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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성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성도
설교날짜 2019.1.20
설교자 박동찬 목사
본문말씀 빌립보서 2 : 5 - 11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성도
 1. 사랑과 긍휼의 마음
 2. 겸손의 마음
 3. 책임감
 4. 감사와 신뢰의 마음


말씀 빌 2: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또는 본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면서 삽니다. 그래서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정작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행복보다는 분노가 가득합니다.
 현대는 과거의 어느 시대 보다 좋은 환경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속에는 분노가 점점 가득해 옵니다. 차를 타고 가다가도 누가 추월해 오면 난데없이 마음  에 숨어 있던 분노가 올라옵니다. 누가 무슨 말 한마디를 해도 분노가 올라오고 상황을 봐도 그렇습니다. 분노로 가득 차서 삽니다. 세파로 살기 힘들다 보니 원하는 것을 소유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마음속에는 기쁨이나 행복이나 감사함보다는 분노가 넘쳐 납니다. 그래서 손가락으로 누르기만 해도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이 분노입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이런 현대인의 모습을 어떻게 표현해야 되는가 생각하다 보니 떠오른 것이 “고장 난 기계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마음이 고장이 났습니다. 기계가 고장이 나면 오작동을 일으키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고장이 나서 기쁨이 주어지면 기쁨으로 받아 들여야 하는데 분노로 반응합니다. 좋은 환경이 주어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마음 상황 속에서는 어떤 여건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감사할 수도, 행복할 수도 없습니다. 기뻐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마음을 고쳐야 합니다. 그런데 가전제품 같은 기계야 수리하는 곳에 맡기고 고치면 되지만, 우리 마음은 도대체 어디에 가서 어떻게 고쳐야 될까요? 어떤 마음이 정상적인 마음일까요? 가장 행복하고 가장 기쁘고 가장 감사할 수 있는 표준이 되는 마음은 도대체 어떤 마음일까요? 오늘 성경은 예수님의 마음을 표준으로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인 빌립보서 2장 5절에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존재라면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됩니다. 그러다 보면 그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축복하십니다. 세상 여건에 따라 감사의 조건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뀌는 순간부터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고 진정한 인생의 기쁨이 무엇이고 행복이 무엇인지를 자각하며 사는 인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볼 때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첫째, 사랑과 긍휼의 마음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사랑과 긍휼로 사람을 대하기 위해서는 사람을 그런 존재로 인식해야 합니다. 사람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느낌이나 감정도 달라집니다.
 상대방이 사랑하는 가족으로 여겨지면 무슨 이야기를 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감정이 안 좋던 사람이 나에게 한 마디를 하면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해도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저 사람이 도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어 저런 이야기를 하지?’라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칭찬하는 이야기를 해도 비꼬는 이야기로 듣게 되고 마음이 상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대할 때 ‘저 사람을 내가 어떤 존재로 대할 것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을 대할 때 연약한 존재로 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니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삶을 살면서도 살아가는 것 자체를 힘겨워 합니다. 좋은 차가 있지만 그 차를 운전하고 가는 것 자체를 힘겨워합니다. 좋은 집이 있으면서도 그 집에서 사는 것 자체를 힘겨워합니다. 원하는 것을 소유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마음속은 더 공허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때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허세를 부릴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허세를 부리면 ‘저 사람이 잘 났으니 자랑하는구나!’라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그 속이 공허하다는 것을 보십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매우 연약하고 늘 실수투성입니다. 혼자 있을 때는 외로워 울면서도 사람들 앞에 서면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과시하기에 바쁩니다. 허세로 가득 찬 인간의 모습을 볼 때 ‘참 인생을 그렇게 사는 것이 의미가 없는데 저렇게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안쓰럽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보실 때 연약한 존재로 보시기 때문에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게다가 인생이 그렇게 살다가 끝난다고 하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의미 없이 자기 자신을 속이면서 외식하는 모습으로 살다가 마지막 날에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살다가 멸망의 길로 떨어지는 인간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마음이 아픕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해 내시기 위해 위로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으로 붙들어 주셨습니다.
 예배가 끝나면 가끔 아기를 안고 와 “목사님, 안수 기도해 주세요.”라고 합니다. 그때 엄마 품에 안긴 아이는 태어난 지 한 달이 되기도 했고 50일이나 100일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 작은 아이들의 표정을 보면 세상 근심 걱정이 하나도 없습니다. 얼마나 평온한지 평화라고 하는 단어는 그 아이들에게 붙여야 될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엄마의 품에 평온하게 안겨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엄마의 품 안에 안겨 평안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를 정작 안수기도 하는 저는 그 평온한 아이를 보면서 ‘불쌍하다.’라는 마음이 듭니다. 안쓰럽습니다. ‘지금은 평온해서 좋겠지만 세상을 알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너는 괴로워해야 된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평온한 것도 1년입니다. 돌이 되고 걷기 시작하면 고집과 아집이 생기고 무언가를 소유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뜻대로 안 되면 길바닥에도 드러눕는 것이 아이들입니다. 그러면서 떼를 씁니다. 초등학교에만 가도 학생들이 살기 싫다고 합니다. 세상이 너무 힘들다고 합니다. 살아갈 날을 생각하니 너무 힘들고 살기 싫다는 것이 초등학생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이 생각이 없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상황을 다 아십니다. 제가 어린 아이들을 보며 안쓰러운 마음을 갖듯이  제 안에서 성령님이 ‘내가 보기에는 너도 안쓰럽다.’라는 말씀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이 다 거기서 거기고 연약하기 때문에 실수합니다. 잘난 척 하지만 사실 잘난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 그렇게 연약한 존재로 살아갑니다.
 마가복은 6장에 보면 예수님 앞에 많은 사람이 모여옵니다. 34절에서 예수님은 그들에 대해

예수께서 나아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관점에서는 다 불쌍한 존재로 보입니다. 그들 중에는 남들보다 돈을 좀 더 가진 사람도 있겠고 성공한 사람도 있겠지만 나아오는 모습을 볼 때 모두 불쌍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면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분입니다. 세상의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볼 때는 “가진 것도 없으면서 누가 누구를 가르쳐? 무슨 위로를 어떻게 한다는 거야?”라고 하며 비웃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 앞에 모여왔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에게는 사랑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며 사람들과 관계를 맺다 보면 사랑의 마음, 긍휼의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사라들이 모입니다.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예수님을 의지하듯이 의지하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많은 것을 가지지 못했다 할지라도 마음이 넉넉하고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하는 사람들 즉

“우리는 다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서로 긍휼히 여기며 살아야 됩니다.”

라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모여와 힘을 얻고 위로를 얻습니다. 그 속에서 진정한 기쁨과 감사와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많은 것을 가져야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 넉넉한 마음과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고 그 마음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내가 사람을 적으로, 경쟁자로 볼 때는 무엇을 소유해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내 가족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 생각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대할 때 마음속에 늘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둘째, 겸손의 마음

 예수님의 성품 중에 가장 불가사의한 성품이 바로 겸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신화를 읽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많은 신의 전쟁과 이야기, 힌두교에 나오는 많은 신을 책을 통해 보며 어떤 신에게 어떤 특징이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다 우상이지만 세계의 많은 사람이 자신들의 신으로 섬깁니다. 그런데 세상이 이야기하는 수많은 신의 공통된 특징은 절대 겸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때론 자신들 마음대로 심술을 부리기도 하고 행패를 부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 신들을 섬기는 사람들의 공통된 점은 신을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풍랑이 불면 신이 노해서 그렇다고 하고 홍수가 와도 가뭄이 들어도 신이 노해서 그렇다고 하며 벌벌 떨며 제사를 지냅니다. 감사의 제사가 아니라 두려움의 제사를 지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성품의 특징을 이야기하며 겸손을 말합니다.
 빌립보서 2장 6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부분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내 성품은 이렇다.”, “내가 너희를 이렇게 사랑한다.”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성품을 가늠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우상 숭배하는 수많은 세상의 신과 똑같은 신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두려움의 제사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아무리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셔도 알지 못하니 “너희 눈앞에 실제로 만질 수 있는 존재로 나타나 내 사랑이 어떠하고 성품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겠다.”하시고는 이 땅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오셨지만 실상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어떻게 그 하나님이 겸손하셔서 인간을 섬길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인간 앞에서 그렇게 겸손한 모습으로 살아가실 수 있었을까요? 신이 인간 앞에 겸손하다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사실 이해가 그렇게 쉽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겸손하신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도자기 굽는 도예가라 불리는 사람들을 보면 물레를 돌리면서 도자기를 예쁘게 여러 모양으로 빚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조각을 하고 색을 입히기도 해 800정도에서 초벌구이를 하고 나중에 1200도 이상 되는 온도에서 재벌구이를 합니다. 그러면 아름다운 작품이 나옵니다. 그런데 도자기의 장인을 보면 아름다운 청자 등을 요리조리 보다가 망치를 들어 깹니다. 저는 이해가 되니 않았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티가 있어서 명품의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저는 ‘그냥 날 주지, 왜 깨지? 가져다 잘 쓸 텐데. 아무리 봐도 멋있고 좋은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전문가의 눈에는 깨야 될 대상으로 보입니다. 도자기를 깰 때 “깨지 마세요. 그걸 왜 깹니까?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낭비입니다.”라고 하면 “당신은 당신 일이나 하세요. 내거 내 마음대로 하는데 무슨 상관입니까?”라고 할 것입니다. 도예가가 도자기를 깨는 것이 죄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예가 뿐 아니라 예술을 하는 사람 모두가 그렇습니다. 화가도 미술 작품도 그림을 그리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찢어 버립니다. 내 작품에 대해 내 마음대로 하는데 관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눈에는 실패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불량품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사람조차도 도자기를 깨고 그림을 찢어 버리듯이 마음대로 처분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연약한 사람에 대해서는 더 사랑과 겸손의 마음을 가지고 격려하고 위로하십니다. 예수님의 그런 겸손한 모습을 보면서 불량품처럼 보이던 인생이 변화되고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로 서게 되며 명품으로 만들어져 갑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 앞에 겸손하셨다.”는 것을 생각할 때 오늘 우리가 왜 교만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늘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시기도 하고 제자들을 기다려 주시기도 하고 제자들을 이해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고 하면 이 겸손을 본받아야 합니다.
 잘난 척 한다고 세상 사람들이 나를 잘나게 봐주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 잘난 척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이 좋고 마음이 설렙니까? 아닙니다. 가까이 하다가도 좀 잘난 척을 하면 “내가 저 사람을 오해했어. 다음부터는 저 사람이랑 가까이 안 할 거야.”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세상 사람들 앞에서 잘난 척 할 때가 매우 많습니다. 모순입니다.  ‘잘난 척 하면 할수록 사람들이 나를 정말 잘난 존재로 인정해 주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평가 절하합니다. “저 사람 잘난 줄 알았는데 아니야. 못난이야. 속이 좁아.”라고 합니다. 그러나 잘났음에도 부룩하고 겸손하면 그 사람의 진가가 더욱 드러납니다. 그리고 진짜 자신 있는 사람은 잘난 척 하지 않습니다. 겸손합니다. 빈 깡통이 요란다는 말이 맞습니다. 우리가 잘난 척 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예수님도 겸손하셨는데.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 2019년 한 해에 겸손을 연습해야 합니다. 겸손한 척 하는 것은 연습이 아닙니다. 실제로 겸손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낮아져 다른 이들을 섬기는 것을 연습해야 합니다. 교만해서 좋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복에 복을 더해 주신다는 성경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2019년 한 해에는 겸손하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

라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셋째, 책임감

 예수님은 책임을 다하는 분이셨습니다. 사람이 어떤 일에 책임을 진다는 것은 참 훌륭한 일입니다. 그런데 막상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서 책임지기를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책임을 진다는 것은 상응하는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되고 벌을 받기도 하며 벌금을 물기도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책임을 지기가 싫습니다. 이런 면에서 어떤 일에 대해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은 진정한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녀를 교육할 때 책임감 있는 자녀가 되기를 원합니다. 또 용기 있는 자녀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너는 용기 있게, 책임감 있게 살아야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살아보니 그것이 힘듭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우리는 그렇게 못 살 때가 많습니다. 책임감을 지지 못하고 살아가고 늘 회피합니다. 무슨 잘못이 있으면 “저 사람 때문에 그랬습니다.”라고 합니다. 내가 물 컵을 떨어트려도 “이 사람이 미끄러운 물 컵을 줘서 떨어트렸습니다.”라고 합니다.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도 시인하지 않고 늘 남 탓을 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어려운 것도 기도하지 않고 바르게 살지 못한 내 탓이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책임적인 자아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떼려고 해야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십자가는 용서의 상징이고 죄 사함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십자가를 바라볼 때 십자가는

“내가 너희들의 실수, 너희들의 죄에 대해서 책을 진다.”

는 것입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십자가는 죄요 용서요 회개의 상징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는 책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기도하셨고 십자가를 지고 힘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갈 때에도 책임을 다하시기 위해 그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셔서 책임을 다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내가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져야할 책임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 대해 책임을 진 것처럼 너희도 세상과 자연과 환경과 교회와 가정과 자녀와 성도들에 대해 책임적인 존재로 살아야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모습입니다. 책임지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지며 살아갈 수 있는, 책임지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요즈음에 세상이 어려워집니다. 무엇이 죄고 무엇이 선인지를 구분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청년들은 갈팡질팡합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고 교회는 빛을 잃은 것 같습니다. 소금의 맛을 잃은 것이 오늘날의 교회인 것처럼 보입니다. “원인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많은 장로님이 “목사님들 때문입니다.”라고 합니다. 장로님들은 “목사님 때문에 되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성도님들은 “이도 저도 다 싫습니다.”라고 합니다. 그 누구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서로에 대해 누구 때문이라고 탓하는 것만 좋아합니다. 그렇게 탓하는 것으로 세상이 달라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을 돌아보면 비난하고 따지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은 많고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러나  책임지려고 하는 존재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적어도 세상 앞에서, 어떤 문제 앞에서 책임을 회피하지 않아야 합니다. “응당 내가 해야 될 일이라면 그 몫을 감당하겠습니다.”라는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 바르게 인생을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그래서 책임을 다하며 살아야 합니다. 내가 책임을 다하려고 할 때 그것으로 인해 세상에서 손해 볼 때가 있습니다. 회사에서도 내가 책임을 지려고 할 때 손해를 보고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그런 어려움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30배, 60배, 100배로 갚아주십니다.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되게 하시는 은혜를 보게 됩니다. 내가 잘못해서 피해를 입는 것이 아니라

“내가 책임을 지고 내가 진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내가 감당해야 될 몫을 감당하겠습니다.”

라는 자세로 나아가는 자에게는 지금의 어려움이 어려움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이 사는 방식입니다.

 넷째, 감사와 신뢰의 마음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가졌고 그것을 잃어버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릴 때도 예수님은 먼저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 내가 알았습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감사입니다. 이 예수님의 감사는

“하나님을 나는 100% 신뢰합니다.”

라는 것으로부터 비롯되는 감사입니다. 아직 나사로가 살아나지도 않았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명령하기도 전이지만 먼저 나사로가 살아날 것에 대해 신뢰하며 감사를 드리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모든 기적의 이야기는 순종에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순종이 쉬운가 하면 쉽지 않습니다. 이런 순종은 오늘 예수님이 보여 주신 이런 감사와 하나님을 향한 100% 신뢰의 마음이 있지 않고서는 힘듭니다. 그래서 내가 정말 기적을 보려고 하면 그 출발점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제가 지난 연합 속회 때

“올해는 그저 감사하며 사세요. 하루에 100번 이상씩 의식적으로 감사하세요. 200번 감사하면 더 좋고 300번을 하면 더욱 더 좋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감사하다 보면 신뢰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감사하다 보면 믿음이 생깁니다. 감사하다 보면 그 감사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기적의 역사를 부어주십니다.
 신앙생활의 시작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보니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감사하게 여겨지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그래서 감사를 배우기 시작하고 그래서 매일매일 매 순간 감사하는 것입니다. 오늘부터라도 하루에 100번 이상씩 감사해야 합니다. 길을 가면서도 “감사합니다.” 자녀를 보면서도 한 번 안아주고 “감사합니다.” 성도들을 보면서도 “감사합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이런 분도 있어서 감사하고 저런 분도 있어서 감사한 것입니다. 어떤 성도님은 “감사하려고 해도 저는 저 성도가 너무 미워요. 감사하다가도 저 성도 얼굴만 보면 감사가 아니라 분노가 솟아나요.”라고 합니다. 그럴 때도 감사해야 합니다. “저 분을 통해 나를 다듬어 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속이 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래도 너보다는 저 사람이 더 나아.”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저 사람 때문에 신앙생활이 정말 힘들었습니다.”라고 하니 “내가 볼 때는 저 사람이 너보다 10배는 더 나아.”라고 하시면 무슨 창피입니까? 누가 더 나은지는 우리가 평가할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나를 때로 나를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저 분을 통해 나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구나! 나를 다듬고 계시구나!’

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 사람이 나의 스승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통해서 내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저 사람으로 인해 감사합니다.”

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매일 매 순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하루에 의도적으로 100번 이상씩 감사해야 합니다. 자꾸 감사하다 보면 어느 틈엔가 내 눈 앞에 펼쳐지는 모든 상황이 감사의 상황으로 바뀌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고 사는 것은 매우 귀한 일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냥 먹고 살기도 힘들어요.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겸손하게 살고 책임도 져야 하며 용서와 감사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야 됩니까?”라고 묻는다면 “힘드니까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아서 힘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보면 환경이 변하고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2019년도를 살아가는 데 있어 마음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이것이 전부라고 이야기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져야 될까요? 사람들 앞에서는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 앞에서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늘 감사와 신뢰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기적의 역사가 열리는, 놀라운 축복의 2019년 한해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랑과 이 은혜로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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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3
박동찬 목사
 누가복음 2 ...
 
616
2018.12.16
박조준 목사
 시편 23 : 1...
 
615
2018.12.9
박동찬 목사
 누가복음 1 ...
 
614
2018.12.2
박동찬 목사
 이사야 9 : ...
 
613
2018.11.25
박동찬 목사
 롬 5 : 5 - 8
 
612
2018.11.18
유경동 목사
 벧전 1 : 1 ...
 
611
2018.11.11
박동찬 목사
 창 3 : 8 - 12
 
610
2018.11.4
박동찬 목사
 시편 1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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