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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난을 이긴 욥의 신앙  
 
고난을 이긴 욥의 신앙
설교날짜 2019.3.31
설교자 박동찬 목사
본문말씀 욥 23 : 10 - 14
 

 


고난을 이긴 욥의 신앙



1. 욥은 고난을 하나님의 훈련과정으로 여겼다.   

 

2. 욥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다. 

 

3. 욥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했다.



욥기 23 : 10~ 14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사순절을 지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당하심, 그리고 죽임 당하심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그 죽으심을 묵상할 때마다 드는 생각은 우리 같으면 저런 고난을 당할 수가 있을까? 견뎌낼 수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누구라도 예수님이 당한 고난을, 그 만큼의 고난을 그렇게 잘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예수님처럼 그렇게 큰 고난을 당하지는 않지만, 매 순간 순간 우리에게 파도처럼 끊이지 않고 밀려오는 그런 고난의 연속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할 때도 많습니다. 고난이 없는 가정은 없습니다. 우리가 편안할 때는 이 고난도 이기고 잘 견딜 것 같은데, 막상 고난이 닥치게 되면 감사 기도도 하지 못합니다. 갈팡질팡 어디로 가야될지 알지 못해서 흔들리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매일 하던 기도도 않나올 때가 있고 찬양을 들으면서도 그 찬양의 가사 말을 의심할  때도 있습니다. 설교를 들으면서도 “아이 목사님은 이런 고난을 안 당하셔서 저런 말씀을 하시지...” 그러면서 자기의 고난의 문제가 세상에서 가장 큰 고난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고난이 오면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되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입니다. 그런데 사람들마다 보면 그 고난을 어떻게 감당해 가는지 다르더라고요. 평안할 때 “나는 어떤 고난이 와도 이길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믿을 수가 없어요. “고난이 오면 나는 못합니다.” 그렇게 말하던 사람도 막상 고난이 닥치면 잘 극복하고 견뎌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편,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크지도 않은 문제에 쉽게 넘어져버리는 그런 성도님들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고난’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욥이지요. 이 욥은 참 엄청난 고난을 겪었던 사람입니다. 감사한 것은 욥은 그런 엄청난 고난을 극복하고 이기고 흔들리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것을 볼 때, “대단한 사람이다.” 라고 느낍니다. 그런데 고난이 쉬었다 오는 게 아닙니다. 그게 항상 문제입니다.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진짜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한 사탄의 공격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렇게 나와 있죠? 그 공격이 맞다는 겁니다. 한번 몰아치면 정신없이 우리에게 겹치고 또 겹쳐서 고난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욥은 더했습니다. 그 많던 재산을 한 순간에 다 날려버렸어요. 이것만 해도 굉장히 큰 충격이지요. 그런데 자녀들을 잃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자기도 아주 심한 질병가운데 고난을 당하게 되는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 가장 정말 나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야 될 사람인 아내가 옆에서 하는 말이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라!” 이 저주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 고통 속에서 처절하게 혼자인 것을 깨닫게 되는 거죠. 아무도 날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친한 친구들이 와서 위로를 하는 게 아니라 “딱한 형편을 보니깐 무언가 아주 숨겨놓은 큰 죄가 있어서 이렇게 심한 형벌을 당하는 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누구보다도 정직하게 살고 누구보다도 신앙적으로 살려고 노력했던 이 욥에게 하는 말이 “네가 숨겨놓은 죄가 있어서 그러니깐 죄를 회개해야 된다.” 욥이 얼마나 답답합니까.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너희들 위로하러 와서 왜 이렇게 나를 괴롭히느냐? 가라” 그럴 정도로 친구들 계속해서 말하는 것이 마음을 더 상하게 합니다. “너 죄 때문이야” “너도 모르는 죄가 있을 거야” “잘 생각해 봐. 뭔가 죄가 있을 거야”
  우리가 때론 “고난을 당하는 것이 죄로부터 오는 형벌이다.” 이런 생각을 하기가 쉽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오늘 우리는 욥기서를 통해서 알게 됩니다. 오늘 이 본문 말씀을 가만히 묵상을 하는 가운데 그래도 감사한 것은, 욥은 이런 심리적이고 정신적이고 육체적이고 현실적인 모든 문제 앞에서 넘어지지 않고 승리했다는 거예요. 오늘 우리가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어디서부터 오는가, 세상 지식에서부터 오는 게 아니고, 세상의 그 누구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이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고난을 이긴 이 욥의 신앙이 어떤 신앙이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욥은 어떻게 그 고난을 이길 수 있었을까? 세 가지 말씀을 잠시 생각해보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째, 욥은 고난을 하나님의 훈련과정으로 여겼습니다.   

 

  고난을 하나님의 훈련과정으로 욥은 보고 있습니다. 어떤 문제이든 그 문제 앞에 섰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문제를 내가 어떻게 보느냐? 이것이 참 중요한 것입니다. 처음 내가 보는 입장에서 “큰 일이다. 이 문제는 큰 문제가. 내가 죽겠다. 이건 아무도 해결 못해...” 그러면 그 문제는 절대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어떻게 이 문제를 보느냐에 따라서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지 아닌지 결정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문제가 생기면 아주 단순하게 그 모든 것들을 결정해 버릴 때가 있어요. 이 것은 해결할 수 있는 문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이분법적으로 나눕니다. 욥은 이렇게 보지 않았다는 거예요. 모든 것을 신앙의 눈으로 봤어요. 육신의 눈으로 보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신앙의 눈으로 보면 해결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때론 문제가 발생 했을 때, 육신의 눈을 감고 신앙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욥은 철저하게 신앙의 눈으로 그 모든 것을 봤습니다. “이것은 나를 죽이려고 다가오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훈련이다.” 이렇게 봤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 참 어이없는 일이 있습니다.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던 사람이 가끔가다 물에 빠져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물에 빠져서 죽게 되는 경우 가운데 어처구니가 없는 경우는 깊지도 않은 물에서 빠져죽는 경우입니다. 허리까지 밖에 안 오는 얕은 물인데 빠져 죽는 답니다. 이해가 잘 안되지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면 되는데 일어나지 못하고 그 얕은 물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익사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두려움이 닥치면 우리의 판단 기준이 마비된다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이 몰려오게 되면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해요. 작은 것도 커보이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넘어질 수밖에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닥쳤을 때, 그 문제를 보기 전에 “하나님, 신앙의 눈으로 보게 해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문제를 보면, 그 문제를 다스리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신앙으로 그 문제를 이겨나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고 나서 광야생활을 하다가 ‘가데스바네아’ 라는 곳에 섰어요. 모세가 각 지파마다 한 명씩 대표를 선출해서 열두 명을 가나안땅에 보내면서 그 땅을 보고 오라고 했습니다. 똑같은 땅을 보고 왔어요. 좋은 땅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그 곳에 이미 주인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 땅에 사는 거인들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저 땅을 취하려고 하면 지금 살고 있는 저 사람들과 싸워야 됩니다. 열 명의 정탐꾼의 눈에는, 그 사람들이 키도 크고 힘도 강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땅을 차지할 수가 없습니다. 전쟁을 하게 되면 우리가 죽을 겁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들은 거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람들한테 메뚜기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메뚜기는 거인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안 된다고 결론을 내려 버립니다. 그 열 명의 정탐꾼이 그렇게 결론을 내린 데에는 이유가 있어요. 두려움이 그들을 언습 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훨씬 강해보이는 것이지요. 싸웠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 같고 죽을 것 같습니다.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처럼 보여 집니다. 포기하게 되는 거예요. 시도도 안 해보고 포기하게 되는 거죠. 그러나 나머지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습니다. 저들은 우리의 밥이라는 거예요. 누군가의 눈에는 거인으로 보였는데, 이 여호수아와 갈렙의 눈에는 밥으로 보였을까요? 여러분, 밥 먹을 때 두렵습니까? 밥 먹을 때 두려운 사람은 없어요. 밥은  맛있게 먹는 거잖아요. 밥으로 보였다는 거예요. 이유가 뭡니까? 이미 여호수아와 갈렙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니까, 그것이 문제로 보이지 않아요. 오히려 밥으로 보인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문제가, 어떤 사람에게는 큰문제로, 어떤 사람에게는 작은 문제로 보여요. 어떤 사람에게는 작은 문제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큰 문제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는 겁니다. 그 차이는 문제의 크기가 어떠하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크기가 어떠하냐에 달려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내 마음의 크기를 육신의 눈으로 보면, 나 자신이 초라할 수밖에 없어요. 작아질 수밖에 없어서 이겨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이것이 보이는 거예요. 그럼 상대적으로 내 앞에 있는 큰 문제가 작아 보인다는 거죠. 골리앗과 싸운 다윗의 이야기를 보면, 여러분 누가 크고 누가 작습니까. 세상의 눈으로 보면 골리앗은 엄청 큰 사람이고, 다윗은 작은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골리앗이 작은 사람이고 다윗이 큰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다윗이 싸워서 골리앗을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눈을 뜨고 보면, 자신이 없어요. 이걸 해도 안될 것 같고, 저걸 해도 안 될 것 같고, 내가 저 수많은 저 똑똑한 사람들을 어떻게 이겨나갈 것이며, 저들이 나를 다 연합해서 공격해오면 내가 이겨나갈 수 있는지 두려운 마음이 드는 거예요. 그러나 육신의 눈을 감고 신앙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는 것이 보이고, 수많은 천군 천사가 나를 돕는 것이 보입니다. 우리는 그 믿음으로 이겨나가면 됩니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어떻게 보았습니까? 10절에 보면,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지금 닥치는 수많은 말도 안 되는 이 고난, 엄청난 이 고난을 어떻게 봤습니까? 이정도 되면, 이게 무슨 훈련입니까? 이렇게 볼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욥은 담대하게 고백합니다. 이것은 나를 훈련시키는 과정입니다. 라고. 순금이 되게 단련하는 과정이라는 겁니다. 순금이 되기 위해서는 1000도가 되는 불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를 수도 없이 해야 되요. 얼마나 뜨겁습니까? 그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면서 불순물들이 다 없어지고 오직 금만 남는 거예요. 이걸 정금이라고 말합니다. 정금의 가치는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렇게 뜨거운 곳에 들어갔다 나와야 정금이 되는 겁니다. 바로 캐면서 정금이 되는 경우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 험한 고난의 과정을, 이정도 쯤 되면 어떻게 훈련으로 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욥은 담대하게 말하는 것이 이것은 훈련의 과정이라는 거예요. 욥이 연단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내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나 훈련은 절대로 죽지 않아요. 욥은 자신이 당하는 이 고난을 전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훈련으로 봤다는 겁니다. 훈련은 유익이 있죠, 훈련은 과정을 거치고 나면, 실력이 향상이 되는 거예요. 정금이 되는 거예요. 전문가가 되는 거죠. 그래서 많은 운동선수들은 이 유익을 알기 때문에, 낮이나 밤이나, 여름이든 겨울이든, 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훈련을 합니다. 자원해서 그 훈련과정을 밟지 않습니까? 훈련을 많이 해야 승리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 힘든 훈련과정을 마다하지 않고 감당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고난 가운데에 있습니까? 죽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끝장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긴다 라고 생각하세요.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단련하시기 위한 훈련과정이라고 믿음으로 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마태복음 10장 29절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아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결코 우연이란 없습니다.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 까지도 하나님께서 주장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러면 나에게 닥치는 고난이 우연히 왔겠습니까? 아닙니다. 그 모든 것도 하나님의 허락하심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고 하나님이 그런 고난을 허락하실 때에는 우리에게 능히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 만한 힘이 있기 때문에, 감당케 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오늘 우리는 알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떤 분들은 이렇게 질문을 하는 거예요. “목사님 저는 정금되기 싫어요. 그냥 편하게 살게 내버려두세요. 이런 고난 싫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살면 좋잖아요. 그냥 편하게 살고, 가면 좋겠어요. 정금 난 되기 싫어요.”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여러분 그러면 하나님이 “그래, 네가 원하면 그렇게 살아라.” 그러실 것 같습니까? 여러분 혹시 여러분들의 자녀가 와서 어느 날 “학교생활이 너무 힘들어요. 나 학교 안다니면 안 되요? 학교 갔더니 너무 힘들어요. 친구사귀는 것도 힘들고 선생님 말씀도 잘 이해가 안 되고, 하루하루가 죽을 것 같아요. 나 이제 그냥 집에서 편안하게 잠자면 안 되요?” 그러면 여러분들 중에 “아~ 그래라” 그러시는 분, 계십니까?  “안 돼 정신 똑바로 차리고 가! 앞으로 공부해야 할 게 얼마나 많은데 벌써부터 포기를 하려고 그래, 학교 가라” 그러잖아요. 그러면 아이들이 어깨가 축 쳐져 가지고 가잖아요. 그 뒷모습을 바라볼 때, 부모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아프지요. 안 보냈으면 좋겠지요. 그렇다고 그렇게 어깨가 쳐져서 가는 아이를 보고 “아빠가 잘못 생각해서 와, 오늘부터 학교 다니지마.” 이러는 분은 없다는 거예요. 이 아이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지나가야 될 그 과정들이 힘들지만 이겨내는 훈련을 거쳐서, 강해지는 거죠. 세상을 이겨 나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실 때에는, 그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세상을 이겨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기라고 훈련하는 것입니다. 정금이 되고 순금이 되도록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하심이 있다는 것을 오늘 우리는 알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고난이 닥치면 늘 묻는 질문이 “왜?”입니다. 자꾸 이유를 묻는단 말입니다. “왜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왜 왜 왜 왜? 라고 하는 질문을 우리가 수도 없이 하는데, 여러분 우리가 왜라는 질문을 자꾸 하다보면 그 문제를 이기지 못해요. 오늘 우리 성도님들 왜라는 질문 내려놓고 하나님이 나를 연단하시는 과정이다. 단련하시는 과정이다. 이것을 통해서 내가 잃는 것도 있겠지만, 얻는 것이 훨씬 많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둘 째, 욥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신앙생활을 지켜나가는 겁니다. 주일날은 예배드리고 주중에는 기도하고 성경보고 원래 하던 대로 하는 겁니다. 어떠한 환경이 오더라도 지켜나가는 거예요. 때로 사람들이 어려운 일에 봉착하게 되면 신앙을 버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잘 믿어봐야 소용없어’,  ‘내가 기도생활도 잘하고 헌금생활도 잘하고 다해봤는데, 이렇게 어려움이 오잖아... 믿어봐야 소용없어’, ‘나 이제부터 세상 되는대로 살아갈 거야.’ 이렇게 하나님을 포기해버리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욥기서를 보면 사탄이 욥을 공격합니다. 사탄이 왜 욥을 공격하느냐?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게 하기 위해서 공격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욥과 같이 이렇게 순종하고 믿음이 좋은 사람을 본적이 있느냐?”, 사탄이 버럭 화를 내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이 축복해주시니까 지키는 거죠, 하나님이 주신 복 빼앗아 보세요. 하나님 욕하고 떠나갈 겁니다.” 그래서 사탄이 욥에게 주신 축복을 하나씩 빼앗아가면서, 공격을 시작하지 않습니까? 사탄이 이렇게 공격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국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게 하기 위함이라는 거예요. 고난이 오면 그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은 사탄의 계획대로 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럴수록 더욱더 우리가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달려 나오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분명히 깨닫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언을 드립니다. 욥은 이렇게 상황이 어려워진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포기했느냐? 그러지 않았습니다. 더 간절해졌습니다. 더욱더 하나님을 바라고 갈망하는 이 과정을 통하고 나니까, 결국 마지막에 욥기서 42장에서 욥이 고백합니다. ‘내가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죽게 되서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귀로 듣는 신앙, 그래서 귀로 듣고 머리로 생각하는 이 지식적인 차원의 신앙생활과 내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신앙생활의 체험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아무리 내가 성경공부 많이 하고 말씀 많이 들어도, 결국은 귀로 듣고 머리로 생각하는 그 신앙의 수준의 차원에서 내가 이 고난이라는 과정을 통하고 나니깐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사랑이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어떤 위대하심인지를 보게 되는 거예요. 알게 되는 거죠. 눈으로 보게 되었다. 차원이 다른 그런 신앙의 깊이 가운데로 나아가는 욥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살다가 이런 저런 고난이 올 때, 이런 고난을 하나님의 훈련과정으로 여기시고, 그래서 더욱더 내가 지키던 그 신앙생활에서 그 자리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끝까지 지키고, 끝까지 승리하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을 드립니다. 고난이 왔을 때, 잘 견디다가 중간에 포기하면, 그것은 아니함만 못한 거예요. 고난이 고난으로 끝나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이 고난이 왔을 때, 끝까지 견뎌나가면, 고난이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축복으로 끝나고 승리로 끝납니다. 정금이 되어 가는 과정으로 이 모든 권한이 한 순간에 변하는 것을 오늘 우리는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다가 안타까운 점은, 많은 분들이 평소에 교회를 열심히 잘 나오다가 갑자기 안보여요. 그래서 ‘왜 안보이시냐?’ 물어보면, ‘아 지금 사업에 문제가 있고, 가정에 문제가 있고 그래서 이 문제 해결하고 다음에 오겠다.’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옳은 것 같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틀린 얘기라는 것을 아시죠. 틀려도 엄청 틀린 얘기예요. 오히려 교회를 잘 안 나오다가도, 문제가 터지는 교회에 와서 엎드리는 게, 이것이 신앙인이죠. 왜? 하나님이 정답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내 문제 풀 수 있는 것은 사람이 푸는 것이 아니고, 세상이 푸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푸신다는 것을 오늘 우리는 알아야 되는 거예요. 문제가 생기면, 그동안 예배를 한 번 드렸다면, 두 번 드려야 됩니다. 그동안 말씀을 한 장 보던 것을, 두 장씩 봐야 되고, 10분 하던 기도를 20분씩 해야 됩니다. 오히려 신앙생활에 더 철저하고, 하나님을 바라 보는데 정신을 집중해야 합니다. 다시 이 신앙의 삶 가운데로 돌아오는 자가 지혜로운 자이고,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오늘 우리는 알아야 될 줄을 믿습니다. 욥은 어려움과 고난이 왔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지키던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 오늘 본문 11절 12절을 보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욥은 가야 할 길을 갔다는 거예요. 어려운 고난이 와도 가야할 길을 갔고, 좌로나 우로나 내 걸음이 치우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귀히 여겼어요. ‘문제가 생길 때,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의 해답으로 삼고 그렇게 살았다.’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거죠. 저는 오늘 이 욥의 고백을 읽으면서 이렇게 고백을 할 수 있는 욥이 얼마나 부러운지 몰라요. 여러분 누구 앞에서 ‘내가 이렇게 살았습니다.’, ‘어떤 고난이 오고 어떤 유혹이 와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내가 이 길을 끝까지 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먹는 이 음식보다 귀하게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것보다도 귀하게 여기고 살았습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욥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 만약에 어려움과 시련, 고난이 찾아오면, 왜? 라고 묻지 마세요. 흔들리지 말고 세상에 의지하지 마세요. 정답은 뭡니까? 하나님 앞에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오늘도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거죠. 흔들리지 말아야 되는 거죠. 왜 그래야 됩니까? 하나님이 정답이시니까, 하나님이 내 삶의 해답이 되시니까, 그렇게 사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이 해답이시라는 것을 깨달으시고, 끝까지 내 신앙 내 신앙 생활하던 대로, 기도의 시간, 찬송의 시간, 말씀 묵상의 시간, 예배의 시간 소홀히 하지 말고 잘 지켜나가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을 드립니다.  


셋 째, 욥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한 욥, 이게 욥의 위대함입니다. 13절~ 14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하나님은 뜻이 일정하신 분이시죠. ‘누가 능히 돌이키랴.’ 돌일 킬 수 없다는 거예요.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내게 작정한 것, ”계획“ 그것이 무엇이든 이루어질 것이다 이런 말씀입니다. 내가 아무문제가 없을 땐 이렇게 고백하기가 쉬워요. 그러나 내가 지금 죽게 된 마당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기는 쉽지 않다는 거예요. 대부분의 경우, 내가 어려운 가운데 당하면, 원망하고 불평하고 죽겠다고, 이제 더 이상 못살겠다고 합니다. 매일 눈물로 원망의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 왜 나한테 이러세요? 왜 그러세요?’이렇게 하는 게 일반적인 반응이겠죠. 욥은 그러지 않았다는 거예요. 나한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다. 나는 그 일이 이루어질 줄로 믿는다. 이것이 진짜 믿음이라는 거예요. 진짜 믿음은, 어떤 상황이 바뀌어도.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믿음인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 믿습니다, 사랑합니다, 아시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아시죠?’ 그러다가 갑자기 어려운 일이 터지면, ‘하나님 나한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배신감을 느낍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향해서 내가 배신감을 느낀다고 하면, 그건 내가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것이 아니었다. 라는 것을 증명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생명까지 주셨잖아요. “생명” 여러분이 누구를 위해서 여러분의 생명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생명까지 주셨는데, 뭐 좀 하다가 일이 안 풀린다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거, 이것이 어떻게 믿음일 수가 있겠습니까? 진짜 믿음은요, 상황이 어떻게 되든, 끝까지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이것이 진짜 믿음인줄로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는 가운데, 어제 저녁에 갑자기 하나님께서 옛날 생각을 떠오르게 하시더라고요. 제가 초등학교 시절, 친구간에 신뢰를 지키는 예화를 들었던 게 생각이 났습니다. 한 사형수가 죽게 되었는데, 그 어머니가 아프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죽을 사형날짜를 받아놓고, ‘내가 이때까지 돌아올 테니까, 아프신 우리 부모님을 좀 만나고 오게 해달라.’ 그 왕이 허락을 안하는 거죠. ‘네가 도망가면 어떡하냐? 어떻게 놔줄 수가 있느냐?’ 그러니깐 친한 친구가 와서, ‘내가 그럼 대신 볼모로 잡혀 있겠습니다. 그날까지 안 오면, 내가 친구를 대신해서 죽겠습니다.’ 이런 얘기였어요. 나중에 그 사형 당일 날, 친구가 오지를 않는 거예요. 왕이 ‘넌 속았어, 안ㅤㄷㅚㅆ지만 넌 친구 대신에 죽어야 된다.’ 사형을 집행하려고 하는 순간 저 멀리서 친구가 ‘멈추시오’ 라고 소리를 지르며 뛰어오는 거예요. ‘내가 여차저차해서 늦었다.’라고 얘기하니깐, 왕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참, 그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 죽음의 자리까지 나온 그 사형수나, 또 그 친구를 대신해서 죽겠다고 자처하고 서있는 친구나, 우애가 참 아름답구나. 너희가 이런 정도의 신의의 사람이구나.’ 하면서 그 사형수를 사면시켜줬다는 예화예요. 그 연극을 보면서, 수많은 어린 아이들이 박수를 치고 기뻐하고 좋아했습니다. 결국 이렇게 신의를 지키는 것이 이렇게 잘되는 것이로구나. 그랬던 기억이 불현 듯, 떠오르더라고요. 여러분들도 옛날에 다 들어보셨지요? 그런데 오늘 날은, 어떻습니까? 우리 자녀들을 어떻게 가르칩니까? 절대 친구 믿지 말아라, 쓸 데 없는 데에 나서지 말아라, 우리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런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는 거예요. 절대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성경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우리 자녀들에게 ‘너 절대로 그 친구를 위해서 대신 죽겠다거나 뭐 신의를 지킨다거나 이런 소리도 하지도 말아라.’ 이게 요즘 세태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그렇게 물들다보니까 하나님을 향한 신앙도 그렇게 됩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생명을 다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는데, 우리는 어느 틈엔가 나도 모르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수준을 선을 그어 놓은 겁니다. 하나님 내가 절대로 이 선을 못 넘어갑니다. 우리 어머니가 그러셨습니다. 절대 믿지 말라고, ‘절대 믿지 말라.’ 그 얘기가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에도 영향을 미치는 거예요. 그 이상은 못 믿어, 하나님하고 요즘 말로 밀당을 하는 거예요. 줄다리기 하다가 ‘하나님이 나한테 고난을 주시네? 이렇게 힘들면 안 믿어도 되는 거죠? 한번 해보자는 거죠 하나님?’ 이게 우리의 신앙의 모습입니다. 이게 진실된 신앙입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욥은 그러지 않았다는 거예요. 14절에 보면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 말씀이 어떻게 들려집니까? 욥은 그 어떤 일이 되었든 내가 좋아하는 방식대로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거예요. ‘내 뜻보다 중요한 건, 하나님의 뜻입니다. 나에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자기의 생명을 잃는 그 순간까지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 이 욥의 모습이 오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진짜 믿음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 그것을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니엘의 세 친구도 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있습니다.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점령을 하니깐, 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포로로 끌려갔어요. 그런데 그 바벨론의 위대한 왕 느브갓네살 왕이 큰 금 신상을 세워놓고 ‘여기다 절해라, 절하지 않으면 저 풀무불에다가 죽게 만들겠다.’ 이런 칙령을 내렸어요. 다른 모든 사람들은 두려워서 절을 하는데,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절을 안 하는 거예요. ‘절 안하면 풀무불속에 들어간다.’ 그랬을 때, 하는 대답이 뭡니까? ‘그 풀무불속에 들어가도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내실 겁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어리석은 대답입니까? 이렇게 바보스러운 얘기가 또 있겠습니까? 그 풀무불속에 들어가는데 하나님이 너희를 건져낸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아라.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살릴 것이다는 말을 외치는 거예요. 이들의 믿음이 진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다음에 증거가 됩니다. 그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우린 금 신상에 절하지 않겠습니다.’ 풀무불속에 나를 건져낼 줄 믿고 들어갔는데, 하나님이 안 구해 주셔서 내가 그 풀무불 속에서 죽는다 할지라도, 차라리 죽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상숭배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에 나는 내 생명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소중하게 지킵니다. 참 대단한 결단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믿음이 있기 때문에 저들은 고난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신앙인들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적당히 어느 선까지는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다가 어느 선이 되면 내가 발을 빼야지.‘ 이런 자세를 가지고는 우리에게 당한 고난을 이기지 못해요. 하나님을 신뢰했으면 끝까지 신뢰하는 거예요. 어떤 상황속에서도 신뢰하는 겁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매 순간 순간 어느 정도나 신뢰하느냐? 그것이 우리가 인생을 이기느냐 지느냐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열쇠가 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하나님을 어느 정도까지 신뢰하십니까? 어려움 속에서 어느 정도까지 하나님을 신뢰합니까? 바라기는 내 삶속에 어떠한 일들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나는 내 생명을 잃는 한이 있을 지라도, 나는 하나님 당신을 신뢰합니다. 당신의 뜻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당신의 뜻이 내 삶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나를 통해 이루시고자 작정하신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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