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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앙생활의 유익  
 
신앙생활의 유익
설교날짜 2019.4.28
설교자 박동찬 목사
본문말씀 사 40 : 27 - 31
 

신앙생활의 유익


1. 바르고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2. 구원의 확신을 갖고 살아갑니다.

3.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살게 됩니다. 





본문말씀  사 40 : 27 – 31.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28.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31.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문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바쁜 세상을 살다가 주일에 와서 시간을 빼앗기는 것인가?’ 혹시 오늘 교회 처음 나오신 분들은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을 도대체 왜 하나? 그저 열심히 살면 되지.’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시작은 유신론, 무신론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가?’ 아니면 신이라는 존재는 세상에서 이야기하듯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거기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어떤 유익이 있는지 말씀드리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를 여러분들께 전하기 원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해서 많은 유익을 얻고 힘을 얻으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 째, 예수님을 믿으면 바르고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바르고 가치 있는 삶을 사는 방법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예수님 안 믿어도 얼마든지 바르고 가치 있게 살 수 있습니다.’ 라고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는 어떤 규범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을 하느냐 안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일단 신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 나는 자유다. 이렇게 생각하다보면, 내 삶의 규범이라고 하는 것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 때, 규범이 있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규범이 없는 삶은 사람이 자유한 것 같지만, 자유가 아니라 방종한 상태로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요즘 세상은 더합니다. 옳고 그름이 없어진 세대입니다. 다음 세대들, 우리 자녀들에게 “너, 그렇게 하면 안 돼.” 하면,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그건 엄마 생각이지, 제 생각은 달라요.” “안 돼. 그것은 틀렸어.” 하면, “틀린 게 어디 있어요? 다를 뿐입니다.” 요즘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같고 다름이 중요한 시대임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매우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옳고 그름이 있어야지 그것이 사라져 버리게 되면, 우리가 앞으로 무슨 일을 저지르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규범이 있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과 어떻게 같을 수 있겠습니까? 규범이 있는 사람은 적어도 도덕적으로 살아갑니다. 발전적으로 살고, 더 열심히 노력하기 때문에 성공의 가능성도 많습니다.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틀린 삶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옳고 그름의 기준이 없는 사람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모릅니다. 때로는 자신의 감정에 이끌려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감정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를 속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 양심이나 이성은 이것이 틀렸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데, 내 감정은 ‘내가 저거 하고 싶어. 먹고 싶어. 저거 가지고 싶어.’합니다. 이 때, 감정에 이끌려 행동하면 내 이성의 생각을 무시해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갈 때, 우리 자신을 너무 믿으면 안 됩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여러분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많이 믿어봤지만 얼마나 실수투성이고, 얼마나 많은 흠이 있고, 얼마나 연약한 존재입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규범을 만들어 놓습니다. 이것은 해도 되고 저것은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철저히 만들어놓는 사람은 실수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미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토론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의 지도자 한 명이 앞에 서서 인도했습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다 질문했습니다. 기독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왜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고, 천지를 창조해 놓고, 형벌을 주는 것은 무슨 경우이냐?”이런 질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하고 답변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오해를 가지고 있는 부분을 풀어주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왜 자꾸 기독교는 인간을 믿지 못하느냐? 인간은 충분히 도덕적이고 성숙하다. “가만히 내버려둬도 되는데 왜 자꾸 하지 말라고 하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느냐? 그렇게 사람을 못 믿느냐? 사람은 충분히 도덕적이다. 성경적인 기준 없이도 잘 살 수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너무 불신하는 것이 아니냐? 성경 말씀 없이도 우리는 충분히 도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소 일리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답변하시는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당신은 밤에 잘 때, 문을 열어놓고 잡니까, 잠그고 잡니까? 문을 잠그고 잡니다. 왜 문을 잠그고 잡니까? 인간이 충분히 도덕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굳이 문을 잠그고 잘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열어놔도 됩니다. 무엇하러 문을 닫아놓고 금고를 만들어 놓습니까? 인간이 충분히 도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고 하면, 세상에 경찰서는 왜 있습니까? 세상에 법원이 왜 그렇게 많아야 하고, 하루에도 수천 건의 소송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간이 도덕적인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오류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역사를 돌아봤을 때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공산주의가 왜 위험한지 아십니까? 공산주의는 철저히 신의 존재를 무시합니다. 신이라는 존재는 없다. 신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이 세상에서 죽으면 끝이다. 유물론적인 시각을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자신들의 소신대로, 자신들의 생각대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중에 서 지도자 한 사람의 결정이 얼마나 잘못된 결과를 빚어냈는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 봅니다. 러시아의 철권 정치를 했던 스탈린을 보십시요. 스탈린은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는지, 같은 동포 수 천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여러분, 그 사실을 아십니까? 수 천만 명을 학살한 것입니다. 중국의 모텍동이라고 하는 지금 중국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는 지도자는 문화혁명을 통해서 지식인, 학자들, 수 천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판단으로 인해 그러한 오류가 저질러집니다. 우리가 잘 아는 히틀러는 6백만 명의 유태인을 학살했습니다. 한 사람이 잘못된 소신과 신념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았더라면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요? 왜 그들은 그런 오류를 범했는가? 바로 규범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인 자신의 생각에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랐을 뿐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인간의 생각을 따르게 되면, 우리는 또 실수하고 넘어지고, 또 잘못된 판단으로 말미암아 또 누군가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의 생각을 조율해가기 때문에 그런 잘못된 판단을 내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요즘 세태를 보면서 목회자로서 제가 심히 우려가 되는 것은 이 시대 가운데 규범이라는 것이 없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전통이라고 하는 것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에 젊은이들은 ‘yolo 인생, 한 번뿐인 인생인데 그저 내 마음대로 살고 가면 되지 왜 자꾸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 모든 것이 다 귀찮은 것입니다. 규범 같은 것에 매여 있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하는 것을 듣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기 싫습니다.” 하며 교회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하며 욕을 합니다. 교회 사람들이 싫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싫은 것일까요, 기독교가 싫은 것일까요? 사실 규범이 싫다는 것입니다. 나는 자유하고 싶은데 왜 이것저것 못하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개인의 자유를 추구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 그것을 무엇이라 하느냐? 인권이라 하는 것입니다. “인권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여러분, 인권이라는 것이 사실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권리를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요즘 세태에서 나오는 인권이라 하는 것은, 모든 규범을 깨뜨리겠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낙태죄라고 하는 것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여성 단체에서 환호를 하고 두 손을 들고 좋아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편하자고 뱃속의 아기를 죽여도 되는 것입니까? 여러분 성경에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아벨의 피가 땅에 흐르면서, 그 아벨의 피가 하늘에 호소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땅에 재앙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뱃속의 아기가 5주가 되고 10주가 되면 그대로의 생명체입니다. 피가 그 속에 흐르고 있습니다. 심장이 뛰고 있습니다. 손과 발이 생겨나는 것이 10주면 다 이루어집니다. 낙태할 때 어떻게 합니까? 아이를 토막토막 잘라내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긁어냅니다. 그 아이들의 피가 공공연하게 이 땅 가운데 만연되어질 때, 그 피의 부르짖는 소리가 안 들릴 것 같으냐는 말입니다.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인권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 이야기는 내 인권을 위해서는 옆에 있는 사람들을 죽여도 된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 이야기입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적어도 책임을 지는 자아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책임이 없어지고 맙니다. 불편한 것들은 다 없애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그런 것들이 없어질 때마다 환호하고 열광하는 이 세대를 볼 때, 심히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간통죄가 폐지되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마음 놓고 성적인 죄를 지어도 되니까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얼마나 좋으냐? 왜 이런 것에 매이고 사느냐? 가정을 지키는 일이 사라집니다. 이제는 이혼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바람을 핍니다. 요즘은 그런 가정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세상은 점점 이렇게 인권이라는 명목 하에 좋은 규범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지금 자기 편한 대로 살아가자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권력이나 힘이 생기면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은 어떤 법이라도 다 바꿔버리고 만다.’ 여러분 요즘 TV, 뉴스를 보면서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우리가 듣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일들은 기본적으로 지켜야하는 규범이 사라져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 규범이 사라지면서 생겨날 일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뿐이다. 저는 그런 생각이 들 뿐입니다. 여러분, 반면에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이것보다 더 높은 도덕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음속으로만 간음해도 그것이 간음이다. 마음으로만이라도 누군가를 증오하면 그것이 살인이다. 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속으로 그러한 생각을 갖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높은 도덕률을 이야기하고 있는 법은 세상에 없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진리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높은 도덕률을 지키며 살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이 다소 불편합니다. 다소가 아니라, 많이 불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아갈 때, 세상은 살기 좋은 곳이 되고, 우린 후손들로 하여금 살기 좋은 나라, 평화로운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인권을 주장하면서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높은 도덕률을 지향하고 그것을 지켜나갈 때, 이 나라가 아름다운 나라가 되고 평화로운 나라가 되고 후손들이 살기 좋은 나라가 된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여러분 동남아시아에 가면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그 사이에 아주 작은 나라가 있습니다. 싱가포르라고 하는 나라입니다. 굉장히 작은 나라입니다. 그런데 GNP가 우리 나라보다 높습니다. 얼마나 거리가 깨끗하고,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들어 놓았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지상 낙원이 있다면 싱가포르라고 이야기할 만큼, 싱가포르라고 하는 나라를 칭찬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시민 정신이 높고, 거리는 질서 정연하고, 모든 것들이 정돈되어 살아갈 수 있는지요. 그 이유 중의 하나로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수상 중에 이관휘라고 하는 수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많이 들어보셨죠? 이관휘 수상은 1965년부터 1990년까지 총리 생활을 했습니다. 지금도 그 분의 정신적인 지도력 아래 그 나라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세운 법칙 중에 하나는, 높은 도덕률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것을 엄격하게 지킵니다. 기본 원칙이라고 하면 국가적인 희생을 치르고라도 그 나라를 만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가는 것은 어떤 정치적인 것을 잘했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선진국에 들어가려고 하면, 그 민족의 도덕성이 어느 정도에 위치해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인권이 무너지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다 보면 결코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할 것입니다. 선진국이 되려면 높은 도덕률이 있어야 합니다. 1등 국민이 되려면 높은 도덕률이 있어야 합니다. 도덕률 없이 경제적인 부강함만 높아지면 그 나라는 타락하게 되고,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나라처럼 전락합니다. 법이나, 사회적인 윤리 이런 것들을 안 지키면 얼마나 편하고 좋습니까? 내 마음대로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교통 법규도 안 지키면 좋겠지요. 뭐든지 내 마음대로 무질서하게 지내는 것이 다소 편해 보일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겠습니까? 그것이 오히려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게 됩니다. 법과 도덕은 지금 다소 불편해보일지 모르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것들은 나를 지키는 역할을 합니다. 나로 하여금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게 합니다. 더 나아가 이 나라는 살기 좋은 나라로 변화됩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성경에 주어진 도덕률이 세상의 어떤 도덕률이나 윤리 규범보다 더 높은 차원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산다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될 때,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인해 적어도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없게 됩니다. 옆 사람에게 피해를 줄 일이 없습니다. 옆 사람에게 예절을 지키며 살 수 있고, 한 평생의 삶을 돌아볼 때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됩니다. 나는 가치 있는 무언가를 추구하며 살았구나. 내 인생을 돌아볼 때 후회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대로 방종하며 사는 것이 지금은 편하고 좋을지 모르지만, 마지막 순간에 가서 내 인생을 돌아볼 때, 내 인생은 정말 형편없는 삶이었구나.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는 후회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 지도자의 자질을 갖출 수 있습니다. 요즘에 아무리 내 마음대로 살고, 인권이 존중된다고 해도 지도자로 서는 사람에 대해서만큼은 얼마나 철저히 검증을 하고 있습니까? 지도자의 자질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으로 살아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살 때, 어느 자리에서나 그 사람은 대우받는 사람으로 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내가 지도자로 살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살기 때문에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되는 것이고, 우리가 살아간 삶의 뒷자리 그 발자취를 돌아볼 때, 그 자리는 깨끗합니다. 살기 좋은 나라가 되고, 깨끗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힘들고 어렵더라도 지켜야겠다는 규범을 마음속에 담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일인지를 알아야합니다.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세요. 세계적인 위인들, 비범한 일을 행했던 사람들은 모두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미국의 노예 해방제도를 만들었던 아브라함 링컨은 철저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영국의 노예를 해방시켰던 윌리엄 윌버포스도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들의 뒤에는 항상 목회자가 있었습니다. 밀림의 성자였다고 불리는 슈바이처 박사는 혼자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지만, 오지에 가서 자신을 헌신하며 살았습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살았습니다. 그 누구도 슈바이처 박사를 보면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위대하다. 저런 분이 있어서 우리가 행복하다. 그런 분들이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런 삶이 가능했습니다. 한국의 역사를 돌아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지하고, 가난하고, 비전과 미래가 보이지 않고, 세계열강의 지배를 받았던 이 민족 가운데 성각자로 살았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선교사들의 복음 증거를 들으면서 머리가 깨었던 사람들, 바로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지도자들은 모두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김구 선생도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신채호, 안중근, 서재필, 도산 안창호… 누구랄 것 없이 모두 기독교 정신을 무장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절망적인 이 나라, 이 민족의 운명을 바라보면서 희망을 외치고, 도전하고,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독립과 해방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냈습니다. 내가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과 규범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자체가 내가 비범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둘 째, 구원의 확신을 갖고 살아갑니다.


  ‘구원’하면 세상 사람들은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의 것이 전부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우리를 현혹하십니까?” 그러면 제가 다시 묻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라고 하는 증거는 대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이 전부라고 하는 확신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내가 모르면 없는 것입니까?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없는 것입니까?” 대부분의 경우 “눈에 안 보이면 없는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럼 눈에 보이면 다 맞는 것입니까?” 합니다. 여러분 눈에 보이는 것 중 거짓된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누군가 나에게 친절하게 대합니다. 저 사람이 나를 상냥하게 바라보고 있고, 상냥하게 말하고 있고,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럼 그 사람이 나에게 상냥한 사람이겠습니까? 아니잖아요. 반면에 내 눈에는 무뚝뚝하지만 그 사람이 진정 나를 위해주는 사람인 경우도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죽음 이후에 영원한 세상이 있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는 여러 근거들이 있다는 것을 오늘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해보이려고 수많은 철학자들이 그것을 증명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철학자 누구를 떠올립니까? 임마누엘 칸트나 데카르트를 떠올리지 않으십니까?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이지요. 존재론적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존재론적으로 원인과 결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이론들도 있습니다. 어떤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또 그 원인에는 그의 원인이 있습니다. 그 원인도 또 어떤 원인이 있기 때문에 그 원인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게 올라가다 보면 제 1 원인이 있는데, ‘모든 것의 시작,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인과론적으로 철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증명했습니다. 목적론적으로도 증명한 분들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목적이 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에 목적 없이 존재하는 것들이 있습니까?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손가락에 난 지문조차도 목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컵을 집을 수도 없습니다. 눈썹이 존재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배꼽이 존재하는 목적도 있습니다. 세상에 목적 없이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우연히 지어진 것이 아닌 지적 설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지적인 설계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구가, 우주가, 세상 만물이 다 누군가에 의해 지적으로 설계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을 설계할 때도 방 구조는 어떻게 하고… 설계도면에 따라서 만들어지는 것처럼 인간의 모든 DNA는 지적 설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하며 목적론적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도 합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도덕론적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했습니다. 세상에는 악한데 잘 먹고 잘사는 사람이 있고, 선하게 사는 사람도 있고… 그런데 언젠가 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죽으면 착하게 산 사람은 무엇 하러 착하게 살았냐는 것입니다. 억울한 것이지요. 악하게 자기만 위해서 잘 먹고 잘살았던 사람이나, 선하게 고생고생 살다가 안개와 같이 사라지는 인생이라고 하면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불공평합니다. 악인을 심판하기 위해서라도 신은 존재해야 한다. 이게 바로 칸트의 이야기입니다. 세상은 공평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공평하기 위해서라도 신의 존재를 도덕론적으로 증명하고자 한 칸트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한 철학자들이 많았습니다. 눈에 안 보이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처럼 말도 안 되는 주장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공기 중에 산소가 있고 질소가 있고 이산화탄소가 있는데 보입니까? 안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합니까? 그것은 느낄 수도 없는 부분입니다. 어느 부분이 산소고, 어느 부분이 질소고 느낄 수 있습니까? 느끼지도 못합니다. 어떻게 눈에 안 보이는데 그런 것은 있다고 우리는 확신합니까?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고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그래도 목사님, 그런 것은 느낄 수 있잖아요.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잖아요. 느낌을 통해 알지 않습니까?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다 보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느낍니다. 나를 보호하시는 것을 느낍니다. 위기 가운데 나를 축복하시는 것을 느낍니다. 왜 못 느낍니까? 그러니 우리는 그 느낌을 통해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안 하는 사람은 이해를 못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해 보면, 하나님이 나를 정말로 사랑하시고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노력하면 노력한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면 ‘아, 하나님이 내 삶을 인도하신 것이구나.’ 그렇게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이 믿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믿어지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펴고 읽다 보니, 이 세상의 삶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죽으면 그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며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보니까 ‘죽음이 끝이 아니로구나.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구나.’ 그 심판의 자리에 서게 되었을 때 우리 모두 그동안 이 세상에서 행했던 행위대로 심판받게 되는데, 그 심판의 자리가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자리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시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우리를 옮겨주시고, 그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의 삶이 얼마나 기쁨으로 충만한 삶이 되는지를 경험합니다. 그 기쁨으로 인해서 우리가 세상을 살 때 어떤 어려움이 올지라도 그것을 우리는 이겨나가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될 때 하나님이 나를 자녀로 삼아주셨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우리가 이야기하는 복음입니다. 복된 소식. 오늘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복음을 믿음으로 받으시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늘 기뻐하며, 찬송하며 승리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신앙생활의 유익이 있다면 이 세상을 살면서도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우리와 함께하시고, 동행하시고, 우리의 삶을 걸음걸음마다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되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 29절에도 무엇이라고 합니까?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고’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게 될 때, 우리 삶의 모든 순간순간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를 축언을 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 너무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되십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절망 가운데 살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교회에 와 성전에서 ‘하나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절망적인 상황에 있습니다.’ 그러고 기도할 때 알 수 없는 소망이 이 속에서 싹트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래,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될 수 있겠다.’ 하면서 우리의 삶이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절망 속에 있던 우리의 삶이 무엇인가가 희망으로 바뀝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니까 우리가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 무엇을 선택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지혜가 없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왠지 저것을 선택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이쪽을 선택하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부어지니까 저 쪽을 선택해야할 것 같은 마음이 듭니다. “용기가 없습니다.” 하면 용기를 주십니다. “하나님, 피곤하고 지쳤습니다.” 하면 까마귀를 통해서라도 먹을 것을 주시고 “일어나라. 내가 너와 함께한다.” 이 믿음으로 우리가 다시 일어나는 것을 경험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저 우주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삶 속에, 작은 부분, 세세한 부분까지도 간섭하시고 우리를 축복하시고 인도하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모릅니다. 제가 목회를 하다 보면, 가슴 아플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어떤 두 부부 성도님이 젋어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 하시다가 어느 날 때가 되니 한 분이 먼저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주일날 와서 예배를 드리는데, 항상 두 분이 같이 예배를 드리셨는데 한 분은 가시고 한 분만 남아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안 좋습니다. 불편합니다. 어느 날 한 여자 권사님이 울면서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목사님.” “예.” “우리 남편이 가고 나서 제가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르겠어요.” 하며 우시는 것입니다. 제가 딱히 드릴 말씀이 없었습니다. 한참을 들어드리다가 손을 잡고 “권사님, 기도해드릴게요.” 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분을 혼자 두지 마시고, 하나님이 붙들어주시고 은혜 베풀어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고, “권사님, 힘내세요. 하나님이 함께하세요. 권사님은 절대 혼자가 아니세요. 하나님은 이렇게 권사님이 외롭고 힘들어하실 때 더 권사님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랬더니 이 분이 적잖이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그러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언합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작은 기도까지 들으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기적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하나님, 아파요.”하면 힘을 주십니다. 며칠 전에 제가 심방을 다녀왔습니다. 우리 교회 암 말기로 누워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8개월 동안 음식을 못 드시고, 몸에 관을 꽂아 계셨습니다. 제가 너무 안타까운 마음에 간절히 기도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랬더니 지난 주간에 연락이 왔습니다. 목사님 그렇게 기도하시고 다녀가신 다음에 이 분이 죽을 드신다는 것입니다. “8개월 동안 음식을 못 드시던 분이 어떻게 죽을 드세요?” 죽을 드시다가 이제는 밥을 드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며 기적이 일어난 것에 좋아하시는 것을 보게 될 때, 하나님 참 좋은 분이시다. 내가 무엇이라고, 부족한 종이지만 그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목회를 하다 보면, 어느 날은 귀신 들린 아이를 데리고 오는 날도 있습니다. “목사님, 귀신이 들렸어요.”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칩니다. 그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 “이 악하고 더러운 귀신은 물러갈 지어다.” 명령했더니, 순식간에 귀신이 떠나가고 이 아이가 멀쩡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런 것을 경험할수록, 하나님의 말씀은 참 진리의 말씀이로구나. 살아있는 말씀이로구나. 말씀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것을 경험하고 “하나님은 안 계십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이 진리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때로는 우리가 잘 모르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열심을 다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님들 기억하세요.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보아야 믿겠습니다.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예수님으로 오셨습니다. 봐도 안 믿잖아요. 보면 믿을 것 같습니까? 봐도 안 믿습니다. 기적을 경험해도 안 믿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믿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렇게 믿는 자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고, 우리가 믿는 성경이 진리임을 다시 한 번 확신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시고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길 축언을 드립니다. 오늘 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들 계십니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심으로 구원받고 복된 삶을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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