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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1)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1)
설교날짜 2019.5.26
설교자 박동찬 목사
본문말씀 히 11 : 1 - 6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1)


1. 믿음으로 산 인물 아벨입니다.  

2. 에녹입니다. 

3. 노아입니다. 





히 11 : 1 – 6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단어가 있다고 하면 믿음일 것입니다.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믿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면 이깁니다.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잘 아는 것 같습니다. 잘 아는 것 같아도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을 들을 때마다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하면 구원의 확신도 어느 때는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느 때는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에 대한 말씀을 잘 드릴 테니, 개념을 정확하게 정리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세 가지를 믿으시면 됩니다.


첫 째는, 나는 죄인입니다. 죄인이어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 중 의인은 없습니다. 다 원죄를 타고난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도 개미를 보고 막 밟습니다. 잔인합니다. 착하게 선을 베풀기보다는 남을 비난하는 것이 너무 쉽습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칭찬하는 것보다 비난하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태생이, 우리 마음속에 선한 것을 품기 보다는 늘 악한 것을 품게 되어있습니다. 혼자 있으면 죄를 짓게 됩니다. 우리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을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죽음 이후에 영원한 세상이 있고 그 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심판이 있다고 하면, 그 심판을 통과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다른 사람들만 그러느냐?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자신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생각할 때 나는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입니다. 이것을 시인하는 것이 믿음의 첫 번째 단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에 다들 동의하시지요? 나는 하나님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시인하는 것이 믿음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그런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나를 대신하여 죽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내 죄 값을 내가 치러야 하는데 내가 치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로우신 예수님을 통해서 대신 우리의 죗값을 치러주셨다. 그것으로 인해서 나는 의인이 되었다. 예수님께서 내 죗값을 치러주셨다. 믿는 이것이 두 번째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음을 믿으시기를 축원을 드립니다.


세 번째 단계는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나는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니고, 이제 나는 더 이상 죄의 노예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 라는 신분의 변화가 일어났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세 번째 믿음의 단계입니다. 


  이 세 단계가 믿음의 핵심입니다. 다른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두 주먹 불끈 쥐고 나는 세상을 이겨보겠습니다. 나는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나는 죄인입니다. 이것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런 나를 살리시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셔서 나를 위해 죽으셔서 나는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여러분 이 믿음을 분명히 갖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언을 드립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면 이것을 믿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내가 이것만 인정하면 그 이후에는 막 살아도 되는 것인가?’ 이것이 고민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믿어요, 그리고 입으로도 시인합니다. 성경에도 보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했는데, 내가 이것을 분명히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데 근데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악과 타협하기도 하고, 불의를 행하기도 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쾌락을 따라서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되는 것인가? 막 사는 정도까지는 안 간다 할지라도 그저 대충대충 살아가는데, 이래도 되는 것인가?’ 믿음이라는 것을 내가 알기는 아는데, 내 삶을 보면 세상 사람들과 구분이 되어야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부터 고민이 터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내가 믿는다는 거야, 마는 거야?’ 잘 모르겠는 것이지요.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은 아는 지식으로부터 시작하지만 끝나는 것도 지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식으로 시작한 믿음이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의 그 날까지, 우리가 구원받은 자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맞지만, 행함이 따라주지 않는, 구원받은 사람처럼 사는 모습이 없으면 그 믿음은 헛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인 줄 믿고 떠느냐?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인 줄 알고 떤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갖고 사는 믿음의 증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은 알겠는데 믿음으로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위해서 성경에 수많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의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믿음의 핵심은 3가지지만, 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보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성경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면서, 우리도 그것을 본받아 인생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히브리서 11장 말씀은 믿음장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성경에 있는 것을 요약해서 이 사람들이 왜 믿음의 사람인지를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2-3주에 걸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이 오늘날 우리의 삶이됨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첫 번째로 소개하는 믿음으로 산 인물은 아벨입니다. 


  아벨은 왜 믿음의 사람인가? 4절 말씀에 보니까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 왜 믿음이겠습니까? 그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최선의 것을 드렸다는 의미이고, 아낌없이 드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것을 드리는 것을 아까워했습니다. 그래서 좋은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은 내가 가지고 하나님 앞에는 남는 여분의 것을 드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기쁘게 받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벨은 그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장 좋은 것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문득 아벨의 이러한 행동을 볼 때, ‘아벨은 물질에 대한 욕심이 없었나? 무엇이 귀하고 중요한지를 모르는 사람이었나?’ 이렇게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세상에 물질에 대한 욕심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좋은 것을 보면 가지고 싶고, 맛있는 음식을 보면 먹고 싶고… 이것은 모든 인간이 갖는 본성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벨은 하나님께)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이 말씀은 준비하다 보니, 신학교 시절에 공부하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그 때는 일주일에 한 번씩 채플이 있어서 채플 시간에 예배를 드립니다. 전체 신학생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중 헌금시간이 있어서 헌금을 드렸습니다. 찬송가를 부르며 헌금을 드리는데 그 때 부르는 찬송이 무엇이냐 하면,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네’ 이 찬송 아시지요?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네’ 하며 헌금 바구니가 돌아가면 헌금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친구가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네’ 이렇게 불러야하는데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깝지만 드리네’ 이렇게 불렀습니다. 그 다음주도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깝지만 드리네’ 했습니다. 그만 하라고 해도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깝지만 드리네’ 했습니다. 웃기는 것을 좋아하는 친구였습니다. 웃기려고 한 소리인 줄은 모르겠지만 그 말이 제게 꽂히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헌금은요, 아까운 걸 드리는 것입니다. 헌금은 아깝지만 드리는 것이 진짜 귀한 것입니다. 안 아까운데 드리는 것이 어찌 귀한 것일 수 있겠습니까? 큰 것이 되었든 작은 것이 되었든, ‘아까워 정말 드리기 아까워.’ 성도님들, 사실 십일조를 하거나 헌금을 드릴 때 사실 아깝잖아요. 안 아깝습니까? 이 돈이면 내가 이 돈을 가지고 맛있는 것을 먹을 수도 있고,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고 다 할 수 있는데 왜 드려야 하나…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하나님이 돈이 없습니까? 하나님 다 있으신데 왜 내 것을 뺏으려 그러시나’하며 별별 생각을 하며 드리는 것을 아까워합니다. 근데 그 아까운 것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아깝지만 드리는 게 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렸을 때 우리가 늘 질문했던 내용이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안 받으셨나? 오늘 본문에 정답이 있습니다. 아벨이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최선의 것을 드렸던 것이지요. ‘아깝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니까 드렸더라.’ 이렇게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아벨은 그 아까운 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을까요? 여러분 이것은 답이 분명합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아까운 것을 드릴 수 있습니다. 또, 이 모든 것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요즘 어떤 선물을 주면, 당신이 나를 이만큼 사랑해? 하면 아니, 사랑을 물질로 판단하나? 하는데 물질로 판단하셔야 합니다. 사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는 곳에 보물이 있습니다. 내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면 가짜를 줄 수가 없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주면서 그것을 받을 때 내가 기쁩니다. 그 이유는 내가 그 사람을 진짜 사랑한다는 증거인 것이지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귀한 것을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벨은 진짜 하나님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내가 가진 양들 중에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던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 이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그 안에 담겨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주인인 것 같아도, 내가 주인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 생명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것이 다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다 착각입니다.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시면 닫을 자가 없고, 하나님이 닫으시면 열 자가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금이고 십일조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을 때는 그것을 모릅니다.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부유하셨다고 어느 순간에 어려워져서 힘든 가운데 계시는 분이 계십니다. 이런 분들이 제 설교를 듣고 나시면, “목사님, 왜 이런 말씀을 예전에는 한 귀로 왔다가 한 귀로 흘러나갔는지 모르겠어요.” 하시는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이 축복해주시고 열어주시니까 내가 넉넉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인데, 이것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나니까 그 때는 그것이 진리라고 하는 것을 깨닫지 못했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지키려고 한다고 지켜지십니까? 여러분의 건강이 지키려고 한다고 지켜지십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십일조는요. 그것을 내고 안 내고에 따라서 구원을 받고 못 받는 문제가 아닙니다. 십일조는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주인이고 종인지를 분명하게하기 위해서 선악과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 되심을 인정하는 것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면서 똑같은 것을 시험하시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십일조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가장 강력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돈의 힘입니다. 여러분, 군대에 가면 군인들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초코파이였습니다. 초코파이 하나를 주면 교회로 가느냐, 성당으로 가느냐, 불교를 가느냐가 결정이 됩니다. 모든 신 위에 가장 강력한 것이 초코파이였습니다. ‘2개를 주면 불교를 가다가 성당을 가고, 3개를 주면 성당을 가다가 기독교로 간다. 초코파이의 힘을 믿느냐?’ 하며 누가 글을 썼더랍니다. 근데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돈의 힘입니다. 그것을 주인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입술로는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십니다.’ 고백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살아갈 때 하나님이 주인이 아닙니다. 돈이 우리의 주인이 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세워두시고, 너의 주인이 누구이냐? 그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까워도 하나님께 드려야할 것을 드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언을 드립니다. 그것이 없어도 우리가 삽니다. 여러분, 십일조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열심히 번 것을 하나님 왜 하나 뺏어 가십니까?’ 가 아니라 하나님이 열 개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 개를 주신 것 중에 하나를 드리고 또 열 개를 주시는 것이 십일조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거꾸로 생각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뺏어 가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제 싫어요. 그런 하나님 믿기 싫어요.” 여러분들이 싫다고 해서 여러분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는 분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내 인생의 주인도 하나님이시고, 내 건강의 주인도 하나님이시고,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는 신앙 고백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것, 아까운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인데, 믿음 장에서 첫 번째로 소개하는 사람이 아벨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믿음의 사람으로 아담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아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벨이 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성경을 읽어보세요. 아벨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제사 한 번, 하나님 앞에 드린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형한테 맞아 죽은 일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를 믿음의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벨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아까운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이 증거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가진 것을 주님 앞에 드리는 것이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많이 드리면 드릴수록, 내가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갔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많이 준비해주면서 상대방이 기뻐할 것을 생각하면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기쁩니까? 똑같은 이유입니다. 내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나의 기쁨입니다. 할 수 있는 아벨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두 번째로는 에녹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에녹은 왜 믿음의 사람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5절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신학자들의 공통적인 의견이, 왜 하나님은 에녹을 사랑하셨을까? 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데려가셨을까? 그 이야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마지막 공중 재림하실 때 이 세상은 끝이 아니다 그 증거를 보이시기 위해 죽지 않고 데려가셨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고 또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가신 이유는 많은 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도 에녹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참 부럽지 않습니까? 저는 성경에서 이 에녹이 너무 부럽습니다. 다른 세상적인 업적을 만들고 …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이겠습니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정말 에녹을 사랑하셔서 죽음을 보지 않고 데려가실 만큼 에녹을 사랑하셨다고 하면, 우리가 이런 걸 부러워하지 않고 무엇을 부러워해야합니까? 그런데 이 에녹, 하나님은 에녹을 왜 그렇게 사랑하셨는가? 성경을 봤더니 이 에녹은 항상 삶의 기준이 자신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이 그 기준이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먹고 싶은 것이 아니고 이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안 하시는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하면 그것을 행하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를 다니면서 종교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녹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진짜 신앙생활임을 깨달아 아는 우리가 되어야할 줄로 믿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있잖아요? 내가 먹고 싶은 것이 있고… 그래도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면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기 싫은 일, 피하고 싶은 일, 쳐다보기도 싫은 일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이 일이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한다면 이를 악물고 그 일을 감당해 가는 것이지요.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임을 우리는 알아야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기준은 항상 나란 말이지요. 무슨 일을 결정할 때, 이 일이 나에게 유익이 되느냐 안 되느냐, 이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 이것이 나를 즐겁게 하는 일이냐 아니냐 그것을 생각합니다. 죄냐 아니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냐를 생각하지 않고 행하게 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성도님들, 오늘 이후에라도 결단을 하세요. 작은 일을 결정하더라도 ‘이것이 내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일까 아닐까?’를 생각하고 결정하시는 복된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언을 드립니다. 제가 목회를 하다보면, 스트레스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는데 검사를 해 보면 스트레스 지수가 높다고 나옵니다. 어제도 걷기 축제를 했는데 부스를 많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향수를 만들기고 하고 많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일찍 가게 되어서 시간이 남아 그것들 하나하나 다 해보았습니다. 하다 보니까 뇌파 검사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정신 상태를 검사한다고 해서 내 정신 상태가 어떤지 좀 봐야 하겠다. 해서 들어갔더니 무엇인가를 머리에 씌웠습니다. 이것을 끼고 10분 있으니까 모든 검사가 다 나왔습니다. 정신 건강이 대체적으로 양호하다고 나오는데 스트레스 지수가 높으니까 스트레스를 관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스트레스를 어떻게 관리합니까? 목회를 하다보면 늘 걱정입니다. 교회에 불이 나면 어떻게 하나, 성도님들 아프면 어쩌나, 누가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면 어쩌나… 전화 한 통이 걸려오면 겁이 납니다. 그래서 미리 문자로 해 주시면 참 감사하겠어요. 갑자기 전화가 오면 그냥 심장이 떨립니다. 밤에 늦은 시간에 전화가 오면 더 떨립니다. 늘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가만히 있어도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아이들이 수련회를 갔다 온다고 하면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사고가 나면 어떡하나… 빨리 끝나고 왔으면 좋겠는 것입니다. 은혜 받는 것은 둘째 치고, 좀 빨리빨리 안 다치고 왔으면 좋겠다는 것이 사실 솔직한 심정입니다. 스트레스 지수가 높습니다. 그러니까 친구 목사님들이 저한테 운동을 해야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더운 여름날 운동하다가 스트레스가 더 쌓일 것 같습니다. 운동은 체질에 안 맞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또 안 할 수는 없고 말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와서 권면하는데, 목사님은 체질상 커피 바리스타를 하면 어울린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향기도 나고 목사님 스타일에 어울린다고 해서 ‘그래, 그럼 그거나 한 번 해볼까.’ 하고 교보문고에 가서 커피 책을 사왔다는 것 아닙니까. 공부 못하는 사람이 책부터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을 펴서 읽는데, 갑자기 제 마음 속에 성령님이 ‘넌 목회가 싫으냐?’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목회가 스트레스냐?’ 제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요즘에 보니까 커피숍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런데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하루에 300잔, 400잔 커피를 내립니다. 얼마나 많이 하는지 손에 근육이 생길 정도로 커피를 내립니다. 그렇게 일주일을 하다가 스트레스가 쌓이니까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듣고 스트레스를 푸는데, 너는 말씀 전하는 게 스트레스라서 커피를 내리면서 스트레스를 푸느냐는 말입니다. 무엇인가 거꾸로 되었다는 생각이 드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하나님께 ‘하나님, 왜 나는 이 모양일까요?’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 내가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이 안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내가 별로 안 기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것이 아닌 것 같고… 하나님의 기쁨과 나의 기쁨 사이에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떻습니까? 세상을 살면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까? 아닌 경우가 많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제 기도가 바뀌었습니다. ‘하나님 이것 이루어주시고, 이렇게 저렇게 되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내 기쁨과 하나님의 기쁨이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나의 기쁨이 될 수 있게 해 주세요. 내 마음을 바꾸어 주시든지, 상황을 바꾸어 주시든지, 내 생각을 바꾸어 주시든지… 하나님 기뻐하시는 것이 내 기쁨이 되기 원합니다. 만약 그것이 안 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내 기쁨을 포기할 수 있는 절제력, 인내력, 끊어버릴 수 있는 힘이라도 주십시오.’ 기도제목이 바뀌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성경을 보니까 사도바울 같은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자신의 기쁨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 같이 하나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었더랍니다. 우리 성도님들 살면서 하나님의 기쁨 같은 것은 생각도 안 하고, 세상의 기쁨, 세상이 유익 주는 것, 세상이 좋다고 하는 것을 나의 유익으로 삼고 하나님의 기쁨은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하나님 이것 얻게 해 주세요. 세상적인 유익을 얻게 해 주세요.’ 우리가 혹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에녹은 모든 순간순간, 작은 것 하나를 결정할 때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했던 사람이기에 하나님은 에녹을 사랑하시고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갈 수 있도록 데려가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언을 드립니다. 우리 성도님들, 내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나의 기쁨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내 기쁨으로 삼고 살겠습니다.’


세 번째로 나오는 인물이 노아입니다. 


  노아는 왜 믿음의 사람이었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했습니다. 노아는 천지창조 후 약 1000년 후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제가 창세기를 연구를 하면서 도표를 다 그려보았습니다. 누가 몇 살까지 살고, 몇 년에 누구를 낳고, 누구를 낳고, 그 사람이 몇 살을 살고… 이것을 도표로 만들고 나니까 머리에 쥐가 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그리고 보니까 신기한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아브라함이 930년을 살고 죽었는데 그 다음에 잠시 후 노아가 태어나서 950년을 삽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리고 보니까 노아가 사는 중에 또 누가 태어났는지 아십니까? 아브라함이 태어났을 때 노아가 살아있었습니다. 한참 뒤인 것 같은데... 아 ‘아브라함이 노아에게서 홍수 사건부터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자랐겠구나.’ 표를 그려보니까 나왔습니다. 그런데 사람이요. 1천년 후라고 했죠? 아담이 누구를 낳고 누구를 낳고…이렇게 피라미드 구조로 낳고 낳고를 반복하여 천 년이 지나면 이미 노아시대 때는 수천 명에서 수억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세 번째 소개하는 사람이 또 다른 누가 아니라 천 년이 지난 다음에 노아를 믿음의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참 충격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이라고 소개되어야 하는데, 천 년이 지난 다음에 노아를 가리켜 믿음의 사람이다. 예수님이 누가복음 18장 8절에 뭐라고 하시냐면 ‘인자가 올 때에 너희 가운데 믿음을 보겠느냐’ 믿음이 없는 세대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것 같지만 믿음이 없는 세대라는 것입니다.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겁이 납니다. 우리 성도님들 매 주일 와서 예배 열심히 드리시고 봉사도 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믿음이 없다고 하신다고 하면, ‘너희는 믿음의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다면 얼마나 그 날이 두려운 날이 되겠느냐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열심히 말씀을 묵상하고, 성경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고 그들의 삶을 본받아야할 줄 믿습니다. 그저 내 옆에 있는 어떤 집사님, 권사님, 또 다른 누군가를 본으로 삼지 마시고 성경의 인물을 본으로 삼고 사는 성도님들이 되실 줄 믿습니다. 성경에 보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 노아는 방주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어느 문헌에 의하면, 노아의 시대까지는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는 땅에서 안개가 올라오고, 습한 기운이 올라와서 대지를 적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비가 떨어질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믿느냐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물이 떨어질 것이다.’ 아무리 봐도 하늘에는 물이라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떨어진다는 이야기이며, 그것이 어떻게 심판을 한다는 이야기인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방주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순종했던 것입니다. 설사 노아의 때에 비가 왔다고 하더라도, 비가 떨어지더라도 그 비가 온 대지를 덮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끝까지 방주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한계가 어디에 있냐하면, 교회에서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마음으로 ‘아멘, 믿습니다.’ 이것은 쉽습니다. ‘비가 와서 너희 모두를 멸망시킬 것이다.’ ‘아멘, 믿습니다.’ 이것은 쉽단 말입니다. 하지만 밖에 나가서 방주를 짓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왜, 방주를 짓고 있을 때 사람들이 지나가며 ‘뭐하는 짓이냐, 왜 이렇게 바보 같으냐. 어리석으냐.’ 조롱하고 모욕하고 멸시할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묵묵히, 어떤 비난의 소리를 한다 할지라도 묵묵히 수 년 간에 걸쳐서 방주를 지어갔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겠느냐? 무슨 말씀을 하면 우리는 해석을 하잖아요? 에이, 그것은 아니고, 이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 이야기고, 이것은 옛날 가치관이고…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얼마 살다가 다 죽고 없어집니다. 영원히 남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만 영원히 남더랍니다. 이 말씀 2000년 전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은 말씀입니다. 우리보다 훨씬 똑똑한 지인들, 천재 같은 사람들, 생 어거스틴 같은 대학자들 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바라기는 오늘 이후로 오늘 성도님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라고 하면 내 생각과 경험과 지식을 내려놓겠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나를 조롱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묵묵히 ‘하나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말씀에 순종해 나아갔던 노아처럼 우리도 말씀을 지켜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어야할 줄 믿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아벨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가장 귀한 것을 드릴 줄 알아야하고, 에녹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선택해야 하고, 노아처럼 세상에서 뭐라고 나를 조롱하고 비난을 하든, 소처럼 그저 묵묵히 ‘내가 가야할 길을 나는 갑니다.’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그냥 교회 생활이 어떤지 알고,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매우 불안정한 믿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이 보실 때 ‘내 기뻐하는 믿음의 사람들아’ 라고 불림 받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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