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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탄 속에 담긴 하나님 성품  
 
성탄 속에 담긴 하나님 성품
설교날짜 2018.12.23
설교자 박동찬 목사
본문말씀 누가복음 2 : 8 - 14
 

 

 

성탄 속에 담긴 하나님 성품
 1. 겸손
 2. 사랑
 3. 긍휼

■ 말씀 눅 2:8-14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요즈음에 심리학자들의 심리학에 대한 업적이 참 대단합니다. 그분들 앞에서 말실수를 하면 속을 꿰뚫어 봅니다. 글씨체를 보아도 성격을 할 수 있고 사인을 하는 모습만 보아도 성격을 아는데 얼마나 힘을 주어서 사인을 하는지 등을 통해 성격을 가늠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을 통해 아이의 심리 상태를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미술 치료 요법이라든지 하는 것도 나타납니다.
 우리도 작품 활동을 통해 사람의 성품을 짐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작품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볼 때 얼마나 섬세하고 완벽하셨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작품 스타일이 어떤 것인지 조금씩 생각해 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시는 방법으로 성탄을 선택하셨습니다. 아기 예수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수많은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성탄입니다. 이런 모습을 취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가만히 생각해 볼 때 성탄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이 어떠한 것인가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성탄 주일을 맞아 아기예수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 속에 담긴 하나님의 성품 세 가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겸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겸손하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성탄의 모습 속에 담긴 하나님의 성품은 겸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누가복음 2장 8절에서 14절 말씀은 매우 잘 아는 말씀입니다.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양떼를 지키는데 천군과 천사가 나타나고 주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그때 천사들이 창화하면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의 평화”

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심에 대해 천지는 진동을 하고 축하했지만 정작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 땅에 탄생하셨다는 것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가장 겸손한 탄생의 모습을 설명해 줍니다.
 사람들은 가끔 모여 대화를 할 때 자기 집안 배경을 자랑할 때가 있습니다. 업적을 자랑할 때도 있고 출생의 비밀을 이야기할 때도 어느 특급 병원의 특급 병실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자랑삼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람들은 틈만 나면 겸손을 가장한 체 자기를 들어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정작 가장 크고 위대하신 우리 하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증거가 그 분의 탄생입니다.
 하나님은 이름 없는 한 목수의 가정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태어날 때도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나그네로 여행을 하다가 여관에 갔지만 묵을 곳이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배가 불러오고 어쩔 수 없으니 “잠시라도 쉴 수 있는 곳이면 아무 곳이라도 상관없습니다.”라고 해서 차지한 공간이 동물들이 잇는 마구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밤에 출산을 했습니다. 출산을 하고 나서 보니 아기를 눕힐 곳이 없었습니다. 말구유가 깨끗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천을 하나 깔고 아기를 눕혔습니다. 냄새는 얼마나 났을까요? 이런 곳에 누워계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며 생각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 누구보다 멋진 모습으로 오실 수도 있으셨을 텐데 가장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신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혹시 마구간에서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가난하고 어려워도 말구유에 누워있는 아기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얼마든지 멋진 모습으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구간을 택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만히 묵상해 보니 거기에는 하나님의 섬세한 사랑과 배려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자기 신분이나 처지가 나빠서 “나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없도록 만드시기 위해 당신 스스로 가장 낮은 곳에 오셨습니다. 신분적으로 하나님께서 어떤 왕가의 자손으로 오셨다면 우리는 천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따를 자격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에 대해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섬세한 배려의 모습을 아기 예수의 탄생 모습 속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겸손하시면서도 섬세하신 하나님. 이런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참 감사합니다. 이렇게 겸손하고 섬세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들여다 볼 때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따르겠다고 고백은 하지만 우리는 겸손한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가진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만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람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조금만 남들보다 좋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과시하려고 하는 과시욕이 있습니다. “나는 이런 것을 잘 해.”, “나는 이만큼 했어. 이 정도면 뭐라고 할 사람이 없지 않아?”라는 것을 자기의 자랑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나보다 나은 사람을 볼 때는 “나도 저거 주세요. 나도 저것을 자랑하고 싶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 나는 저렇게 해주지 않으신 것 감사합니다.”, “나를 이렇게 축복해 주셔서 이만큼 잘 되게 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은 바리새인의 기도와 비슷합니다. “저 죄인들 같지 않게 하시고 나를 선택해 주셔서 바르게 살게 해 주시고”라는 기도는 “나 정도면 되지 않았는가?”를 자랑하는 바리새인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낮고 천하게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귀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기 위해 당신 스스로가 가장 낮고 천한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성탄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너무나도 많은 것이 우리의 눈을 흐리게 만듭니다.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자꾸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양말을 자꾸 보게 만들고, 크리스마스트리를 보게 만들고, 산타 크로스, 루돌프 사슴을 자꾸 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겸손히 말구유에 누워계신 예수님께 집중하고 그 분에 대해 묵상하며 겸손하게 오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도 겸손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오심으로 세상의 낮고 천한 사람 그 누구라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선포하신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을 때 우리 주변에 소외된 어려운 사람들을 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은 마땅히 되어야할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성탄의 계절에 하나님의 겸손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겸손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세상 앞에 겸손함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선물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사랑

 성탄을 생각할 때마다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 있습니다. 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굳이 이 땅에 오셨냐는 것입니다. 그 질문의 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포기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당신의 생명을 주어서라도 우리를 살리시려는 사랑입니다. 이 외에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다른 이유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셔서 우리를 다스리시기 위해 오셨습니까? 아닙니다. 권력을 잡기 위해 오셨습니까? 이 세상의 어떤 쾌락을 맛보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까? 당신을 과시하기 위해 오셨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우리를 사랑하셔서 멸망과 죽음의 길로 떨어지는 우리를 그대로 둘 수 없어 당신이 우리를 대신해 죽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성탄을 생각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하나님의 포기할 수밖에 없는 사랑입니다.
 반면에 우리의 사랑은 어떠합니까? 참 인간은 보잘 것 없는 사랑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대단한 것 같아 보여도 너무 초라한 껍데기일 뿐입니다. 영원할 것 같이 고백하던 사랑이 쉽게 변질됩니다. 쉽게 질리고 쉽게 포기합니다. 헤어지며 가장 소중하다고 외쳤던 사랑을 버립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이야기하기는 미안하니 대부분 하는 이야기가 성격이 안 맞다는 것입니다.
 성격이 안 맞는다고 돌아서는 것이 사랑입니까? 이것이 저것이 안 맞아서 헤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랑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잘 맞습니까? 안 맞는 것을 따지면 우리와 하나님처럼 안 맞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와 하나님은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려고 하는데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다. 도저히 너희를 사랑할 수 없다. 내가 너희를 포기해야겠다.”라고 하시며 우리를 버리셨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와 하나님은 너무나 맞지 않습니다. 문화도 생각도 생활 방식도 안 맞습니다. 우리는 육에 속한 사람이고 자꾸 육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것을 향해 오라고 하십니다. 내가 듣기 싫은 소리를 자꾸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부담이 되니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지만 “죽이자.”라고 하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그렇게 맞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싫다고 하며 죄악과 세상의 길로 나아가는 우리를 향해 “그래. 내가 이만큼 노력했으면 되었다. 너희 갈 길로 가라.”고 하며 버려두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는 사랑을 통해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고 책임지셨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로 결단했으니 이 사랑은 영원하다. 끝까지 가는 사랑이다.”

라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입니다. 이 모습을 보여 주신 이유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세상을 향해 책임지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요즈음에는 흔들리는 가정이 많습니다. 서로 믿고 꾸린 가정이지만 여러 가지가 어려움 속에서 가정이 깨어집니다. 성탄을 맞아 다시 한 번 처음 결혼할 때의 마음을 회복하고 끝까지 가정을 지키고 서로를 더욱 더 뜨겁게 사랑하고 돌볼 수 있는 믿음의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그런 의미에서 감정이 아니고 이념도 아닙니다. 무조건 적인 것입니다. 사랑은 의지이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감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변합니까? 아침에 좋았던 감정이 한 시간이 지나면 상해 버립니다. 그런 것에 서로의 일생을 걸고 결혼을 한다는 것보다 위험한 도박은 없습니다. 그러니 깨지고 맙니다. 결혼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로 결단했으니 나도 당신을 끝까지 지키겠습니다.”라는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이사야서에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잠잠히 끌려가셨습니다. 그러나 비참하게 죽으시면서도 억울하다고 항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왜 죽어야 되는지도 모른 체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의 죄를 지고 대신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차라리 당신이 죽는 편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사랑. 이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이번 성탄 절기를 지나면서 ‘오늘 우리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인가? 내 가족을 향한 사랑, 내 가정과 자녀와 이웃과 교회를 향한 사랑의 모습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내 스스로 사랑한다고 착각하고 사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다시 한 번 묵상하고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어제는 하루 종일 바빴습니다. 낮에는 청년들이 일일 찻집을 했습니다. 한 모금 품앗이였습니다. 수익금을 가지고 노숙자들에게 찾아가서 따뜻한 외투를 한 벌씩 나누어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감사한 것은 뜻이 좋으니 마음이 맞는 많은 성도님이 후원을 해 주신 것입니다. 모금액이 다 차서 외투를 사 한 벌씩 나누어 드렸습니다. 그 분들에게는 외투 한 벌이 얼마나 소중하겠습니까? 또 용돈을 모아 개안수술을 해 준다는 청년들도 있었습니다. 한명이 개안 수술을 하는데 드는 돈은 190만원입니다. 모금액이 모이다 보니 4명 내지 5명이 개안수술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이 참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겠다는 청년들을 보니 그 마음이 감격스럽고 좋았습니다. 오후에는 아이들이 벨라시타에 가서 깜짝 공연을 했습니다. 10분의 공연이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놀랄만한 작은 기쁨의 소식입니다. 그것을 보며 행복해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역할입니다. 저녁에는 난민들이 와서 공연을 하며 아프리카 춤 등 여러 가지를 했습니다. 이라크 사람들은 이라크 과자도 만들어 왔습니다. 우리에게 식사를 대접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성도가 와서 공연을 보며 박수도 치며 하나가 되었고 그 후에 애찬관에서 진열된 이라크 음식과 아프리카 음식을 먹었습니다. 참 맛있었습니다. 대접을 받으며 ‘누가 나그네고 누가 주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준비를 하고 그분들을 초청해 식사를 대접하고 공연을 보여 드리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거꾸로 되어 그분들이 공연을 하고 식사를 대접하고 우리는 얻어먹고 공연을 보며 즐거워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하시며 나그네들을 대접하고 어려움 가운데 있는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 교회가 성탄절을 맞아도 나만 기쁘면 되고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을 돌아보지 않는 모습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민망스럽지만 깨달으라고 저들을 보내 우리들을 대접하게 하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대한민국에 들어와 있는 난민의 숫자는 4만 5천 명 정도고 북한에서 내려온 탈북민이 3만 명입니다. 4만 5천 여 명의 난민들 가운데 이 땅에서 살도록 공식적으로 허락을 받은 사람은 900명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난민이 된 것이 얼마나 아픈 일이겠습니까? 입장을 바꾸어 우리가 그 처지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비참합니까? 과거에 베트남 전쟁이 있을 때 살기 위해 보트를 타고 베트남을 떠났습니다. 있을 곳이 없어 작은 배 위에서 20-30명이 살았습니다. 배가 가라앉지 않은 것도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한 달이 지나도록 있으니 먹을 것은 없고 배 위에서 굶어 죽든지 물에 빠져 죽어야 되는 상황인데 어느 나라 앞바다까지 왔습니다. 바로 눈앞에 육지가 보입니다. 그 곳에 내려가면 삽니다. 그런데 내리려고 하니 난민들은 받지 않는다고 내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육지가 보이지만 내리지는 못하고 떠돌다가 바다에서 죽어간 사람이 매우 많았습니다. 요즈음에 난민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은 돕고 봐야 합니다. 죽을 위기에 있는 살리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교회가 해야 될 일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이 땅의 교회들이 얼마나 소외된 사람들에 대해 눈을 돌리지 않고 살았으면 난민들이 퍼 주는 밥을 먹게 되었을까요?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해야 될 일인데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하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한국교회가 지금이라도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회개하고 돌아서야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너무 우리 사는 것이 바빠서 주변을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주변에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돌아보지 못하고 사는 우리들의 모습이 얼마나 잘못된 모습입니까? 이번 성탄에 사랑으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너무나도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넘치도록 많은 사랑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처럼 우리 주변에 어려움을 당하는 이웃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모습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고치고 치료하며 도우며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긍휼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사랑의 실체라는 긍휼과 섬세함을 성탄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성경 말씀 중에는 위로가 되는 말씀이 많습니다. 그 중에 참 따뜻한 말씀이 마태복음 12장 20절의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신다.”

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상한 갈대를 보면 보기 싫어 꺾어 버립니다. 떼어 내야 보기가 좋습니다. 꺼져 가는 심지는 꺼지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과연 어떤 존재입니까? 상한 갈대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상하고 악취가 납니다. 꺼져 가는 심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내버려 두시거나 무관심하게 방치해 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멸망으로 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며 너무나도 불쌍한 마음이 드십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 내신 것이 우리를 대신해 당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는 믿기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의 죄가 하나님이 십자가에 대신 죽으심으로 사함을 받았다.”

는 것을 믿기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복음인지 모릅니다. 만약에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시며 “너희도 구원을 받으려면 십자가의 고난을 다 거쳐야 된다. 그래야 구원 받는다.”라고 하신다면 이 세상 사람들 중에 구원을 받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또 구원에 대한 조건으로 “공부 많이 해야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하면 도대체 어디까지 해야 구원을 받습니까? 학비가 없어서 공부를 못하고 학위를 못 받는 사람들은 다 구원을 못 받아야 됩니까? 불공평한 일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야, 선행을 많이 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얼마나 많이 돈을 벌고 얼마나 많은 선행을 해야 됩니까? 내가 100번의 선행을 했는데 어떤 사람은 200번의 선행을 했습니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저는 구원을 못 받는 존재가 되고 맙니까? 세상에 구원을 조건을 걸고 “구원을 어떻게 받는가?”라고 물었을 때 무슨 이야기를 해도 다 불공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공평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으니 믿으라는 것입니다. 믿는 것은 돈 많은 사람도 없는 사람도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공부 안 한 사람도 권력을 가진 사람도 권력을 안 가진 사람도 믿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조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시해 주신 조건인 것입니다.

“믿어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단 너희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먼저 인정해라.”

이것도 쉬운 것입니다.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인정 못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공한 사람들은 죄인이 아닙니까? 우리는 다 부족한 사람들이고 죄인입니다. 죄인은 죄의 대가를 받아야 됩니다. 그런데 그 대가를 치를 수 없으니 우리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이 구원의 유일한 조건입니다. 얼마나 공평합니까?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이 배려가 섬세하고 놀라운지 그 사실을 볼 때 하나님의 사랑이 놀라운 사랑이고 긍휼의 마음이 대다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성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보니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고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기쁩니까? 선물을 주기 때문입니까? 캐롤이 흘러나오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고 상처 받은 영혼을 위해 이 땅에 오셨으니 모든 사람이 기뻐할 만한 성탄의 날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열심히 노력도 해 보고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보고 결심도 해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좌절하고 절망하고 살며 힘들어서 목 놓아 대성통곡합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오늘 우리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고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상담 오는 성도들을 보면 제 방에만 들어오면 대성통곡을 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예배드릴 때는 평안하고 좋지만 가정마다 문제가 있고 문제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긍휼의 하나님이 오늘 우리 성도들의 처지와 형편을 알고 계십니다. 어려운 환경이 변하여 선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섬세하신 사랑과 긍휼을 생각할 때 내 생각으로는 답이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는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이라는. 그래서 우리 하나님을 생각할 때 희망을 꿈꾸고 다시 한 번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이번 성탄의 절기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성품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겸손하신 우리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신 위대하신 그 분이 겸손하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더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하나님은 겸손하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분의 섬세하신 긍휼하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진정으로 “기쁘다 구주 오셨네.”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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