이 없어서 당신을 목사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뛰어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목사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생리에 맞고 맞지 않고를 따질 필요 없습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이 나를 목사로 불렀다면 그 일이 큰 일이 되었든 작은 일이 되었든 최선을 다하세요. 수많은 사람 가운데 나를 부르셨다는 것이 감사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자다가도 일어나서 감사해야 될 일이고 가문의 영광중의 영광입니다. ‘해야 되는가? 하지 말아야 되는가?’를 고민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권면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사명을 맡기시는지 아십니까? 일할 사람이 없어서 맡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함이고 우리를 영광되게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우리가 어린 자녀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아빠를 위해서 이것 좀 해 줄래?”라고 했을 때 “응, 아빠. 내가 해 줄게.”라고 하고는 뒤뚱 뒤뚱 걸어가면서 아빠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려고 하면 기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시킬 때 이미 그것을 하면 선물을 주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거 하면 내가 선물 줘야 되겠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아빠를 사랑해서 순종하려는 마음 자체가 귀한 것이지 ‘얼마나 잘해 내려는지 보자.’라는 생각으로 지켜보다가 “나는 아버지로서 너에게 모든 것을 주었는데 너는 그것 밖에 못해?”라고 하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실 때는 우리 마음을 보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보시고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고 더 큰 선물을 주십니다. 우리의 삶을 보장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 사명을 못한다고 거절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대통령이 날 좀 불러서 일을 좀 맡겼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대통령이 무슨 일을 맡기면 가문의 영광입니다. 동네방네 전화해서 “대통령이 나에게 전화해 이런 일을 맡겼어요.”라고 합니다. 어디 더 알릴 데가 없는지 싶고. 그것을 얼마나 자부심으로 삼고 살아갑니까? 그런데 실상은 그런 일이라 할지라도 내 인생의 마지막 날에는 다 썩어 없어질 것이라고 성경은 교훈합니다.

 

세상일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썩어 없어지는 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노력하며 했던 일들은 하나도 썩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돌에 맞으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어리석습니다. “왜 그렇게 고난을 당하며 살아가?”라고 할 때 사도 바울은 “너희들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은 배설물에 해당하는 것이고 내가 현재 당하는 고난은 장차 나타날 고난에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가장 영광스러운 길을 걸어간다.”라고 했습니다. 사명을 감당하고 사는 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렵고 힘든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얼마나 잘 해내고 얼마나 완벽하게 해 내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맡기셨으니 힘닿는 대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하며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면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 힘들 때 나타나는 반응은 “내가 해 줄게.”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힘들어해도 내가 해 준다는 말이 안 나옵니다. “안 됐다. 저 사람 참 힘들게 사네.” 하고는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가만히 지켜볼 사람은 없습니다. 달려가서 대신 그 짐을 져 줍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했을 때 나는 예수님을 위해서 어떤 짐을 대신 지고 있습니까? “예수님,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겠습니다. 부족하지만 그 십자가를 대신 지기 원합니다.”라는 마음이 내게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신앙을 관념의 세계 속에서 착각하지 말고 삶을 통해 내 신앙의 본질과 참 모습이 어떠한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깊은 사랑의 교제 가운데 나아가고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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