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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실상을 밝히 보고 있는가  
 
실상을 밝히 보고 있는가
설교날짜 2019.5.19
설교자 박동찬 목사
본문말씀 요 9 : 1 - 7
 

 



 


실상을 밝히 보고 있는가


1. 예수님만이 우리의 눈을 열어주신다.
2. 눈이 열리면 실상을 보게 된다.
3.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요 9 : 1 – 7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4.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길을 가시다가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을 만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시각장애인을 보자 제자들이 궁금한 생각이 들었어요. 이 사람은 어떤 사고로 인해서 후천적으로 시력을 잃은 것이 아니라 날 때부터 앞을 못보는 상태로 태어났습니다. 제자들이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무슨 죄가 있어서 그런 것인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보면 제자들도 “이 사람이 누구의 죄로 인해서 이렇게 태어나게 되었습니까? 이것이 자기 죄입니까? 아니면 그의 부모의 죄입니까?”이렇게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죄로 인해서 이 사람이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나게 되었다고 단정을 짓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사람의 죄냐? 부모의 죄냐? 누구의 죄 때문이냐? 결론은 그냥 죄 때문인데, 누구의 죄 때문이냐 이것이 궁금한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때로 이런 실수를 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 어려운 일을 당하면 우리가 쉽게 판단을 합니다. ‘분명히 무슨 죄가 있어서 그럴 것이다.’ 욥도 그랬습니다. 욥은 누구보다도 의롭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사랑했던 정말 의로운 동방의 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이 위로하러 왔다가 욥에게 하는 말이, “무언가 죄가 있어서 그럴 것이다. 네가 겉으로는 의로운 척하지만 속으로는 숨겨놓은 죄가 있으니 이렇게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네가 지금 생각이 안 나도 잘 생각해 보고 그 죄를 회개하라.” 고 권면을 합니다. 욥은 누구보다도 의롭게 살려고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은 그가 받는 고난은 죄 때문이라고 단정 짓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누가 우리 주변에 어려운 일 당하면 ‘죄 때문이다’ 이런 생각하지 마시기를 축원을 합니다. 모든 것을 그렇게 단정 짓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 실수를 합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3절에 보니까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죄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앞 못 보는 그 사람에게 가서 그의 눈을 고쳐주셨습니다. 사람이 앞을 보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앞을 못 보기 때문에 사고를 당할 수 있는 확률도 높고, 또 누군가에게 쉽게 속을 수도 있죠. 어려운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눈을 감고 1시간만 생활해보세요, 얼마나 불편한지 알게 됩니다. 마음껏 걸어 다닐 수도 없습니다. 너무나도 불편합니다.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은 참 귀한 축복인거죠. 왜 우린 나면서부터 시각 장애인으로 태어나지 않고 이렇게 볼 수 있었을까요? 내가 노력해서, 내가 결심해서, 내 의지로? 아닙니다. 하나님이 볼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귀한 은혜요, 축복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아 아는 성도님들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말씀을 가만히 묵상을 하니 이런 생각이 들어요. 내가 보기는 보지만 과연 내가 보는 것이 진실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요. 나 자신을 내가 볼 때 나라고 하는 존재는 이런 존재고, 이렇게 사는 존재인가? 나의 현 상황, 돌아가는 주변의 상황도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이 그것이 진실이겠는가? 그것이 실상이겠는가? 우리는 눈이 있어서 보지만 헛된 것을 볼 때가 있어요. 허상을 보고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을 때도 있고, 진실을 보면서도 그것을 허상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눈을 떴기 때문에, 볼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감사하고 이렇게 고마워해야 하는 것인가? 어찌 보면 진실을 진실로 구분하지 못하고 사는 것은 아닙니까? 소위 말하는 눈 뜬 장님이 아닙니까? 눈은 뜨고 있지만 보지 못하는 겁니다. 사리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날 때부터 시각 장애인 된 사람과 우리의 삶이 뭐가 그리 다른가? 별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실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진실이라고 믿고 삽니다. 내가 보는 것으로 인해 나 스스로가 나를 속이고 있는 존재라고 말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닙니다. 저는 이 말씀을 가만히 묵상하면서 나는 지금 나의 실상을 보고 있는가? 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도 실상을 보고 있는가? 허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성도님들은 어떠십니까? 자신에 대해서 실상을 보고 계십니까? 아니면 주변에서 돌아가는 모든 것에 대해서 실상을 보는 눈이 있으십니까? 저는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오늘 우리 삶에 주시는 3가지 교훈의 말씀을 잠시 생각해보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오늘 이 본문 속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되는 것은 예수님만이 우리의 눈을 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예수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고 예수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야 비로소 우리는 실상을 볼 수가 있어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내 눈이 세상을 바라본다고 해도 그것은 실상이 아니라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날 때부터 시각 장애인이 된 사람, 이의 인생은 얼마나 어둡겠습니까? 보지 못하니 모든 것이 깜깜하죠. 아무리 불을 밝게 밝혀도 시신경이 죽어있기 때문에, 그 밝음을 인식을 못하는 것이에요. 어두울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이야 복지 시스템이 잘 되어있으니까 그런 분들도 살아가는 데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지만, 2천 년 전에는 그런 시스템이 잘 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전에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게 되면 손가락질을 당했습니다. 사는 것 자체가 힘들었습니다. 구걸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놀림을 받게 되고, 천대를 받았습니다.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정말 암흑과도 같은 그런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어느 날 전혀 이런 기적을 예상하지 못하고 오늘도 하루가 사는 것이 참 버겁고 힘들겠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고 하루를 시작을 하는데, 우연히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긍휼이 많으신 예수님은 이 시각 장애인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만나서 얘기를 해주시고 눈을 열어서 보게 해주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서, 그 시각 장애인의 눈이 열려지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 결과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후의 삶이 얼마나 달라집니까?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여전히 어둠 가운데 있는 거예요. 여전히 괴롭고 남들이 속이면 속을 수밖에 없는 그런 인생을 살지만 내가 예수님을 만나고 이제는 눈을 뜨고 보니깐 어둠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빛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속아 살던 인생이 속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는 얘기죠. 더 이상 어둠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빛 가운데 삽니다. 얼마나 황홀하고 감격스럽습니까?  얼마나 기쁜 일이고 좋은 일입니까? 여러분, 어둠 속에 살던 사람은, 자기가 어둠 속에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요. 그런데 그 사람이 어둠속에서 빛을 보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과거에서는 빛 가운데 사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알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제가 가만히 말씀을 묵상하다가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다 밝은 빛을 보는 것 같아도 어둠속에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아무리 진리의 말씀을 증거를 해도 그것이 진리인 줄 구분도 못하고 어둠 속에 그저 살아가면서 그러면서도 우리는 불편한 걸 모르고 그렇게 사는게 좋은 줄 알았어요.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나서 우리의 믿음의 눈들이 열리지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빛 가운데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경험을 하게 되는 거죠. 깨닫게 되는 거죠. 그러고 나면 우리의 삶이 과거의 어둠가운데 살던 삶이 정말 얼마나 불쌍하고 가련한 삶이이었는가?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의 삶의 자세가 달라지는 것이죠. 예수님을 믿어서 나는 이제 봅니다. 이제는 빛이 내 눈에 들어왔습니다. 빛이 빛 가운데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나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는 기쁨이 충만해야 되고 감사가 넘쳐나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삶은 어떠한가? 한번 우리가 돌아봐야 됩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내 삶이 기쁨으로 돌아섰는가? 감사와 감격이 넘치는 삶으로 그렇게 변화가 되었는가? 아니면 나는 교회는 다니고는 있지만 여전히 내 삶 가운데는 절망이 있고 여전히 내 삶 가운데는 어둠이 가득하고 그래서 기쁨과 찬송보다는 한숨과 탄식이 넘쳐나고 있으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슬픔과 탄식가운데 있으면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한번 돌아볼 수 있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의 실상을 보고 그래서 이 실상을 보는 눈이 열려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참 기쁨과 감격의 그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참 감사한 일들이 많이 있어요. 이런 일도 감사하고, 저런 일도 감사하고, 감사한 일들이 많은데 그 감사한 일 가운데에 가장 감사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도님들이 변화되는 모습을 볼 때 제일 감사해요. 과거에는 교회를 다니고 예배를 드리고 또 봉사를 하러 간다고 하면 “왜 그런 쓸데없는 일을 하느냐”고 하면서 손가락질하고 조롱하던 사람이 어느 날인가, 교회에 앉아있고 말씀을 듣는다는 말이죠. 예배가 시작 되고 설교를 하면 그냥 꾸벅꾸벅 졸던 사람이 어느 날인가 보면, 초롱초롱한 눈으로 설교 말씀을 들어요. 기도할 때는 또 울기까지 합니다. 찬송을 할 때에는 얼마나 열정적으로 찬송을 하는 지. 달라지는 거예요. 전도 나가자고 하면, 같이 동행 합니다. 또 어느 날 보니, “어디 다녀오세요?” 물으니 쌀 배달하고 온다는 거예요. 사회봉사부에서 쌀 배달하는데 거기까지 따라가서 봉사를 하고 와요. 아니 저 분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렇게 달라진 것일까? 저는 정확히는 몰라요. 그러나 짐작이 되는 부분은 있죠. 예수님이 저분을 방문했구나. 저분의 마음을 찾아가셨구나. 오늘 이 성경에 보면 날 때부터 맹인된 이 사람이 어느 날 오늘도 구걸을 하려고 길을 나서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눈이 고침 받고 어둠 가운데 있던 삶이 빛의 삶으로 바뀌지 않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어둠 가운데 살던 그 사람을 찾아 가신거죠. 어느 날인지 모르지만, 찾아가셨어요. 깨닫게 하셨어요. 보게 하셨어요. 믿음의 눈을 열어주시니까 이제는 예배하는 것이 너무나도 귀하고 감사한 일이 되었습니다.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지, 내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귀한 축복인지 깨닫게 됩니다. 교회에 와서 교회의 일원이 되고, 성도가 되고, 내가 신앙생활을 하고,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께서 자녀 삼아 주셨다는 것을 보게 되니까, 그 다음부터는 감격에 넘치는 거예요. 이제는 내 삶을 드려도 아깝지가 않아요.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고 섬기는 것이 내 삶의 기쁨이 되어져 갑니다. 저는 이 말씀이 참 좋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우연인 것 같은 그 날,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그 날, 길을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이 시각 장애인이, “예수님이십니까? 나 눈 좀 보게 해주세요.” 이런 요청도 하지 않았더라고요. 성경을 아무리 봐도 그런 요청이 없어요. 그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사람의 눈을 열어주시고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얼마나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이 성경의 예수님이 오늘 우리의 예수님이신 줄로 믿으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오늘 우리도 어느 날 그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날, 여전히 죄와 고통과 또 삶의 어려운 환경 가운데 그렇게 살고 있는 어느 날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어느 날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닫힌 문을 열어주시고 그리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주시고 운명을 바꿔주시는 그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참 귀하고 감사한 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배 때마다 늘 함께 인사하는 내용이 뭡니까? 오늘 우리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늘 고백을 함께 하잖아요. 이것이 너무 감사한 겁니다. 우리가 예배 드리는 어느 날, 주일 낮이 될지, 저녁이 될지, 수요일이 될지, 금요일이 될지, 또는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순간이 될지, 어느 날이 되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우리 주님이 예배하는 자리에 함께하시기 때문에 그 주님의 때에 우리의 삶의 문제를 고쳐주시고 해결해주시고 우리의 믿음의 눈을 열어서 실상을 보게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감격하고 주님을 찬양하게 하는 그 날이 반드시 있을 줄로 믿습니다. 예배의 자리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 축복의 자리요, 가장 귀한 자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고 위로하시고 축복하시고 문제를 변화시켜 주실 것이고, 그래서 슬픈 탄식이 변하여 새 노래가 되고, 찬양이 되게 하시고 그 주님을 신뢰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눈이 열려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열어주시는 그 눈으로 실상을 보면서 사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을 드립니다. 

 

  두 번째로, 오늘 말씀 속에서 주시는 교훈은 눈이 열리면 실상을 보게 된다는 겁니다.

 

  눈이 열리면 그때부터는 실상을 보게 되어 있어요.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이 눈이 열리니깐 빛을 보는 거예요. 이제는 정확히 보는 겁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한다는 것은 그저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고 설교를 듣는 것을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 생활한다는 것은 열린 눈으로 실상을 보는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과거에는 눈이 닫혀 있었어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몰랐어요. 어둠 가운데 살았다고 하는 것은, 내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이제는 열린 눈으로 보니까 아하 이 얘기였구나 과거에 어두웠을 때에는 아무리 얘기해줘도,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알아듣지를 못했어요. 겨울에 내리는 눈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은 하늘에서 눈이라는 것이 떨어지는 데 이것이 얼마나 가볍게 떨어지는 지, 손에 닿으면 녹는다, 얘기를 해줘도 알 수가 없어요. 도대체 천천히 떨어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개념을 잡을 수가 없어요. 눈이 열리고 보니깐 그 모든 것들이 정확해 지는 것이에요. 아 이것이 눈이로구나 이렇게 떨어진다는 것이로구나 우리의 삶을 보면서 태양이라고 하는 것이 저렇게 생겼구나. 달빛이라는 것이 저렇고, 밤하늘에 수 놓은 별이라는 것이 저런 것이로구나. 보게 되는 거죠. 너무나도 정확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제는 정확히 보니깐, 우리가 신앙생활이 예전과는 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보게 되니까, 달라질 수 밖에 없죠. 어떻게 달라지겠습니까? 눈이 열려서 실상을 보게 되면 더 이상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 방황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 아직도 방황하고 있으면, 우리의 눈이 열리지 않은 것이에요. 실상을 보지 못할 때는 세상이 더 좋아 보였어요. 교회에서 하는 말이 진리라고 들리지 않아요. 실상을 보게 되니, 세상이 틀린 것이로구나. 실상을 보게 되니, 성경말씀이 진리로구나.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로구나. 여태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틀렸고, 세상 이야기가 옳았고 세상 뉴스나 인터넷이나 유투브나 이런 곳에서 나오는 얘기가 진실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리고 성경이 틀렸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실상을 보게 되니까 세상 이야기가 틀리고 성경이 옳다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게 되면, 그 다음에 드는 생각이 ‘내가 어리석었구나. 보지 못하면서 우겼구나.’ 그걸 알게 되는 거예요. 실상은 내가 그동안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였는지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그것이 죄인지를 모르고 살았다는 거예요. 그것을 회개하게 되는 겁니다. 주님 몰라서 그랬습니다. 과거에 내가 어두운 가운데 있을 때는 그것이 진리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죄를 지으면서도 그게 죄인지 몰랐습니다. 내가 이제 문을 열고 보니까 그게 죄이고 더러운 짓이라고 하는 것을 이제 깨닫게 되었으니 하나님 용서해주세요. 이제는 내 삶이 달라지겠습니다. 보면서도 어떻게 과거의 삶을 살겠습니까? 그게 달라진다는 거예요. 또 눈이 열리고 나니까 예수님의 사랑이 보이는 거죠. 나는 예수님 그렇게 존경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고 내 뜻대로 내 맘대로 살았는데,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내가 깨닫기를 기다렸죠. 또 기다리시고 또 기다리시고 내가 죄를 짓고 넘어지면 또 기다리시고 용서해주시고 일으켜주시고 그렇게 나를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그 예수님의 사랑이 보이는 거예요. 그 사랑이 보이니까 아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크고 놀랍고 위대한 사랑인지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보게 되고, 깨닫게 되면 그 다음에 세상에 살아가는 것은 아무것도 귀한 것이 보이지 않는 거에요. 모든 것이 감사합니다. 이래도 감사하고 저래도 감사하고, 이래도 기쁘고 저래도 기쁘고 이러한 기쁨과 감사가 우리 성도님들의 상 가운데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러고 나서 또 믿음의 눈이 열리고 나니까 보이는 것이 있어요. 뭐가 보입니까? 사탄의 공격 유혹이 보이는 거예요. 나를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덤벼드는 것이 보입니다. 예전에 모를 때는 그런 얘기하면 목사님 사탄 같은 얘기하지 마세요. 어디서 귀신같은 얘기 하지 마세요. 악령같은 소리 하지 마세요. 믿음의 눈이 열리고 보니까 24시간 나를 죽이려고 덤벼드는 악한 영의 괴기가 보이는 겁니다. 내 사랑하는 가족을 죽이고 넘어뜨리려는 많은 악한 영의 공격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가리지 않고 무차별로 공격을 하고 우리를 속여서, 결국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고 멀리 멀어지게 만들려고 하는 그 사탄의 괴기가 보이는 겁니다. 이게 보이면, 우리의 기도가 달라지게 됩니다. 이게 보이면 우리가 잘 되게 해주시고 월급 오르게 해주시고 이런 기도는 못하게 됩니다. 이런 실상이 보이면 기도가 달라져요. 하나님, 나에게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세요. 천사를 통해서 내 가정을 지켜주세요. 우리 가정 보호해 주시고 영적으로 강건한 가정이 되게 해주시고 기도가 바뀌어 질수 밖에 없습니다. 왜 그런 기도 못하느냐? 보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여전히 세상적인 것이 진리이고, 세상적인 것이 좋아 보이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 앞에 올바른 기도를 올려드리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공격이 보이니까, 하나님께 나를 붙들어 달라는 기도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 우리 가족을 붙들어 달라, 내 자녀 붙들어 달라,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아내, 붙들어 주시옵소서.” 이 기도가 구구 절절 매 시간 시간 흘러 넘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의 경우를 한번 보세요. 예수님을 만나고 사도 바울의 경우는 앞을 못 보게 되었어요. 예수님을 만나고 눈이 멀어버렸어요. 마치 예수님이 “너 그 눈뜨고 네가 보는 것이 진리라고 믿는 그런 눈은 필요 없다. 보지마라.” 그리고 눈을 아예 못 보게, 시력을 빼앗아 버린 거예요. 장님이 되 버렸어요. 사도 바울은 자기가 보고 판단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틀렸습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이 자기는 옳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틀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의 시력을 빼앗아 버렸어요. 그리고 나서 ‘이게 뭐냐?’ 두려워하고 방황하고 있는 사도바울에게 예수님께서 아나니아를 보내서 기도하게 했습니다. 특이한 것은 사도행전을 보면 아나니아가 안수기도 할 때 바울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습니다. 비늘 같은 것이 덮여 있으니, 어떻게 보겠습니까?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의 눈을 가로 막고 있던 것,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던 그 비늘이 떨어져 나가고 나니까 진리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보고 실상을 보게 되니까, 사도 바울의 고백이 달라지는 겁니다. 자기가 잘난 줄 알았습니다. 자기 정도면 정말 최고인 줄 알았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고 가마리엘 문하생이고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학식으로나 모든 면에 있어서 나를 따라올 자가 없고 정말 이 정도면 지도자로서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이 열리고 보니까 자기가 얼마나 부족하고 못난 사람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공부를 많이 해서 지혜롭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예수님도 못 알아보는, 그런 어리석은 자였음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바리새인으로 율법을 철저히 지키면서, 누구보다도 의로운 삶을 살려고 노력을 했는데, 결국에는 죄인 중에 괴수였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의 고백이 얼마나 달라집니까?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나의 나된 것은 그저 내 노력으로 그 어떤 학식이나 내 모든 그런 삶의 배경으로 내가 이렇게 된 줄 알았는데 깨닫고 보고 나니까, 실상을 보고 나니까,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요? 정말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겸손해지고 달라지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요? 예수님이 눈을 열어주셔서 자기 실상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보면, 소아시아의 7개의 교회 얘기가 나옵니다. 근데 3장을 보면 소아시아의 7개의 교회중에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라오디게아라고 하는 지역은 지금도 터키에 가면 파무탈리야라고 해서 유명한 관광지입니다. 온천이 나오고, 관광수입으로 돈이 많이 벌려지는 그런 지역입니다. 이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교회도 다니고, 예수님도 믿고, 재산적으로도 문제가 없이 부유해서 늘 만족을 했어요. 늘 만족을 하면서 요한계시록 3장 17절을 보면, ‘나는 부자다 부유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그렇게 고백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이런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지적을 하는 말이 “네가 부자이고 부여하여 부족한 것이 없어보이느냐? 너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무슨 얘기입니까? 눈이 닫혀 있다는 거예요. 이 정도면 만족스럽고 이 정도면 그저 남부러울 것 없고 이 정도면 잘 사는 그런 삶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영적으로 볼 때, 믿음의 눈을 열고 보면 너의 인생이 그 세상적인 조건으로만 만족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얼마나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었는지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거죠. 그러면서 권면하는 것이 요한계시록 3장 18절에 보면, 안약을 사서 눈에 넣어 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비유입니다. “안약을 넣어서 너의 보지 못하는 그 눈을 볼 수 있게 고쳐서 실상을 봐라. 그렇게 모든 걸 마음 놓고 이정도면 되었다라고 그렇게 자만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라는 거에요. 영적으로 헐벗은 그 모습을 봐야 된다는 겁니다. 이 말씀을 가만히 보니, 우리의 문제는 뭘까? 우리의 문제는, 성도님들 중에 나는 부유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아요.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이랬군요. 그렇지만 우리는 아무리 봐도 부유하지 않은 것 같아 이래서 이런 라오디게아 교인들 얘기는 저한테 안 맞는 것 같아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렇다고 하면 우리는 더 큰 문제에 빠져있는 거예요. 여러분 사실 우리는, 다 부유한 자들입니다. “목사님,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저 가난해요.” 아니요, 다 부유한 자들이에요. 여러분, 전쟁에서 우리가 얼마나 어려웠던 시절을 지나왔어요, 지금 가장 풍요를 누리고 있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렵다고 얘기를 합니다. 저는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지만, 우리가 다큐멘터리를 볼 때 ‘어떻게 저런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았을 수가 있었을까?’ 그런 상황을 성도님들 가운데도 지나오신 분들이 계시죠. 다 그렇게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지나갔어요. 그 시절과 지금을 비교해보면 지금은 너무나 우리는 부유한 삶인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부유한지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현실, 이것이야 말로 더 큰 문제가 아니겠는가?’ 이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감사해야 될 것에 대하여 감사할 줄 알고,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 내가 이 부분이 부족하다는 것을 시인할 줄 아는 성도님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이야기들이 무서운 경고처럼 들려지는 거예요.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믿음의 눈이 열려져서, 우리의 실상을 바로 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우리가 실상을 바로 본다는 것이 왜 중요하냐면은, 바로 봐야 우리는 바른 구원의 길을 갈 수가 있기 때문이에요. 바로 보지 못하면, 우리는 만족하고 지금 이렇게 살면 된다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착각하고 있다가, 멸망의 길로 떨어지면 얼마나 그 인생이 불쌍한 인생이 되고 말겠어요. 바로 봐야 바르게 신앙 생활할 수 있는 겁니다. 어둠 속에서 우리는 진실을 외면한 채 그리고 나는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내 마음대로 마치 여자들이 눈을 감고 화장을 하는 것과 똑같다는 말이죠. 여러분 눈을 감고 화장을 하면, 예쁘게 화장이 되겠습니까? 나중에 화장을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더 엉망진창이 되겠죠. 그러면서도 나는 예쁘게 잘 화장이 된 줄 알고 지나가겠죠. 눈이 열리고 빛이 들어와서 거울을 보면 내 모습이 얼마나 엉망인지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지금 인생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하고 별로 다르지 않은 문제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깨어나서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바른 길, 의의 길 정직한 길 승리의 길을 걸어 갈 수 있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우리 성도님들이 기도하실 때 ‘하나님 눈을 열어 주소서. 나의 삶을 보게 하옵소서. 나의 모습을 보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오늘 말씀이 주는 세 번째 교훈은,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본문의 주인공은 나면서부터 맹인이 된 사람입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운명과 신세를 한탄하며 살 수도 있었을 거예요. 오죽 답답한 상황이면 제자들이 물어볼 때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렇게 얘기를 할 만큼 크게 불쌍한 그런 인생을 살던 사람이 오늘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입니다. 가끔 저에게 상담 받으러 오는 사람이나 기도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분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보면 너무나도 사정이 딱해서 뭐라고 해줄 말이 없는 그런 분들이 있어요. 이 가정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이 성도님들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파도가 계속해서 쉼 없이 밀려오듯이, 문제들이 계속 생기는 것일까요? 또 어떤 성도님은 아이를 데리고 오는데, 이 아이가 심한 중병에 걸려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큰 질병을 가지고 있는 그런 경우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정말 힘쓰고 애쓰는데, 뜻하지 않은 어려움이 찾아오고 힘들어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런 분들이 오면 제가 딱히 뭐라고 말을 해줄 것이 없어요. 무슨 말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우리 성도님들도 주변에 그런 분들이 계시면 어떻게 위로하십니까? 막연히 “그냥 잘 될거야.” 아니요, 그것은 답이 안 된다는 거예요. 뭐라고 위로를 해줘야 될지를 모르겠어요. 그럴 때 우리 성도님들은 3절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해답 삼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거죠. 우리 성도님들 어려운 가운데 있으십니까? 사람의 말이나 위로가 별로 힘이 안 될 거예요. 이럴 때 오늘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붙잡는 우리 성도님 되시기를 축원을 드립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합니다. 좋으신 예수님,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는 예수님, 또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시는 예수님, 오늘 우리도 어느 날인가 고난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어느 날인가 주님께서 우릴 찾아오셔도, 그리고 우리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역사하시는 일이 반드시 있을 거라 믿습니다. 그래서 슬픔이 변하여 새 노래가 되게 하시고, 울음이 변하여 찬양이 되게 하시고, 찬송이 되게 하시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시는 그 역사를 경험하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게 되실 줄로 믿습니다. 성도님들, 자신의 실상을 보고 계십니까? 믿음의 눈이 열리고 나니까, 아 ‘내가 죄인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로구나.’ 이것이 보이는 거예요. 또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절망의 골짜기를 나 혼자 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와 동행하시는 우리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는 것이에요. 주님이 나를 붙들고 계시는 것이 보이는 겁니다. 나는 부족하고 완전하지 못한 사람이라,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 보이는 겁니다. 사탄이 그런 우리를 죽이려고 끝까지 공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붙들고 계신 것이 보여야 되는 거예요. 늘 믿음의 눈을 열어서 이 진실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어떤 어려운 상황이 몰려온다 할지라도 그 상황을 믿음으로 이겨나가는 복된 우리 성도님이 되시리라 믿습니다. 주님으로 인해 믿음의 눈이 열리시고, 그로 인하여 실상을 바라보고 주님과 덕으로 믿음으로 승리하시는, 우리 복된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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