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역사를 일으키는 교회 (살후 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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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나님 앞에 서야하는 인간의 실존  
 
하나님 앞에 서야하는 인간의 실존
설교날짜 2018.11.11
설교자 박동찬 목사
본문말씀 창 3 : 8 - 12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인간의 실존
1. 불순종한 죄인의 모습
2. 늘 책임을 회피하고 끊임없이 변명하는 존재
3.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
   

   
■ 말씀 창 3:8-12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사람들마다 인생을 살며 목표를 가지고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열심히 달립니다. 그들을 볼 때 희망이 생깁니다. ‘아, 열심히 뛰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포기하지 않고 의욕 있게 열심히 달려가는 모습을 볼 때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젊은이들이 꿈을 꾸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달려가는 모습들은 격려할 만한 일이고 아름다운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달리기는 달리는데 무엇을 위해 달리는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어디에서 와서 무엇을 위해 살다가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라는 것을 좀 알고 달려야 하는데 모르고 달립니다. 오히려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존재나 하나님의 말씀 같은 것들은 무시해버리기 때문에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떻게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의식을 차리고 보면 나는 이미 이 세상에 태어나 있습니다. 그리고 옆을 보니 다 달립니다. 그러니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나도 달립니다. 그러다가 ‘결국 때가 되면 죽는 것인 인생이로구나!’,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 인생을 바라보게 되면 인생이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습니다. 남들보다 조금 더 가지면 무엇 합니까? 그렇게 살다 죽어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인생을 생각하고 인생을 설계하다 보면 결국 우리 모두의 인생은 허무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우리의 존재가 어디에서부터 왔는지 불투명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존재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다가 하나님께로 가는 존재이고 죽음 이후에는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이 있다고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이 세상의 삶이 끝이 아니고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서서 ‘영원한 생명인가? 영원한 심판인가?’에 대한 판정을 받아야 되는 그런 시기가 온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신뢰하고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인 창세기 3장 8절에서 12절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에덴동산을 아름답게 만드시고 그 동산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무엇을 해도 다 괜찮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선악과는 먹지 마라.”고 하신 이 한 가지를 기준으로 세우셨습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모든 동물과 식물의 이름을 지어주고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이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담과 하와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신적인 존재인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 자리를 대신할 수도 있으니 선악과라는 기준점을 만들어 놓으시고 “이것만큼은 너희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것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이 경계를 넘어서는 안 된다.”는 관점으로 선악과 사건을 이해할 수도 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탄이 나타나 “너희들 이거 먹어도 돼. 먹어도 죽지 않고 하나님처럼 될 거야.”라고 했습니다. 아담이 듣고 보니 일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되는데 자기의 생각에 옳고 좋아 보이는 것을 선택해서 결국은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범죄 한 것입니다. 범죄하고 나서 보니 눈이 밝아져 자기들의 허물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들의 벗은 몸이 부끄러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피해 숨는다고 해서 영원히 숨을 수는 없습니다. 그 곳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아담은 범죄를 하고 난 다음에 꼼짝없이 하나님을 대면해서 만나야 했습니다. 그 장면이 오늘 읽은 장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담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피하고 싶은 마음, 변명하고 싶은 마음, 어떻게든 하나님께 용서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저지르고 보니 후회되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복잡한 심정 속에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이 말씀을 가만히 묵상하다 보니 이런 모양으로 저런 모양으로 열심히 살다가 사는 방식은 다 다르다 할지라도 어느 순간엔가 하나님 앞에 서야 되는 순간이 우리 모두에게 온다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그 자리가 아담이 범죄를 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 같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서야 되는 자리라고 한다면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인생을 살면서 ‘그렇게 살지 말 걸.’ 후회하고 가슴을 쳐도 그때는 이미 기회가 없습니다. 얼마나 후회하는, 탄식하는 삶이 되겠습니까?
 저는 이 본문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아담의 모습이 다른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을 살다가 언젠가 하나님이

“이제 올라와라. 너의 시간이 다 되었다.”

라고 하시면 모든 것을 놓고 가야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실존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인간의 실존의 모습으로 세 가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것을 잘 생각해 보고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잘못된 자리이면 돌아서서 하나님 앞에 칭찬 받고 구원받는 자리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 불순종한 죄인의 모습

 지금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아담은 마음이 많이 불편합니다. 하지 말라는 것을 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압니다. 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겨 범죄 했습니다. 아담은 마음속으로 ‘빨리 시간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벌이 한 번 용서해 주는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도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아담이 선 자리에 서게 되었을 때를 한 번 상상을 해 보기로 합시다. 예배를 드리고 있는 순간에 하나님이

“이제 너의 삶이 다 되었으니 와라.”

라고 하시면 내일 중요한 할 일이 있더라도 놓고 가야됩니다. “목사님, 저는 내일 결혼해야 해요.”라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결혼을 하지 못하고 가는 것입니다. “여행계획 다 짜 놨어요.”라고 해도 놓고 가야 됩니다. “저는 큰 사업을 벌여 놓았습니다. 마무리해야 합니다.”라고 해도 놓고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오라고 하시면 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서 있을 때 하나님과 나는 어떤 관계일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혹시 아담처럼 불순종한 죄인의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되는 것은

 ‘하나님을 대면해서 만나는 순간에 어떤 평가가 나에게 주어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류역사를 볼 때 세계를 지배했던 알렉산더 대왕도 젊은 나이에 갔습니다. 나풀레옹도 갔고 징기스칸도 갔습니다. 히틀러도 갔습니다. 초인사상을 이야기했던 니체도 갔습니다. 인간의 심리를 아주 정확하게 꿰뚫어 본 것 같았던 프로이드도 갔습니다. 부귀영화를 누렸던 큰 회사의 회장님과 사장님도 갔습니다. 이들 모두는 잠깐 이 세상에서 남들의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오라 하시니 다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어느 한 사람 예외 없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하나님을 대면하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 ‘내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잘 먹고 부귀영화를 누리고 사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만나는 그 순간에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가?’라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도 누구든지 하나님이 오라고 하시면 가야됩니다. 그때 그 모습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 두려워 떠는 아담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면 그 인생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살았다 할지라도 불행한 인생입니다.
 오늘 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불순종하고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불순종하고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 정도는 몰라도 된다. 그저 내가 선하고 바르게 살면 된다. 내 마음 대로 최선을 다해 살면 되지. 하나님의 말씀을 구적구절 읽으면서 그것을 내 삶에 적용해 볼 필요는 없지 않는가?’라는 것이 오늘 날 많은 사람의 생각이라고 할 때 참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사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크리스천을 포함해서)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어떤 부분에 불순종하고 있는지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내가 무엇을 잘못하는지는 알아야 합니다.

아담은 먹지 말라고 하는 선악과를 먹었다는 자기 죄를 알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릅니다. 무슨 말씀에 불순종하는지도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이 현대기독교인들의 문제라면 문제는 심각합니다. 그런 우리들을 사탄이 꾀어 유혹에 넘어지게 만들고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하면 “그건 아니다. 잘못된 것이다.”라고 하며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모르니 사탄이 주는 것을 넙죽넙죽 받아먹고 쉽게 넘어져 버립니다. 알아도 넘어지는데 모르고 있으니 얼마나 넘어지는 것이 쉽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창세기 3장 8절에서 12절 말씀은 매우 중요한 권고와 권면의 말씀입니다.
 제가 전하는 말씀이 조금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구원의 길은 쉽지 않다.”가 결론인 설교이기 때문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모든 것이 쉽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믿습니다.”라고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그렇게 살아도 괜찮아. 너도 괜찮고 다 괜찮아.”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리고 받아들이는 성도도 대충 살아도 된다고 하는데 얼마나 좋습니까? “주일에 한번 와서 예배를 드리고 가도 구원을 받는다.”라고 이야기를 해 주면 ‘아, 내가 이렇게 살다 가도 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얼마나 편합니까? 그런데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라고 하면 갈등이 생깁니다. 저도 얼마든지 “그렇게 대충 살아도 하나님의 구원은 변함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구원을 받습니다.”라고 했는데 마지막에 보니 그것이 아니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면 제가 큰 범죄를 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을 다 멸망의 길로 인도한 아주 악한 목회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결코 구원의 문제를 쉽게 다루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했습니다.”라고 해도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습니다.”라고 해도 예수님은 “불법을 행하는 자야. 나에게서 떠나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다. 이루었다 함도 아니다. 푯대를 향해서 부르신 그 부름의 상을 향해 달려갈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의 희망을 가졌다면 끝까지 믿음을 지키면서 구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 구원을 받았다고 세상에 휩쓸리는 세속주의자로 살아도 된다는 이야기는 성경에 없습니다.

 오늘 날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예배를 드리지만 나가서 사는 모습을 보면 세상 사람과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그래도 괜찮아.”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으면 안 된다. 죽어.”라고 했지만 사탄은 “먹어도 돼.”라고 했습니다. 안 된다는 말을 지키는 것이 쉽습니까? 괜찮다는 말을 지키는 것이 쉽습니까? 괜찮다는 말을 지키는 것이 쉽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계속 우리에게 구원의 길인 좁은 길이 아니라 넓은 길로 가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는데 사탄은 넓은 문도 괜찮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좁은 문으로 가는 것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넓은 문도 괜찮다는 사탄의 이야기인, 내가 듣고 싶고 원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길로 가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의 끝은 괜찮지가 않습니다. 사탄은 아담에게도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어도 된다고 했지만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 나가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는 것을 성경에서 봅니다.
 세상적으로 살아도 된다고 하는 이야기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라 할지라도 사탄의 속삭임입니다. “너 좋을 대로 먹고 싶으면 얼마든지 먹어도 괜찮다.”는 유혹의 이야기를 믿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야 합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그런 찔림이 있다면 불순종의 자리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에 다 감사하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감사한 은혜는 회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없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망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바로 돌아갈 수 있는 길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개의 길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도 회개를 많이 해 보아서 알지만

회개는 “하나님, 이렇게 안 살겠습니다. 이렇게 잘못된 것을 용서해 주세요.”라고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도 없이 회개했는데 어느 순간엔가 다시 죄에 빠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도 죄송해서 못하겠습니다.”라는 생각을 가져본 적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깨달은 것이 ‘아, 회개는 말이나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로구나! 행함으로 하는 것이로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헬라어 원전을 보면 회개라는 말은 유턴입니다. 돌아서는 것입니다. 회개에는 가던 길에서 ‘이제 이 길이 아니로구나!’ 하면 돌아서서 바른 길로 나가는, 행위가 따릅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 이래서 내 마음이 아픕니다. 용서해 주세요.”라고 고백만 하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진정 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돌아서는 것이 회개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다가 “이것은 잘못된 길이로구나!”라고 하며 돌아서서 자기가 핍박을 받는 자리에 섰던 것이 진정한 회개의 모습입니다. 만약 지금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오늘부터는 결단을 하고 행동을 바꾸어야 합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TV든 인터넷이든 핸드폰이든 어떤 매체를 통해서든지 이러한 설교를 듣는 사람은 복됩니다. 설교를 듣는 가운데 회개하고 돌아설 수 있는 기회가 아직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누가 무어라고 해도 사탄의 속삭임과 유혹에 넘어지지 않겠다고 성경 말씀을 읽고 또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성경 말씀에 따라 내 잘못된 부분을 교정하며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겠다고 결단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저도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가야되는 이유는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 불순종한 죄인의 모습으로 서게 되는 것은 불행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에이. 목사님. 저는 그런 거 안 믿어요.”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믿든 안 믿든 그 자리는 있습니다. 그 자리가 없다면 우리가 교회에 와서 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내 마음 대로 살면 됩니다. 우리는 소망을 이 땅에 두고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소망이 꺾어져 버리고 “너는 불순종한 죄인이다.”라고 경고를 받는다면 그 인생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우리는 손에 손을 잡고 구원의 여정을 향해 끝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서로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삽시다.”라고 결단하고 그 길을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둘째, 늘 책임을 회피하고 끊임없이 변명하는 존재

 하나님이 아담 앞에 나타나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아담이 “벗어서 두려워서 숨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면 네가 그 나무 열매를 먹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다 아시면서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네 먹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3장 12절에 보면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어 내가 먹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조금 전만 해도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달콤한 고백을 하던 그 아담입니다. 그러니 남편도 너무 믿어서는 안 될 존재입니다. 사람이 곤경에 처하면 약해져 책임을 회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아담은 죄의 책임을 아내에게 넘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넘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그 여자를 내가 언제 필요하다고 했습니까? 왜 그 여자를 만들어 주셔서 나로 하여금 범죄 하게 만드십니까?”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모든 죄는 하나님께로 갑니다. 또 우리가 변명할 때 보면 그런 변명을 많이 합니다. “아니 하나님 왜 율법 같은 것을 만들어서 우리를 죄인 취급하십니까?”, “왜 그런 악한 마음을 주셔서 범죄 하게 만드십니까? 하나님이 애당초 그런 마음 안 주셨으면 되지 않아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하와에게도 물으셨습니다. “네가 왜 그랬느냐?” 하시니 “하나님이 창조하신 저 뱀이 나를 유혹했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책임을 회피하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회개하고 돌아서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끊임없이 또 변명하고 변명합니다. 어떤 변명입니까? 제가 많은 사람을 만나 보니 이런 변명을 빈번하게 합니다. “사람이 다 그렇죠. 어떻게 말씀대로 살면서 세상에서 성공을 합니까? 요즈음에 그렇게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너무 올드합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너무 요즈음 젊은이들의 문화를 모르시고 세태의 문화를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성경은 어울리지 않아요.”라는 변명을 합니다. 아무리 어울리지 않아도 법은 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법입니다. 어울리지 않고 생각이 맞지 않고 그렇게 사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그런 변명이 합리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책임회피입니다. 제일 좋은 책임회피가 무엇일까요? “우리 교회 목사님이 안 가르쳐 줬어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는데 “너 왜 그렇게 살았느냐?”고 하시는 데서 “우리 목사님이 그런 거 안 가르쳐 줬어요.”라고 하면 제가 얼마나 당황이 되겠습니까? 더한 책임회피는 “교회에서 그래도 된다고 가르쳤는데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안 가르치는 것도 문제지만 잘못 가르치는 것도 문제입니다.
 참 이런 것들이 우리 목회자에게 있어서는 큰 갈등입니다. 목회자들도 다 약합니다. 목회자들은 다 구원받고 완벽하고 성도들은 다 심판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약하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제대로 된 것을 가르치고 제대로 된 것을 배우고 제대로 된 그 길을 같이 걸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얼마 전에 누구에게 “요즈음에 구원 받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아도 소아시아 7교회 가운데 5교회가 책망을 받고 2교회만이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다 믿는 사람들과 교회 아닙니까?”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보았을 때는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양과 염소로 나뉘고 칭찬 받는 사람과 책망 받는 사람으로 나뉠 때 5대 2로 책망 받는 사람의 비율이 훨씬 더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의 말씀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고 끝까지 불법을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이 쉽지 않습니다. 저는 “그러니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당신은 구원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라고 물으며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러면 왜 교회에서 그것을 안 가르쳐 줍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 질문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맞습니다. 진짜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하면 목회자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목회자들의 목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크게 짓는 것이 아닙니다. 수만 명의 성도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목회자의 본질이 아닙니다. 목회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본질은 하나님이 맡겨 주신 양 무리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구원받게 하는 것이며 이것이 최대의 사명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을 보면서 “그래도 괜찮습니다.”라고 하면 삯꾼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따라야 합니다. 요즈음에 내 마음 대로 생각하고 상상하는 내가 복음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내 생각이 답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중요하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이제는 변명과 책임회피를 그쳐야 합니다. 그런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바뀌지 않습니다. 법은 법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성경을 공부하는 이유는 성경에 대한 지식을 넣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것을 머릿속에 넣어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을 넣기 위함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통해 마치 거울과 같은 성경 말씀을 통해 나의 잘못된 모습을 보고 화장을 고치듯이 나의 삶의 자세를 고치고 옷매무새를 고치듯이 우리의 잘못된 부분을 고치라고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성경에 관한 지식이 많습니다.”라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성경을 읽고 성경공부를 하는 것은 백해무익한 일입니다. 성경에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방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을 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 믿는 우리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지금 교회에 와 있는데요.”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의 세상적인 가치관과 세상적인 삶을 추구하던 길에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늘 달콤하게 유혹하고 이 세상에서 행복과 축복을 줄 것 같이 이야기 하고 무엇을 해도 괜찮다고 하는, “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삶을 살아도 괜찮다.”라고 하며 죄를 짓게 만드는 사탄의 이야기를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과 사탄의 이야기를 따르지 말고 오직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그 말씀을 따라가며 구원의 완성을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

 평생을 열심히 살아 성공도 하고 부귀도 얻었습니다. 나름대로 세상적으로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서 보니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생을 살았다 면 그 인생만큼 비참한 인생은 없습니다. 세상에 그것보다 더 두려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어디에 있어?”라고 하며 하나님을 따라 사는 사람을 어리석게 생각하고 손가락질 했습니다. 그런데 죽어서 보니 그 하나님이 실존하십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 없다고 하던 내 삶의 모습이 얼마나 후회가 되겠습니까?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은 첨단 로봇의 시대, 과학의 시대,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철저히 부인되고 무시되는 그런 시대가 도래 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은 “하나님 없이 바벨탑을 쌓자.”와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행복할 수 있다는 헛된 거짓말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는 하나님 없이도 유토피아 세계가 펼쳐지고 천국이 펼쳐질 것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이야기합니까? “앞으로 심판의 때가 온다.”, “배교의 때가 온다.” “정신을 차려라.” “깨어 근신하라.”라고 합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의 말을 따라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까? 100%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볼 때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대신하려고 한 사건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건은 인간의 쾌락을 추구하고 성적인 타락을 추구하며 “그것이 훨씬 좋다. 행복하다. 행복한 삶이 여기 있는데 너희는 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느냐?”라고 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을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망하고 말았습니다. 바벨탑 사건은 “인간들이 모이면 못할 일이 없다.”고 하는, 어떻게 보면 니체가 이야기하는 초인사상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힘을 합쳐 탑을 높이 쌓아 하늘꼭대기까지 닿게 만들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바벨탑은 무너져 버립니다. 수많은 우상이 있고 수많은 철학과 이데올로기가 대단하게 세상을 지배할 것 같았지만 모든 것이 무너지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님의 말씀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여전히 존재하고 많은 사람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구원의 길로 이끌어가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습니다. 세상이 무언가를 변화시키고 우리의 삶에 즐거움을 줄 것 같이 이야기를 해도 믿어서는 안 됩니다.
 멸망해 가는 소돔성에 살아남은 사람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의 두 딸 그리고 그의 아내 4명이었습니다. 그들만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도시가 멸망해 가는 긴박한 상화 속에서도  롯의 아내는 세상에 미련이 남았습니다. 그 곳에는 자기의 재산도 있었고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여전히 세상에 미련이 남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뒤돌아보지 말아야 되는데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미련을 두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세상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두고 하나님의 가치관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남겨져 있는 시간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아무리 행복을 줄 것 같이 이야기를 해도 속아서는 안 됩니다. “이걸 먹으면 행복할 거야.”, “이것을 가지면 행복할 거야.”, “네가 높아지면 행복할 거야.”라는 말은 다 거짓말입니다. 사탄은 아담을 넘어트린 그 방법으로 여전히 오늘도 우리를 공격하고 넘어트리려고 합니다.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로 자극하면서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그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선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언젠가는 서게 된다는 것을 믿습니까? 믿지 않습니까? 그런 날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날은 옵니다. 그때 하나님이 “아무개야, 네가 어떻게 살다 왔느냐?”라고 물으신다면 나 자신을 돌아보며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존재를 부인했던 것, 이런 날이 안 올 것처럼 생각하고 살았던 것, 마음껏 내가 좋아하는 대로 살아왔던 것이 다 부끄러움으로 남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그 날. 정말 잘했다 칭찬 받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로 부름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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