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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후회 없는 인생을 사는 성도  
 
후회 없는 인생을 사는 성도
설교날짜 2018.12.30
설교자 박동찬 목사
본문말씀 시 90 : 6 - 10
 

 

 

후회 없는 인생을 사는 성도
-송년주일-
1. 우리 모두에게는 인생이 끝나는 시점이 있다.
 2.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
 3.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기억하라.

    
■ 말씀 시 90:6-10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오늘은 2018년 송년 주일인 마지막 주일입니다.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시작했던 2018년인데 어떻게 지나갔는지 벌써 마지막 주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항상 이맘때가 되어 한 해를 돌아보면 잘한 일도 있어서 ‘잘 했다.’, ‘열심히 살았다.’라는 것보다는 ‘좀 더 열심히 살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가 많은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1년씩 끊어서 인생을 산다는 것은 참 귀한 축복입니다. 한 해의 시작과 끝을 경험하면서 한 해를 돌아보고 반성하며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1년씩 끊어서 사는 것이 축복입니다. 만약에 한 번에 80, 90, 100년의 인생을 통으로 산다면 분명히 어제 시작한 것 같은데 내 인생이 끝날 때가 되고 다시 무언가를 계획할 수 없이 지나가 버립니다. 통으로 사는 인생은 위험한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달력이라는 것이 있어 1년씩 우리 인생을 끊어주니 다시 시작해 보고 끝날 때는 새로운 한 해를 바라보며 배운 교훈을 통해 한 해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참 귀한 은혜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 하는 시점에서 돌아보게 될 때 세상을 사는 많은 사람이 사는 방법이 비슷합니다. 분주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바쁜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뛰어다닙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렇게 바쁩니까?”라고 물으면 모릅니다. “남들이 뛰니 나도 뜁니다. 남들이 저 방향으로 가니 나도 저 방향으로 갑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사람이 ‘내가 어디에서 와서 무엇을 위해 살다 어디로 가는가?’, ‘그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목표를 세우고 목표의 끝에 갔을 때 열매로 인해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그 길로 갑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이 그 길로 가니 나도 그 길로 갑니다.”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뛰니 나도 걷기 보다는 뛰어야 할 것 같아서 뜁니다.”라고 합니다. 다시 한 번 ‘내가 가는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후회함이 없는 결과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아니면 그때 돌아보면서 ‘아,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닌데.’라고 후회할까요? 그렇다면 참 비참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인생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목표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지?’에 대한 답을 줍니다. 이것을 알기에 우리는 2018년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면서 ‘인생을 살아갈 때 꼭 기억하고 살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시편 90편 6절에서 10절 말씀을 통해 세 가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우리 모두에게는 인생이 끝나는 시점이 있다

 많은 사람이 인생을 살아갈 때 자기의 인생에는 끝이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2018년의 마지막 주를 좋든 싫든 맞게 되는 것처럼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내 인생의 끝은 반드시 옵니다.
 지난 2018년에도 많은 계획과 목표를 세웠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목표와 꿈을 이루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꿈을 향해 가는 도중에 있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계획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 와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어느 선에 와 있든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끝이 나면 “끝!” 하고 맙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다면 이런 것을 다 이룰 수 있을 텐데.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라고 한다고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모래시계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모래시계에는 모래가 가득한데 뒤집으면 얇은 통로를 통해 모래가 많이 떨어집니다. 내 시간이 그 모래와 같습니다. 얼마가 남았는지 모릅니다. 수많은 모래가 담긴 큰 모래시계만큼의 시간이 남은 사람도 있고 작은 모래시계에 담긴 모래만큼의 시간이 남은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시간이 주어진 것처럼 생각하고 살다 내 시간이 별로 안 남아서 어느 순간엔가 끝나버리고 “올라와라.”라고 한다면 모든 것을 놓고 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나에게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과 분명한 것은 언젠가 우리의 시간이 끝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착하게 살았든 악하게 살았든 열심히 살았든 게으르게 살았든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했을 때는 사정을 보아주지 않습니다. 기다려 주거나 연장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끝이면 끝입니다. “끝!”이라고 하며 내 인생의 끝이 현실로 다가옵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살아야 됩니다. 많은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공통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오래 살았습니다.”라고 말씀하시더라도 느낌상으로는 잠깐 지나온 것 같다는 것입니다.
 제가 요즈음 청년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아이들이 얼마나 밝고 뛰는지 모릅니다. 그런 그들에게 저는 가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라. 금방 나처럼 된다. 나도 너네처럼 젊었을 때가 있었어. 꿈이 많고 열심히 재미있게 살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언제 지나왔는지 지금 이 모습으로 살고 있단다.”라고 해줍니다. 저보다 연세가 많으신 분들은 저에게 “목사님, 금방 갑니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결국 살고 보면 빠르게 지나간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습니다.
 추운 겨울 날씨입니다. 특히 요즈음에는 영하 10도 안팎으로 꽤 춥습니다. 게다가 습기가 있고 바람이 불면 우리는 더 춥게 느낍니다. 이것을 우리는 체감온도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체감온도로는 영하 10도를 영하 20도로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우리 인생도 체감인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체감시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100년을 산다고 했을 때 ‘100년’이라고 하면 긴 것 같아도 살아 보면 금방입니다. 금방 지나가고 나면 너무나도 인생이 짧게 느껴집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라는 제목입니다. 모세는 120세를 살았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오늘 본문 9절에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 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평생이라고 하면 얼마나 길게 느껴집니까? 그런데 그 평생이 순식간에 다했다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

이라고 했습니다. 요즈음에는 100수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시편기자는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진리입니다. 돌아보고 나니 우리 인생이 정말 슬픔밖에 없었던 것처럼 생각됩니다.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라고 시편기자는 또 말합니다. 시간이 얼마나 빠른지 우리가 날아가는 것처럼 생각된다는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시간이 날아간다.”는 표현을 쓰고는 하는데 우리 현실을 살아가는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나고 보면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가는지 모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합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죽음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지난 1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갔습니까? 지난 한 해가 길게 느껴셨습니까? 제가 이 제단에서 2018년을 맞이하며 송구영신 예배를 드렸던 것이 엊그제 같습니다. 2018년의 시작이라고 이야기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오늘 끝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것도 순식간에 지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시간을 헛되이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돈은 아낄 줄 아는데 시간은 아낄 줄 모릅니다. 사실 시간이 돈보다 귀한 것입니다. 시간을 귀하게 여기고 아끼며 살아야 합니다.

 둘째, 매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

 전도서 3장 1절에서 8절을 보면 때에 관한 교훈이 있습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때라는 것에 대해 교훈을 주는데 눈에 들어오는 말씀이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시간이 그렇게 빨리 지나간다면 언젠가 인생을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 인생이 끝났기 때문에 평가를 받아야 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안다면 매 시간 속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어느 청년이 상담을 하면서 “목사님, 저는 왜 이럴까요? 이렇게 해도 안 되고 저렇게 해도 안 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나는 왜 이런 모습으로 살아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도 해도 안 될 것 같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내 모습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어제 내가 무엇을 했는가가 오늘의 나를 결정합니다. 과거에 내가 어떻게 살았는가가 오늘의 나를 결정합니다. 과거를 반추해 볼 때 내가 게으르게 살고 잘못 살아서 오늘 이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면 오늘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을 통해 내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의 결과입니다. 내일 내가 멋진 모습으로 서 있기 원한다면 오늘 내가 달라진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내일의 열매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인생을 평가 받아야 할 시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시간에 얼마나 최선을 다하는가가 내가 하나님 앞에 선 시간이 두려움의 시간이 될지 기쁨의 순간이 될지를 결정합니다. 내 운명에 따라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가에 따라 하나님을 만나는 그 날이 기쁨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살다가 하나님 앞에 칭찬을 받는 인생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받는 평가는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칭찬 아니면 책망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우리는 양과 염소로 나뉩니다. 오늘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양의 모습으로 서게 될까요? 염소의 모습으로 서게 될까요? 사람들 가운데 섞여 있을 때에는 누가 양이고 염소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자이신 예수님이 오실 때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우리를 구분합니다. 양은 오른 편에 염소는 왼편에 서게 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오른편에 있는 양들은 복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왼편에 있는 염소는 저주를 받아 마귀와 그 사자들과 함께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이 누구는 양이고 염소라고 미리 결정을 해 놓으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어진 시간 속에서 얼마나 최선을 다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양과 염소로 나뉘는 중요한 단서에 대해 마태복음 25장은 열쇠가 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선을 행했는가? 선을 행하지 않았는가?’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양으로 분류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양으로 분류된 사람들이 “우리가 언제 주님께 그렇게 하였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지극히 작은 자인 어려운 자와 주변에 있는 자들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염소들로 분류된 사람들은 “우리가 왜 염소입니까? 왜 이런 저주를 받아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아니 우리가 언제 예수님을 만났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깨달아야 할 중요한 것은 염소의 부류에 들어간 사람들은 악을 행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쁜 짓을 하고 못되게 살았던 사람들이 아니고 이들이 염소로 분류된 이유는 모른 척 했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지 않고 모른 척 하고 자기만을 위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가만히 묵상할 때 우리의 가슴이 뜨끔해집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달려가는 것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하나님이 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을 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어려움 가운데 있는 이들을 도우며 그들에게 베풀며 은혜를 나누며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최선을 다해 사는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한 평생 열심히 살았습니다.”라고 한다고 해도 그것이 내 이기적인 생각으로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해 달려가는 인생이었다고 하면 그 인생은 의미 없는 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누군가 저에게 와서 “목사님, 저는 정말 성공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라고 할 때 저는 “성공해서 무엇을 하려고 하세요?”라고 묻습니다. “많은 사람을 돕고 어려움 가운데 있는 이들을 구제하며 돌보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라고 하면 제 마음 속에서부터 진심으로 그 분을 축복합니다. 만약 “나와 내 가족이 남부럽지 않게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면 그것은 저주입니다. 그렇게 사느니 가난하게 사는 것이 낫고 어렵게 사는 것이 낫습니다. 적어도 어려우면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 욕심을 따라 살고 나만 잘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면 성공하게 되어도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나와 내 가족을 위해 사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 저주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모른다고 사는 것이 저주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부자가 얼마나 똑똑하고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남들보다 금방 자기 곳간을 먹을 것과 재물로 채웠습니다. 그러나 만족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많이 가졌으면 많이 나누어야 되는데 곳간을 다 헐고 새로 지었습니다. 그리고 금방 다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이제는 여러 해 동안 먹고 살기만 해도 부족한 것이 없겠다. 이제는 즐기자.”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누가복음 12장 20절에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너의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가 먹지도 않고 열심히 쌓아 두었던 모든 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것은 대학을 못나와서가 아닙니다. 지혜가 부족해서도 아니고 남들보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자기의 시간이 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끝이 온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인생을 가치 있게 산다는 것에 대해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시간을 헛되이 사용하지 않는 것을 이야기하고 자기 욕심을 위해 살지 않고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공부해서 남 주니? 너 좋은 거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이 공부해서 남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사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들을 때 맞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부해서 남 주고 열심히 일해서 남 주어야 합니다. 성공해서 남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사는 방법입니다.
 인류역사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사람을 이야기하라면 솔로몬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전도서 3장 12절에서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다.”

라고 했습니다. 솔로몬 왕은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사람보다도 많은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좋다는 것을 다 먹어 보았고 가져 보았고 누려 보았고 하고 싶은 것 다 해 보았습니다. 여행도 가 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성공해서 해 보고 싶다는 것을 다 해 본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마지막에 남긴 이야기가 사람이 사는 동안 기뻐하고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행하고 쾌락을 즐기고 권력을 누리는 것보다 기뻐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가장 귀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지혜로 남겨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순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귀하게 여기고 그 시간 속에서 선을 행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내년도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가 올 한 해를 살면서 후회가 되었기 때문에 내년 한해에는 우리에게도 언젠가 끝이 오는데 그 끝이 오기 전에 주어진 시간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바른, 하나님의 사람들이 사는 방법입니다.

 셋째,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기억하라

 하루하루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지난 한 해를 살며 여기까지 온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다. 실패하는 것이 저주가 아닙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볼 때 교통사고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또 질병과 사고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질병에 걸리고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이 나쁜 일을 했거나 악인이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시간이 다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일을 하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마지막 주일에 일산광림교회에 모여 말씀을 듣고 한 해를 돌아볼 수 있는 모든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이것이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내가 하루를 더 사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까? 내가 하루를 창조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루를 더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덤으로 주신 기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면서 마치 내가 하루를 창조한 것처럼 당당하게 삽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하루를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따뜻한 공기와 햇살과 따뜻한 물을 주셨습니다. 모두 우리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주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태어날 때 내 의지대로 태어나는 사람이 있습니까? 죽을 때도 죽지 않고 하루를 더 살겠다고 한다고 하루를 더 살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도 결국 은혜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도 은혜고 살아가는 동안 마시는 공기도 은혜입니다. 아파트나 집에 살 때 전세를 내는 분도 있고 월세를 내는 분도 있습니다. 값을 치르고 내 집을 사는 분도 있습니다. 전기세도 내고 수도세도 냅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돈을 절약하기 위해서 전기를 아끼기도 하고 물을 아끼기도 합니다. 그러면 공기를 마시면 하나님 앞에 공기세를 내야 합니다. 햇빛을 받으니 세금을 내야 되지 않습니까? 땅을 밟고 사니 월세나 전세를 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감사한지 모릅니다.
 공짜가 은혜입니다. 공짜가 어떻게 보면 세상적인 말이지만 고상하게 신학적인 용어로 바꾸면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가 공짜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공짜로 거저 주셨습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공짜로 주어진 은혜입니다. 정부가 “전기세 내지 마세요. 물 값 내지 마세요. 다 은혜입니다.”라고 하면 정말 살기 좋은 나라에 왔다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그렇게 한 대통령이 누구이든 영원히 대통령이 되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의 왕이시고 모든 것을 공짜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감사한지 모르고 마치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삽니다. 오늘 우리는 인생을 살 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 가운데에 시간도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시간이라는 은혜에는 제한이 있습니다.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시간의 은혜만큼을 우리가 누리는 것입니다. 아직 젊으니 시간이 많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오늘 하루를 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인생을 사는데 있어 가장 보람 있고 가치 있게 사는 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3층 하늘에 올라가 보았습니다. 그러고 나니 세상적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던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위해서 돌에 맞고 채찍에 맞는 인생으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게다가 사도 바울은 돌에 맞고 채찍에 맞는 것을 즐거워했습니다. 정신이 이상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은 장차 받을 하나님의 영광에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지금 당하는 고난보다 장차 거두어들일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 알기 때문에 모든 세상일을 뒤로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체험을 통해 알게 되니 그의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인생을 살면서 결국 내가 인생을 다 살았을 때 가장 가치 잇게 남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내가 인생을 다 살았는데 가장 후회하고 ‘그러지 말 걸.’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죄짓는 것입니다. 두 가지가 분명해집니다. 내가 인생을 다 살고 나서 후회할 일은 죄 짓는 것이고 인생을 다 살고 난 뒤에 정말 가치 있다고 잘 살았다고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일입니다.
 요즈음에는 성적인 범죄를 참 많이 짓습니다. 자기의 거룩을 지키지 못하고 결혼하기 전에 이미 성적인 범죄를 짓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하기 싫은데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몰라서 자꾸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그게 왜 죄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성경이 죄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대답에 청년들은 “학교에서도, 친구들도 다 괜찮다는데 뭘 그걸 죄라고 하세요? 그리고 이것은 나의 프라이버시입니다. 건드리지 마세요.”라고 합니다. 제가 “프라이버시 좋아한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거룩한 것은 내 프라이버시를 이야기하는 그 시간에 거룩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거룩한 척 하는 것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나 혼자 있는 시간에 거룩한 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내가 프라이버시라고 이야기하는 그 시간이 떳떳한 사람이 거룩한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거룩하고 바깥에서는 거룩해 보여도 프라이버시라고 하는 시간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끔찍한 죄를 짓는다면 죄인입니다. 우리는 사실 내 프라이버시라는 시간을 어떻게 다스리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혼자 있는 그 시간에 거룩을 지켜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모르니 이 세상을 그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날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입니다. 히브리서 12장에서도 우리가 죄와 싸워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디가지 싸워야 합니까? 히브리서 12장 4절에서는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 되는 데 그렇지 않고 쉽게 타협합니다. 세상이 괜찮다고 하니 괜찮은 걸로 하나님의 말씀이 변질됩니다. 친구들이 괜찮다고 하니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결혼은 행복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거룩을 지키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다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괜찮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 것이 괜찮은 일입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안 보겠다고 하며 성경을 바꾸어 버리겠다는 시도들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의 모습은 바벨탑을 지을 때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그렇게 똑같은지 모릅니다. 물론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그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우리의 시간이 다 되어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 눈물을 흘리며 회개할 수밖에 없는, 후회할 수밖에 없는 일이 바로 지금 이 세대 가운데 일어나는 일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 안타까운 일도 있고, 억울한 일도 있고, 잘 한 일도 있고, 후회되는 일도 있습니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가운데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아무리 성공했다 할지라도 내가 죄와 타협하고 늘 죄 가운데 머물러 있었다면 그 인생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내년 한 해를 설계할 때 무엇을 생각해야 되겠습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일까?’,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게 사는 것일까?’, ‘어떤 인생이 가장 후회하지 않는 인생이 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내 거룩을 지키고 하나님 만나는 날 부끄럽지 않는, 진정한 기쁨의 날이 되어 하나님 앞에 칭찬 받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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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0
2019.8.18
유경동 목사
 히 11 : 1 - 4
 
649
2019.8.11
박동찬 목사
 출 12 : 29 ...
 
648
2019.8.4
박동찬 목사
 출 2 : 1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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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찬 목사
 딤후 4 : 7 - 8
 
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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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철 목사
 막 9 : 21 - 24
 
645
2019.7.14
박동찬 목사
 미가 6 : 6 - 8
 
644
20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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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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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3 : 13 - 18
 
642
2019.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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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엡 6 : 10 - 13
 
641
2019.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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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37 : 23 ...
 
640
20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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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 11 : 20 ...
 
639
2019.6.2
박동찬 목사
 히 11 : 8 - 12
 
638
2019.5.26
박동찬 목사
 히 11 : 1 - 6
 
637
2019.5.19
박동찬 목사
 요 9 : 1 - 7
 
636
2019.5.12
박동찬 목사
 엡 6 : 1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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