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또 다시 일어나는 교회 (빌 3:12~14)
> 인터넷방송 > 예배 > 주일예배
 
 
제목   부활의 영광으로 가는 길  
 
부활의 영광으로 가는 길
설교날짜 2019.4.14
설교자 박동찬 목사
본문말씀 요 12 : 12 - 16
 



 




부활의 영광으로 가는 길 

 

1. 사람들의 요구나 기대감에 흔들리지 말아야 된다. 

 


2.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았다.  

 


3. 예수님이 빌라도 법정 심판대 앞에 섰다.
 

 

 


 

요한복음 12:12~16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오늘은 종려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서 굳은 결단을 하시고 예루살렘에 입성을 합니다. 그 소식을 듣고 예수님에 대해 평소에 많은 소문을 들었던 예루살렘에 살던 유대인들이 다 모여 옵니다. 예수님이 기적도 행했다더라, 병자도 고쳤다더라, 또 귀신도 쫓아내더라.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이분이 진정 메시아로 오신다 하면 우리에게 큰 해방과 자유를 줄 수 있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 문 앞으로 모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을 할 때에 손에 든 것이 팜 트리라고 하는 종려나무 가지였습니다. 그 나무 가지를 들고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라며 예수님을 환영했던 것이 종려주일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것을 기념하는 주일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군가가 이렇게 환영을 해주고 칭찬을 해주면 마음이 설레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왠지 내가 성공한 것 같고 인생을 헛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스스로 우쭐해지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나를 칭찬하고 환영하던 사람들이 시간이 얼마 지나고 나면 나를 비난하는 경우도 있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그분 참 좋은 분이에요 하고 칭찬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그분 내가 좋은 분 인줄 알았는데 좋은 분이 아니더라, 똑같더라, 오히려 더 하더라, 나쁘더라, 뭐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우리는 앞을 내다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금 칭찬하는 그 사람이 내 편이라고 하는 생각을 갖게 되고 그 사람을 믿고 의지하게 됩니다. 만약에 나를 칭찬하고 나를 환영하는 그 사람이 멀지 않아서 뒤에서 내 욕을 하고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미리 알게 된다면, 내가 지금 길을 가는데 나를 환영하고 뛰쳐나와서 나를 맞이하고 칭찬하는 사람을 볼 때 우리가 기쁠 수 있겠습니까? 별로 기쁘지 않을 겁니다. 지금은 나를 환영하지만 조금 있다가 나를 배신할 사람인 것을 알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 사람에게 인생을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말하고 오히려 그를 비난하거나 그 사람을 향해서 어떤 충고를 해주려 할 것입니다. 그것이 보통 사람들이 가지는 인지상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을 할 때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예수님을 환영하는 이 사람들이 멀지 않아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자고 외치며 폭동을 일으키려는 사람들로 변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환영하는 인파들 사이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그들의 환영으로 인해서 그렇게 기쁘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착잡한 심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예루살렘 성전을 들어가셔서 결국은 가롯 유다의 배신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시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고난 주간에 있었던 일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어리석은 죽음으로 보이고, 허망해 보이기도 합니다. 왜 그렇게 죽으셔야 했는가. 내가 만약 예수님이라면 죽기 전에 뭔가 멋있는 일도 하고 기적도 행하고, 그러면서 내가 이런 존재다. 라고 알리겠습니다. 너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는다 라고 알리고 죽으면 정말 메시아로 오신 분이시지만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는구나 하고 깨닫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인간 같으면 본인이 가진 능력을 총동원해서 내가 어떤 존재라는 것을 좀 밝히고 싶을 만도 한데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연약한 모습으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그렇게 십자가에서 담담히 또 조용하게 죽음을 맞이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영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실패한 죽음인 것처럼 언급하고 조롱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무기력해 보이고 허망해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실패한 죽음이 아니라, 그 길이야 말로, 그 십자가의 죽음이야말로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길 이었다 고 하는 것을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성경의 교훈이 인생의 깊은 교훈을 많이 담고 있다고 믿습니다. 부활의 영광은 어느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서 그 과정을 다 이겨내고 난 다음에 부활의 영광이 임합니다. 출 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 애굽 하자마자 가나안으로 들어갔습니까? 아닙니다. 홍해를 건너야 하고, 광야 길을 걸어야 됩니다. 결국 요단강도 건너고 또 싸워야 할 전쟁들을 다 싸우고, 마지막에 가서 그 가나안 땅, 약속의 땅을 유업으로 얻게 되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영광을 받고 싶어 합니다. 말 그대로 영광스러운 것이니 부활의 영광을 나 또한 누리기를 원하고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원한다고 해서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번 고난 주간에 예수님이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길을 걸어 가셨습니다. 그 길이 어떠한 길이었는지 우리가 다시 한 번 묵상해보고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할 것인지 몇 가지 교훈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우리도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첫째, 사람들의 요구나 기대감에 흔들리지 말아야 된다. 

 

  사람들의 요구나 기대감은 늘 있습니다. 거기에 흔들리지 말아야 됩니다. 종려 주일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환호를 하면서 열렬히 환영을 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요’ 라고 환영을 했습니다. 이 말은 ‘당신은 메시아입니다’ 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살다 보면 누군가 나를 칭찬해 주는 사람의 말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나를 칭찬해 주는 사람이 내 편인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평소에 나에게 잘하는 사람이 어느 날 나한테 뭔가 요청을 하면 거절하기가 힘들어집니다. 저 사람 나한테 잘해 주고 나를 칭찬하고 늘 내 편이었던 사람이므로,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것이 보통 사람들이 가지는 마음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때, 수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환호하고 환영 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향해서 환호하고 또 환영했던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뭔가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어떤 기대감 입니까? 메시아라고도 하고 기적도 행한다고 하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로마의 지배, 이 압제 속에서 해방시켜주실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핍박이 너무나도 힘이 드는데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결집시켜서 이 로마 군인들을 다 쫓아내면 이 이스라엘을 자유로운 나라로 만들 수 있겠다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면 다윗의 시대처럼 번영한, 번성하는 그런 나라가 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 다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기대감 때문에 예수님에게 우리가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이제야 오시는 군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이제 해방의 때가 왔습니다, 자유의 때가 왔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예수님을 맞이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사람들의 기대감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 열망이 아주 강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이런 기대감을 만족시켜주지 못하면 사람들은 광분 할 것이고 또 실망 할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폭동이 일어날 지도 모르는, 큰 폭동이 일어날 것 같은 그런 상황을 예수님이 감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어느 정도라도 사람들의 기대감을 충족시켜 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는가, 있었을 수도 있다는 거죠. 군중의 심리가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 빌라도가 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만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면, 이 군중의 심리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수 많은 무리들이 모여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라 못 박아라 외치는데 이 예수님이라는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고 하면 폭동으로 변해 버릴 가능성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죄가 없지만 나는 너희들 때문에 이 사람을 죄인으로 넘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손을 씻어 버리는 그런 빌라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요즘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마음 이라는 거죠. 포퓰리즘 이라고 하는, 인기주의 입니다. 나라 살림이 어떠하든지 상관 안하고, 나에게 인기가 많이 몰리도록 퍼줍니다. 내가 인기가 많아지면 나를 향해서 투표를 해 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권력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나라가 어려워지고 국고가 탕진이 되기도 합니다. 또 사람들 눈치 보면서 하다 보면 잘못된 정책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나라가 어려워져도 나 때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결국은 국가가 어려워지는 겁니다. 나라가 어려워 졌을 때 정작 보면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기대감을 충족시킨다고 하는 것은 그 순간에는 뭔가 나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것이 옳은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대중의 기대감을 충족시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환영과 칭찬, 기대감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그 사명을 내가 온전히 감당하느냐 못하느냐 그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에 가서는 사람들에게도 더 큰 이익이 된다고 하는 것을 예수님은 분명히 아셨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이나 기대감 때문에 당신이 가야할 길 대신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일을 했다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로마인들을 쫓아낼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럼 세상 역사가 바뀔 수도 있었겠지요. 그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뭔가 도움이 되고 혜택이 되는 그런 일들이 있었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뜻은 무산이 되어져 버리고 오늘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만들어질 수가 없는 그런 결과가 나오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모습은 우리에게 큰 교훈 됩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이런 유혹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사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대감 속에 살아갑니다. 내가 생각할 때는 저 길이 옳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기대하니 나도 이 길을 가야겠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기대감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며 애쓰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보다는 나를 향한 사람들의 기대감을 충족시키고 그것을 위해서 내 인기를 계속해서 유지해 나가고 있습니다. 내 권력을 유지해 나가고 내 힘을 유지해 나가고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얻으며 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우리가 그 때 그 때마다 사람들의 요구와 사람들의 기대감을 눈치 보면서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결국에는 죄의 길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중에 가서는 후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길을 가려면 진리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대감에 부응하며 살아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옳다고 말씀하시는 그 길을 향해서 걸어가야 됩니다.
  예수님은 주변 사람들의 환호와 환성과 열망, 열렬히 환영하는 그 모습에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전을 거쳐서 죽음의 길, 십자가의 길, 골고다의 길을 향해서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반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사람들의 요구나 기대에 흔들리지 않고 내가 가야 할 길, 진리의 길, 옳은 길, 의의 길, 그 길을 끝까지 묵묵히 걸어갈 수 있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둘 째,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았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신앙의 본질을 회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시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중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책망할 것이 있다고 언급됩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첫 사랑을 잃어 버렸다는 겁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처음 할 때는 기쁩니다. 예수님께서 내 마음 가운데 오시니 기쁘고 내가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이 기쁩니다. 그런데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다 보면 점점 매너리즘에 빠지게 됩니다. 형식적인 종교인으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는 예수님이 가장 먼저 가신 곳이 성전이었어요. 예루살렘 성전은 각계 각층에서, 또 멀리 떨어져 살던 사람들도 절기가 되면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거룩한 성전에 돈 바꾸는 사람들이 있고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 있는 등 장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내쫓으시면서 외치는 말씀이 있지요. 그것이 뭡니까?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왜 장사하는 이런 시장터를 만들었느냐, 그러면서 성전을 깨끗하게 정화시키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궁금한 것은 왜 하나님의 성전에 이렇게 장사하는 사람들이 있고 비둘기파는 사람이 있고 돈 바꾸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까? 학교 졸업식에 가보면 학교 정문에 꽃 파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졸업 식장에 꽃을 미리 준비 못 하신 분들은 여기서 꽃을 사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 학교나 졸업식장을 가보면 그 앞에는 꽃을 파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제사하는 곳이에요. 그런데 멀리 타국에서부터 이렇게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서 올 때 거기서부터 내가 양을 끌고 올 수는 없습니다. 내가 제사의 제물로 사용할 동물을 가지고 오기가 너무 번거로운 겁니다. 가보면 성전 앞에 제물로 사용할 동물을 팔고 있어요. 그 곳에서 사서 가면 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온갖 장사하는 사람들이 다 모여 올 수 밖에 없는 곳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또 성전 세를 내야 됩니다. 타국에서 오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들은 타국 돈을 가지고 오니까 환전소가 필요한 겁니다. 돈을 바꿔 주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돈을 바꾸는 사람도 있어야 되고 비둘기 파는 사람도 있어야 되고 음식 파는 사람들도 있었겠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는 그곳을 보니 이것이 기도하는 거룩한 성전이 아니라 장사꾼들이 모여서 물건을 파는 시장처럼 보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어느 틈엔가 내 모습이 거룩한 하나님을 갈망하기 보다는 교회의 어떤 행사와 종교적인 행위와 형식적인 행위 가운데 빠져 버리게 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을 향해서 오늘 예수님께서 외친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종교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신앙인의 삶이 중요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내 마음을 쏟아 넣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말을 할 때 그 성전을 관리하던 종교 지도자들이 볼 때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겠습니까. 그래서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이때부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싫어하고 죽이려고 하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이런 마음을 모르지 않으셨어요. 그러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예수님은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다시 한번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이런 일로 말미암아 모략을 꾸미게 되고 내가 십자가에 죽게 될 것이고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아셨죠. 그래서 예수님이 다음에 취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기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생활 중에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종교적인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에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시는 겁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엎드려서 기도 하시잖아요. 앞으로 닥칠 고난에 대해서 이길 수 있는 힘은 세상적인 지식이 아니라는 것이죠. 내가 이길 수 있는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과 지혜라고 하는 것을 아셨어요. 이렇게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기도하실 때,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 하시는 겁니다. 그 기도를 통해서 결국 예수님은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이겨 나가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많은 경우 세상적인 생각들이 교회로 들어오게 될 때가 있어요. 세속주의가 교회에 침투해 옵니다. 편의주의를 원하고 성공주의를 원하고 또 율법주의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세상을 돌아 보면 여러 형태의 교회가 존재합니다. 어느 한 교회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어요. 어떤 교회에서는 이런 모양으로 예배를 하고 어떤 교회에선 저런 모양으로 예배합니다. 예배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죠. 그 예배를 통해서 내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고, 하나님 앞에 나는 연약한 자입니다, 나를 붙들어 주시고 나로 하여금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라고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그 은혜를 체험하고 능력을 힘입는 것이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런 힘을 힘입을 때 우리는 세상 속에서 당하는 여러 가지 위기와 위험을 이겨나가는 그런 힘과 능력을 얻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가는 길은 어느 하나의 문을 열었더니 바로 부활의 영광이 그 앞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그 날까지 내가 가야 할 그 길이 가시 밭길이라고 하면 그 길을 가야 되는 거예요. 매 순간 순간 기도하며 주님과 동행할 때 우리는 그 고난의 길, 그 어려운 역경의 길을 헤쳐 나가고 승리의 길을 걷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고 기도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가는 길이고,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나아갈 수 있는 비결입니다.  

 

  셋 째, 예수님이 빌라도 법정에 심판대 앞에 섰다. 

 

  이것이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판단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인생 살면서 누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심판하든지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결국 예수님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모략에 의해서 빌라도의 법정에 섰어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장면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잖아요. 모든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 주 아니십니까? 죄가 없으신 분이, 의로우신 예수님이 심판 받아야 할 인간들, 그 죄인들 앞에 있습니다. 그 심판 주가 죄인의 모습으로 서있는 장면이 지금 빌라도 앞에 서있는 예수님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누가 누구를 심판한다는 이야기입니까. 예수님께서 오히려 심판을 하셔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런 죄인들 앞에 심판받는 모습으로 서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봐도 참 우스운 그런 모습이 아닐 수가 없다는 겁니다.
  오늘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따르는 우리들도 어찌 보면 상황이 참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교회는 그래도 세상을 향해서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진리의 길이 이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됩니다. 죄와 타협하면 안 됩니다. 몸부림 쳐야 됩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오히려 세상에서는 교회를 조롱하고 있다는 거예요. 왜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다, 왜 그렇게 너희들은 어리석은지 모르겠다. 그렇게 살지 말아라. 이렇게 오히려 교회를 조롱하고 판단하고 심판하고 있는 세상의 모습을 보게 될 때가 있다는 거예요. 그럴 때마다 제 마음 속에는 뭔가 항변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거죠. 뭔가 따지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아니 누가 누구를 지금 정죄하고 있느냐 얘기하고 싶어요. 논쟁도 하고 싶고 우리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을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니까 예수님은 그런 세상의 조롱 앞에 항변하지 않으셨다는 거예요. 잠잠 하셨어요. 모욕과 십자가의 고난 앞에서도 침묵하시면서 오히려 세상이 주는 고난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가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심판 주이면서 죄인들, 심판 받아야 하는 그 죄인들 앞에 죄인의 모습으로 서 계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이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는 길이요 또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지는 길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 주님은 아셨기 때문이다 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 성도님들이 꼭 아셔야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대신 죽으셨다 말이에요. 그러면 질문할게요.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인의 죽음이냐 의인의 죽음이냐 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 죄를 다 짊어 지셨잖아요. 어떻게 보면 죄인의 죽음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겁니다. 죄인의 죽음이면 부활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워낙 의로우신 분이시고, 예수님의 잘못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신 죽음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성경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는 가장 큰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신 의인의 죽음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의 죽음에서 부활을 일으킨다라고 하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 이라고 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었지만 그 마음을 볼 때 예수님의 마음은 의인의 마음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이 세상을 살면서 세상의 오해 속에서도 그것을 내가 친히 다 감수하면서 죽음의 길 고난의 길을 가야 되는 이유는 그것이 의인의 죽음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라는 것입니다
  세상과 항변할 필요가 없는 거에요. 세상 이야기에 대해서 내가 억울하다고 말하면서 논쟁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사랑하는 모습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을 끌어안고 나를 비난하고 판단하는 사람을 향해서 참고 인내하고 더 나아가서 그들을 사랑하게 되고 그들의 허물이 나의 허물인 것처럼 내가 그것을 감싸안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모습이 어리석은 모습이 아니라 의로운 삶의 모습이라고 인정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보느냐에 대해서 우리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은 심판주가 아닙니다. 모든 것을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실 것이냐 이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백이면 백 ‘부활의 영광을 원하십니까?’ 하고 물으면, ‘아멘. 부활의 영광을 원합니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부활의 영광을 소망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성도로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세상 쾌락과 세상 즐거움과 세상 부귀와 세상에 부러워 보이는, 좋아 보이는 그런 것들을 다 등지고 내가 성도의 길로 고난의 길로,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는 이유는 부활의 영광을 소망하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진짜 부활의 영광을 원한다고 하면 먼저 진짜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진짜 죽지 않고는 부활의 영광이 없습니다. 죽은 척 하다가 일어나는 것은 부활의 영광이 아니라 자다가 일어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진짜 부활의 영광을 원한다고 하면 내가 진짜 세상 앞에 죽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죽음 없이 부활은 있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불의한 죽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우리의 죽음이 의로운 죽음이 되어야 되는데 어떻게 죽어야 의로운 죽음이겠느냐, 사람들의 요구나 기대에 부응하면서 사는 사람은 의로운 죽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붙잡고 하나님의 기대에 맞게 그렇게 살다가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 종교 생활하는 게 아니라 매일 살아계신 주님과 동행하고 기도로 능력을 얻는 그런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세상이 우리를 공격하고 조롱하는 것에 대해서 항변하고 막아서는 것이 아니라 억울하더라도 그것을 다 감싸 안고 중보기도 하고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포옹 하고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난을 감수하며 살아가게 될 때 이것이야말로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지는 길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아 아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문제는 자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자신이 없다는 게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자신이 없고, 용기가 없고, 그렇게 싸워 나갈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세상적으로 잘되게 해주세요 이 것 잘되게 해주시고 저것도 성공하게 해 주시고 그런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붙잡고 진리의 길, 그 길이 고난과 역경의 길이라 할지라도 그 길을 갈 수 있는 그래서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힘과 지혜와 능력을 하나님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찌 보면 이것이 우리가 가장 간절하게 기대하고 또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해야 되는 기도제목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 이제 이번 사순절에 마지막 주간을 지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묵상 하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는 것일까 돌아보면서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지혜와 힘과 능력을 가지고 이 부활의 능력을 소유하고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시길 축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더욱 더 감사하고 영광을 올려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번호
날짜
설교자
제목
성경본문
영상
644
2019.7.7
박동찬 목사
 막 4 : 35 - 41
 
643
2019.6.30
박동찬 목사
 단 3 : 13 - 18
 
642
2019.6.23
박동찬 목사
 엡 6 : 10 - 13
 
641
2019.6.16
박동찬 목사
 시 37 : 23 ...
 
640
2019.6.9
박동찬 목사
 히 11 : 20 ...
 
639
2019.6.2
박동찬 목사
 히 11 : 8 - 12
 
638
2019.5.26
박동찬 목사
 히 11 : 1 - 6
 
637
2019.5.19
박동찬 목사
 요 9 : 1 - 7
 
636
2019.5.12
박동찬 목사
 엡 6 : 1 - 3
 
635
2019.5.5
박동찬 목사
 삿 2 : 6 - 10
 
634
2019.4.28
박동찬 목사
 사 40 : 27 ...
 
633
2019.4.21
박동찬 목사
 마 28 : 1 - 6
 
>>
2019.4.14
박동찬 목사
 요 12 : 12 ...
 
631
2019.4.7
박동찬 목사
 마 27 : 32 ...
 
630
2019.3.31
박동찬 목사
 욥 23 : 10 ...
 
 1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운영자에게 메일보내기

SSL certifica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