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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탄의 신비 속에 담긴 은혜  
 
성탄의 신비 속에 담긴 은혜
설교날짜 2018.12.9
설교자 박동찬 목사
본문말씀 누가복음 1 : 26 - 31
 

 





성탄의 신비 속에 담긴 은혜
-2018년 대강절 둘째 주-
1. 인간의 몸으로 오신 신비
 2. 인간의 시간 속에 들어오신 신비
 3.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신 신비
    
■ 말씀 눅 1:26-31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지적 호기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알고자 하는 욕망이 매우 강하고 그런 호기심 때문에 인류 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해 왔습니다. 요즈음에는 4차 산업 혁명시대와 인공지능 시대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인간은 지적인 호기심을 통해 이와 같은 눈부신 발전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병원에서도 모든 병에 대해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아직도 불치의 병이 많습니다. 우주에 대해서도 오래 전부터 연구를 했지만 여전히 그 끝이 어디이고 우주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알고 싶으나 알 수 없는 것.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른다고 합니다. 그런 것을 우리는 신비라고 합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신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살면서 인간이 경험하는 수많은 신비 가운데 가장 놀라운 신비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탄의 신비입니다. 성탄은 하나님이 탄생하신 것입니다. 그 말 자체가 이해가 안 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자신이 창조하신 세계 안으로 들어오신 사건이 바로 성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이 연구를 하고 노력을 해도 해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에 대해 말도 안 되는 거짓이나 신화로 취급해 버리곤 합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틀린 것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선지자들을 통해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실 것을 예언하셨고 예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들이 이 말을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믿든 못 믿든 하나님이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지식으로, 살아온 경험으로, 학교에서 배운 것으로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신비라고 합니다. 이 인류 역사 가운데 오신 하나님의 성탄의 신비에는 가만히 묵상을 하고 들여다보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중심으로 성탄 속에 담긴 신비와 그 은혜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인간의 몸으로 오신 신비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지금이야 많이 들어서 ‘아, 그런가 보다!’라고 하지만 사실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태평양 바닷물을 작은 컵 안에 다 담을 수 있을까요? 만약 “태평양 물이 이 작은 컵 안에 모두 담겼다.”라고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까요?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존재입니까?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우주라는 것은 그 시작이 어디이고 끝이 어디인지 모릅니다. 광활한 곳을 우주 같다고 표현한다면 그 크기를 더 실감나게 표현하는 비유대상은 없습니다. 그런 우주보다 하나님은 더 크신 분입니다. 우주라는 개념을 놓고 볼 때 지구라고 하는 별은 보이지도 않는, 티끌 중의 티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지구도 인간이 보면 매우 큽니다. 그리고 지구라는 곳에 서 있는 ‘나’라는 존재는 너무나도 작고 부족한 존재입니다. 우주에서 볼 때 티끌에 불과한 지구인데, 그 티끌 같은 지구에서 또 티끌 같은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러면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이 티끌 같은 우리의 몸속에 들어오셨습니다. 아기 예수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이 납득이 됩니까? 안 됩니다. 그래서 성탄은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이 티끌 같은 인간의 몸속으로 들어오셨다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 남겨진 사건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 남겨진 성탄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두 가지 교훈이 있는데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가능이 없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놀라운 은혜입니다. 신비이면서 동시에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오셨을까요? 불가능이 없으신 기적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하나님 스스로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밝히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로 이 땅에 오신 사건이 성탄의 사건입니다. 오늘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 안에 거하셔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탄을 생각할 때 갖게 되는 마음의 자세는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풍랑을 잠잠하게 하시고 능력과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셨고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인생을 살면서 두려워 할 것이 무엇일까요? 성탄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확신하고 삶에 어떤 역경과 환란이 온다고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능히 이겨나가야 합니다.
 세상의 역사를 보면 세상과 자연이 돌아가는 이치가 매우 섬세합니다. 예를 들어 지구는 축이 기울어져 있는데, 그 축이 조금만 더 기울어져도 인간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자전의 속도가 조금만 더 빨라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태양과 빛의 적당한 조도를 비롯해 모든 것이 맞추어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도는 것도 조금만 달라지면 큰 일이 납니다. 이런 모든 것을 세심하게 운영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인생을 돌보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할까요?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며 도우십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시편 기자는 수도 없이 많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볼 때 어떤 역경과 어려움이 와도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경을 뚫고 일어나는 위대한 승리자가 됩니다.
 성탄에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고 하면서도 그 이유를 모르고 기뻐해서는 안 됩니다. 성탄의 신비 속에는 이런 은혜가 있고 나와 함께 하시고 도우시며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니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으로 넉넉히 세상을 이겨나가야 합니다.

 둘째, 인간의 시간 속에 들어오신 신비

 하나님은 인간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 영원이라고 하는 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영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시간 속에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시간도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시간을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은 시간 안이 아닌 시간 밖에 존재하십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는 분이니 시간의 지배를 받을 수 없습니다. 성탄은 무엇입니까? 시간 밖에 계신 하나님이 시간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탄의 두 번째 신비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시간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크로노스의 시간과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카이로스라는 말은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크로노스라는 시간은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1999년에서 2000년이 되고 2005년이 되고 올해가 2018년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 기계처럼 흘러가는 시간이 크로노스의 시간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히 주어진 시간입니다. 그러나 카이로스의 시간은 크로노스의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역사하시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은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도 그 말씀도 믿지 않습니다.”라고 했던 사람이 어느 순간엔가 하나님을 만나면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다메섹 도상으로 가던 사도 바울이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그 순간. 그래서 삶이 전적으로 달라지는 그 순간을 우리는 카이로스의 시간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마음대로 완악하게 살던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어느 순간 들어오며 하나님을 만나고 인생이 전적으로 변화되는 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길어야 100년 동안 주어진 크로노스의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수도 없이 내가 변화되며 희망을 품고 다시 도전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우리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질적이며 은혜로운 시간입니다.
 그런데 시간 밖에 계신 하나님이 시간 안으로 들어오시는 성탄의 신비가 없었다면 우리의 인생에서 카이로스의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말도 틀린 말이 됩니다. 우리 인류의 역사 시간 밖에 계신 분이 어떻게 시간을 다스리겠습니까? 만들어 놓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시간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 이야기는 우리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탄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시간과 역사 그리고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되신다는 고백을 하나님께 올려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원 속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신 성탄의 사건.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우리 역사를 주관하시고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되시는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세상의 역사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사람에 의해 만들어져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시는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역사를 히스토리라고 합니다. 이 말은 히이즈 스토리로 그 분의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가신다는 의미입니다. 인간들은 사건과 전쟁 어려움을 인간들이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배후에서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즉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를 펼쳐 놓지만 성경의 주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사람이 만드는 것 같아도 실상은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저마다 착각을 하고 삽니다. 내가 노력해서 무언가를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내 역사를 만들어 간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세상의 역사를 만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착각입니다. 성경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마태복음 10장 29절에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참새의 의지로 떨어지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손길이 붙들고 있습니다. 인간이 무언가를 다 하는 것 같아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도 우리가 여기까지 왔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내가 키가 좀 작아 커졌으면 좋겠어.’라고 바란다고 커질 수 있습니까? ‘내가 건강이 좀 안 좋아. 아프지 않게 살아야지.’라고 마음  먹는다고 그렇게 됩니까? ‘돈 좀 많이 벌어야지.’라고 생각한다고 돈을 많이 벌 수 있습니까? 물론 많이 버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벌지 못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살고 싶은 만큼 살아야지.’라고 한다고 그렇게 됩니까? 아닙니다. 내 생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나는 모릅니다. ‘한 200년 정도 살아야지.’라고 마음먹는다고 그렇게 될까요? 아닙니다. 인간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뇌의 신경 몇 가닥이 끊어지면 바보가 됩니다. 아무리 건강하다고 해도, 내가 내 건강을 지켰다고 하지만 교통사고가 나 평생을 누워있게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몇 초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모든 것을 만들어 가는 것처럼 착각하고 사는 어리석음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입니까?
 진짜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진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인간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신 성탄의 신비 그 자체가 놀라운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우리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셨을까요? 내가 나의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이 도우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역사의 개입하셔서 내 삶의 역사들과 이야기들을 만들어 가시겠다는 의지가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돈이 있는 사람들, 스스로 강하다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리석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합니다. 시편 2편 1절부터 4절의 말씀을 보면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일을 계획하지만 성경은 그것을 ‘헛된 일’이라고 표현 합니다. 세상의 군왕들은 권세를 비롯해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고 관원들이 서로 꾀하는 이야기가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그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버리자”라고 합니다. 시편기자가 고백하는 순간에도 그 이전에도 지금까지도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꾸 얽어매려고 하는 구속으로부터 벗어나자고 합니다. 그래서 바벨탑도 세워 보고 인공지능 로봇도 만드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함으로 “우리 인간이 최고다.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보자.”라고 하며 계획을 세웁니다.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지혜로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1장 4절에서는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그런 노력을 해 보아야 하나님의 비웃음거리밖에는 안 됩니다. 내 인생이 내 것이라고 믿고 어떻게 좀 잘해 보겠다고 하는 사람을 성경은 어리석다고 합니다.
 나의 삶, 나의 세월, 나의 역사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얽어 매셔서 이리저리 끌고 다니신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시간 속에 오셔서 견디기 힘든 인생의 무게, 내 삶의 무게를 짊어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버티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승리의 길, 의의 길, 진리의 길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우리는 성탄의 신비 속에서 다시 한 번 기억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셋째,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신 신비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의 주체가 되십니다. 인간은 피조물로,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일 뿐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은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아담과 하와를 사랑하신다고 해도 인간의 죄의 본성 때문에 하나님과 분리가 되었습니다. 마치 물과 기름 같습니다.
 물이 기름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 기름과 하나가 되려고 애를 썼지만 잡으면 잡을수록 기름은 물에서 분리가 되었습니다. 노력을 해서 물이 기름과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처럼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의 본성을 가진 인간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하며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찾고 또 찾아도 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잡은 것 같은데 또 분리가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하고 공부하고 연구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철학으로, 돈으로, 의지로, 학문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해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우리와 같이 낮아지셔서 우리와 똑같은 피조물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하늘의 모든 왕권을 포기하시고 우리와 같은 피조물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사건이 바로 성탄의 신비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하늘보좌를 버리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될 수 없으니 하나님이 당신의 자격을 버리시고 인간의 연약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성탄의 신비이면서 동시에 성탄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성탄을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왜 하나님이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시고 벌레만도 못한 인간의 죄와 실수와 모든 것으로 얼룩진 우리의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오신 모습. 과연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사랑입니다.
 사랑과 관련하여 세기적인 로맨스가 있습니다. 영국의 국왕이었던 에드워드 8세의 이야기입니다. 1936년. 지금으로부터 82, 3년 전 이야기입니다. 에드워드 8세는 1936년 1월 20일에 영국의 국왕으로 즉위를 했습니다. 그런데 1936년 12월 12일에 동생인 조지 6세에게 왕위를 넘겼습니다. 왕이 된지 11개월 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영국의 국왕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대단한 자리입니까? 그런데 그 자리를 11개월 만에 동생에게 물려주고 물러났습니다. 그 이유는 에드워드 8세가 한 여인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아가서에 나오는 한 왕과 사랑 받을 수 없었던 술람이 여인의 이야기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에드워드 8세는 국왕의 자리를 포기하고 한 여인을 선택했습니다. 그 여인은 이혼을 했던 미국 여인 월리스 심슨입니다. 지금이야 “그게 뭐 어때?”라고 할 수 있겠지만 82년 전에는 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 사회에서도 이혼이라고 하는 것이 흔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습니다. 게다가 재혼을 해 헤어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영국의 국왕이 그 여인을 사랑한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영국 국회와 영국 국민들의 자존심이 상할 만합니다. 영국의 국왕입니다. 가문도 좋고 혈통도 좋고 무엄하고 깨끗하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한 번 이혼하고 두 번째 이혼을 준비하는 여인을 너무 사랑했습니다. 영국 국회에서는 “당신이 결혼을 하려면 적어도 국민들과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결혼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는 눈물을 머금고 포기하고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국왕의 자리를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월리스 심슨이라는 여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는 왕이었지만 윈저 공이라는 이름으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아내는 평생 귀족의 신분을 가지지 못하고 윈저 공의 아내로 살았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자기가 죽고 난 다음에 아내에게 해가 갈까 전전긍긍 하면서 모든 것을 배려했습니다. 사랑의 힘이라는 것이 참 위대합니다. 어떻게 국왕의 자리까지 내어던져 한 여인을 사랑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람은 그보다 더 놀라운 사랑입니다. 인간의 사랑이 아무리 위대하다고 해도 하나님의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이고 부족하고 실수와 흠투성이인 우리를 포기하지 못하셔서, 우리를 대신해 죽으시기 위해 오신 것이 바로 성탄의 사건입니다. 그것도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도대체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막연한 사랑이 아니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이런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월리스 심슨이라는 여인을 부러워할 것 없습니다.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권리를 가지신 하나님이 그것을 포기하시고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던지신 메시지가

“나는 너를 포기할 수 없다.”

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해, 우리를 향해

“나는 포기할 수 없다.”

고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이 너무 크면 다른 것을 포기합니다. 성탄의 신비를 묵상하다 깨달은 것으로 돌려서 말하면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는가가 결국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증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을 포기하셨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라고 하는데 도대체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하신다는 것입니까? 얼마만큼 사랑하신다는 이야기입니까? 그 답은 하나님 되시는 당신 자신을 포기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래서 성탄의 신비를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은 따뜻해집니다. 비록 많은 것을 가지지 않았어도 마음은 따뜻해집니다. 실수가 많고 흠투성이라 할지라도 성탄을 생각하면 마음속에 희망이 솟아납니다. 내가 정말 많은 것을 가지지 못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해도 나에게 비추이는 성탄의 기쁨을 빼앗아갈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고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하며 좋아하니 ‘그런가 보다!’ 하는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성탄의 신비를 깨닫고 보니 왜 기쁜지 이해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인 신비는 매우 놀랍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기적의 하나님이 오셔서 주시는 메시지가

“내가 이런 기적의 하나님.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 하나님이다. 너희와 함께 하기 위해서 왔다. 두려워하지 말라.”

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며 우리 인간의 시간 속으로 뚫고 들어오셨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신비입니다.

“네 인생의 시간의 주인은 네가 아니라 나다. 내가 너의 시간을 만들고 역사를 만들고 삶을 만들기 위해 이곳에 왔다. 나와 동행하는 인생을 살자.”

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두 번째 신비입니다.

“내가 너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 내가 너를 위해서 죽고 내가 너를 건지기 위해 하늘보좌를 버리고 모든 영광을 내려놓고 너에게 왔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 하나님이다.”

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성탄의 세 번째 신비입니다.
 우리는 성탄의 신비 속에 담긴 은혜를 잘 알고 이번 성탄절에는 누구보다 더 기쁘게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고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외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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