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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진정 감사해야 하는 이유  
 
진정 감사해야 하는 이유
설교날짜 2018.11.4
설교자 박동찬 목사
본문말씀 시편 118 : 1 - 4
 

 

 

진정 감사해야 하는 이유
-추수 감사주일-
    
    
■ 말씀 시118 1-4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제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이제 아론의 집은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이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추수 감사 주일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청교도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1620년 영국의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 메이플라워라고 하는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그때 그 배에 탑승했던 인원이 102명입니다. 미국에 가면 1930년대에 대공황이 있었을 때에 지어진 빌딩이 있는데 그 빌딩이 바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입니다. 이 빌딩은 102층으로 신앙의 선조인 102명의 청교도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 땅에 이주한 것을 기념해서 지어졌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근본이 기독교 신앙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항해 도중에 한 사람이 죽고 배 안에서 한 명의 생명이 탄생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도착을 할 때 102명이 내리게 되고 도착한 날짜가 11월 16일입니다. 처음에는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버지니아 쪽으로 가기를 원했지만 조류와 풍랑으로 인해 북쪽 매사추세츠라고 하는 곳에 도착을 하게 됩니다. 항해를 시작한지 63일 만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잘 사는 나라니 미국에 가서 좋겠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당시 미국은 아무 것도 없는 척박하고 황량한 광야였습니다. 그래서 영국에서 무서운 죄를 지은 죄인들을 유배 보냈습니다. 살아남기 힘들 정도의 험한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국의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 좋은 환경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미국 땅으로 갔습니다. 11월 16일의 북쪽 매사추세츠는 한국보다 더 춥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아침 저녁으로 날씨가 차지만, 매사추세츠는 더 찹니다. 게다가 강풍이 불고 또 잘 먹지 못해서 영양실조에 걸렸습니다. 여러 가지 환경은 너무나도 악조건 속에 있었고 집도 없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버텼을까요?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조건을 견디며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추위는 점점 더 심해졌고 1월과 2월이 갈 때는 얼음이 얼 정도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루에 두세 명씩 죽어갔습니다. 봄철이 되었을 때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50여 명이었습니다. 먹을 식량이 없으니 사냥에 의존을 해야 되는데 겨울철에 사냥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영국에서 온 그들이 그런 경험을 해 본적도 없었습니다. 사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봄이 되어 땅이 녹게 되자 가져왔던 곡식을 심고 배고픔을 참고 견디며 미국에 도착한지 1년이 지난 가을에 첫 수확물을 거두었습니다. 그때 얼마나 큰 감격이 있었을까요? 그들은 거두어들인 농작물 중 가장 좋은 것을 골라 제단에 올려놓으며 하나님 앞에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추수감사주일의 기원입니다.
 청교도들의 삶의 모습을 가만히 생각해 볼 때 우리가 회개하게 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면서 엎드려 기도하면 하나님이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실 것이라는, 좋은 환경을 원하기 때문에 내가 소원하는 것을 들어주실 것이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좋은 환경을 버리고 척박한 땅을 향해, 신앙의 자유 하나를 위해 이주해 왔습니다. 또 하나는 어려운 역경의 순간을 지나며 많은 형제자매가 목숨을 잃어갔지만 그럼에 불구하고 감사를 잊지 않았고, 첫 열매인 수확물을 얻을 수 있었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농사를 지어본 사람들은 농사라고 하는 것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아무리 노력을 한다 해도 햇빛이 비치지 않고 빗물이 내리지 않으면 죽게 됩니다. 그러니 곡식을 자라게 하시고 열매를 거두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압니다.
 청교도들은 첫 수확물을 거두고 보니 매우 감격스러웠습니다. 또 그들을 살게 하시고 버텨내게 하시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참 컸습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이 시편 118편 1절에서 4절 말씀에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라고 했습니다.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표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감사하라는 말속에 있습니다. 감사하라는 말은 사실 우리가 원어적으로 해석을 해 보면 찬양에 더 가깝습니다. 찬양과 감사에 연관관계가 있는데 보다 더 적극적인 의미의 감사가 찬양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감사를 할 때는 “이렇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고마운 마음입니다. 그러나 찬양을 한다는 것은 “나에게 이런 것을 해 주셔서 감사할 뿐만 아니라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당신은 위대하신 분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그냥 단순하게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높여 드리고 찬양하는 일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평소에 하나님께 감사를 잘 합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추수감사주일을 맞아 진정한 감사의 의미가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서 감사해야 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감사해야 될 것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것 2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와 언약 관계를 맺으셨다

 오늘 본문인 시편 116편 1절에서 4절에 의하면 감사의 내용이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입니다. 인자함이라고 표현된 말은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언약을 맺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혼식에 가면 언약을 맺습니다. 결혼식을 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언약식 즉 약속하기 위해서입니다. 반지를 끼워주면서 “이제 나는 당신만을 바라보며 살 것입니다. 당신만이 나의 사랑의 전부입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우나 더우나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좋은 날 뿐만 아니라 나쁜 날에도 당신에게 남편의 의무를 다하고 아내의 의무를 다하겠습니다.”라는 것이 결혼 서약이자 언약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살다 어려운 날이 와도 결혼식의 언약을 기억하면서 ‘그래, 내가 그래도 이러면 안 되지.’라고 다짐하며 책임을 다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결혼식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언약 백성이 될 만큼 자격이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믿음도 부족했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도 부족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런 공로도 없고 부족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지만 어느 날 하나님이 오시더니 그 연약하고 많은 사람의 비난과 지탄을 받아 마땅한 이스라엘 민족을 붙잡으시고 언약을 맺으시며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는 너희의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나의 자녀가 될 것이다.”라고 하시며 언약식을 맺으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성경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를 향해서도 하나님은 동일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언약을 맺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알아야 합니다. 고아와 같이, 떠돌이와 같이 살던 우리들. 늘 죄악을 벗해 살던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너는 안 되겠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너야 말로 나의 아들이다.”라고 하시며 붙잡으시고 아들과 딸로 삼아주신 것이 언약입니다.
 성경에는 아가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시편 뒤에 나오는 아가서는 한 나라의 왕이 보잘 것 없는 한 여인을 사랑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아가서를 보면 표현이 너무 적나라해서 닭살이 돋을 듯한 표현이 많습니다.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대부분이 이런 내용이라서 읽다 보면 다 읽을 수가 없습니다. “내 누이 내 신부야. 내가 나의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재료를 거두고”, “사랑하는 자여 함께 걸어가자.”,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우유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언덕과도 같고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지는구나.”
 우리가 사랑을 하면 눈에 콩깍지가 쓰인다고 합니다. 희미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다 예뻐 보이고 좋아 보입니다. 그런데 그 콩깍지가 벗겨지면 ‘아, 여기 점도 있었구나!’, ‘이랬었구나!’, ‘저랬었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보이지 않던 것이 다 보입니다. 그렇지만 사랑을 하면 그런 것이 안 보이니 모든 것이 다 아름답게 비춰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콩깍지가 씌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짜 우리가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비추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볼 때는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못났습니다.”, “나는 그저 이렇게 부족한 사람입니다.”라고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에는 “너는 그렇지 않다. 내가 생명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사랑한다.”라고 하십니다. 아가서가 나와 관계없는 왕과 여인의 사랑이야기라면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가서를 읽어야 되는 이유는 아가서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읽다 보면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이 감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게달의 장막이 무엇입니까? 검은 색을 나타낸 표현입니다. 수달이나 물개가 거무튀튀한 것처럼 여인의 얼굴도 백옥같이 하얀 것이 아니라 거무튀튀합니다. 검은 게달의 장막 같이 아름다워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왕은 그 여인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입술은 어떻고 코는 어떻고 뺨은 어떻고.”라고 표현합니다. 그 생각을 해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참 감사합니다.
 제가 며칠 전에 한 집회에 참석을 했는데 한 CCM 가수가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노래를 들으면서 제가 엄청나게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중간에 듣다 눈물이 뚝 떨어졌습니다. CCM 가수가 “인류역사상 하나님을 가장 그리워하는 사람이 누굴 것 같습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아담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동했습니다. 하나님과 아침저녁으로 동행하면서 하나님을 대면하여 만나고 하나님과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에덴동산을 거닐던 추억이 있기에 하나님을 다시 보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수는 다시 그렇게 죄로 분리된 아담을 하나님이 미워하셨을 것 같으냐고 물었습니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아담과 똑 같이 아담을 보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올라와라. 다시 와라.”라고 하고 싶으신데 아담은 올 수가 없습니다. 죄의 장벽이 가로막혔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담이 하나님께 대답을 한다면 “하나님, 나는 죄인이라서 하나님 앞에 갈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노래의 가사는

“네가 나에게 올 자격이 없기에 내가 내 자격을 버리겠다.”

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나에게 올 자격이 없기에 내가 나의 자격을 버리고 너에게 간다.”는 것입니다. 그 대목을 듣는데 눈에서 눈물이 쭉 흘렀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사건은 그런 사건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격이 높아지면 자격 조건에 맞는 사람을 만나려고 하고 더 높아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랑을 배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이기 때문에 당신의 자격을 버리시고 “네가 낮은 곳에 있다면 내가 그 낮은 곳으로 가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나는 너를 결코 버릴 수가 없다. 내가 너를 아들 삼았으니 어느 곳에 가든지 끝까지 기다리고 인내하고 이 언약을 져버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는 그 분의 백성이고 아들이고 딸이라는 사실이 감사합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면 세상적으로 높아지지 않고 조금 더 가지지 못해도 그것이 나를 속상하게 할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죄인이었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지만 하나님이 나를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백성 삼아주시고 그 약속을 꼭 지키시겠다고 우리를 붙들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조금 더 성공을 못하고 남들보다 조금 더 돈을 갖지 못한 것은 억울하고 원통해 하며 눈물을 흘릴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나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때는 무엇에 대해 감사합니까? 자녀가 조금 잘 되면 감사합니까? 물론 안 되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러나 안 되었다고 해서 서운해 하거나 억울해 해서는 안 됩니다. 늘  좋으신 하나님.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지식의 한계라는 것이 물 컵만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런 정도의 지식에 담긴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이런 작은 인간의 지식에 태평양 바다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다 담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알 수가 없습니다. 늘 하나님은 이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더 많은 또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의 눈이 열려 태평양 바다를 보고 ‘아,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로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언약을 맺어주셨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만큼 감사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방에 있다가도 자다가 깨어 일어나도 이 사실에 감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며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둘째, 당신의 생명을 주실 만큼 나를 사랑하신다

 세상에 영원한 사랑은 없습니다. 인간은 어느 순간엔가 보면 늘 외롭습니다. 결혼식장에서는 늘 내가 지켜주겠다고 했지만 살다 보면 뜻하지 않은 일로 헤어지게 되고 그러고 나면 원수도 그런 원수도 없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사랑하던 사람이 원수로 바뀌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이 악해서 그럴까요? 인간은 악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약해서 그런 것입니다. 나는 지키고 싶지만 지키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한 권사님이 저에게 찾아와 “저 이제 어떻게 살아요?”라고 물었습니다. 남편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끝까지 나를 지켜준다고 했는데 이렇게 가 버렸습니다.”라고 하면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원래 나 는 혼자였던 것 같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늘 어느 순간엔가 깨닫고 나면 결국은 나 혼자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이것이 실존주의 철학입니다. 외롭습니다. 4차 산업 혁명이 일어나 모든 것이 편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생활환경이 좋아진다고 해서 내가 진짜 행복해지고 만족함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기계 문명이 발전하면 할수록 인간은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소외감이 있습니다. 좋은 차를 타고 다녀서 행복한 것은 얼마나 갈까요? 일주일. 길어야 한 달입니다. 좋은 집에 살아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도 오래 가지 않습니다. 며칠이 지나고 나면 ‘내가 사는 게 이게 뭔가?’ 옆집에 사는 사람을 보니 더 좋은 집에 삽니다. 그러면 ‘나도 저것 좀 갖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며 상대적인 박탈감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마음은 늘 허전하고 공허하며 혼동 가운데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의 인생의 공허함과 소외감과 외로움을 채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밖에는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영원하신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아니고는 우리의 심령을 채울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이 로마서 8장 32절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세상에는 나와 상관없는 사람을 위해 내 아들을 죽게 만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 상관이 없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 죄 값을 치르도록 십자가에서 대신 죽게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 그것이 내 정욕과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인도하십니다. 5절에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다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사람이 고난을 주고 어렵게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언약을 맺어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내 편이시다.”라는 고백이 흘러나오면서 어떤 역경에서도 승리하고 이기는 자가 됩니다. 이사야 53장에도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라고 했습니다. 당신의 죄와 허물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에 당신이 찔리셨습니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이 채찍에 맞고 상했던 것은 매를 맞을 만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은 것으로 인해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된 것이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은 이와 같이 끔찍이도 우리를 아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그 사람이 얼마나 끔찍한지. 당신이 피를 흘리고 쓰러지고 넘어지시면서도 우리를 끝까지 붙드십니다. 그래서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리로다”라고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충분한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제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두 종류의 성도님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분들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고 교회에 나오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했다고 슬퍼할 필요는 없습니다. 조만간에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교회에 나오는 그 자체가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어떤 역경과 환난이 와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으로 늘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한 분들은 교회에는 다니지만 마음에 여전히 추운 마음이 있고 무슨 일이 잘 안 되면 “하나님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라고 하며 원망도 하고 불평도 합니다.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은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불어서 감사하고 눈이 오면 눈이 와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해 보았기 때문에 세상적인 것으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보면 과거에 내가 세상에서 즐기고 좋아했던 것들이 다 부끄러워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면 삶이 달라집니다. ‘내가 왜 세상에 빠져 그렇게 세상 사람들처럼 살았나.’라는 후회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회개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에게서만 진정으로 회개가 일어납니다.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는데 회개하라고 하면 “내가 뭘 잘못했다고 회개하라고 하지?”라고 하며 기분 나쁘게 듣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나면 회개하지 말라고 해도 회개를 합니다.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고 과거의 모습이 부끄러워하게 됩니다. 세상 적으로 살던 것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저렇게 열광적으로 살 필요가 있나? 세상과 잘 어울려서 잘 살아가면 좋은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은 그렇게 살라고 해도 못합니다.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되고 기도하게 됩니다. 변화의 삶을 살아갑니다. 보화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담긴 진짜 가치를 보았기 때문에 그것에 비하면 엉터리 같은 세상의 이야기들을 쫓아가지 않습니다. 어리석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랄 살겠습니다.”라고 합니다.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변화가 없다면 신앙생활을 잘못한 것입니다. 왜 안 변합니까? 100% 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느 순간엔가 우리에게 임하게 되면 100% 달라집니다.
 추수감사주일에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나는 무엇으로 인해서 감사하는가?’입니다. 내가 세상 적으로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축복을 주셔서 감사한 것입니까? 그래서는 안 됩니다. 청교도들의 신앙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좋은 환경을 버리고 척박한 땅으로 갔습니다. 세상에서 보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어리석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가치를 보았기 때문에 좋은 환경을 버리고 척박한 땅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어려움이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했고 하나님이 주신 보잘 것 없는 수확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중에 제일 좋은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감사했습니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서 세상 속의 세상적인 조건으로 인해 감사하는 자가 아니라, 늘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송으로 영광을 돌리는 진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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