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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 죽음의 의미  
 
예수 죽음의 의미
설교날짜 2019.3.24
설교자 박동찬 목사
본문말씀 창 3 : 13 - 15
 


예수 죽음의 의미



1. 나는 소중한 존재다. 

 

2.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심은 순종이다.  


3. 사탄의 권세가 깨어졌다.



 


창 3 : 13-15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신기한 것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우리의 신앙이 점점 깊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교회에 오면,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그 인간을 질투로 꾀어서 죄를 짓게 만들고 멸망의 길로 이끌어 하나님과 분리되는 삶을 살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대속의 죽음을 믿음으로 죄로부터 자유하게 되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라는 복음의 내용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복음의 말씀을 듣다 보면 갈등이 생깁니다. ‘이것을 과연 믿어야할 것이냐, 말아야 할 것이냐.’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교회에 오면 좋은 말씀을 듣고, 교양 생활하는 곳인 줄 알고 ‘나도 신앙생활하며 내 마음을 수양해야겠다.’ 라는 생각을 하고 왔는데, 와서 복음을 듣고 나면 마음을 수양하는 차원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이 말씀을 내가 믿음으로 받아야 하는 것인가. 세상에 나가면 어리석다고 하고, 또 세상에서는 미련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내가 이것을 진짜 믿음으로 받을 것인가. 아니면 믿는 척 할 것인가.’ 고민이 되는 것이지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그런 깊은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고, 종교생활 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이런 생각으로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도 더러 계시더군요. 또 어떤 분들은 가만히 보면 ‘세상에서 똑똑하고 지혜롭고 나보다 공부도 많이 한 사람들이 저렇게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것을 보면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세계가 있나 보다. 저 사람들이 믿으니 나도 믿고 보자.’ 하고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믿기로 작정하고, 성경 공부도 하고, 또 ‘교회에서 뭐라고 가르치는지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더러 어떤 분들은, 말씀을 들으면 그냥 그 말씀이 믿어지는 분들이 있습니다. 참 놀랍죠? 이런 분이든, 저런 분이든 모두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부름을 받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시기를 축원을 드립니다.

  결국 의심을 하던 분들도 말씀을 들으면서 점점 그 말씀에 빠져들게 되고 그 말씀이 믿어지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신앙이 금방 자라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분들은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야 한다.’는 마음으로 하나하나 두드려 보다가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도달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사순절 기간 동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기간입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 했는지,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런 것을 자꾸 듣다보면 처음에는 나와 예수님과의 관계가 1인칭과 3인칭의 관계처럼 받아들여지던 것이, 점점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다보면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신 것이 어떤 한 남자가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시고 나를 위해서 죽으시고 고난당하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내가 얼마나 죄인이었는가.’ 를 보게 됩니다. 나와 하나님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 내 육신의 부모보다도 더 가깝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나를 지으시고, 만드시고, 이끄시고, 베푸시고,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신앙생활은 또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깊은 영적인 각성과 함께 주님과 동행하는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줄 믿습니다. 저는 오늘, 이 사순절 기간을 지나면서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 3가지 말씀을 전하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째, 나는 소중한 존재다. 

 

  예수님의 죽음에 담긴 교훈 첫 번째는 ‘나는 소중한 존재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 저를 한 번 따라해 보실까요? “나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한 번 고백을 시켜드려야겠다.’ 듣는 것보다 한 번 이렇게 시인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나는 소중한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만큼 소중한 존재인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어요. 땅과 하늘과 해와 그 모든 것을 지으시고, 인간을 만드시고… 사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인간보다 귀한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경에 보면 그 하나님이 나를 살리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이 한 영혼의 존재 가치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보석이 귀하다고 합니다. 다이아몬드도 귀하다고 하고, 세상의 지위도 귀합니다. 맞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가치를 가진 것 중에 가장 귀한 가치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우리 영혼의 가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귀한 존재라는 것을 늘 기억하고 사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안타까운 것은, 때로 보면 자신을 비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못해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나님이 나를 왜 이렇게 만드셨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하는 것마다 안 돼요.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는 인생일 뿐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그 모든 참소가 사탄, 마귀로부터 온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너는 누구보다도 존귀한 사람이다. 너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귀한 가치를 가진 존재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스스로를 가리켜 “아니요. 나는 가치가 없는 존재입니다.”라고 고백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자녀를 보면 우리 자녀는 부모에게 세상 그 무엇보다도 존귀한 존재입니다. “너는 존귀한 존재야. 너는 존귀한 딸이야.” 그런데 이 자녀들이 세상에 나가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나는 그저 있으나 없으나 그런 존재야.” 이런 이야기를 하면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여러분 사탄이라고 하는 존재는,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밤낮 참소한다. 이 참소하는 자의 정체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마귀, 사탄이라는 것입니다. 이 마귀, 사탄이 우리를 참소하는데 때로는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참소하고 때로는 우리의 가족이라든지, 사랑하는 사람들, 친구,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 우리를 참소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 참소라고 하는 것 뒤에는 내 생각, 누군가의 생각이 아니라 사탄이 참소하도록 공격하기 때문에 참소를 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어느 날 불현 듯 떠오르는 생각이 “나는 할 줄 아는 것이 없고요. 나는 못 났고요. 세상에 없어야 할 존재가 태어난 것 같아요.”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내 생각이 아니라 사탄의 공격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 가족이라든지 친구라든지 가까운 사람이 “너는 도대체 왜 그 모양이니? 너는 그래서 할 줄 아는 것이 무엇이니? 너와 같은 사람과는 더 이상 상종하기 싫다. 얘기하기 싫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무너져 버리거든요. 그런데 이러한 생각도, 그 사람의 생각 같지만, 사실 그 사람의 생각을 통해서 우리를 참소하는 사탄의 공격이라는 것을 오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 많은 정보가 있는데 그 정보 가운데 어리석은 사람은 틀린 정보를 받아들입니다. 여러분, 요즘 인터넷에 보면 잘못된 정보가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나오는 소식이라든지, TV에서 나오는 소식이라든지 하는 것은 우리가 배경을 잘 이해하지 않고 그것을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실, 실상을 알고 보면 잘못된 정보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특별히, 인터넷 상에 떠도는 정보들은 잘못된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잘못된 정보를 받아들이면 그 정보를 보는 본인의 손해입니다. 때로 우리에게는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구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틀린 이야기를 하면, 그것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틀린 이야기, 틀린 정보를 받아들입니다. 바른 정보가 필요합니다. 세상에서 나를 향해 하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나를 공격하는, 자신을 분열시키고 파괴하는 생각들은 사탄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는 존귀한 자다. 내가 너를 택하여 세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선택했다. 너는 나의 아들이다. 내가 강하고 의로운 팔로 너를 붙들 것이다. 너는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존귀한 존재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탄은 반대로 사람들을 통해서 “너는 아니야. 너는 이 세상에 있으나 없으나 하는 존재야. 너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어. 손만 대면 안 될 거야.”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선택하세요. 어떤 이야기를 듣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겠습니까?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세상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면, 이 세상에서 내가 어떤 처지, 어떤 형편 가운데 살지라도 나는 존귀한 인생임을 기억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성경에 좋은 말씀이 아주 많잖아요? 그 말씀 가운데 몇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 말씀을 제가 참 좋아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운 줄 아시고, 제자들을 불러 모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5번, 10번, ‘이제는 더는 아니야.’ 하고 포기하는 것이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겠습니까? 실수하고 넘어져도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 어떤 환경 가운데 있어도 포기하지 안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이 그러한 것입니다. 끝까지, 내가 실수하고 넘어진다고 할지라도, 내가 또 넘어진다 할지라도, ‘이제 그러지 말자.’ 하고 일어섰는데 또 넘어지는 그 순간이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서 “예수님, 나는 예수님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사랑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결국은 끝까지 사랑하지 못했지요. 여자 종이 “너도 그 쪽 당이지?”하고 물어볼 때,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세 번째 물어보니까 저주까지 하며 강하게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스스로 자기 비하가 시작된 것입니다. ‘나와 같은 존재가 무슨 큰 일을 하겠는가?’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갔습니다. 갈릴리 바다로 갔습니다. 예전에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잡았던 것처럼, 다시 고기를 잡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아파하는 베드로 앞에 나타나십니다. 베드로를 위로하시고,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상처를 씻어주시고,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위대한 하나님의 사도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어떤 상황이 펼쳐질 지라도 예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궁금한 것이 생깁니다. “그럼, 가롯 유다는 왜 버렸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착각하면 안 되는 것은 예수님이 가롯 유다를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가롯 유다도 예수님을 버리고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아 예수님 앞에 엎드려 “예수님, 잘못했습니다. 다시 일어날 기회를 얻고 싶습니다.” 이렇게 고백했으면 예수님이 가롯 유다를 버리셨겠습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용서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죄인도 예수님 앞에 용서받지 못할 죄인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생각으로 상상할 수 없지만,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그런데 가롯 유다는 왜 망했습니까? 세상에 자신이 똑똑하다는 사람, 위대하다는 사람이 이래서 위험합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정죄하고, 스스로 심판하고, 스스로 모든 것을 끝내버립니다. “나는 부족한 존재입니다. 하나님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하고 나갔더라면 하나님께서 붙드셨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스스로 판단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심판이 없어. 이제 모든 것이 끝이야.’ 하며 스스로 심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라는 것을 주셨습니다. 자유 의지를 가지고 사랑을 할 때 그 사랑이 진짜 사랑인 것이지요. 몽둥이를 들고 “너, 나 사랑할 거야, 안 할 거야?” 이것은 폭력입니다.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의 고백을 듣는다 해도, 그 고백이 기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완벽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주셨습니까?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자유 의지를 주신 이유는 하나님과 진정한 사랑의 교제가 일어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나면, 하나님의 은혜 앞에 엎드러지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자유 의지를 잘못 사용합니다. 탕자의 이야기를 보면, “아버지, 내 몫을 주세요. 나는 나가서 아버지 품을 떠나 세상에서 멋지게 살아보겠습니다.”하고 나갑니다. 그랬을 때, 아버지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배신감을 느낍니다. 그 배신감 때문에 “너는 이제 끝이다.” 그러고 잘라버렸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에서 탕자의 아버지는 자신을 배신하고 나간 그 아들을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집 문 앞에 나가서 매일 아들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돌아와 주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돌아와 주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나중에 다 망한 거지꼴로 돌아왔을 때, 그 아버지가 한 행동은 정죄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들을 끌어안고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왜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여러분, 왜 그렇게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신다고 생각하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마세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족한 것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채워주셔서 완전한 삶을 살게 만드십니다.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이끌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내 좁은 소견을 가지고 제단하지 마세요. 잘라버리지 마세요. 제한하지 마시고, 그 사랑을 믿음으로 받으시고 그 사랑 앞에 감격하며 나아가서 주님의 은혜를 누리시는 복된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둘 째,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심은 순종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철저한 순종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철저한 순종의 본을 보이시면서,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방법이 여기에 있다고 가르쳐주십니다. 사람마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정도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10퍼센트, 어떤 사람은 50퍼센트, 어떤 사람은 70퍼센트, 어떤 사람은 80퍼센트… 거의 100퍼센트 순종하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우리가 내 신앙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가, 믿음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가를 알려고 하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몇 퍼센트나 순종하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순종과 믿음은 비례합니다. 그래서 순종을 많이 하면 할수록 그 사람의 믿음이 깊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머리로는 순종이 되는데 행동으로는 순종이 안 됩니다. 그 사람을 보면 미움이 솟아오릅니다. ‘죄와 타협하지 마라’ 하는데도 그 죄를 끊어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물질을 가지고 선을 행하지 못합니다. 내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돌아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준이 머리로는 이해를 하지만, 우리의 삶을 보면 진정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어디까지 순종하시느냐, 당신의 생명을 주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보세요. 두렵고 떨립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라고 하십니까? ‘주님 뜻대로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순종하셨습니다. 고난의 십자가의 길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입니까? 그래도 그 길을 가셨습니다. 순종하셨습니다. 죽는 줄,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줄 알면서도 십자가를 향해서 골고다를 향해서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지 않습니까? 자신을 희생하는 자리까지 순종하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 순종하셨을까요? 때로는 피하고 싶고, 내 마음은 그것을 거부하고 있지만, 결국은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답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지요.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야 승리가 이루어짐을 알기 때문에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왜 순종하지 못하는가? ‘하나님의 뜻이 진짜 옳을까?’ 그것에 대해 우리 마음속에서 계속 의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머리로는 ‘믿습니다. 100퍼센트 하나님이 옳습니다.’ 그런데 왜 순종 안 합니까? 내 마음 속에서는 갈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옳을까? 나에게 손해가 되는데… 그러면 내가 많은 것을 빼앗겨야 하는데… 그러면 내 유익을 잃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을 해야 되나?’ 때로는 나 자신을 희생할 용기가 없기 때문에 순종하지 못할 때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한 장, 한 절을 읽더라도 그 말씀을 읽고 ‘오늘은 내가 이 말씀 따라 순종하며 살겠습니다.’라고 결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매일 매일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마귀, 사탄의 괴기를 이기고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옳은 길, 의의 길을 걷는 거룩한 길을 걸어갈 수 있는 비결입니다. 

  여러분 바둑 경기를 생각해 봅시다. 바둑을 둘 때 누가 이기냐 하면, 고수가 이깁니다. 고수는 어떤 사람입니까? 몇 수 앞을 내다 볼 줄 아는 사람, 이렇게 되면 저 사람이 어떻게 될 것이라고 하는 수를 더 많이 아는 사람이 고수인 것입니다. 항상 바둑을 둘 때는 고수와 하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수들은 벌써 그 다음에 무슨 수를 놓을지 압니다. 또, 상대방이 다른 곳에 두면 어떻게 두어야 하는지를 압니다. 그런데 하수들은 한 수를 놓을 때에도 당황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놓은 돌 바로 옆에 바싹 붙여서 두게 됩니다. 자신도 그 옆에 한 수를 두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라서 그 옆에 놓다 보면, 엉망진창으로 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둑이나 장기를 두다 보면 우리 인생도 똑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탄은 우리와 영적 전쟁을 벌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수를 다 꾀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어디에 수를 놓으면 죽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저렇게 고고한 척해도 어디에 한 수를 두면 넘어진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은 은혜 받아서 그것을 한 번 이겨봤자, 그 다음에 이렇게 수를 놓으면 넘어진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수를 꾀고 있는 것이 사탄이란 말이지요. 여러분, 사탄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지혜는 사탄의 지혜를 따라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내 생각 내려놓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만이 사탄의 지혜를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이길 수 있는 길을 이미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길을 따라갈 때 사탄이 아무리 꼼수를 부린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살지 않고, 내 생각대로 살면 내가 이기는 것 같아도 결국은 패배하고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초등학생이었던 시절에, 장기판을 들고 다니던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어느 날 제 앞에 장기판을 펴더니 장기를 두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는 두는 법을 모른다.” 했더니, 가르쳐주겠다는 것입니다. 차는 이렇게 똑바로 가는 것이고, 포는 하나를 건너뛰어서 잡는 것이고, 졸은 어떻게 가고… 장기 두는 법을 쭉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더니 한 판 두자는 것입니다. 배우자마자 실전으로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장기를 두는데,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두면 그 친구가 다 이기고, 저렇게 두어도 그 친구가 다 이겼습니다. 다음에도 게임을 했습니다. 10번을 해도 제가 다 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지는데도 배우려고 계속 두었습니다. ‘지더라도 언젠가는 내가 이기리라.’ 하고 계속 따라서 두고 있는데 한 친구가 옆에 오더니 제게 훈수를 두는 것입니다. 제가 두려고 하자, 그렇게 두지 말고 이렇게 두라는 것입니다. 제 실력으로는 상대방을 이길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말을 그냥 들었습니다. 그 훈수대로 하다 보니, 차도 먹히고, 포도 먹히고, 다 먹히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화가 났습니다. 훈수를 두려면 잘 두든지 하지, 이렇게 다 잡아먹히도록 하면 어떻게 하나? 그런데 놀랍게도 마지막에 제가 이겼습니다. 어떻게 두든지 다 따먹히는 것 같았는데 마지막에 가서 그 장기판의 장을, 임금을 잡았습니다. 이 아이는 진짜 고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때 깨달은 것은, 고수의 말을 들어서 손해 볼 것이 없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진짜 지혜로운 사람의 말을 들어서 손해 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늘 지혜의 한계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 때 제가 깨달은 것이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과는 우리가 싸움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이길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고 보면, 때로 내가 손해 보는 것 같아요. 내가 질 것 같아요. 내가 넘어질 것 같아요. 이래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지혜가 사탄의 지혜보다 낫다. 하나님의 지혜가 내 지혜보다 낫다. 내 지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하다. 이것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손해 보지 말아야지. 하나라도 더 가져야지.’ 이런 마음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선을 행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놓고 회개하고 용서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며 살아보세요. 이것이 우리에게 큰 유익이 되고 승리의 비결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진정 지혜로운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진짜 지혜로운 사람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아닙니다. 교만한 사람이 아니고, 어떤 세상적인 지위를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진짜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귀를 기울이고 들어야 하는 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그 날 그 날 읽는 그 말씀을 양식으로 삼고, 그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세상에서 볼 때는 미련한 것 같습니다. “너는 십자가의 길 가지 마라. 손해 보며 살지 마라.” 이렇게 얘기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세상이 뭐라고 해도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멋진 승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길, 순종의 길이야말로 우리가 세상을 이기고, 사탄의 권세를 이기는 길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셋 째, 예수님 죽음의 의미는 사탄의 권세가 깨어졌다는 것이다.  

 

  사탄의 권세, 우리를 주장하던 사탄의 권세, 우리를 볼모로 잡던 사탄의 권세가 깨어졌다는 것을 믿으시길 축원을 드립니다. 본문 말씀, 창세기 3장 15절 말씀은 우리가 신학적으로 ‘원복음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복음의 아주 초기 형태라는 것입니다. ‘최초의 복음이다.’ 원복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뭐라고 합니까? 사탄을 향해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여러분, 이것이 어떻게 원복음이겠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여자의 후손은 누구냐면 바로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남자의 씨를 통해서 후손이 됩니다. 여자의 후손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그 분, 바로 예수님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범죄하고 사탄에게 속아서 넘어지는 그 순간부터 이 인간을 다시 회복시키고자 하시는 굳은 결의를 하신 것입니다. 사탄의 권세를 밟아버리려는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으로 올 자가 있다.’ 그 분이 누구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 분을 통해서, 여자의 후손으로 원죄가 없으신 그 분이 오셔서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영어 성경에 보면 이 상하게 한다는 표현을 crush 라는 단어를 씁니다. crush your head라고 합니다. crush라는 단어는 그냥 짓밟아서 으깨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자의 후손이 너를 짓밟아서 으깨버릴 것이다. 이런 표현입니다. 그리고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발꿈치를 상하게 하다’에서 상하게 하다의 표현을 영어 성경에서는 strike라고 합니다. 때린다는 것입니다. 치는 것, 때리는 것. 여러분 발꿈치 때려봤자 잠깐 아프고 마는 것이지요. 사탄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말씀을 보다보면, 사탄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아담으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 온 세계를 다시 회복시키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사탄이 압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것을 못 뺏어 가게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면 자신이 이기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사탄의 한계입니다.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롯 유다에게 예수님을 팔고자 하는 생각을 넣어주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자신이 이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예수님을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을 통해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아예 밟아버렸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에게 죄와 사망의 권세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그 사실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자가 되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그 이후로는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탄의 참소를 받을 이유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사탄이 우리를 향해 “너는 못한다. 너는 안 된다. 너는 죄인이다. 너는 하나님도 버렸다. 네 기도는 응답하지 않는다.”하는 이야기에 대해서 더 이상 귀 기울여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생명까지 주신 나의 구주이십니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내 생각을 가지고, 내 어떤 행동과 삶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제한하지 마세요. 어린아이들에게 엄마가 “하지 마. 하지 마.” 그래도 아이들이 하다가 실수하고 넘어집니다. 넘어지고 나서, 뒤를 돌아보며 “엄마!” 하며 손들고 쫓아옵니다. 그 때 확 밀쳐버리는 엄마가 어디 있습니까? 그렇죠? 다시 끌어안습니다. “그래 그러지 말랬잖아.” 하나님의 사랑은 그 부모의 사랑에 따라올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또 실수해도 된다.” 이 이야기가 아니라, 이제는 이 모든 죄로부터 우리가 돌아서는, 보다 성숙해지는, 성숙을 향해 걸어가는, 그런 믿음의 사람이 되자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죄의 유혹을 이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내가 과거에 습관적으로 짓는 죄가 있으면 “예수의 이름으로 물러가라.” 라고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매일 죄를 범합니다. 어떻게 보면, 선악과를 먹은 것이 그렇게 큰 죄입니까? 하나님이 “먹지 마.” 그랬는데 먹은 것이 큰 죄입니까? 우리는 하루에 그런 죄를 열두 번도 더 짓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하지 마.” 그래도 하지 않습니까? “싫어요, 할래요.” 그런데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큰 죄였느냐 이 말입니다. 우리 같으면 벌써 열두 번도 더 쫓겨났을 것입니다. 그렇죠? 매일 매일의 죄가 가르쳐주는 것은 죄는 그렇게 끔찍하다는 것입니다. 큰 죄든 작은 죄든 죄는 크고 작은 것이 없습니다. 죄는 그냥 다 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 죄는 결국 하나님까지도 죽게 만든다는 것을 배웠으면, 이제 우리의 적인 죄와 싸워야합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내가 알고 있는 죄가 있거든, 예수님께 씻어달라고 하고 죄와 싸워 이기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줄로 믿습니다. 어떤 죄라 할지라도, 그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돌아서서, 의의 길, 승리의 길, 거룩한 길을 걸어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번 사순절의 절기에 하나님이 왜 죽으셔야 했는지 다시 한 번 묵상하시고, 의의 길, 진리의 길, 승리의 길, 거룩한 길을 걸어가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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