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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3)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3)
설교날짜 2019.6.9
설교자 박동찬 목사
본문말씀 히 11 : 20 - 26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3) 

 

1.사람들을 축복하며 사는 것
2.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로 선택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
3. 하늘의 소망을 두고 사는 것


 

히 11 : 20 – 26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21.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22.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23.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24.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브리서 11장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믿음으로 사는 것에 대해 계속해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오늘은 특별히 이삭과 야곱과 요셉, 그리고 모세에 대해서까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경은 이들이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외국에 가면 묘비명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산소에는 그냥 이름 석자만 적혀 있습니다. ‘누구의 묘이다.’ 그런데 외국에서는 묘비에 이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다가 갔다는 것을 기록합니다. 제가 오래 전에 봤던 영화  내용에 이런 묘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돈 많은 여성 분이 나중에 자신이 죽게 되면 자신의 묘비명에 좋은 말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을 만나서 “내가 죽거든 묘비에 이런  내용을 적어주세요.” 했더니,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세요. 당신이 얼마나 이상하게 인생을 사시는지 아십니까? 그래서 그렇게 써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지금부터라도 그렇게 살면 되지 않느냐?” 그래서 자신의 묘비에 적힐 만한 내용을 적어보고 그것을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에서 인간관계가 무엇인지, 인생을 더불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갔습니다.  

저는 히브리서를 읽을 때마다 기자가 기록한 믿음의 사람들의 내용을 보면서, 마치 이들의 묘비명이 이렇게 적힌 것이 아닐까? 죽은 다음에, 우리도 이 세상을 열심히 살지만 우리가 죽고 난 다음에 누군가가 우리를 떠올릴 때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있을 것 아닙니까?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었다. 선한 사람이었다.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늘 웃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들이 적힐 수가 있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누군가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는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느냐’ 이것이 참 중요한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약속한 성령을 보낼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의 이름을 보혜사라고 하는데, 보혜사의 뜻은 보호하시고, 은혜를 주시고 우리의 스승이 되시어 우리로 하여금 잘못된 길을 갈 때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 이 보혜사를 영어 성경에 보면 counselor 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성경에 보면 helper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세상에서 기독교인답게 살아야 하는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이유는 우리가 믿음의 사람으로 살도록 돕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의지하면 우리가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노력한다고, 내가 두 주먹 불끈 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면 우리가 믿음대로 사는 성도가 될 줄 믿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 에 대해 세 가지 말씀을 전하고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첫째,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사람들을 축복하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를 보면, 20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21절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축복했다는 것이지요. 축복했다는 것과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슨 관련이 있을까 생각할 수 있지만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첫 번째 특징이 축복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을 축복할 권세를 주신 줄로 믿습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그렇게 축복하는 대로.. “축복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할 지 모르겠지만, 신기한 것은 우리가 축복한 대로 세상이 그렇게 됩니다. 성경 말씀을 읽다 보면,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성경에 나온 믿음의 사람들이 말을 하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했을 때 그렇게 되었습니다. 또, 그 형 에서는 자신의 축복을 동생이 가로챘다는 것에 화가 나서 동생을 죽이려고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나중에 자신의 열 두 아들을 축복하는데, 시간이 지나니 야곱이 축복한 그대로 된 것입니다. 이 축복이라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모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우리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셨기 때문에 없던 것이 생겼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셨음을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믿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말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권위가 있고, 변화되는 역사가 있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는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할 때, 굉장히 생각하고 조심해서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 8편 2절에 보면,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어린 아이들, 심지어 젖먹이들까지도 입술의 권세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권세로 묶으면 묶여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악한 마귀 사탄을 대적하면 저들이 쫓겨날 만큼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가 강력한데, 그 말씀의 권세를 누구에게 주셨느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을 잘해야 합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나와 보니까 사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먹을 것도 없고… 그래서 불평과 원망을 하는데, 이 불평과 원망이라고 하는 것은 눈덩이와 같습니다. 처음에 작아도 산에서 굴리면 점점 부풀어지듯이, 우리가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을 한 번에 회개하고 돌아서야지, 그렇지 않고 그 불평과 원망을 계속 되씹다 보면 이것이 점점 커집니다. 그래서 차라리 애굽에서 죽게 내버려두지, 왜 우리를 출애굽 시켰느냐? 하나님의 뜻에 대해 반대하고 차라리 죽겠다고 이야기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반응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민수기 14장 28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사람이 말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무슨 말을 하느냐? 이것은 내 선택이에요. 내 자유에요. 이 말하고 싶은데 왜 당신이 반대하십니까? 나는 이 말을 하고 살겠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하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던지는 그 말이 씨앗이 되어 땅 속에 떨어집니다. 누군가의 마음에 떨어지고, 세상 속에 떨어지게 됩니다.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면, 부정적인 가지가 열매 맺게 됩니다. 엉겅퀴가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저주를 심으면 저주의 열매가 맺히는데, 그 열매를 누가 먹게 되느냐? 심은 사람이 먹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저주를 하고, 안 된다고 이야기하면 결국 그 쓴 열매는 내가 먹게 됩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이 그냥 던져 놓고 사라지는 줄 알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6절에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이 이야기는 농담을 하더라도 라는 의미입니다.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우리가 농담으로라도 누구를 욕하거나 비난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말씀의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음이 있다고 하면 그 믿음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늘 말할 때는 생각하고, 축복의 말을 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니, 목사님. 믿음과 말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상관이 있지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믿는다고 하면, 어떻게 부정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망한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모욕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때문에 내가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축복의 말을 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고 또 한 가지 생각해봐야할 것은,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는데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축복했다는 것입니다. 축복은 현상을 분석해서 ‘축복을 받을 만해야 축복하지요.’ 가 아니라 축복 받지 못할 일이라고 하더라도 축복하면 그 말대로 되는 것을 오늘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의 현실과 상관없이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축복의 말을 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믿음으로 바라보고 축복의 말을 하기 때문에, 축복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의 증거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가정에 가셔서도 가정을 축복하셔야 합니다. “우리 가정은 참 좋습니다.” 자녀를 보시더라도 “우리 자녀들은 참 활발하고 좋습니다.” 축복해야 합니다. “너는 잘 될거야.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할 거야.” 남편에게도, “당신, 힘내세요. 하나님이 함께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실 것입니다.” 늘 축복의 말을 하세요. 아내에게도, 부모님에게도, 사업장에도. 내가 속한 공동체를 위해 축복해야 합니다. 교회를 축복하고, 한국 교회를 축복하고… 우리가 믿음으로 축복하게 될 때, 축복에 따라 상황이 변화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어느 분이 “목사님, 우리 자녀는 늘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어느 날 기도하다가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이 말이라는 것은 때로는 칼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밧줄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마디 던지는 이야기가 누군가의 상처를 깊이 찌릅니다. 불구자가 되도록 하기도 합니다. 또, 올가미가 돼서 내던지는 한 마디가 그 사람을 묶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녀들이 부모의 말 때문에 영적으로 묶여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결국 자녀가 그렇게 되는 것은 그 뒤에 부모의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계속 축복하는 말을 했다면 우리 자녀들이 지금 날라 다닐 것입니다. 그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과거에 우리 자녀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그 얽혀진 것들이 끊어지도록 기도하시는 성도님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우리 아이는 싹수가 노래요.” 이런 이야기도 하지 마세요. 노란 것을 하나님께서 파랗게 바꾸어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죽은 자를 살리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데, 자꾸 노랗다고 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 자녀를 영적으로 묶어버리는 것입니다. “너는 노래. 절대 노래.” 파랗던 애가 노래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저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을 할 때 축복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은 천국과 같은 곳입니다.” 감사가 넘쳐야 합니다. 우리 입술 가운데 감사와 찬양의 고백이 마르지 않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꾸 불평하고 원망하면 점점 그 상황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영적인 권세가 담겨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농담이라도 저주스러운 이야기하지 마시고 축복의 말을 통해 변화가 일어나고 살아나는 역사를 경험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래서 축복하며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삶의 방법입니다. 

 


두 번째로 알아야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로 선택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두 번째 주인공은 요셉입니다. 요셉은 우리가 잘 알죠. 노예로 팔려간… 그러나 거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되게 하시고, 존귀한 자가 되게 만드셨습니다. 이 요셉은 정말 놀라운 사람입니다. 세계지도를 펼쳐 놓고 보면, 지중해라는 곳이 있습니다. 지중해 옆으로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서쪽에 지중해가 있고, 아프리카의 북쪽으로 지중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중해에서 인도양으로 오려고 하면,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서 희망봉을 돌아 와야 인도양에 올 수 있습니다. 배를 타면 몇 달이 걸리는 거리입니다. 빨리 오는 길, 지중해에서 나일 강쪽으로 뚫어서 홍해로 연결하면 인도양까지 오는 데 얼마 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것이 대공사입니다. 어떻게 육지를 뚫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수에즈 운하를 아시지요? 이것이 이집트를 뚫어서 지중해에서 홍해로 연결된 것입니다. 이 수에즈 운하를 누가 처음 시작했는지 아십니까? 바로 요셉입니다. 놀라운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 요셉 때 완공이 되지는 않았지만, 요셉 때부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중에는 수에즈 운하로 뚫리는 놀라운 일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이라는 존재는 그렇게 지혜롭고 놀라운, 그래서 당대의 이집트 사람들로부터 존귀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자수성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 TV에 성공시대라는 것이 있었다면, 조명을 받고 방송으로 소개되어도 놀라울 것이 없는 사람이 요셉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요셉은 권세도 있었습니다. 이집트가 전 세계를 다스릴 때 그곳의 총리 대신이었으니, 전 세계를 다스리는 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권세가 있었단 말입니다. 이 권세를 가지고, 당시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었을 때 자신의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과 형제의 식솔들이 다 몰려올 때 가장 좋은 땅을, 이집트에서 가장 물이 많고 기름진 땅을 준 것입니다. 그 땅이 바로 고센 땅이었습니다. 고센이라는 기름진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야곱의 자손들이 살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고생도 많고 어려움도 있었지만 하나님이 요셉을 선택해서 기근으로 인해 아브라함의 가정이 다 망하게 되었을 때 요셉을 통해 이주를 하게 만들고 잘 먹고 잘 살았더라. 그리고 끝.’ 이렇게 될 것 같은데 이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동화에서 보면 ‘옛날 옛적에 누가 살았고 이런 저런 위기가 있었는데 나중에는 잘 먹고 잘 살았더라.’ 하고 끝나지 않습니까? 요셉의 이야기도 그것과 비슷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축복 받은 사람이고, 요셉으로 인해서 가족들이 다 살게 되었습니다.’ 라고 생각하고 박수 쳐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정작 요셉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잘 먹고 잘사는 것이 한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고, 단순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요셉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요셉은 기억한 것입니다. 그 약속이 무엇입니까?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다.’ 그런데 그 큰 민족을 이루려면 적어도 그 곳이 이집트는 아니라는 것을 요셉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불편한 것 없이 잘 먹고 잘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야 한다. 떠나게 될 것이다. 라는 것을 요셉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때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너희가 떠나게 될 때 내 유골을 가지고 같이 떠나다오. 나도 너희들과 함께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여정 가운데 같이 가기를 원한다. 내 민족과 함께하기를 원한다. 이것을 예언처럼 유언하는 요셉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요셉의 유언이 창세기 50장 24절에 나옵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이렇게 나옵니다. “내가 맹세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맹세해.”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내가 아마 너희들이 떠날 때쯤에는 뼈만 남겠지만 내 해골을 버려두지 말고 짊어지고 가야 한다. 그래서 실제로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 요셉의 해골을 짊어지고 갑니다. 남겨두지 않습니다. 요셉은 그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지혜가 놀랍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나 때에 내가 기도한 것이 다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분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내 때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가 많지만,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마지막 때의 역사까지 얼마나 시간이 깁니까? 우리는 기껏 살아봐야 백 년도 못사는 존재들이 아닙니까? 긴 역사 속에서 보면, 우리는 점에 지나지 않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사는 그 점에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요셉은 그렇게 보았습니다. 감사한 것은, 그 중에 점 같은 인생을 살았지만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한 부분을 담당하게 하시는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찬양하고 있는 요셉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자신이 이집트의 총리 대신으로 있는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긴 계획과 역사하심 속에 내가 한 모퉁이를, 한 부분을 담당하고 내가 그곳에 동참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 감사하다고 생각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요셉의 모습은 믿음으로 사는 자의 모습임을 오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오늘 우리들은, 저와 여러분들은 매우 영광스러운 존재임을 아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생각해보세요.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우리는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잖아요. 계획 속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야곱을 부르시고, 사사들을 부르시고, 사무엘을 부르시고… 다 부르셨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매 이 땅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그 다음 제자들을 통해 복음이 전해지고, 믿음의 선진들로 인해 감리교가 생기고 장로교가 생기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시다가, 끝으로 가서 2019년 오늘 역사의 현장 속에 하나님께서 누구를 택하셨냐? 저와 여러분들을 택하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한 부분을 감당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모여서 봉사하고 섬기기도 하고… 이 자리에 하나님이 나를 불러주셨다는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여러분 때로는 내가 선택해서 온 것 같지만 내가 선택해서 온 자리가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셨기 때문에 내가 여기에 있음을 깊이 깨달아 아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역사가 얼마나 대단한 역사인데 그 역사 속에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셨음을 깨닫게 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찬양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 이 감격을 잊지 않고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올림픽 때 보면 달리기가 있습니다. 달리기 중에서도 릴레이가 있습니다. 열심히 바톤을 들고 뛰어 그 다음 사람에게 주면 또 열심히 자신의 몫을 뜁니다. 최선을 다해 달립니다. 한 사람이 실수하면 지는 것입니다. 실격되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달리고, 또 바톤을 이어 받습니다. 나중에 승리를 하게 되는데, 그 승리했을 때의 감격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런데 그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은 국가의 대표들입니다. 누구를 선발합니까?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을 선발하고 또 선발해서 그 국가의 명예를 걸고 달리게 하는 것입니다. 국가대표라는 자격증을 가진 것만으로도 굉장히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을 보면 이 릴레이 달리기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모세가 바톤을 들고 뛰다가, 또 여호수아에게 바톤을 넘깁니다. 여호수아가 바톤을 들고 뛰다가 또, 사사들에게 바톤을 넘기고, 사무엘에게 넘어가고, 제자들에게 자꾸 넘어가다가 지금 누구에게 와 있느냐? 우리에게 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받을 만한 존재이냐? 아니잖아요. 우리는 너무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주님, 저 잘못 고르셨어요. 얼마나 잘나고 대단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 사람들에게 바톤을 줘서 달리게 하시지, 니는 달릴 자격이 없습니다. 제게 맡기면 집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니, 네가 달려야할 때야. 네가 기도하고 복음을 전해야하고, 네가 이제 사람들을 섬기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할 때다.” 하시며 우리에게 바톤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부인하지 마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참 감사한 것은 세상에서 국가 대표를 뽑을 때 잘난 사람, 최선을 다하는 사람, 실력이 있는 사람을 뽑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제가 부족하지만 나도 그곳에 있기를 원합니다.” 하고 사모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바톤을 주십니다. 그리고 바톤을 주시니까 세상에서는 바톤을 받은 사람이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바톤을 주신 이가 바톤을 잡은 사람으로 하여금 뛰게 만드시고 이기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길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 “하나님이 나를 불러주셨으니, 어떤 일인지는 모르지만 나를 통해서 이루어주실 줄 믿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달려나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어야할 줄 믿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늘의 소망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땅이 아니라 하늘에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절대로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모세를 믿음의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모세에 대해 24절에서 26절까지 이야기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임을 칭함 받기를 거절했다’ 우리 같으면 어떨까요?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공주의 아들이야.” 이것이 얼마나 큰 자랑거리겠어요? “무시하지 마. 내가 알고 보면 공주의 아들이야.” 얼마나 큰 자랑이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모세는 거절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택했습니다.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모세가 이 세상의 소망을 두고 살았다면, 공주의 아들이라고 늘 자랑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더 이상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았습니다. ‘까짓 것,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잠시 내가 세상에서 남들보다 더 좋은 것을 갖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을 가져도 그것은 별 것이 아니다. 차라리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는 것, 이것이 더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보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보니까 진짜 귀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진짜 귀한 것은 하늘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하나님께서 상 주시는 것을 받기를 원하는 모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런 모습을 세상에서는 이해를 못합니다. 절대 이해 못하지요. 그래서 모세처럼 살려고 하는 기독교인들을 어리석게 여깁니다.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에게 왜 어리석게 그곳에 빠져 사느냐? 그러지 말아라. 주일에 한 번 가라. 잠깐 예배 드리고 와라. 어느 교회 가니까 그 교회는 예배 진짜 짧더라. 그 교회로 가라. 아주 세련된 교회라고 말합니다. 예배는 그렇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시간에 쫓겨서 늘 설교할 때 그러는데… 성령님이 오시다가 종 치면 가셔야 해요. 이런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사실은 우리가 깊이 찬양하고 깊이 들어가야 하는데, 요즘에는 짧은 시간을 선호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실상 어리석은 것은 그렇게 예배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그 귀한 것을 귀한 줄 모르고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그런 것, 세상적인 부러움, 세상적인 즐거움, 이런 것 다 뒤로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약에도 보면 이 모세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사도바울이지요. 사도바울도 가정 배경부터, 지혜부터, 로마 시민권까지… 학문이면 학문, 배경이면 배경, 돈이면 돈 안 가진 것이 없고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을 다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배설물과 같이 여긴다. 하나님의 것을 보니까 배설물과 같아.’ 이 배설물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 만큼 차이가 난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쫓아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누구는 배설물과 같이 여기는 것을 우리는 하나님께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모세는 공주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는데, 우리는 무엇이 잘못되어서 그것을 구합니까? 모세가 믿었던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믿는 동일하신 하나님이시고 사도바울이 믿었던 하나님도 동일하신 하나님이신데, 왜 그들은 그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것들을 달라고 엎드려 있느냐는 말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가만히 제 자신을 되돌아보니까 답이 나옵니다. 영원한 하늘나라의 가치를 안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 모르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가 하늘의 가치보다 귀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합니다.’고 고백은 하지만, 내 몸과 마음과 삶은 이미 세상에 나가 있는 우리를 보게 됩니다. 또, 순간의 유혹, 결국 우리가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나와의 싸움인데, 이 순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A를 선택할까, B를 선택할까? 하나님은 A를 선택하기 원하셔서 A를 보는데 고난이 있으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고난을 피하려고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피해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숨으려고 하고, 피해버립니다. 그러다 보니까 한 번 피하고, 두 번 피하고, 세 번 피하고… 계속 피하다 보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가 아니라 세상 속에 빠져 사는 자로 그렇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 가운데 가장 큰 원인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내가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이 물음에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진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그것을 감당하게 되는데, 오늘 우리는 그러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기 보다는 나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진짜 사랑하면, 하나님을 위해 포기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증거가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랑하는 성도님들, 세상의 유혹이 올 때마다 덥석덥석 물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돌아보고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세처럼, 바울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지금 순간의 즐거움보다 영원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정리해드립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매일매일 축복하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 오늘부터라도 가정을 축복하고, 자녀를 축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나라도 축복하세요. 안 된다고 말하지 말고 축복하세요. 또, 하나님의 뜻은 세대를 이어져 내려가고 있는데, 그 가운데 나를 쓰임 받는 존재로 부르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또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이 땅에서 아등바등하며 살지 말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달려가는,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최선을 다해서 달려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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