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역사를 일으키는 교회 (살후 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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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
설교날짜 2018.10.28
설교자 박동찬 목사
본문말씀 창세기 1:1-5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
1. 우리의 삶은 공허하고 혼돈하다
 2. 빛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 말씀 창 1:1-5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요즈음에는 책을 안 읽는 시대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젊은이들은 주로 핸드폰에서 자료를 검색라고 궁금한 것은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다 알 수 있습니다. 책을 읽거나 뉴스를 시청하거나 신문을 보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서 출판사마다 ‘책을 발간하기는 해야 하는데 어떤 책을 발간해야 되는가?’라는 고민을 하다 조사를 해 보니 자기 개발에 관한 책들은 그나마 팔렸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오랫동안 팔린 베스트셀러로 1위를 한 번도 놓치지 않은 책은 성경입니다. 성경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이 읽었고 여전히 오늘 날도 베스트셀러입니다. 젊은이들이 “요즈음에 누가 성경을 봅니까? 가치관을 비롯한 모든 것이 지금 이 시대에는 맞지 않습니다. 시대에 뒤떨어진 내용입니다.”라고 합니다. 과거에도 그런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에는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이 깨어나면서 하나님께 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찬란한 인간의 문명을 꽃피우기도 했습니다. 그 시대에 프랑스의 볼테르라고 하는 시인이며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시대 이후 100년 안에 성경은 없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더 이상 성경의 가치가 없어지고 성경을 읽는 사람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성경은 사라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볼테르가 죽고 나서 50년이 지나지 않아 제네바 성서 공회에서 볼테르의 집을 사 성경을 인쇄하는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성경은 볼테르의 집에서 아주 불티나게 인쇄되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여전히 성경은 읽을 가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늘 지키고 있습니다. “성경이 왜 그렇게 많이 팔립니까?”라고 물을 때 대답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읽어 보면 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늘 우리와 맞지 않는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읽어 보면 왜 그렇게 잘 팔리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저를 비롯한 목회자들은 성경을 많이 읽기도 하고 묵상하기도 하고 연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읽고 연구하다 보면 결론이 나옵니다. 그것은 성경은 진리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또 읽어 보면 공통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인생을 살면서 풀리지 않던 수많은 인생의 문제가 풀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매우 많은 것을 만들어냈습니다. 지금 이 시대를 가리켜 4차 산업 혁명의 시대라고 합니다. 삶의 패턴이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로봇이 사람이 하는 일을 하고 하늘을 나는 자동차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미 개발이 되어 택시가 하늘을 날며 사람을 운반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이제는 유토피아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합니다. 살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지고 모든 인류는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듭니까? 정말 행복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신기하게도 안간 문명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3차 산업 혁명이나 4차 산업 혁명 같은 이야기가 나오면 나올수록 우리는 공허감과 소외감을 느낍니다. 점차 ‘나는 누구이고 여기는 어디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며 내가 살아온 삶의 패턴과는 전혀 다른 패턴으로 살면서 인간은 점점 기계에 밀려 소외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기계 문명이 발전하고 있는데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고 물으면 “이렇게 인류가 발전하고 있어서 행복합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돈을 많이 가진 사람도 ‘내가 돈을 많이 가졌으니 남들보다 내가 행복한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진심으로 남과 비교하지 않고서도 당신은 행복합니까?”라고 질문하면 “행복합니다.”라고 대답하지 못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합니까? “남보다 높은 자리에 있으니 나는 행복하다.”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행복의 기준이 아닙니다. 높은 자리나 낮은 자리가 행복을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일을 하면서 행복을 느낍니까?”라고 물으면 “예스.”라고 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많은 인기를 누리는 연예인들조차도 언제 그 자리에서 떨쳐나게 될지 몰라 늘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최고의 스타라고 하는 많은 연예인이 남몰래 앓고 있는 질병이 우울증 아니면 공황장애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너무나도 공허하고 곤고한 마음으로 성경을 펼쳐 들었는데, 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말씀이 순간 비수와 같이 날아와 양심을 찌르면서 ‘이것이 내 삶의 길이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 앞에 고꾸라지고 손을 들고 나아가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내 삶을 주님께 드립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빛이 되는 진리를 발견하고 달라지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5절 말씀은 세상의 기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성경에 귀한 말씀이 많지만 우리 인생의 해답을 담고 있는 말씀이 창세기 1장의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말씀을 읽고 또 읽으면 이 말씀 속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깨닫게 되는지 모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 중요한 말씀을 앞에 두셨습니다. 뒤에 놔두었으면 앞에 부분만 읽다 포기하니 못 읽을 텐데 이 말씀을 제일 앞에 두었기 때문에 신년이 되면 ‘올해는 성경을 읽어야지.’라는 각오를 다지면서 늘 읽게 됩니다. 하나님이 중요한 말씀이니 제일 앞에 두어 작심 3일이라도 꼭 읽고 깨달으라는 마음으로 제일 앞에 두신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은 정말 우리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많이 듣고 읽은 부분입니다. 그런데도 읽을 때마다 ‘진리가 이 안에 있구나!’, ‘해답이 이 안에 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왜 하나님을 의지해야 되고 왜 하나님을 믿어야 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우리의 삶은 공허하고 혼돈하다

 우리의 삶은 공허하고 혼돈한 삶입니다. 우리 삶이 얼마나 무질서하고 혼돈 가운데 있는지 내 내면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겉은 깨끗하고 멀쩡한 것 같아도 속은 다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 이 시대 사람들의 마음의 모습입니다.
 과학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고층 빌딩이 생기고 신도시가 만들어졌습니다. 신도시가 계획 속에서 잘 설계가 되어 반듯반듯하게 도시가 만들어집니다. 길도 널찍하고 곧게 만들어집니다. 돌아가는 길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반듯하고 잘 설계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인생도 잘 설계된 것 같고 신도시로 이사 가서 높은 빌딩에 살면 내 인생이 높아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무질서합니다. ‘내가 정말 노력해서 내 인생을 반듯하게 만들어야 되겠다.’라고 생각하고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집, 좋은 차에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어 보이고 또 능력이 있어서 미래를 잘 설계하며 계획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아, 저 분은 반듯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로구나!’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 볼 때 ‘반듯하게 설계가 되어 살아가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혼돈과 무질서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는 실상을 들여다보아야 되는데 실상을 못보고 항상 사람의 겉모습인 외모나 사는 모습만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잘 사는 사람일지라도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 바쁘게 살고 있는지 방향도 없이 달리는 모습이 보입니다. “남들이 달리니까 나도 달린다.”라고 하며 달립니다. 알고 달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달리고 있는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달리는 것입니다. 달리지 않으면 도태되는 것 같습니다. “나만 달리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뒤처지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저 사람들이 뛰면 나도 뛰어야죠. 저 사람들이 집을 세우면 나도 세워야죠.”라고 하며 덩달아 달립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그래서 “왜 그런 일을 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했을 때 정확히 대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가면 레밍이라는 동물이 있습니다. 레밍은 쥐과로 설치류라고 하기도 합니다. 쥐와 토끼의 중간쯤 됩니다. 그런데 이 동물의 특징은 한 마리가 달리면 다 달린다는 것입니다. 바스락 소리에 한 마리가 놀라 달리기 시작하면 떼를 지어 살던 수많은 레밍이 달립니다. 그러면 자기가 먼저 시작해 달렸으면서 옆 레밍들이 뛰면 ‘얘는 왜 뛰는 거야?’라는 생각으로 또 뜁니다. 그렇게 뛰고 또 뛰고 경주가 되어버립니다. 그들이 달린 길 끝에는 절벽이 있습니다. 그 영상을 보고 매우 놀란 것이 깎아지른 듯 절벽에 도달해서도 밑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 다른 레밍이 뛰어 내리면 따라서 뛰어내린다는 것입니다.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절벽 끝 바다에 수도 없이 많은 레밍이 빠져 죽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어리석다.’입니다. ‘어떻게 저렇게 자기 앞을 생각도 안 하고 남이 뛰니 같이 뛰지? 그러다가도 절벽이 있으면 멈춰서야 되는데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자기가 죽는다는 것도 모르고 뛰어들다니 참 어리석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 모습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생각하고 가치 있는 일을 위해 달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남들이 하니 합니다. 남들이 대학을 가니 대학에 가고 남들이 좋은데 취직을 한다니 합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과 레밍의 모습이 뭐가 그렇게 다릅니까? 심리학적으로는 이렇게 개인의 판단이나 생각보다 궁중 심리에 의해 남을 따라하는 것을 레밍 효과라고 합니다. 레밍과 같은 어리석은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실상을 들여다보니 행복과 만족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무엇이 진짜 행복인지 알고 사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 좋은 집을 가지고 좋은 차를 타면 행복할 줄로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돈이 많고 시간이 많으면 행복할 것 같습니까? 오히려 그것으로 죄를 짓습니다. 세상적으로 타락하는 것입니다. 보통 권력을 가지면 돈과 함이 따르게 되니 그렇게 타락하다가 “그거 죄입니다.”라고 하면 “이게 죄야? 그럼 죄 아닌 걸로 만들면 되지.”라고 하고는 법을 바꾸어 버립니다. 죄를 죄가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과거에 죄였던 것이 지금은 죄가 아닌 것으로 변한 것이 꽤 많아졌습니다.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이 간통입니다. 간통은 더 이상 성립이 안 됩니다. 세상은 점점 더 발전하는 것처럼 보여도 어떻게 보면 점점 무질서 속으로 빠져 듭니다.
 젊은이들은 어떻습니까? 얼마 전 저녁에 라페스타에 일이 있어 나가보았습니다. 매우 휘황찬란했습니다. 밤11시가 되고 12시가 가까워 오니 젊은이들이 술을 먹고 남자건 여자건 할 것 없이 길바닥에 누웠습니다. 친구들이 와 일어나라고 팔다리를 잡아끌어도 일어나지 못하고  인사불성이 속옷이 다 보이는데도 부끄러운지 몰랐습니다. 이런 젊은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홍대나 신촌가에서 새벽에 청소를 하시는 분들이 청소를 하려고 보면 화려해 보이는 거리의 구석구석에 사람들이 토해 놓은 오물이 즐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전보다 삶이 좋아지지 않았습니까? 삶의 질이 좋아지고 모든 것이 다 편해졌습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만취가 되어 창피한 것도 모르고 거리를 깨끗이 청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물을 토해내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속에서 나오는 것을 바라볼 때 우리 속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면의 질서가 다 무너지는 것이 젊은이들만의 모습일까요? 아닙니다.
 이제 결혼해서 꿈을 가지고 사는 많은 3, 40대 부부의 모습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결혼을 하면서 ‘이 사람과 행복한 가정을 꾸려야 되겠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런데 뜻대로 일이 되지 않습니다. 처음에 한두 번 실패할 때는 ‘세상이 다 그런 거지. 또 도전하지 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해도 해도 안 됩니다. 갈수록 빚은 늘어가고 자신감은 떨어지고 아이들은 점점 커 가고 너무 답답하니 밤이 되면 포장마차에 가 술잔을 기울이면서 소리 소리를 지릅니다. 너무 속이 답답하고 외로워서입니다. 그 모습을 볼 때 애처롭습니다. ‘참 사는 게 힘들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처럼 내면의 질서들이 다 무너지는 모습을 볼 때 겉은 화려하고 좋아보여도 속은 여전히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한 장로님과 대화를 했습니다. 여자 장로님으로 80세가 되신 분인데 20대 초반에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병원에 누워있는데 의사가 더 이상 소망이 없으니 포기 각서를 쓰라고 했습니다. 피가 3분의 1밖에 안 남았다는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장로님은 침대에 누워 “하나님, 나 이제 죽어요.”라고 하는데 갑자기 환상 가운데 병원 문이 열리더니 예수님이 들어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하시나 보았더니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반듯이 누워있는 장로님 배를 여시고 수술을 하셨습니다. 만져 보고 싶은데 손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정도로 약해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수술을 한참 하시며 이것도 끄집어내시는 것 같고 저것도 끄집어내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새벽 종소리가 울렸습니다. 그 당시가 60년 전이니 새벽에는 교회에서 종을 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온데 간 데 없이 사라지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아침에 엄청 난 양의 하혈을 하고 깨끗이 나았습니다. 살아난 것입니다. 그 간증을 가지고 하나님께 “이제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고 자기의 삶을 돌아보니 어려서부터 교회에는 다녔지만 여전히 혼돈과 어두움 속에 사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흑암 속에 있으니 어디로 가야 하는지 길이 보이겠습니까? 보이지 않았습니다. 장로님은 “하나님. 내 인생은 흑암입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보여주세요.”라고 기도를 하며 창세기 말씀을 펼치고 읽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장로님은 “맞아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내 인생이 흑암의 깊음 위에 있습니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3절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라는 말씀을 읽는데 갑자기 마음속에 밝은 빛이 비쳤습니다. 어둠이 물러가고 밝은 빛이 들어오는데 삶에 희망이 넘치기 시작하고 “예수님과 함께 평생을 주님께 드리며 살겠습니다.”라고 결단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간증을 들으며 “맞아요. 장로님. 우리 인생이 다 그런 거예요.”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이 다 그렇습니다. 세상 그 누구에게도 빛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빛은 세상의 헛된, 화려해 보이는 빛이 아닙니다. 생명력을 가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창조의 빛인 진리의 빛을 따라서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는 빛의 자녀다.”라고 합니다.
 우리의 내면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집은 좋아 보이고 삶은 질서정연하게 잘 되어 있는 것 같지만 내면에 빛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빛이 있으라.”라고 하셨습니다. 그 빛을 받게 될 때 우리의 내면은 고쳐지고 새로워지는,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빛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의 삶을 누리는, 복된 삶을 살아야합니다.

 둘째, 빛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빛을 창조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빛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시력이 좋아 “목사님, 저는 시력이 2.0입니다.”라고 해도 빛이 없으면 아무 것도 보지 못합니다. 눈이 있으나 빛이 없으면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빛이 없으면 실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어둠 속에 있어 보았습니까? 어느 나라에 가 동굴 속에 깊이 들어가니 빛이 들어오지를 못했습니다. 그곳에서 등불을 끄니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 눈 앞에서 손을 들었다 놓았다 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눈이 있는데도 보지를 못하는 것을 경험하며 ‘빛이 없으면 아무리 내가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눈이 있지만 하나님의 빛이 조명되지 않으면 실상을 보지 못합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흑암 중에 잘난 척을 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니 내 의견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내 말이 맞고 상대방의 생각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아무리 그렇게 말씀을 하셔도 나는 내 생각대로 살아갈 것입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빛이 비치지 않으니 내 마음대로 상상하고 내 마음대로 생각합니다. 나는 옳다고 스스로 위안 삼아서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에게 창조의 빛이 비치면 내 모습이 보입니다. 빛은 여러 가지 역할을 합니다. 중요한 몇 가지는 첫째,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두움 속에서 갈 길을 알지 못하고 “내가 옳다.”고 하고는 자기의 소견대로 살아갑니다. 성경에도 보면 자기의 소견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목사님이 뭐라고 하시든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합니다. 내가 어두움 가운데 있으니 자기가 옳은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밝은 빛이 비취면 ‘내 모습이 이런 모습이었나?’,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이런 옷이었나?’, ‘내 지금 생각이나 표정이나 모든 것이 이랬나?’라는 생각이 들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하니 부끄러워지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삶 속에서 만족하다고 살았던 과거를 돌아볼 때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빛이 비춰지니 회개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 내가 정말 이런 모습인 줄 몰랐습니다. 이제야 알고 회개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라고 회개하고 돌아서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빛이 비치지 않아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백날 천 날 이야기를 해도 이해를 못합니다. 빛 가운데 본 사람이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틀린 길입니다. 돌아서서 와야 됩니다.”라고 해도 듣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도할 때 제일 먼저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 저분들이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듣지 않을 것입니다. 틀렸다고 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자기의 소견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간구 하옵나니 저들에게 빛을 비춰 주시옵소서. 생명의 빛인 진리의 빛을 비춰 주셔서 눈이 열려지게 하시고 밝음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자기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으면 돌아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는 다니지만 여전히 마음 가운데 진리의 빛이 비치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진리의 빛과 생명의 빛이 비춰지면 자기의 삶에서 돌아서게 되고 생명의 길, 구원의 길, 진리의 길을 걷는 복된 자가 됩니다.
 두 번째 빛의 역할은 따뜻함을 준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는 빛의 자녀다.”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빛에 대해 잘 알아야 됩니다. 과학문명이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그래서 온풍기가 만들어지고 손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보온 시설들이 아무리 잘 갖춰진다 할지라도 이상한 것은 ‘그래서 우리 인생이 따뜻한가?’ 하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런 것을 만든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인생은 여전히 춥습니다. 여전히 차갑습니다. 여전히 냉기가 돕니다. 인간관계도 믿었던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하니 몸에 한기가 돕니다. 따뜻한 집에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따듯한 집에 산다고 내 인생이 따뜻한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따뜻한 이불을 덮고 잘 수는 있지만, 따뜻한 이불을 덮고 자도 여전히 내 마음이 추운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에게는 우리 안의 추운 냉기를 몰아내고 따뜻한 우리 마음을 데워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빛이 우리 안에 비춰지게 될 때 우리는 따뜻할 수 있습니다.
 겨울에는 산에 가든지 다른 어느 곳을 가도 눈이고 얼음입니다. 맨발로 방바닥을 디디면 발바닥이 시리고 춥습니다. 그 얼어붙었던 대지를 녹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노력입니까?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녹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봄철이 되면 나라 전체를 꽁꽁 얼게 만들었던 얼음들이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녹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언 땅이 녹은 곳에서 나무가 올라오기 시작하고 잎사귀가 새롭게 열립니다.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힙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햇볕의 따뜻함 때문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러면 아무리 복잡한 문제라도 금방 답이 나옵니다.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사람들을 대할 때 누구에게든지 따뜻함으로 대하셨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에게 사람들은 기세등등해서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 여인을 돌로 쳐서 죽여야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여인과 군중들 사이에서 “그렇게 하든지 너희가 알아서 해라. 이 여인이 죄를 지었으니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수많은 군중을 보며 담대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모두 죄가 있으니 한 사람, 한 사람 돌을 내려놓고 갔습니다. 이 여인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인을 만났습니다. 이제 여인과 예수님은 일대 일로 독대를 한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여인이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성난 군중들도 한 마디 못하게 하고 쫓아내셨는데 나에게는 어떤 엄벌을 내리실까? 뭐라고 하실까?’라는 생각으로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인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새 인생을 살아라. 과거도 중요하지만 현재와 미래가 더 중요하다. 너의 현재와 미래를 정말 밝게 아름답게 만들어가라.”

라고 하시며 기회를 주셨습니다. 따뜻함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이 율법을 가지고 “여인아, 너는 살 자격이 없어. 천국에도 못가. 구원 받지 못할 거야. 너 같은 사람 때문에 나라가 안 돼.”라고 하셨다면 돌에 맞아 죽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보면 예수님에 대해 느껴지는 것이 있습니다. 요한복음과 마태복음, 마가복음 등을 통해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 예수님은 참 따뜻한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을 예리하게 통찰하셨지만 마음은 따뜻했습니다. 자신을 배신한 베드로에게도 찾아가셔서 손수 물고기로 요리를 만들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볼 때 ‘우리의 삶은 옳은가? 그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예수님의 따뜻함이 있는가?’

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성경은 “너희는 빛의 자녀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빛이시고 빛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빛의 자녀가 맞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빛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너희는 빛의 자녀이기 때문에 빛의 자녀답게 살아라.”

라고 합니다. 빛은 어두움을 밝혀서 실상을 보게 할 뿐만 아니라 따뜻합니다. 우리에게 생명력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넘어진 사람들의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아 절망 가운데 있던 사람이 희망의 꽃을 피웁니다.
 빛의 자녀인 우리는 가정에서 따뜻해져야 합니다. 세상에 나가 그리고 친구들 사이에서 따뜻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이고 사명입니다. 요즈음에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헬 조선’을 비롯해 여러 가지 좋지 않은 단어들을 사용해 우리가 사는 현실을 묘사합니다. 아닙니다. ‘헬 조선’이 변하여 천국이 될 것입니다. 정치가 바뀌고 경제가 달라진다고 해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빛의 자녀인 우리들로 인해 변화됩니다. 교회에 희망이 있는 이유는 교회에 다니는 우리가 빛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모습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가면 모든 사람이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갑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은 빛이시라”,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더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신 이유는 우리들을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빛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 빛이 필요합니다.”라고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 보니 빛이 있었습니다. 태어나 보니 공기가 있었고 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환경을 미리 만들어 놓으시고 그 안에서 살게 하신 분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선재적 은총이라고 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나 안 다니는 사람이나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하나님은 없다고 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면서도 하나님의 도움 없이 내 힘으로 힘껏 살아왔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하나님의 도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공기와 빛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다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믿지 않는다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 사람은 왜 그럴까요? 어두움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참 빛 되신 하나님의 사랑의 빛이 비쳐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할 때 빛 되신 예수님이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시면 각박한 세상 속에서 따뜻할 수 있습니다. 길을 잃고 혼돈과 공허 속에 살던 우리가 진리의 길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생명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며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잘 믿어 정말 이 세상을 힘차게 살아가고 죽은 이후에 영원한 구원의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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