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역사를 일으키는 교회 (살후 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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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가 서있는 자리  
 
내가 서있는 자리
설교날짜 2018.9.23
설교자 박동찬 목사
본문말씀 출애굽기 3 : 1 - 5
 

 

내가 서 있는 자리
1.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리가 거룩한 자리이다
 2. 지금 나는 어떤 자리에 서 있는가 생각해 보라
 3. 내 믿음의 자리는 어디인가 생각해 보라


말씀 출 3:1-5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때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인생을 살면서 사람들은 자리에 매우 민감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자리에 누가 올랐는가? 못 올랐는가?’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다못해 우리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학급의 회장을 맡았는가? 반장을 맡았는가?’, ‘줄반장이라도 섰는가?’를 따질 정도로 자리에 굉장히 민감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된다고 합니다. 그래야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성공이라는 생각에 굉장히 자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자리가 높은가? 아닌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옳은 자리인가? 거룩한 자리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높은 자리라 할지라도 죄의 자리이고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는 자리라면 마지막은 망하는 수밖에 없고, 결과를 알게 되었을 때는 후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높은 자리로 올라가야 한다. 그 자리가 악한 자리이든 아니든.”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높은 자리가 아니라 옳은 자리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서 거룩한 자리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거룩한 자리에 서야한다고 가르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고 하나님이 지켜보시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옳은 자리, 거룩한 자리를 더 가치 있는 자리로 생각하고 서야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출애굽기 3장 1절에서 3절 말씀은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왕궁에서 왕자의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최고 높은 자리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순간에 살인죄를 저지르고 나서는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살기 위해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 아무도 주목해 보지 않는 곳에서 40년 동안 양 떼를 치면서 지냈습니다. 그 자리는 정말 세상적으로 이야기할 때 별 볼일 없는 자리입니다. 최고의 자리. 남들이 부러워하는 자리에서 40년. 정말 별 볼일 없는 자리에서 40년. 이렇게 80년을 지나고 난 다음에 모세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도대체 인생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높은 자리에도 있어 보고 낮은 자리에도 있어 보고. 이것이 무엇인가?’ 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호렙산에서 모세의 발걸음을 인도하십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우연인 것 같지만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셔서 호렙산으로 간 것입니다. 그 곳에는 불이 붙은 떨기나무가 있었는데, 불이 붙었는데도 나무가 타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신기한 광경을 보려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습니다. 그때 4절에 보면 갑자기 음성이 들렸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에 있나이다”

그러자 5절에서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 땅이 거룩한 자리이니 그 자리에서 신을 벗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서 있는 그 자리는 세상적으로 볼 때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꺼리는 자리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벌판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하나님은 거룩한 자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발에서 신을 벗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성경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관점과 세상의 관점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과 세상의 관점. 우리의 갈등은 항상 거기에 있습니다. 이 두 관점 가운데 어디를 따라야 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과 세상의 관점 중 어느 것이 옳습니까? 세상의 관점이 옳아 보이고 좋아 보이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옳고 하나님의 관점이 옳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에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의 삶을 돌아보시고 어떻게 생각하시고 판단하실 것인가에 늘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어느 자리에 서 있는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특별히 ‘내가 어느 자리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데, 이것이 내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6장에 보면 모세가 출애굽을 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 때 여자와 아이들의 수를 뺀 60만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출애굽을 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이를 많이 낳았습니다. 둘씩만 나았다 하더라도 4명으로 계산하면 60만 명에 가족들까지 다해 200만 명이 넘는 사람을 출애굽 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광야 길로 인도해 갈 때 고라라는 사람이 모세를 대적했습니다. 고라는 똑똑하고 지도력도 있고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고 사리판단력이 분명했습니다. 그런 그가 가만히 보니 모세가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마음대로 끄는 것 같아 불만이었습니다. “왜 당신이 우리의 지도자가 되고 당신이 말하면 따라야 합니까?”라고 하며 기분나빠했습니다. 그래서 민수기 16장에서 고라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모든 족속은 다 거룩하다. 그리고 이 회중 가운데 하나님은 함께 하신다. 너와만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너의 말을 들어야 되고 네가 가자는 곳으로 가야 하느냐?”라고 하며 모세를 대적했습니다. 그런 고라에게 수많은 사람이 동조했습니다. 그들에게도 “맞아. 고라 이야기가 맞는 것 같아. 우리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불공평하게 모세가 나타나서 우리의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뭐야?”라는 불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민수기 16장을 읽다 보면 마지막 결론이 하나님이 모세를 대적하던 고라를 멸망시키신 것입니다. 고라만이 아니라 모세를 따를 것인지 고라를 따를 것인지 선택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고라의 말이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고라와 함께 했던 사람들이 다 같이 망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성경의 이야기를 들을 때 조심해야 될 부분이 있습니다. 세상을 사는 동안 무엇을 결정하든 그 결정은 나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내가 이것도 결정할 수 있고 저것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내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내 의지에 달려있고 내 생각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선택한 결과는 결국은 내가 받아야 되는 몫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 가지를 선택할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자기의 생각과 경험을 따라서, 어떤 사람은 세상의 가르침을 따라서, 어떤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조롱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겠다고 선택합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수많은 사람이 선택하면 그것이 옳고 선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세상의 어떤 방식이 옳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시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되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어떤 자리에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보다는 거룩한 자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를 선택하는 믿음의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출애굽기 3장 1절에서 3절 말씀을 통해 얻게 되는 신앙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리가 거룩한 자리이다

 우리는 거룩한 자리에 서야 합니다. 세상을 따르는 사람들은 결국은 후회하고 멸망의 자리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거룩한 자리에 머무르는 사람은 후회함 없이 결국 마지막에 가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되고 승리의 면류관을 쓰게 됩니다. 그러면 거룩한 자리가 어디일까요? 거룩한 자리는 지리적으로 결정된 어느 한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곳이 거룩한 자리입니다.
 호렙산은 지금도 성지순례를 가서 보면 돌산입니다. 나무도 없고 꽃도 피지 않습니다. 그저 황량한 돌들만 많습니다. 지금 모세가 서 있는 곳도 돌짝밭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돌짝밭이고 사람들이 가기 꺼려하는 곳이고 아름다운 모습이 없습니다. 거룩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서 있는 모세를 향해 하나님은 “네가 서 있는 곳이 거룩한 곳이다. 그러니 네가 서 있는 곳에서 신을 벗어야 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여기가 거룩한 곳입니까? 그 호렙산이 축복받은 산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머무시고 하나님이 그곳에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거룩한 곳이라고 거룩한 성전이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말을 비웃습니다. “내가 교회에 한번 가보니 죄인만 득실득실 하고 교인들도 상대해 보면 이기적이고 자기 밖에 몰라. 그런데 교회가 뭐가 거룩한 곳이야?”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하지만 교회가 거룩한 이유는 우리 인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분명히 인지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라서 성전이 거룩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성전이 거룩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곳이 호렙산이든 또 다른 산이든 그곳은 거룩한 곳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사실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호렙산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함께 하는 이 곳이 거룩하다.”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며 거룩의 의미를 가지고 출애굽을 시키기 위해 이집트로 들어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곳에 갈 때에도 내가 너와 함께 하는 것을 통해 거룩한 곳에서만 일어나는 기적.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지만 타지 않은 것과 같은 기적들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거룩한 장소에서 일어나니 두려워하지 말고 이집트로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거룩한 것은 나에게 흠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끝날 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거룩한 곳이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두 명, 세 명, 네 명의 가족들이 모여 예배하면 그 곳에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가정이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또 교회 안에 우리가 모여 예배할 때 교회는 거룩한 곳이 됩니다. 직장에 삼삼오오 신우회로 모여 예배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그 곳이 거룩한 곳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 거룩한 곳이고 그 곳에 기적이 나타난다는 것을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이유는

“두려워하지 말고 세상으로 나가야 된다. 사명을 가지고 이집트로 들어가라.”

라는 사명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내가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며 내가 거룩한 존재이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감사하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모세에게는 출애굽이라는 대역사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못한다고 능력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에 모세는 결국 순종하고 출애굽을 위해 이집트로 나아갔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전도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죄로부터 허덕이는 이집트로부터 고난을 당하는 백성이 출애굽을 했다는 것은 죄의 세력으로부터 고통을 당하는 우리가 출애굽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 한 삶을 누리게 만드는 것이 전도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안 믿는 사람에게 나아가는 이유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는 세상 문화를 바꾸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방종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바르게 사는 길을 가르치는 사명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실의에 빠지고 낙심하고 좌절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로 격려하고 일어나게 만드는 사명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세상에 나아갈 때 그런 사명을 받고 나아가야 뙤는 것인데 많은 사람이 이런 사명을 받고 나아가기 싫어합니다. “하나님, 내가 먹고 살기도 힘듭니다.”, “바쁩니다.”, “할 일이 많습니다.”, “약속이 많습니다.”, “못합니다.”, “할 만한 사람을 보내주세요.”라고 모세와 똑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내가 있는 곳이 거룩한 곳이고 그 곳에는 기적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세상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아멘. 하나님. 제가 그 사명을 감당하겠습니다.”라는 고백으로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가정에서 설거지를 하더라도 “하나님, 이 가정을 거룩하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직장에 나가서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내가 있는 곳이 거룩한 곳인 줄 믿습니다. 직장을 거룩한 곳으로 변화시켜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길을 가면서도 “하나님, 나를 일산에 살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이 일산 지역을 거룩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아가는 것은 먹고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가지고 사는 존재가 바로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어디에 가든 “하나님, 나로 인해 이 땅이, 이 장소가 거룩해지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둘째, 지금 나는 어떤 자리에 서 있는가 생각해 보라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로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세 가지 중 한 가지입니다. 첫째는 모세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는 거룩한 자리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성경에 보면 여럿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소돔 성처럼 화려한 자리에 가지 않고 광야에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그것을 애통해 하며 “나도 소돔성에 들어가 그들처럼 흥청망청하며 오락을 즐기며 살겠습니다. 나도 그렇게 살게 해 주세요”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소돔성과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에 살았습니다. 오히려 소돔성 사람들은 그런 아브라함을 어리석다고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든 “주님과 함께 하고 싶고, 닮고 싶고, 이곳에서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 저의 기쁨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행복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에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는 않았지만 조용히 주님과 300년 동안 동행하며 살았습니다. 에녹의 삶은 거룩한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신앙인의,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리를 세상적으로 볼 때는 하찮고 보잘 것 없는 자리로 볼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살아갔던 아브라함의 모습이나 모세의 모습이나 또 다른 누군가의 모습이 하찮게 보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자리는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이고 하나님이 주목해 보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축복된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거룩한 자리에 머물러 사는 복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소돔성 사람들의 자리입니다. 그 당시로는 가장 번영했다고 하는 도시가 소돔성이었습니다. 그 죄악의 도시에 수많은 사람이 살았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자신들이 죄악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죄악의 자리는 멸망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후회할 수밖에 없는 자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몰랐습니다. 내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을 바보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죄를 즐기며 삽니다. 자기들 소견이 옳은 대로 마음 놓고 죄를 즐기다가 어느 한 순간 마지막 때가 되면 멸망의 길로 떨어집니다. 소돔성 안에서 자기정도면 성공했다고 스스로 위로를 받고 칭찬을 받고 삽니다. 우리가 혹시 그런 자리에 있지는 않았습니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교회에는 다니지만 일주일 동안 세상에 나가서 세상의 낙을 누리며 내가 성공했다고, 스스로를 옳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는 어떠합니까? 내가 소돔성 안에서 세상을 즐기고 인생을 즐기고 있으면서도 내가 똑똑하고 내 선택이 옳다고 생각하며 살지는 않습니까?
 셋째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자리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을 따라 다니며 축복을 받았지만 아브라함과 결별을 하게 될 때 눈에 좋아 보이는 소돔성으로 가기고 결정했습니다. 그 곳에 가면 행복과 만족과 자기 성취감이 있을 것 같고 인생을 즐기며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그 길로 갔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그 자리가 잘못된 자리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기가 잘못된 자리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깨달았을까요? 소돔성에 사는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데 그는 깨달았습니다. 아브라함을 따라 다니며 그 신앙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어려서부터 자녀들에게 신앙교육을 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롯은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두 천사가 소돔성을 멺망 시키기 위해 가게 될 때 창세기 19장 1절에 보면 롯은 성문 앞에 있었습니다. 성 안이 아니라 성문 앞에 있었던 것입니다. 소돔성으로 들어가고 나가는 출입구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그 성에 들어가자니 괴롭고 아브라함에게로 나가자니 그 자리도 두려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될지 알지 못해 성문 앞에 앉아 방황하고 흔들리는 롯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롯은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죄악 된 도시에 살았지만 고민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롯의 자리에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는 드리지만 세상에 나가면 세상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합니다.
 1부 예배를 마쳤는데 한 성도님이 나가며 “목사님, 말씀에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라고 하며 항상 응답은 말씀을 통해서 받는데 그렇게 산다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하며 나갔습니다. 저는 공감한다고 하며 등을 두드려 주었습니다. 정답을 아는 것은 쉽지만 그렇게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알기 때문에 그렇게 살고자 노력합니다. 알기 때문에 옳은 방향으로 돌아서려고 노력하고 노력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베드로후서 2장 7절과 8절에서는 옷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이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다.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으므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심령이 살아 있기 때문에 상하는 것을 롯은 압니다. 그래서 괴롭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마음에 괴로움이 있다는 것은 감사한 것입니다. 아직 내가 생명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나가 세상 사람들처럼 살면서 괴롭지가 않고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고 왜 교회는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고 교회를 비난하면 그 사람은 생명이 이미 죽은 사람일지 모릅니다.
 롯은 괴로워했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신앙 교육을 바르게 시켜야 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보면 어려서부터 신앙교육을 받아서 중고등학교 때까지는 잘 자랍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빨라져서 고등부 아이들과 접하면서 세상 문화를 접하게 되고 대학에 가서 대학생 친구들과 세상 문화를 접하고 보면, 매우 음란한 세대의 문화를 보며 심령이 상합니다. 중‧고등부 때까지는 그래도 깨끗했던 심령이 대학에 가고 청년이 되고 보니 상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어렸을 때 복음이 들어갔기 때문에 상한 심령이 옳지 않은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아서야 되겠다는 방향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롯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결국 롯은 구원받았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이나 모세와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자리를 지양하며 살아갑니까? 아니면 소돔성 사람처럼 향락을 누리면서 내가 원하는 대로 살면서도 멸망으로 가는 줄도 모르고 죽을 운명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똑똑하다고 마음껏 죄를 지으면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롯처럼 이렇게 세상을 따르면서 죄를 지으며 살 수 없다고 그래서 돌아서고 싶다고 다짐을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나는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그 자리가 내가 생각하기에 거룩한 자리가 아니라면 거룩한 자리에 서야 합니다.

 셋째, 내 믿음의 자리는 어디인가 생각해보라

 믿음과 연관시켜서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처럼 다니엘이나 세 친구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들은 그 믿음이 기적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들의 특징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옳다고 생각하며 그 말씀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보면 그의 삶 속에서는 늘 기적이 넘쳐 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적을 여러 번 경험해야 합니다. 삶에 기적이 일어나야 합니다. 기적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고 믿음이 없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기적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에는 반드시 기적이 일어나는데 그 기적은 믿음의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믿음에도 분량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 반신반의하는 믿음이 있고 아예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의 믿음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기적은 온전히 하나님을 믿는 자리에 있을 때 일어납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 자리에 없을지라도 기적을 베푸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정금 같은 믿음이 될 때 그 믿음으로 살아갈 때 기적이 상식이 되는 삶이 이어지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의 정도는 말이나 생각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이 신앙정도를 정확히 표현해 줍니다. 고린도전서 4장 20절에도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왜 기적이 그렇게 많이 일어났을까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렇게 했습니다. 아들 이삭을 바치라 하실 때도 이삭을  바쳤습니다. 행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못 떠납니다. “아니 내 나이가 75세인데 무슨 말씀이세요?”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살인자의 신분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시 이집트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붙잡히라는 이야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도 바로 왕 앞으로 가야했습니다. 바로 왕 앞에 가면 바로 잡힙니다. 죽음의 자리입니다. 그런데도 가라고 하실 때 죽음을 무릎 쓰고 갔습니다. 우리 같으면 갈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 가면 나는 죽어요. 못 가요.”라고 했을 것입니다. 다니엘은 다른 신에게 예배하면 사자굴에 던진다고 했는데도 하나님 앞에 세 번 예배했습니다. “믿습니다.”라고 한다고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변화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도 금신상에 절하면 풀무 불 속에 집어넣는다고 했지만 죽을 줄 알면서도 금신상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역사는 그럴 때 일어납니다. 여리고성을 돌면 무너진다고 하셨을 때도 “아멘 믿습니다.”라고 한다고 무너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단강이 갈라진다고 하셨을 때도 “아멘. 믿습니다.”라고 한다고 갈라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요단강으로 들어서야 했습니다.
 세상에 살며 큰 위기 앞에 설 때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죽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영원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십니다. 그러면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믿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럴 때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성문 앞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롯과 같은 반신반의의 믿음을 가지고 삽니다.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들으면 아멘 내가 그렇게 살겠습니다. 세상에 나가면 세상이 좋아서 세상과 섞여서 삽니다. 그러다 갈등이 생깁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그러다가 교회에 나와 교회에 와서 기도해 보고는 “아멘. 그렇게 살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또 돌아서면 ‘말씀대로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하나, 믿지 말아야 하나?’라고 하며 흔들립니다. 더 나아가 소돔성 사람들처럼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고 기적이 일어난다고 선포하면 “저 목사님은 현대인들에게 저렇게 이야기하지? 기적이 어디 있어. 그저 신앙생활을 종교생활로 고상하게 해야지. 통성기도를 하라고 하고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말도 안 되는 헛된 신앙을 불어넣고 있는 것은 아냐?”라고 하며 믿음이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의 믿음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교회에 다니는 성도님들 중에 진짜 믿음을 가지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사는 사람은 5% 미만입니다. 75%이상의 신앙인이 롯과 같이 반신반의하면서 평생을 흔들리다가 끝납니다. 나머지 20%는 정말 충격적이게도 교회에 와서 예배는 드리지만 하나님의 존재는 믿지 않습니다. 능력이나 기도를 믿지 않습니다. 영적인 세계를 믿지 않습니다. 교회에 와서 종교생활이나 교양생활 차원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반신반의하는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늘 흔들리는 인생을 살게 될 뿐입니다. 찬송가 중에 “이리저리로 흔들리는 내 모습 저 원수 조롱한다.”는 찬양이 있습니다. 이리저리로 흔들리고 늘 반신반의하는 자리에 머무르지 말고 아브라함이나 모세처럼 다니엘과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온전히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겠습니다.”라고 하며 결단하고 그 자리로 돌아설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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