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역사를 일으키는 교회 (살후 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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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설교날짜 2018.10.21
설교자 박동찬 목사
본문말씀 에베소서 5 : 8 - 14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1.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도 감사하며 사는 것
 2. 꿈꿀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꿈을 꾸며 사는 것
 3. 사랑할 수 없는 중에도 사랑하며 사는 것

 박 동찬 목사님
주일설교 2018년 10월 21일

 
■ 말씀 엡 5:8-14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떠나니라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세상을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나는 크리스천입니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산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에 다니는 삶을 삽니다.”라는 것 이상의 신비가 있고 숨은 속뜻이 있습니다.
 내가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것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나의 죄가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죄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 투성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나 겉으로는 상대방을 사랑하고 위하는 것 같이 합니다. 그러나 뒤로 돌아서서는 잘 안 된 것이 고소하고 잘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픕니다. 이런 것이 다 내가 죄인이라는 증거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많은 죄가 있습니다. 우리의 속생각이나 남을 비난하는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 볼 때 그 누구도 “나는 의인입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죄 가운데 머물러 있는 나를 구속하셨습니다. 나의 모든 죄 때문에 죽어야 했던 나를 대신해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내 죄를 다 씻어 정결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의인이 되었습니다. 참 놀라운 사실입니다. 내가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의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 내가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내 죄가 사해졌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죄 가운데 있을 때에는 사탄의 노예로 살아갔습니다. 사탄은 죄를 짓게 만들고 나는 사탄의 종이 되어 그것이 안 좋은 일인지 좋은 일인지 구분도 못하면서 죄와 정욕 가운데 빠져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남들보다 인생을 잘 살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보니 과거에 그렇게 살았던 내 모습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깨닫고 보니 ‘왜 그것을 내가 그렇게 즐거워했을까?’라는 후회가 됩니다. 많은 성도님과 이야기를 하며 “죄의 길 가운데서 돌아서야 합니다.”라고 하면 “이게 무슨 죄입니까? 나는 이렇게 즐겁고 사람들 다 그렇게 사는데.”라고 합니다. 그러던 사람이 하나님이 그 눈에서 비늘을 벗기시고 실체를 보게 하시면 “그렇게 살았던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한심스럽고 부끄럽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때 제가 왜 그렇게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는데 그렇게 산 이유는 사탄이 눈을 가리고 귀를 가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죄의 욕심들을 심어 주어 우리의 삶을 이끌고 엉망진창이 되게 만들어 결국은 멸망의 길로 떨어지게 합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님을 믿고 크리스천이 되고 보니 그런 삶에서 돌아서게 됩니다. 사탄의 노예로 살던 내가 이제는 사탄의 노예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씻어 줄 뿐만 아니라 나를 자녀 삼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노예와 하나님의 자녀는 엄청난 신분의 차이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도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과거에 세상적으로 살던 내가 교회에 출석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완전한 신분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잘 아는 선교사님 한 분이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입양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너는 내 아들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고아원이라는 곳에서 잠을 자다 어느 날 집이라는 가정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이것이 낯섭니다. 음식을 먹으라고 하면 지금 많이 먹어두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 하나라도 더 먹으려고 마구 먹어댑니다. 자신의 신분이 변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생활을 하다가도 언제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선교사님은 그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런 모습으로 비추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적으로 살아가고 죄와 벗하여 사탄의 노예로 살아가던 우리를 하나님이 건지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나 다 똑같죠?”라고 하며 여전히 삶의 모습도 변하지 않고 하나님을 만나기 전 삶으로 돌아가 사탄과 어울려 사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 될 때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이라고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제는 어둠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빛 가운데 살아가는 존재인데. 완전히 신분이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르고 삽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오늘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것이 세상 사람들과 어떤 점에서 다른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도 감사하며 사는 것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적인 조건이 좋으면 감사하지만, 조건이 나빠지면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조차도 감사할 수 있는 존재가 크리스천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시고 나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돌아볼 때 흠이 많고 연약하고 부족하고 실수투성이입니다. 그런데 그런 나를 부족하다고 하시지 않고 온 몸에다 오물을 묻히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든 오물을 닦아 내시고 오늘부터 “너는 내 아들이다.”, “너는 내 딸이다.”라고 하시며 우리들을 자녀 삼아 주셨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감사한 일입니까? 내가 더 이상 세상적으로 높아지지 않고 세상적으로 남들만큼 많은 것을 가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한 것입니다. 그것뿐입니까? 멸망의 길로 가는, 구원받지 못하는 운명에 처해 있는 우리의 생명을 살려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해 주셨는데 이것보다 더 귀한 선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살면서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만약 누가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만큼 돈을 주겠습니다. 그런데 딱 하루만 살고 죽어야 됩니다.”라고 하면 그 돈을 받을 사람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 무엇 합니까? 내일 내가 죽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아니요. 나는 그런 것 필요 없습니다. 그것보다는 내 생명이 더 중요합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한 생명이 온 천하보다 더 귀하다고 했습니다.

 “너희가 온 천하를 얻고도 한 생명을 잃으면 그것이 무슨 기쁨이 되겠느냐?”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명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살아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을 살다가 천국을 소망하고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셨습니다. 이것만큼 감사한 일은 없습니다. 가장 귀한 선물을 받고 보니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작은 것들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두렵거나 불편하거나 원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에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의 교리고 성경의 가르침으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실체요 팩트라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사실을 진심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어느 곳에 있든지 담대할 수 있습니다. 자신감이 넘치는 것입니다. 상황이 어떠하든지 노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무언가에 쫓기는 인생을 살지 않게 됩니다. 알 수 없는 넉넉함이 우리의 삶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진 재물이 없어도 남이 가진 건강이 있지 않아도 부럽지 않습니다. 나에게는 남이 갖지 못한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분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보다 감사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어느 곳에 있든지, 어떤 처지와 형편 가운데 있든지 감사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어떤 청년 하나가 저한테 상담을 하는데 자기가 예수님을 믿고 나니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 그런 감사함을 가지고 살다 보니 사람들의 눈에 다르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너 정말 많이 변했다.”, “너 정말 성숙해진 것 같아.”, “여유로워진 것 같아.”라고 하면서 “무슨 좋은 일 있니?”라고 묻는다는 것입니다. 달라진 것은 없는데 남들이 바라볼 때는 달라졌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여유도 있어 보이고 좀 더 성숙해져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무언가 좋은 일이 일어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슨 좋은 일이 있기에 너의 삶에 그렇게 기쁨이 있고 달라졌니?”라고 물은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달라졌습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서울대에서 공부를 잘 한 한 청년이 서울대 의대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서울대 병원 외과 전문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여기서 의사로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선교지로 가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이디오피아라고 하는 굉장히 못 살고 어려운 나라로 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훈련시키신 것처럼 그곳에서 많은 의사들을 제자로 양육하려는 좋은 뜻을 가지고 가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발의 통증을 비롯해 몸의 여러 곳에 불편함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나와 정밀검사를 받았더니 파킨슨병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 병은 온 몸이 굳어져 가는 것입니다. 의사가 몸이 굳으면 어떻게 수술을 하겠습니까? 점점 굳어가는 몸을 보며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이상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며 아침 산책을 하는데 소나기가 쏟아졌습니다. 비를 피하려고 나무가 우거진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무 잎사귀들이 얼마나 큰지 비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곳에 비를 피하며 서 있는데 갑자기 마음속에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비가 쏟아진다고 꼭 집에 가야 하는 것은 아니로구나! 이렇게 비를 피할 곳이 나무 밑에도 있고.’라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지금 몸이 이렇다고 해서 꼭 한국에 가야되는 것은 아니로구나! 하나님이 어느 곳에나 함께 하시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무가 우거진 곳이 있듯이 내 인생도 피할 길이 있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그 남편을 위해 열심히 기도를 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예수님의 품에 안긴 자기들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들을 안으시고 어디론가 가시는데 그들이 목적지를 정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인도해 가셨습니다. 부부는 그저 예수님의 품에 안겨 갈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발을 보니 발에서 피가 나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피투성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안고 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아,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구나! 우리는 그저 예수님의 품에 안겨 있을 뿐이고 예수님이 우리의 인생을 이끌어 가시는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떨 때는 좀 몸이 심하게 굳어 올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두려움이 더 몰려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 몸이 더 굳어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데 하나님은 없는 것들. 세상의 천한 것들을 들어서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도구로 쓰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러고 나니 점점 몸이 더 약해져 가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감사할 수 있고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내가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내가 강하면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했다는 말을 할 수밖에는 없는데, 약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니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날 때가 되었구나!’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난 주간에 인도차이나반도 5개국의 선교사 대회를 인도하고 왔습니다. 갔더니 530여 명의 선교사님들이 가득히 모였습니다. 그분들과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다 보니 별별 일들이 다 있었습니다. 추방당한 일을 비롯해 대단한 사연이 많았습니다. 저는 “그런 일들을 어떻게 다 견디셨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은혜로 다 지나올 수 있었다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고백은 “내가 이렇게 헌신했으면 잘 되게 해주셔야 하는데 많은 고난을 겪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라는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 “때에 따라 알맞은 곳으로 옮기게 하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라고 하며 음식을 참 맛있게도 드셨습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렇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감사하는 것은 세상적인 조건 때문이 아니지. 하나님 때문이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우리가 어디에 가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는 매일 매 순간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감사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제대로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둘째, 꿈꿀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꿈을 꾸며 사는 것

 꿈을 꿀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꿈을 꾸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길입니다.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내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힘든 상황이 몰려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인도하시니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문제가 없는 가정은 없습니다. 다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곳에서 한 선교사님의 부인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다 순간 덜컹거렸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갑자기 얼굴이 사색이 되더니 호흡이 곤란해지며 견딜 수 없는 두려움을 겪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함께 식사를 하며 “무슨 일이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비롯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모든 이야기를 듣고는 제가 답을 줄 수 있었겠습니까? 없었습니다. 단지 그분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답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세요. 그래봐야 죽기밖에 더하겠습니까? 살아도 하나님과 함께 하고 죽어서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내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하나님이 정답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세요.”라고 이야기할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별 이야기가 아닌, 다 아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성령님이 기름 부으셔서, 그 분의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그리고 후에 장문의 문자를 보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위로받고 힘을 얻었습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기에 어떤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하나님이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꿈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그 하나님이 오늘 연약한 가운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꿈을 주셔서 ‘길이 저기로구나!’라는 깨달음을 주시며 길을 보게 하십니다. 절망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빛을 보여 주시면서 희망을 보게 하시고 그 희망의 빛을 향해 나아가게 하십니다.
 성경을 보아도 감사한 것은 하나님이 늘 사람들에게 꿈을 주셨다는 것입니다.시시 꿈을 잃어가고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꿈을 주시면서 놀라운 일을 만들어 가시는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75세까지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너에게 자녀를 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그 나이에 자식을 준다고 하시니 “내가 나이가 75세인데 무슨 자녀를 얻겠습니까?”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꿈을 주셨고 그 꿈을 100세에 이루어주셨습니다. 더 절망적인, 정말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꿈을 이루어주시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수많은 사람이 절망 가운데 있을 때, 아브라함의 꿈을 생각하면서 꿈을 꾸게 됩니다. 요셉도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릅니다. 형님들이 자기를 섬기는 꿈이었습니다. 형들이 들을 때 헛웃음을 칠 수밖에 없는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꿈 때문에 결국 그 위기를 다 이기고 마지막 순간에는 그 꿈이 현실이 되는 것을 성경은 증거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꿈을 꿀 수 없는 사람들에게 꿈을 허락해 주십니다. 
 저도 어려움 당할 때가 있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우왕좌왕했습니다. 그때마다 엎드려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꿈을 주셨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 내가 이 난관을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내 힘으로는 안 됩니다.”라고 할 때 하나님이 큰 산을 보여 주시면서 “네가 이 산을 넘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못 믿겠습니다. 저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네가 어떻게 그 산을 넘어갈 수 있는가 하면 이 길과 저 길로 넘어가면 그 산을 넘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가르쳐 주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손에 지구가 들려 있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보이느냐? 지구가 내 손에 들려 있다.”고 하시며 위대하신 하나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너의 문제가 아무리 커도 지구가 내 손 안에 있는데.” 라고 하시며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시며 “네가 나를 신뢰하느냐?”라고 하시며 믿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멘. 하나님. 내가 그것을 믿음으로 받습니다.”라고 하며 보았더니 큰 산으로 보였던 산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지구가 손바닥만 한데. ‘아, 하나님이 역사하시는구나!’라는 믿음을 갖게 되니 어떤 상황 속에서도 두렵지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목사님은 목회 힘들지 않으세요?”라고 하면 “안 힘들어요.”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저 분이 목회를 대충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 힘들지 않겠습니까?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힘들지 않다고 답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힘들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실수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다 보충해 주시니 힘들 이유가 없습니다. 힘든 일이 없겠습니까?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동행하시고 하나님이 풀어주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일에 너무 매이지 않습니다.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맡깁니다. 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 때도 있습니다. 왜 어려운 일이 없겠습니까? 어렵고 힘든 일이 올 때마다 푸는 저만의 방법은 있습니다. “에이. 몰라요. 하나님이 알아서 하세요.”라고 하며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그렇게 풀어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몰라요. 그러나 하나님이 이 문제 붙들고 계시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잘 되든 안 되든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믿습니다.”라고 하며 하나님께 모든 문제를 위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희망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망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 역사하십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세상이 무너져도 기독교인들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뿐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포기할 수 없습니다. 자녀를 포기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세상이 망해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절망 가운데 빠져있을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국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선을 이루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볼 때 오늘 우리는 믿음으로 세상을 넉넉하게 이깁니다.
 꿈을 잃어버리고 길을 잃어버리고 방향을 잃어버리고 어디로 갈지 몰라 방황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저 잘 모르겠어요.”라고 하며 엎드리면 하나님이 꿈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 꿈을 향해 도전할 수 있는 힘과 지혜와 용기를 더해 주실 것입니다.

 셋째, 사랑할 수 없는 중에도 사랑하며 사는 것

 하나님은 사랑할 수 없는 중에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오래 전 아주 어린 시절에 신앙생활을 하며 가졌던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내 죄가 다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 바로 천국으로 데려가시지 왜 남겨두시는가에 대한 궁금증이었습니다. 이 세상을 살다 보니 세례 교인이 되고 교회도 열심히 다니지만 죄를 짓고 또 넘어지고 또 넘어집니다. 이렇게 살 것 같으면 차라리 처음에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고 천국에 가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세례 받는 즉시 다 쓰러져 죽게 만드시지 않고 살아가게 하십니다. “도대체 하나님. 천국이 그렇게 좋은 곳이라 하는데 왜 이 땅을 살아가도록 하시면서 죄와 싸우게 만드십니까?” 하는 것이 궁금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는 감당해야 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소외된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사명을 저희에게 감당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흘려보내는 일을 너희들이 감당해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에게로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전해져서 세상을 향해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흘러가도록 만드는 사명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그 사명을 다 감당하기 전까지는 데려가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명이 있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할 때 사랑에 대해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 사람에게 좋은 감정이 있으면 그것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랑이 감정이 아니라 의지라고 합니다. 온전한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라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장이라고 하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래 참는 것이 좋습니까? 아닙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사랑은 의지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라고 견디고 인내하고 믿어주고” 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이 ‘사랑이 감정이 아니라 의지로구나! 그렇다면 말이 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예수님께서 “네 원수라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사랑이 감정이면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랑이라는 것이 감정이 아니고 의지라면 우리는 원수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를 악물고 사랑합니다. 의지이기 때문에 참아주고 들어주고 견뎌내는 것입니다. 원수를 참아내고 그를 사랑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의 모습입니다.
 톨스토이 단편 소설 가운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천사가 한 생명을 거두러 왔는데 갓 난 아이의 부모였습니다. 이 아이를 누가 키웁니까? 그런데 결론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그 아이가 잘 자라더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아이가 부모의 도움 없이 살아서 자랄 수 있었을까?’를 보니 사람들의 사랑으로, 돕는 손길로 그 아이가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 사람은 사랑으로 사는 것이로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 이 책의 내용입니다.
 세상을 돌아보면 불쌍한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을 보면 ‘과연 저런 처지에 있는 사람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면 죽지 않고 다 살아갑니다. 누군가의 도움에 의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는 결국 사랑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하시고 사랑으로 돕는 손길들이 있게 만드셨습니다.
 물은 흘러가야지 고여 있으면 썩습니다. 그리고 악취가 납니다. 그래서 물은 흘러야 됩니다. 그러려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야 됩니다. 높은 곳이 있고 낮은 곳이 있어야 물은 흐릅니다.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낭비인 것 같아도 그렇게 물이 흘러가는 과정을 통해 물은 정화가 됩니다. 맑은 물이 되고 깨끗한 물이 됩니다.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물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목사님,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왜 이렇게 세상을 불공평하게 만드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니, 뭐가 불공평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높은 자리에서 부유하게 살고 어떤 사람은 낮은 자리에서 가난하게 사니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가만히 보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못됐고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착한데 그렇게 불공평하게 만들어 놓으시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 질문에 대해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을 해야 되나?’라는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습니다. 물에 대한 이야기를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면서 자연을 정화시킵니다. 하나님은 우리 믿는 사람들의 사랑이 어디론가 낮은 곳으로 흘러가게 만드신 것이다. 그렇게 흘러야 우리가 사는 인간 세상이 정말 사람 사는 세상 같아 “그래도 살만한 세상입니다.”, “그래도 감사한 세상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것은 사랑이 흐를 때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 사건은 감정적이거나 이기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의지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이기적인 사랑은 물이 고여 있는 것처럼 사랑이 내 안에 고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깝다는 마음을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게 만드는 것이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나의 사랑의 물을 흘려보내는데 내 생명이 다 소진될 때까지 흘려보낸 사랑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숨을 쉬고 감사한 것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나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내 안에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이타적인 사랑을 가지고 흘려보내야 합니다. 그러고 보면 원수를 볼 때도 불쌍한 마음이 생깁니다.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볼 때 아무리 잘 살아도 불쌍해 보입니다. ‘저분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흘러가야하는데.’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많은 것을 소유한다고 해서 기쁜 것이 아닙니다. 그 기쁨은 잠깐입니다. 영원한 기쁨을 소유하는 길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길뿐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있게 되면 내 안에 기쁨이 샘솟듯이 넘쳐납니다.
 내가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세상 속에 흘려보내는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소망이 되고 빛이 되고 소망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이라고 하면 세상 사람들은 반대합니다. “무슨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입니까?”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우리가 흘려보낼 때 예수님으로 인해 세상의 변화 역사가 일어났듯이 세상은 변화될 것입니다. 어떤 세상으로 변화될까요? 어둠 가운데 있던 사람이 빛을 보게 되고 절망 가운데 있던 사람이 소망을 보게 됩니다. 슬픔 가운데 탄식하던 사람이 새 노래를 부르고 감사하게 됩니다. 그렇게 삶이 달라집니다.
 지금도 세상을 볼 때 절망과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그들에게 우리의 십자가의 사랑. 이타적인 사랑으로 말미암아 꿈을 꾸게 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탄식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절망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소망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이 일어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일을 이룰 사람이 누구입니까? 정치인입니까? 경제인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우리 크리스천들에 의해 사랑이 세상으로 흘러가게 되고 그 흘러간 사랑으로 그 땅 가운데 수많은 사람에게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내가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그저 세상적인 사람이 교회에 다닌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내가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감사할 수 없는 중에도 감사하고 꿈꿀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꿈을 꾸는 것 그리고 사랑할 수 없는 중에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생각을 꼭 머릿속에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삶을 살아가다 힘든 날을 만날 때 ‘그래 내가 크리스천인데. 목사님께 이런 설교를 들었지? 꿈을 꿀 수 없는 중에도 꿈을 꿀 수 있는 것이고 감사할 수 없는 중에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고 사랑할 수 없는 중에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라고.’라는 생각을 하며 이것이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으로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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