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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나님이 주목해 보는 사람  
 
하나님이 주목해 보는 사람
설교날짜 2019.2.3
설교자 박동찬 목사
본문말씀 왕상 1 : 15 - 21
 

 


하나님이 주목해 보는 사람


1. 감사와 찬양이 끊이지 않는 사람  



2. 해야 할 일을  피하지 않는 사람 

 


3. 진심으로 회개하는 사람 
 




열상 1:15-21
밧세바가 이에 침실에 들어가 왕에게 이르니 왕이 심히 늙었으므로 수넴 여자 아비삭이 시중들었더라 밧세바가 몸을 굽혀 왕께 절하니 왕이 이르되 어찌 됨이냐 그가 왕께 대답하되 내 주여 왕이 전에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여종에게 맹세하시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반드시 나를 이어 왕이 되어 내 왕위에 앉으리라 하셨거늘 이제 아도니야가 왕이 되었어도 내 주 왕은 알지 못하시나이다. 그가 수소와 살찐 송아지와 양을 많이 잡고 왕의 모든 아들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군사령관 요압을 청하였으나 왕의 종 솔로몬은 청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내 주 왕이여 온 이스라엘이 왕에게 다 주목하고 누가 내 주 왕을 이어 그 왕위에 앉을지를 공포하시기를 기다리나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내 주 왕께서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나와 내 아들 솔로몬은 죄인이 되리이다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이 어떤 대하소설을 읽는 것보다 재미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인간사를 알려고 하면 삼국지를 읽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삼국지나 어떤 역사 소설보다 적나라하게 인간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이 되기 위해 암투를 벌이고, 모사를 꾸밉니다. 때로는 의리를 지키는 사람이 있는 반면 배반을 하는 사람이 있는 등 이런저런 인간사의 모습이 생생하게 성경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어보면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어떨 때 어떻게 처신해야하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이 늙어서 죽을 때가 되니 여러 아들들 사이에서 왕위 쟁탈전을 벌이는 상황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다윗의 여러 아들 중에 아도니아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죽으면 자신이 제일 따르는 사람이 많고 나이가 많으니 왕이 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 다윗이 죽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제사장들을 모으고 군대 장관이었던 요압도 끌어들이고 형제들에게도 ‘내가 왕이 될 테이니 내 앞에 무릎 꿇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솔로몬과 밧세바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 이야기는 ‘너희들은 적이다.’ 한쪽 편으로 선을 긋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때쯤 되니 나단 선지자가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를 찾아가서 “이제 저 아도니아가 왕이 되면 당신과 당신 아들은 죽음을 면치 못할 상황이 벌어지는데 왜 이대로 있습니까? 당장 다윗에게 찾아가 다윗에게 당신이 예전에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겠다고 한 약속을 상기시켜 주어야합니다.” 하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자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한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가 다윗을 찾아가 이야기합니다. “지금 아도니아가 왕이 되려고 하는데, 당신이 예전에 내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되게 해 준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아도니아가 왕이 되면 나와 솔로몬은 죄인이 될 것입니다. 어쩌면 역적으로 몰려 죽게 될 지도 모릅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본문 20절에 보면, 백성들은 이 상황이 어떻게 펼쳐질지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누가 왕이 될지 모두 주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다윗의 아들이었던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이제 또 상황이 어떻게 될지 주목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꼭 누군가를 주목합니다. 상황이 어떻게 될지 보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어떤 때는 누군가가 나를 예의주시하는 것이 기쁨이 될 때도 있지만 어떨 때는 부담스러울 때도 있고, 그래서 그것들 무시하고 내 길을 가자니 좋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운한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이라는 존재는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고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떠오른 생각 중에 하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목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보다 하나님의 주목을 받으며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셔야할 줄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사람을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통해 큰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다윗은 한 번도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쓴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삶의 모습을 보면 늘 하나님이 다윗을 주목해보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주목해보셨기 때문에 다윗은 왕이 되고자 암투를 벌이고 모사를 꾸미고 책략을 꾸미고 누구를 속이거나 아프게 하거나 죽일 계획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러지 않았음에도 하나님은 다윗이 자연스럽게 왕의 자리에 앉게 만드셨고 위대한 왕이 되도록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내가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식되느냐 그것에 따라서 내가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세상적인 생각입니다. 다윗은 그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의 삶이 온전히 하나님만을 바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목을 받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큰 일을 행하는 자로 세워졌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중요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시느냐’입니다. 이 말씀을 중심으로 ‘다윗이 어떤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의 주목을 받는 존재가 될 수 있었을까?’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주목을 받고 하나님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하나님 도우심 가운데 큰일을 이루시는 복 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첫째로, 다윗의 삶을 살펴보면 감사와 찬양이 끊이지 않았던 사람임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어려서 양을 치는 목동의 시절에도 항상 감사 찬양을 했습니다. 사울 왕이 죽이려고 할 때 도망 다니던 어려운 시절에도, 왕이 된 다음에도, 다윗은 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항상 감사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감사와 찬양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보통의 경우는 나에게 좋은 일이 이루어질 때 감사하고 찬양을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평범한 시절에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찬양을 올려드렸습니다. 어려서 목동으로서 양을 치는 것이 뭐 그리 감사한 일이겠습니까? 형들도 많은데 왜 맨날 아버지는 나에게 양떼를 치라고 양떼를 맡기는지, 내가 막내라고 맨날 푸대접을 받아도 되는 것인지 그런 것에 마음이 아팠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은 늘 감사와 찬양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찬양의 특징은 세상적인 조건에 따라 감사하거나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존재에 대해 기뻐하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고 찬양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느 때 감사합니까? 승진할 때 감사하고 좋은 일이 있으면 감사하고, 대학에 합격하면 감사하고, 건강 회복되면 감사하고… 보통 사람들은 조건에 따라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감사보다는, 평소에 모든 일이 하나님 은혜임을 고백하는 감사를 원하십니다. 일어서고 앉는 것조차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고백을 받기 원하십니다. 다윗의 찬양은 한 마디로 진짜 찬양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 존재로도 당신은 찬양받기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다윗에게는 감사이고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늘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다윗은 그 자체로 복된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찬양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축복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찬송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빛 되신 하나님이 오시니 악한 영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찬양을 할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찬양을 하면 사울에게 붙었던 악신이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윗의 찬양은 노래가 아니라 진정한 찬양이었기 때문입니다. 조건에 따라 부르는 찬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찬양을 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빛이 임할 때 어둠이 떠나가는 것처럼 우리가 찬양을 할 때 어둠이 떠나가고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여호사밧이라는 왕이 있는데 이 여호사밧 왕도 전쟁을 치르게 될 때 군대를 제일 앞서서 내 보내는 것이 아니라 군대 앞에 찬양대를 조직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들었어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져서 전쟁을 하지도 않았는데도 적들이 지리 멸렬해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은 승리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올려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고 그래서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내 삶의 모든 문제들을 내가 해결해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제일 먼저가 되어야합니다. 그럴 때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고, 열리지 않던 축복의 문도 우리의 찬양으로 말미암아 활짝 열리는 역사를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찬양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고, 당신을 향한 마음을 주목해 보십니다. 다윗이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다윗을 주목해보셨고, 다윗을 통해 놀라운 일들을 이루셨음을 믿습니다. 


  두 번째로, 다윗은 해야 할 일을 피하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 같이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점입니다. 성공한 사람들, 큰 일을 이룬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 차이점은 특별한 일이 있을 때 그것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귀찮고 힘들어도 그 일을 합니다. 해야 할 일이면 힘들어도 행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닥쳐도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할 때는 그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가장 평범한 진리 가운데 하나가 무엇입니까? 심지 않으면 거두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어떤 열매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적이나 축복은 내가 아무것도 안하는데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심지 않으면 거두지 못한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기적은 우리가 하나를 심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이 30개, 60개, 100개가 되게 하신다, 오병이어가 오천 명을 먹이고 남는 기적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작은 것이라도 심게 될 때 그것에서 거두는 역사를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시편 126편에 보면,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가 기쁨으로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힘들고 귀찮다는 것입니다. “나가기 싫어요. 몸이 아파요.” 그러니 그 일을 하려고 하니 눈물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눈물이 난다고 해서 그 일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짐을 짊어지고 나아가 씨를 뿌리면 지금은 힘들지만 뿌린 대가를 거두게 된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쳐줍니다. 다윗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고 하면 귀찮더라도 회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이야기가 바로 골리앗과의 싸움입니다. 다윗은 골리앗과 마주하고 있는 전쟁터에 용사로 간 것이 아닙니다. 전쟁의 군인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형들에게 도시락을 갖다 주려고 간 것이지요, 현장에서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모독하는 골리앗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 소리를 다윗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 군사가 들었습니다. 그 모독하는 소리를 들으며 어찌 저럴 수 있느냐 며 모든 사람이 분개했습니다. 하지만, 차이는 다윗만이 일어나 싸우러 나갔다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분개만 하고 있었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나라도 싸워야겠다.’며 일어나 나간 용사가 다윗이었습니다. 어쩌면 다윗도 모른 척하고 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니지. 저 사람은 키도 큰데 싸웠다간 내가 죽을 것 같다. 우리 아버지가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 그랬는데 나도 그냥 참자. 못 들은 척하자.’ 그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잘난 척하다가 다칠 수 도 있고 내가 평생 후회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는데 괜히 나섰다가 잘못되면 어떡해?’ 또 다른 경우에는 ‘그냥 모든 것이 귀찮아. 여기까지 걸어오느라고 힘이 다 빠졌어. 이제는 싸울 힘도 없어.’ 하며 이것저것 핑계를 대며 가만히 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를 조롱하는 것이라면 내가 참을 수 있지만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조롱하는 저 소리는 내가 참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 자리에서 나서지 않아도 그 누구도 다윗을 비난할 사람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런 골리앗 앞에서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잠잠하지 않았습니다. 담대히 섰습니다.  

 

  여러분, 평소에 아무 일 없을 때 떠들고, 정작 말해야 할 때는 침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행동하지 말아야 할 때는 무엇인가 대단하게 행동할 것처럼 하지만, 막상 행동해야 할 때는 행동하지 않고 침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중요한 일이라면 그 일이 내 일이 아니어도 나설 수 있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사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그것이 나에게 고난이 되고 위기가 되고 역경이 된다 할지라도 내가 감당하겠노라.’ 며 다윗처럼 일어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세상에서는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보고 어리석다고 이야기합니다. 왜,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도 않는데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삽니까? 어리석은 일이지요. 그런데 세상을 살면서 나에게 유익이 되는 일만 추구하고 사는 것이 과연 잘 사는 길이겠는가? 그것이 바르게 사는 길이겠는가? 우리가 자녀들에게도 바르게 살아야한다 의를 위하여 살아야한다 정직하게 살아야한다 이야기 합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의 이익만을 위하여 살아간다고 하면 그것이 과연 바르게 사는 길이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옳은 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은 칭찬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을 보면 10절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내가 잘못해서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옳은 일을 하다가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복이 임하느냐?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라’가 무슨 뜻입니까? 옳은 일을 위해서 피하지 않고 희생을 감수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은 이것이 무모한 도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믿음의 사람이 보여야할 태도를 다윗이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여러분 적극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인생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대충 되는 대로 사는 사람들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올 한 해를 살면서 성도님들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칭찬 받을 일이 있는가?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 큰 것 내 생명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작은 일 하나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올 한 해 이것만큼은 내가 붙잡고, 지키고, 귀찮고 힘들더라도 감당하고 살아야겠다.’ 결단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 일을 행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언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한 가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고민하세요. 그러고 그저 세상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이것 한 가지를 꼭 실천하며 살 때 하나님의 눈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자에게 가고, 하나님이 주목해보시는 사람은 결국 인생에서 후회하지 않고 복된 인생을 살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도 오늘 다윗처럼 그 축복의 자리에 서게 될 때, 하나님은 그런 성도님들을 붙잡으시고 놀라운 일들을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세 번째로, 다윗이 주목을 받은 이유는 다윗은 회개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가장 사랑하셨던 부분, 다윗을 놓을 수 없었던 부분 중에 하나가 있다고 한다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합니다. 그 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나와서 회개를 하느냐 안 하느냐 입니다. 이것이 정말 용기 있는 사람이 취해야할 태도입니다. 요즘 교회 다니는 분들의 가장 큰 문제는 남의 잘못은 지적하지만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를 비롯하여 말씀드립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도 자기 방어 기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잘못했다고 하면 그것을 방어하고자 하는 마음이 본능적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합리화를 하고 회피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방법을 가지고 자신을 보호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앞에서든 하나님 앞에서든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인정할 줄 알아야합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아요. “잘못된 것입니다.” 이야기하면 “내 생각에는 아닌 것 같다.”고 오히려 이야기한 사람에게 반문합니다. “그것이 왜 잘못입니까? 요즘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삽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잘못입니다. “성경에 그것이 잘못이라고 되어있지 않습니까?” 하면 성경 말씀조차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과거의 가치관입니다. 지금 시대와 맞지 않습니다. 현대 생활에는 맞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가 옳은 이야기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진리의 말씀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평가가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분위기나 시대적인 사조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재판장에 죄인의 몸으로 섰을 때 판사들이 이야기하는 중에 “판사님 제 생각에는 판사님이 틀린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얼마나 웃지 못 할 상황이겠습니까.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저는 사탄의 전략이 얼마나 놀라운지요.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다 장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안 지켜도 된다는 생각을 머릿속에 부어주었습니다. 젊은이들의 머릿속도 장악하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까지도 부인하게 만들고 그것이 시대에 맞지 않는 일이니 이제 성경을 바꿉시다. 현대적으로 성경을 재해석해야합니다.’ 이런 움직임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볼 때, 이 시대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사탄의 계획이 얼마나 참 놀라운지요. 그럴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끝까지 의의 길을 걸어가면서 성경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군가 제게 “목사님,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한 가지 선물을 구하라고 한다면 어떤 것을 구하시겠습니까?” 하며 생각하게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성도님들은 어떤 선물을 구하시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세상적인 성공을 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돈 많았으면 좋겠고, 육신이 약한 사람은 건강했으면 좋겠고, 영적으로 민감하신 분들은 어떤 은사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하실 것입니다. 은사에도 종류가 많으니 “어떤 은사를 원하십니까?” 하면 “저는 방언 통역을 했으면 좋겠어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으니 그런 은사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언의 은사가 멋진 것 같아요. 누구를 보며 당신의 미래가 어떨 것 같습니다. 하며 예언해주면 멋지지 않습니까? 대단히 신령해보이기도 하고, 예언의 은사는 멋진 것 같아요.”, 어떤 분들은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가 있으면 좋겠어요.” 어떤 사람은 “손을 얹으면 병이 낫는 치유의 은사가 있으면 좋겠어요.” 하는 등 이런 것 저런 것 많이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에게 스스로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선물을 주신다면 무엇을 구한다고 할 것인가. 그 중에 제 마음을 끄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치유의 은사입니다. 정말 치유의 은사를 받고 싶어요. 그래서 아픈 성도님들 오시면 제가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할 때마다 치유가 일어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 다음 순간에 제 마음을 때리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치유의 은사 다음으로 죄에 민감할 수 있는 은사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죄에 둔감한 자가 아니라 예민한 사람입니다. 어느 시인의 고백인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에서처럼 그 작은 움직임에조차도 이것이 죄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이 아니라면 그것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돌아설 수 있는 죄에 대한 민감성의 은사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왜냐하면 이것이 제 생명을 보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에 하나님의 수많은 일꾼들, 사역자들, 놀라운 일들을 행하던 성령 사역자들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놀라운 성령의 사역자들이 기도 많이 하는데 왜 넘어집니까? 약한 인간이기에 그렇습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칭찬을 받고 잘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자신이 잘난 줄 압니다. 놀라운 사역을 감당하다보면 처음에는 겸손했지만 어느 순간 자기 스스로가 대단한 사람인 줄 착각을 하게 됩니다. 나중에 자신이 잘못하는 일에 대해서도 그것이 잘못이 아니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이제 말이 되지 않는 일을 말이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실수하고 넘어지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사울 왕입니다. 사울이 처음에 왕으로 발탁되던 때에 얼마나 겸손했는지 모릅니다. 자신은 할 수 없다며 짐짝 뒤에 숨어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사울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사람들의 칭송을 받게 되자 “나는 왕이니 뭐든지 해도 돼.”, 사무엘 선지자가 오는 시간이 늦어지니까 자신이 왕의 신분으로 제사를 지내며 ‘나는 왕이니까 괜찮다.’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모릅니다. 결국은 하나님 앞에 버림받았습니다. 왕이 되고 버림받는다는 것이 축복이겠습니까? 축복이 아닙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순수하고 열정적이고 하나님을 사랑했던 다윗이었지만 왕이 되고 보니 실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충직한 부하의 부인을 탐하게 된 것입니다. 누가 봐도 잘못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왕이니까 괜찮을 거야.’ 라는 생각을 사탄이 넣어줬습니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게 되고 그 일을 덮으려고 하다 보니 결국은 충직한 부하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살인죄까지 짓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과 다윗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다윗은 철저히 하나님 앞에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왕이었지만 나다나엘이라고 하는 이름 없는 선지자가 와서 “왕이시여. 왕이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얘기할 때 그것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합리화시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왕인데, 너는 누구인데 와서 나에게 이렇게 무례하게 이러느냐”라고 하고 나다나엘의 말을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회개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편 51편의 말씀이 이런 상황 속에서 나온 다윗의 ’회개의 고백’입니다. 이 ‘회개의 고백’을 가만히 보면 ‘나는 죄악 중에 출생했습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죄악 덩어리입니다. 그러니 내 마음에 정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나를 완전히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그러면서 죄의 결과가 멸망인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인 것을 압니다. 그래서 “나에게서 성령을 거두지 마시옵소서. 나를 벌하지 마시옵소서. 나를 버리지 마시옵소서. 통회하는 마음을 외면하지 말아주소서. 내가 간절한 마음으로 울며 회개합니다.”라고 합니다. 그런 마음이 이 시편 51편 가운데 담겨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보통 성도님들이 죄 얘기를 하면 우리가 갑자기 마음 문이 닫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얘기를 들으면 때로 우리 마음속에 싹트는 생각이 “나는 다윗 같은 그런 짓은 안 했으니까 나는 괜찮지. 나는 다윗만큼 악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 나 정도면 괜찮을 거 같아.”라는 생각입니다. 그 생각이 더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러니 나는 회개하지 않아도 돼. 내가 지금 짓는 이 정도의 죄는 죄도 아닌 거야. 적어도 다윗 정도의 죄를 지어야 그것이 죄다.” 이러면서 우리는 회개할 기회도 없이 멸망의 길로 갑니다. 그렇게 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님들이 기도하실 때 “하나님, 내가 고쳐야 할 것, 내가 습관적으로 짓고 있는 범죄함이 있다고 하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2019년도에는 죄의 길이 아니라, 죄의 습관을 끊어버리고 거룩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회개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 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죄의 길에서 돌아서기 싫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 정도가 뭐가 죄라 그러나.’ 계속 죄의 자리에 머무르고 싶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유혹은 절대적으로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올 한 해 죄의 습관을 끊어버리시고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윗은 왕의 신분이었지만 자신의 죄 앞에서 펑펑 울며 회개했습니다. 다윗은 왕이라는 신분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왕의 신분과 체면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회개했기에, 그런 다윗을 하나님은 주목해보셨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나를 주목해보느냐 칭찬하느냐 그것은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주목해보시고 칭찬하신다 하면 얘기는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왜 하나님이 다윗을 주목해 보셨습니까? 다윗은 늘 감사하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찬양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피할 수 있는 자리도 피하지 않고 그 일을 내가 감당하겠다고 누구보다 나서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자신이 왕이든 아니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회개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다윗이었기에 하나님은 다윗을 존귀하게 만드시고 위대한 왕으로 세워주셨다고 하는 것을 오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2019년 한해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꿈이 무엇이고 목표가 무엇입니까? 세상의 허탈한 거 구하지 마시고 ‘나도 다윗처럼 살겠습니다. 나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며, 죄와 타협하지 않고 살겠습니다.’ 이것이 2019년 한해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의 꿈이 되고 소망이 되고 목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자로 축복을 받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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