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또 다시 일어나는 교회 (빌 3:12~14)
> 인터넷방송 > 예배 > 주일예배
 
 
제목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2)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2)
설교날짜 2019.6.2
설교자 박동찬 목사
본문말씀 히 11 : 8 - 12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2)


1. 새로운 출발을 의미합니다. 

2. 좋으신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히 11 : 8 – 12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요즘 세상에서는 기독교에, 교회에 문제가 많다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도대체 세상이 이렇게 교회에 대해서 반감을 가질까 생각을 해 보니까 역시 교회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많은 문제들을 보면 그 중에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게 세속주의가 교회 안에 들어와서 세상적인 가치관이 기독교의 원래적인 가치관, 본질을 훼손시키는 것은 아닌가, 또 다음세대를 위한 교육 커리큘럼이 준비되지 않은 것도 문제입니다. 또 우리 목회자들이 세상에 비춰지는 것이 도덕적, 윤리적인 문제로 인해서 교회가 다시 종교 개혁을 일으켜야 한다. 그렇게 이야기할 만큼 문제가 많은 것이 사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문제들 중에서 사실 가장 중요한 문제를 이야기하라고 하면, 그건 어느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무엇이냐 하면, 오늘 우리는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이 압니다. 많이 알지만, 중요한 것은 그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공부를 많이 해도 그대로 살지 않습니다. 예전에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가 교회로서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믿음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믿음대로 사는 것이 어떻게 보면 내가 진짜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을 증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히브리서 11장 말씀을 중심으로 계속 살펴보는데, 지난주에는 아벨을 첫 번째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벨은 말씀드린 것처럼 특별히 대단한 일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누구보다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가장 귀한 것을 드렸는데, 그것을 하나님이 믿음으로 보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믿음으로 보셨고 믿음의 사람을 소개하는 것에 있어서 아벨을 첫 번째 사람으로 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녹은 매 순간순간 무엇을 결정할 때 나의 기쁨,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것, 내가 즐거운 것을 선택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일까? 비록 내가 기뻐하지 않는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그것을 선택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에녹의 그런 점을 믿음으로 보고 믿음의 사람의 대열에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지난주에 소개했던 또 한 사람은 노아였습니다. 노아는 납득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도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비난할지라도, 묵묵히 방주를 만들어 하나님의 말씀에 끝까지 순종했는데, 그 노아의 순종을 성경은 믿음으로 보고 믿음의 사람의 반열에 이 노아를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 그들의 믿음의 삶은 어떤 것인지 세 가지 말씀을 전함으로써 살펴보고, 믿음의 삶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새로운 출발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산다고 했을 때 가져야할 자세로 ‘새로운 출발이다.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소개되는 아브라함. 아브라함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아브라함아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떠나라는 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입니다. 여러분, 75세에 내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떠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마 몇 안 되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떠나라고 하셨을 때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진자 그 말씀을 붙잡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네가 떠나면 그 다음에 어떻게 해서 살게 할 것이고…이런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냥 떠나라. 그러면 네 민족을 복되게 할 것이다. 네 민족을 뛰어나게 할 것이다. 너를 축복할 것이다.’ 이렇게 결과만 이야기하셨습니다. 사는 동안 내가 여기 떠나면 무엇을 해 먹고 삽니까? 수익은 얼마나 벌어야합니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런 것에 대해 묻지도 않았고, 하나님은 답변을 주시지도 않았습니다. ‘떠나라’ 했을 때 아브라함은 그냥 떠났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떠나라’했을 때 아브라함처럼 “예”하고 순종하고 떠날 수 있겠느냐.. 또 한 편으로 생각해보면 갈 곳도 없습니다. 아브라함 때는 이 갈대아 우르가 워낙 타락한 곳이고 우상을 만드는 곳이니까 ‘그곳을 떠나 새로운 도시로 가면 내가 그곳에서 새로운 민족을 이룰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떠나보면 다 거기가 거기입니다, 다 이미 타락해 있고, 이미 세속주의에 물들어 있고, 세상의 가치관과 방법대로 살아가고 있는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떠난다고 해도 솔직히 어디로 갈 데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 오늘 우리로 하여금 떠나라고 하신다면 어디로 떠나야 하겠습니까?’를 질문해야 합니다. ‘어디를 떠나서 어디로 가야합니까?’ 그러면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을 해 보니까 이 말씀 속에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과거의 삶의 방식, 예수님을 믿기 전의 삶의 방식,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좋다고 하며 살아왔던 방식에서 돌아서서 이제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비로소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라는 것은 내가 잘못했던 것을 깨닫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이 쪽 길이 옳은 줄 알고 이 쪽 길로 계속 가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보니까, 진리를 보고 나니까 ‘이 길이 틀린 길이로구나. 이 길로 가면 후회할 수밖에 없고 이 길로 가면 멸망할 수밖에 없구나.’ 깨닫게 되면 돌아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길이 아니다. 잘못된 길로 왔으니까 다시 돌아서자’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방식 그대로 살면서 계속해서 나아가다가 ‘이 길로 가다가, 멸망의 길로 가다가 내가 아무리 세상적으로 성공해도 후회할 수밖에 없는 길이다’ 깨닫고 나니 돌아서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이라도 돌아서서 의미 있는 삶, 가치 있는 삶,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아가야 되겠다. 돌아선다는 것이지요.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신 것은 이제 신앙생활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라. 달라진 삶을 살아라.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 살겠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살겠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겠습니다. 하는 고백은 이제 더 이상 세상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 속에서 일하고 세상 속에서 먹고 살지만, 그러나 그들의 삶의 방식과 문화를 따라 살지 않고 ‘이제는 돌아서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겠습니다.’를 의미하는 삶이 되어야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내가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과거의 죄인 되었던 삶과 세상에서 예수님을 안 믿었을 때의 삶의 모습하고 지금의 모습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하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아, 내가 이런 부분이, 몰랐는데 이런 부분이 많이 고쳐졌구나. 이런 부분이 달라졌구나.’ 이런 것을 보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렇게 달라진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과거의 습관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투가 있고, 행동하는 투가 있고,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있었단 말입니다. 이것이 나도 모르게 세상에 살다보니까 세상화된 것입니다. 그런 습관이 우리 몸에 배어있습니다. 이 습관을 바꿔야하는데, 우리가 습관을 바꾸려고 하면 쉽게 바뀝니까? 쉽게 안 바뀐다는 것입니다. 말투도 잘 안 바뀌고, 행동 방식도 잘 안 바뀝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초창기에는 자기 자신과 투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싸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남을 비난하고 비판하던 것이 한 순간에 축복이 되느냐? 안 그렇습니다. 어떤 것을 보면 자꾸 문제의식이 떠오르고 또 비난하고 비판하게 됩니다. 그것을 이제 바꿔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그런 이야기가 나오려고 할 때, 그 저주의 말을 축복의 말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룩한 습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세상적인 습관을 벗어버리고 거룩한 습관화가 되어야 합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점점 좋아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달라지는 것이지요. 예전에는 이것 좋아 보이면 덥석 물고, ‘이거 합시다. 저거 합시다.’ 내 생각대로 했다고 하면, ‘이제부터는 그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예수님을 내 구주로 모셨으니 묻고 해야겠다.’ 하며 성경 한 구절을 잠깐이라도 보고 ‘하나님, 지금 내가 이런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인데 예전 같으면 A라는 것을 덥석 물어버렸겠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주님 가르쳐주세요. 어떤 것이 옳은지, 어떤 것을 내가 선택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세요.’ 기도라도 한 번 하고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행동양식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것이 습관화되기 시작하고 그러한 거룩한 습관이 우리 삶에 체질화되기 시작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편해집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하나님의 전에 나와 설교를 들을 때도 ‘하나님이 나에게 설교 말씀을 통해 분명히 들려주시는 말씀이 있을 것이다.’며 기대하는 마음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예전에 경쟁한다고 하면 ‘무조건 이겨야 한다. 무조건 이기고 봐야 한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무조건 이기고 봐야 한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왔다고 하면, 이제는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니까 그것이 덧없는 것이었다. 그것이 의미 없는 것이었구나.’ 그것을 이겨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이긴다고 한들, 내 마음 속에 남는 것은 허무와 공허함 밖에 남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말씀을 보니까 ‘진짜 중요한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져주는 것이고, 배려해주는 것이고,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는 것이고, 내가 남들보다 하나 더 갖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하나를 더 주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길이로구나.’ 생활 습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과거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내가 기쁘고 좋은 것, 이것을 내가 취하면 취할수록 나는 행복하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 욕망을 추구하면서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에 보니 ‘그것이 아니로구나. 이제는 내 기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쁨, 이웃들의 기쁨, 또 하나님의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진짜 귀한 일이로구나.’ 이제는 내 욕망을 자꾸 내려놓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향해 우리의 삶의 방향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들어야하는 첫 번째 말을 무엇이냐 하면, “아니, 교회에 다니시더니 달라지셨어요.” 이 이야기입니다. 또 우리가 신앙생활하고 교회를 10년을 다녔는데 “당신 교회 다니는 사람이었어요? 몰랐어요. 달라지는 것이 하나도 없네.” 하면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가 들어야할 얘기는 “정말 교회에 다니더니 달라지셨어요. 많이 달라지셨어요. 완전히 달라지셨어요.”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기쁘고 우리에게 영광이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 삶이 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가 과거, 세상적으로 살던 삶의 방식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삶의 출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길임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내 삶의 모습이 과거와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고 느껴지면 아브라함처럼, 내 삶의 습관을 세상적인 삶의 방식으로부터 떠나서 주님과 더불어 주님과 같이 멋진 신앙생활을 출발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두 번째 믿음으로 사는 길은 좋으신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특징 중의 하나가 이 좋으신 하나님을 신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신뢰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내가 저 사람을 신뢰하는지 안 하는지..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내가 저 사람을 신뢰하는지 안 하는지는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알게 되어있습니다. 신뢰한다고 하면 행동이 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느 날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아, 이리 와. 너 오늘부터 조상 해.” 하고 아브라함을 세우신 줄 아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그 말씀 가운데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지를 하나님은 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이 되었을 때, 아브라함이 100살이 되었을 때 이삭이라는 약속의 아들을 주신다는 약속을 100살이 되어서 이루어주셨습니다. 이삭이 어떤 아들입니까? 아브라함의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귀한 아들입니다. 100살에 얻은 아들이니까요. 그런데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 이삭을 바치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귀하게 주셨는데.. 약속의 아들을 주셔놓고 다시 달라고 하시면 어떡합니까? 이것이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이 그 말씀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볼 때마다 제 과거가 생각납니다. 창피한 고백입니다만, 우리 아이가 어렸을 때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배를 수술해야 한다고, 배를 갈라 장기를 꺼내 잘라내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프니까 어찌할 방법이 없다고 했던 것입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하나님께 엎드려 얼마나 간절히 했는지 모릅니다. 기도를 한 것까지는 좋은데, 내용이 너무 유치한 것입니다. 제가 지금 생각해도 참 부끄러운데, 그 때 제가 어떻게 기도했나면요. “하나님, 우리 아이 수술, 죽은 자도 살리신 하나님이신데 저 어린 아이를 어떻게 배를 갈라서 수술합니까? 하나님 고쳐주세요. 만약에 하나님 안 고쳐주시고 수술하게 되면 저 목회 안 합니다.” 했습니다. 제가 그냥 미래를 걸고 “하나님, 저 목회 안합니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는 저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그랬는지 하나님이 “그래. 네 마음이 그렇게 간절하구나.” 수술을 안하고 그냥 나았단 말이지요. 그래서 그 기도를 그렇게 응답해주셨구나. 그렇게 협박을 해야지 기도를 이루어주시는구나. 하고 생각을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때의 기도가 얼마나 부끄러운지요. 아브라함은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아들을 내게 바쳐라”도 아니고 “그 생명을 달라.” 도 아니고, 그저 아프니까 수술을 해야 하는데,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상황에서도 제가 기도했는데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쳐라. 제물로 바쳐라”에 주저하지 않고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브라함이 이럴 수 있었을까? 로마서 4장 17절에 보면, 그 아브라함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이심을 아브라함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히브리서 11장 19절에도 보면 그 말씀이 있습니다. 19절 말씀을 보세요.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내가 죽여도 하나님이 살리실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을 하시고 이렇게 아들을 요구하신 것은 내 아들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무엇인가 다른 계획이 있으시다.’고 하는 것을 아브라함은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보이는 것의 이면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믿음을 아브라함은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 부분을 헤아렸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 말도 안 되는 요구에서도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진짜 살아계시고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십니까? 말 그대로 전지전능하시고, 능치 못함이 없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십니까?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의 아버지가 되셔서 내 삶을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것이 진짜 믿어진다고 하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무엇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무엇을 염려하겠습니까? 두려워하고 염려한다는 것 자체가 “나는 그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은 아직도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깊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는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 전부고, 그것이 사실이다.’고 살아갑니다. 지금 내 앞에 나쁜 일이 펼쳐지면 그것이 나쁜 일인 것입니다. 그 이면의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큰 일이 날 것같이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이라도 잘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다 뺏긴다.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 전부이다.’ 하나님이 이삭을 달라고 하시면, “왜 하나님, 이삭을 달라고 하세요? 뺏으려고 하세요?” 왜 하나님이 나에게 이삭을 요구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그것이 전부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인 줄 알았더니 나쁘신 하나님이시군요. 왜 주었다가 뺏습니까?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상황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그런 어린 아이와 같은 수준에 우리의 신앙이 머무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다보니까 “너 실수하면 안 돼. 예배도 잘 드려야 하고, 기도도 열심히 드려야 하고… 안 그러면 하나님이 한 순간에 다 뺐어가.” 이런 하나님으로 우리가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아이들이 어릴 때 사탕을 좋아하니까 “그 사탕, 아빠 줘.”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사탕이 먹고 싶어서 그러겠습니까? 아니잖아요. 그 아이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 신뢰하는지를 보려고 하는데 아이들은 대체적으로 안 줍니다. “싫어. 주면 내가 먹을 것이 없잖아.”하고 안 준단 말입니다. 그러면 속이 상합니다. 왜 속이 상합니까? 그 사탕 못 먹어서 속상한 것 아니잖아요. ‘아, 이 아이가 아직 어리니까 나를 신뢰하는 정도가 이 정도 밖에 안 되는구나.’ 아는 것이지요.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어떤 시험의 환경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이 보시고자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근데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러시는 것이에요?’ 눈앞에 펼쳐지는 것만 보고 ‘하나님 왜 이러시는 것이에요? 하나님 혹시 가짜는 아니세요? 살아계신 것입니까?’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데, 우리 성도님들 그러지 마시고 우리 신앙의 깊은 곳까지 가서 아브라함처럼 신뢰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오늘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느냐? 하나님이 이삭을 바치라고 하니까 창세기 22장에 보면, 일찍 일어나서 주저하지 않고 바로 모리아 섬으로 떠났습니다.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리아 산에 도착하자마자, 창세기 22장에 보면 아들을 그냥 ‘이리 와 봐.’ 하고 결박을 해서 제단 위에 나무를 놓고 그 위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그러고는 순간적으로 칼을 빼서 제사를 지내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놀란 것입니다. 너무나 신속하게 이루어지니까 “그리 하지 말아라.” 하나님의 사자가 말했습니다. “왜 그렇게 성격이 급하니?” 하나님이 이삭을 받아서 뭐하시겠습니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고서 창세기 22장 12절에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결국 시험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을 이렇게 테스트하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시험해보면 아는 것입니다. 테스트를 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21절에 보면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도대체 어디까지 네가 순종하는지를 보았고, 진짜 그 아들…’ 하나님이 왜 이삭을 요구하셨습니까? 아브라함에게 가장 소중한 것, 보물 1호가 있다면 이삭이었습니다. 거기까지 보신 것입니다. 네게 가장 귀한 이삭을 나에게 바칠 수 있겠느냐? 결국 이삭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잖아요? 바칠 수 있겠느냐? 거기에 아브라함이 순종한 것, 죽이기 직전까지, 제사를 드리기 직전까지 보시고 ‘네가 나를 신뢰하는 구나’ 그 행위를 통해서 확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는 부분에서는 누구에게보다 뒤처지지 않을 만큼 하나님을 신뢰했다는 것이 아들을 드리는 모습을 통해 확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때,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뢰의 정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님들, 하나님을 믿습니까? 하면 다 믿습니다. 합니다. 다 알죠. 다 믿죠. 그런데 어디까지 신뢰하느냐? 이것이 우리의 믿음의 정도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는가?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믿음의 정도를 보시기 위해 우리를 시험하실 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무엇인가를 요구하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너에게 작은 것을 나를 위해 줄 수 있느냐? 우리는 고민합니다. 작은 것이지만 드립니다. 그런데 큰 것, 큰 것을 요구하실 때 우리는 드리기 힘들어집니다. ‘작은 것은 드리기 쉽지만 힘든 것은 드리기 힘들어.’ “하나님 그것은 왜 드리라고 하세요? 하나님이 그것이 필요한 것은 아니잖아요. 나한테 필요한 것을 왜 달라고 하세요?” 우리의 실수는 거기에 있습니다. 항상 지금 현상적으로 벌어지는 것이 전부인 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것을 왜 나에게서 뺏어가려 하십니까? 직장 생활로 바쁜 사람에게 하나님이 시간을 요구하십니다. 너 그렇게 세상적으로 바쁘게 살기보다, 바쁜 시간을 쪼개서 나에게 와서 예배를 드림으로 나에게 시간을 줄 수 없겠니? 그럴 때 우리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이것은 너무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을 해서 내가 돈을 벌 수 있을 때 벌어야 합니다. 시간은 내가 은퇴한 이후에 남으면 하나님께 드릴게요. 이러고 하나님 앞에 시간을 못 드릴 때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나의 재능, 그림을 잘 그린다거나 세상의 어떤 재주가 있는 것 하나님이 너의 재능을 나를 위해 줄 수 있느냐? 하나님 제 이 재능을 교회에서 무료로 봉사하기에는 너무 아깝습니다. 이 시간에 내가 세상에서 재능을 발휘하여 돈을 이만큼 벌 수 있어 큰 수익이 되는데, 이것을 교회에 그냥 재능 기부하기에는 너무 아깝습니다. 이것이 세상에서는 얼마짜리인지 아십니까? 재능도 우리가 드리지 못합니다. 세상의 즐거움에 빠져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너의 세상 즐거움을 포기해라. 포기하고 나에게 와서 내가 주는 즐거움을 한 번 누려보지 않겠느냐? 아니요. 나는 세상이 너무 재밌고 교회는 너무 따분해요. 세상의 즐거움이 내가 사는 유일한 길인데 교회로 막으려하지 마세요. 우리가 전도할 때도 젊은 친구들과 이야기해보면, “세상이 이렇게 즐거운데 교회에서는 다 하지 말라고 그러는데, 무엇 하러 교회에 가서 인생이 얽매여가지고 자유롭지 못하게 살려고 하느냐? 바보 같다. 교회에 가지 마라.” 이런 이야기들을 주변에서 많이 듣게 됩니다. 성공의 욕심이 있는 이에게 하나님께서 그 성공의 욕심을 내려놓을 수는 없겠느냐? 아니요, 안 됩니다. 나는 성공을 해야만 합니다. 너의 생명을, 너의 인생을 나에게 줄 수 없겠느냐? 너의 자녀, 안 됩니다. 말도 안 되는 것만 하나님은 요구하세요? 난 하나님께 아무것도 드릴 수 없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달라고 하실 때 무엇을 주실 수 있으십니까? 오늘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것, 하나님을 체험함을 통해서 더 깊은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더 깊은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다 보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더 신뢰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더 신뢰하다보니, 하나님이 나중에 나의 생명을 원한다 하실지라도 하나님, 내가 이것을 주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처음에는 줄 수 없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점점 체험하면 체험할수록, 점점 더 깊은 신뢰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의 정도가, 신뢰의 정도가 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성도님들이 지금의 믿음의 자리에 만족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함으로 더 깊은 믿음의 자리까지 나아가고, 하나님께 내 생명을 드릴 수 있기까지 나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백이 나올 때까지 나아갈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세 번째 믿음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볼 때 사라,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별로 믿음이 없다고 했는데, 오늘 히브리서 말씀에 믿음의 사람을 소개할 때 사라도 등장합니다. ‘사라도 믿음의 사람이었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11절에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라의 나이가 89세였습니다. 1년 뒤에 90세에 이삭을 낳게 되는데, 그 때 여호와의 천사들이 지나가면서 사라를 만납니다. 아브라함을 만나서 대화하다가 내년 이맘 때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것을 장막 뒤에서 사라가 들었습니다. 그러고 창세기 18절에 뭐라고 표현되냐 하면, 사라가 웃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 것이지요. 아무리 하나님이 약속을 하셨다지만, 내가 나이가 들었는데 어떻게 아이를 낳습니까? 90세까지 안 주시다가, 지금까지 없으면 없는 것이지 내년 이 맘 때 아이를 나흘 것이라 하니까 자신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피식하고 실소가 터져 나왔겠죠. 제가 이 말씀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웃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줄 믿습니까?’ 하면 “아멘”하는데 실제로 그런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면 “피식”하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성경에만 있는 것이지, 진짜로 나에게 그런 기적이 일어나겠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 같은데, 결국 그 말씀을 믿지 못합니다. 나도 모르게 실소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피식”하고 웃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때 하나님의 천사가, 창세기 18장에 보면 “왜 웃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 웃느냐?” 그런데 저는 이 한 마디에 사라가 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왜 웃느냐?” 오늘 우리의 성도님들, 성경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세요. 믿으면 기적을 봅니다. 이번에 호렙산의 표어도 ‘믿으면 하나님의 기적을 보리라.’ 요한복음 11장 40절에 보면,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러 가는데 나사로의 옆 무덤의 돌문을 옮겨 놓으라고 하니까 “예수님 죽은 지 나흘이 되었어요. 늦었어요. 이미 끝났어요.” 했습니다. “너희가 믿으면 하나님이 영광을 볼 것이다.” 말씀하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피식” 웃는 것입니다. ‘이번 호렙산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럼 “아멘”하지만 속으로는 피식 웃는 것입니다. 이럴 때 성령님께서 너희의 심령 가운데 ‘왜 웃느냐?’ 정색을 하시면서 “왜 웃느냐?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 오늘도 우리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네가 믿느냐?” 이렇게 책망하실 때 거기서 깨닫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언을 드립니다. 사라가 그 순간에 깨어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아, 하나님이 이루어진다고 하시면 진짜 이루어지지, 어떻게 안 이루어지나.” 그것을 못 믿는 우리가 한심하고 부족한 것이지요. 그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오늘 11절에 보니까, ‘이는 약속하신 이가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왜 웃느냐?”는 지적 때문에 사라가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 믿었더니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기적의 역사가 나타나는데 그 기적이 어떤 기적이냐? 12절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가 누구입니까? 사라입니다. 나이도 90되어서 아기를 출산할 수도 없습니다. 죽은 것 같습니다. 믿음도 없습니다.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죽은 것 같던 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시면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약속하시면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게 될 때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어떻게 됩니까?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할렐루야.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습니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은 어떤 것이든지 그 말씀은 이루어집니다.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가서 ‘네가 잉태하게 될 것이다. 주의 뜻이 이루어지리이다.’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이 믿음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성도님들이 나는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 것인가? 이것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계십니까? 이번 호렙산에 나눠드리는 책자에 하루하루 말씀을 적으세요. 그렇게 말씀을 적는 가운데,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으면 그 말씀을 붙드세요.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 생활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산다는 것은 가슴이 뛰는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내 안에 있으면 가슴이 뛸 수밖에 없습니다. 소망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이어도 내 안에 희망이 솟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결국 기적으로 이어지게 됨을 우리는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자녀에 대한 약속을 주실 것입니다. 누군가에게는 회복에 대한 약속을 주실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치유에 대한 약속을 주실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세상적으로 존귀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실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약속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이 약속의 말씀을 붙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붙들고 오늘도 좋으신 하나님과 세상을 이겨내 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번호
날짜
설교자
제목
성경본문
영상
650
2019.8.18
유경동 목사
 히 11 : 1 - 4
 
649
2019.8.11
박동찬 목사
 출 12 : 29 ...
 
648
2019.8.4
박동찬 목사
 출 2 : 1 - 10
 
647
2019.7.28
박동찬 목사
 딤후 4 : 7 - 8
 
646
2019.7.21
조종철 목사
 막 9 : 21 - 24
 
645
2019.7.14
박동찬 목사
 미가 6 : 6 - 8
 
644
2019.7.7
박동찬 목사
 막 4 : 35 - 41
 
643
2019.6.30
박동찬 목사
 단 3 : 13 - 18
 
642
2019.6.23
박동찬 목사
 엡 6 : 10 - 13
 
641
2019.6.16
박동찬 목사
 시 37 : 23 ...
 
640
2019.6.9
박동찬 목사
 히 11 : 20 ...
 
>>
2019.6.2
박동찬 목사
 히 11 : 8 - 12
 
638
2019.5.26
박동찬 목사
 히 11 : 1 - 6
 
637
2019.5.19
박동찬 목사
 요 9 : 1 - 7
 
636
2019.5.12
박동찬 목사
 엡 6 : 1 - 3
 
 1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운영자에게 메일보내기

SSL certifica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