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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는 자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는 자
설교날짜 2020.3.8
설교자 박동찬 목사
본문말씀 시 91 : 1 - 16
 


20200308 박동찬목사님


시편 91편 1-16절


아멘 오늘 귀한 찬양에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가 어떠한 환란과 위기속에서도 우리가 승리하는 그런 귀한 삶을 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깊이 묵상하는 절기를 우리가 보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코로나 19바이러스 이 문제로 인해서 우리가 온통 우리의 모든 신경이 이 바이러스와의 전쟁 가운데에 우리의 마음이 가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 사순절 절기에 정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우리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그 고난과 죽음당하심을 우리가 매일 매일 말씀을 통해서 묵상하면서, 또 이 사태가 잘 진정이 속히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즘에는 이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이 기세로 말미암아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문고리를 잡을 때에도 ‘여기에 세균이 있으면 어떡하나’ 이런 생각을 하고, 늘 두려움 가운데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그 많은 모습들을 우리가 보게 되는데, 그러고 보니까 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안전한 곳이 있느냐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역 주변은 그 어느곳도 안전하다고 볼수가 없어요. 누구를 사람을 만날 때에도 저 분은 안전한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고 마트에 가서 장을 볼 때에도 어떤 물건을 잡으려고 하다가도 이게 또 혹시라도 확진자가 잡았던 물건이면 어떡하나 이런 생각 때문에 잡지를 못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엘리베이터에 그 이쑤시개를 놔둔 곳도 있다고 해요. 그래서 이 버튼을 누를때 손가락으로 누르지 않고, 그것으로 이렇게 누르도록, 그래서 오염을 방지해야한다 그러면서 스스로의 안전을 책임지려고 애를 쓰는 그런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 가운데 코로나 바이러스의 기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이것이 한번 몰아치고 나니까 정말 그 어느 곳도 안전하다고 얘기할 수가 없고 누구를 만나도 저 사람이 안전한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그런 두려움이 우리 가운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할 때 우리가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감사하게도 성경은 그곳이 있다라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전능자의 그늘 아래 있는 자가 안전하다’ 이렇게 소개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안전한곳 가장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곳이 있다라고 하면 그곳은 바로 하나님의 품인줄로 믿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오늘 성경의 말씀처럼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그 깃으로 우리를 덮으실 때 우리는 상황이 어떠하든지 우리는 그 안에서 안전을 보장받고 평안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줄로 믿습니다. 감사한 것은 오늘 하나님께서 전능자의 그늘아래 있는우리를 보호하시고 지키신다 약속하였스니 그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붙드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저는 우리가 주님의 품 안에 있을때가 안전하지만 그러나 그 안전과 더불어서 또 베푸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시는가 세 가지 말씀을 잠시 생각해보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합니다.



첫째는, 전염병의 위기에서 우리를 건져주신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에 보면 “지존자의 은밀한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아래 사는 자여”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그러면서 3절에 가면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참 위로가 되는 말씀이 아닐수가 없습니다. 지금 딱 우리 상황에 맞는 그런 적절한 말씀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는데,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전염병에서 우리를 건지신다. 새 사냥꾼의 올무가 무엇입니까. 새를 사냥하는 그 사냥꾼들은 숲에 가서 나무와 나무 사이에 이 새 그물을 쳐 놓게 되는거예요. 올무라고 하는 것이 그물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 나무와 나무 사이의 그물을 쳐 놓으면 새는 그 그물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멋지게 날개 짓 하면서 푸른 창공을 향해서 날아가려고 날아가지만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그물에 걸려서 죽게 된다라고 하는것입니다. 그래서 새 사냥꾼들은 그렇게 올무를 쳐놓고 새를 사냥하기를 기다렸다가 거기에 잡혀드는 그런 새를 잡아가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지요. 사탄이 우리를 공격할 때에 똑같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어디가 안전한지를 모르죠. 그러고 살아갈 때가 많이 있지만 이 사탄은 마치 이 새 사냥꾼이 참새를 사냥하듯이 오늘 우리를 향해서 그물을 쳐놓고 우리가 걸려지게 되어질 때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걸려 넘어지는 우리를 건지시고 살리시고 새로운 기회를 허락해 주신다는 이 약속의 말씀이 또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전염병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나는 전염병에 절대 걸리지 않을거야’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결단한다고 해서 이 전염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라고 하는것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이 코로나 19 바이러스도 마찬가지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약을 먹으면 낫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지만 지금까지 이 약이라고 하는 것이 개발이 되지 않았다는 얘기에요.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그런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워 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건지실 것이다’ 이렇게 약속하고 있는 이 말씀을 붙드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늘 이런 두려움을 가지고 사는데 사람이 이렇게 두려움을 갖게 되는 이유가 뭔가 하면, 바로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런 전염병의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건지시겠다 약속하고 있는 이 약속의 말씀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는 거죠. 세상의 그 누구도 “내가 국민을 보호하겠습니다.”, “내가 당신을 보호하겠습니다.” 이렇게 얘기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 사람의 그저 하는 얘기일 뿐이지 진짜 우리 사람으로서는 내가 아무리 사랑하는 내 가족이라 할지라도, 내 자녀라 할지라도, 이런 전염병의 위험으로부터 우리가 보호해주고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건지고 내가 너를 지켜줄 것이다 약속의 말씀을 주실때는 그 말씀은 신뢰할 수 있는 말씀이라는 거죠. 왜그렇습니까? 하나님은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에이 목사님, 그저 그냥 그 얘기는 그저 맨날 하는 얘기 아닙니까? 그 말씀을 어떻게 믿습니까. 하나님이 진짜 계시기는 한것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생각할 때가 있다는거죠. 근데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우리의 어떤 이성이나 논리나 우리의 경험으로 말미암아서 그것을 납득하고 이해하는 것, 그것을 믿음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수 많은 기적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다는거죠. “에이 목사님, 그런 말씀 어떻게 다 믿으라고 그러세요. 확인도 안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성경의 말씀을 그저 하나의 신화의 책으로 그정도로 받아들이고 그 정도로 얘기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는것 같아요. 근데 성도님들, 한번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서든지 이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당신이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알게 하고 싶은데 아무리 얘기를 해줘도 우리가 믿지를 않는다는 거예요.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이 답답하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이라고 하는 것을 기록을 해서 그 안에 수많은 기적의 이야기들, 샘플들이 있지요. 아브라함과 함께하시고, 모세와 함께하시고, 여호수아와 함께하시고, 다윗과 함께하시고, 그래서 수많은 기적들을 일으키고 수많은 놀라운 일들을 일으켰던 것을 다 기록하게 그렇게 남겨둬서 “이거 봐라 이렇게 내가 인류의 역사속에 이런 일들을 해왔다”라고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우리에게 제시하면서 “이렇게 많은 일들을 내가 하지 않았느냐”라고 그 책을 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책 자체를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러할 때 오늘 우리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새벽에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로마서 4장의 말씀 아브라함의 믿음에 관한 말씀이에요. 이 말씀을 제가 가만히 묵상을 하다보니까 믿음에 대해서 새로운 그런 관점을 가지게 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로마서 4장 19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소개를 하는데 이렇게 소개를 합니다. 그가 백세가 되어서 자기 몸이 죽은것같고, 100살이 되면 뭐 모든 이 기능이 신체의 기능이 제대로 발휘를 할 수가 없는거죠. 그래서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아내 사라의 태가 죽은것 같음을 알고도 이것이 무엇입니까? 현실입니다. 이것이 이성적인 사고인거죠. 100살이 되고 아내 사라는 90살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 태가 죽은 것은 당연한 것이죠.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뭐라고 얘기하느냐. [ 아브라함은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였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의 나이가 백살이고 사라의 나이가 90살이라고 하면 거기에서 무슨 믿음을 갖겠습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하겠지만, 아브라함은 그러지 않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다. 믿음으로 견고하여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약속하신 그것을 능히 이루실줄을 확신하였다.] 이렇게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세상에서 보면 얼마나 바보같은 믿음이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이렇게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앞에 인정받는 믿음이 된다라고 하는 것은 그저 납득한만한 것 이해가 되는 것, 그것을 믿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그런 믿음을 하나님은 진짜 믿음이라고 보지 아니하신다 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생각이나 경험보다 하나님의 약속이 중요하다.’ 이것을 알았다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라고 하는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믿음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것이고 그분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 이것이 진짜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바로 그런 믿음이라는 거죠.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너의 아들 이삭을 바쳐라”. 그렇게 명령하실 때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이 것이 말이 되는 요청이겠습니까?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아브라함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네.” 그러고 바로 그 다음날로 이 아브라함은 이 제물을 이 제단 쌓을 도구들과 함께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가 없죠. 로마서 4장 17절은 그럴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이시니라.] 이것을 믿었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죽여도 하나님께서 살릴 것이다. 그러고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이시다. ‘내가 100살이 되었을때 주신 아들이다’ 이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4장 18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어요. 이것이 진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근데 오늘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바랄 수 있는 것만 바라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거죠. 이해가 되는 것만 이해하려고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내 이성과 내 경험과 내 지식과 이것을 벗어나는 것은 우리가 조금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으면서, ‘나는 올바른 믿음을 가졌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그것은 옳은 믿음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진짜 믿음으로 보지 아니하신다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현실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는 거죠. 오늘도 우리가 이 약속을 믿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오늘 이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이냐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는 자에게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전염병에서 너를 건질 것이다라고 약속을 주셨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는 자가 되어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의 깃으로 우리를 덮으신다. 여러분 암탉이 병아리를 품을 때, 위기가 닥치면 병아리가 다 암탉에게로 가요. 그래서 다 품안에 안기게 되고 그러면 그 암탉은 그 새끼 병아리들을 그의 깃으로 덮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정겨워 보이는지 몰라요. 근데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품에 우리를 품으시고, 당신의 강하고 의로운 두 팔로 우리를 붙드시고, 품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신다고 하면 누가 우리를 해할수있겠느냐 라고하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되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ㅣ 우리를 위하는 그 말씀이 얼마나 귀한 말씀이 많이 있는지 모른다는 거예요. 우리는 그 말씀을 묵상할 때 마다 ‘세상이 어떠하든, 또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우리는 그 약속을 믿습니다.’ 하는 이 마음으로 우리가 살아가게 될 때 오늘 이 위기를 우리가 능히 쉽게 분명하고도 당당하게 승리하고 이기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의 은혜 아래 거하시면서 믿음 가운데에서 그 분의 놀라운 은총을 체험하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두 번째는 오늘 이 말씀을 볼 때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는 자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는것입니다. 

사람들은 늘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근데 그 이유가 뭔가 하면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불확실한 미래, 그 미래가 어떤 미래가 닥칠지 모르는데 그 미래가 이렇게 닥쳐올때, 문제가 닥쳐오게 될 때, 내가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것을 확인하기만 한다면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근데 문제는 어떤 문제가 다가올지 모르겠다는 것이도, 그것을 내가 대처할 수 있는 힘이 있을지 없을지, 그것을 모르겠기에 우리는 두려워하고 불안하고 염려하는 그런 인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다가 학창시절, 중 고등학생 시절 생각이 났어요. 무서운 수학선생님, 키가 얼마나 큰지 정말 골리앗같은 수학선생님이 계셨는데 이분이 그 문제를 아이들에게 공부를 시키면 공부를 안해오니까 이제는 숙제를 내주시고 그 다음주에는 이제 수학시간이 되니까 한사람 한사람 번호를 부르면서 문제를 풀게 하는 거예요. 근데 이 문제를 못풀면 그가 들고있는 큰 몽둥이로 엉덩이를 때리는거예요. 얼마나 힘이쎈지 한 대 맞으면 기절을 할 정도로 강하게 때리셨습니다. 근데 이미 순서를 정해 놓는데 “1번, 11번, 21번, 31번, 41번, 나와서 문제 풀어.” 이게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근데 1번 문제를 푸는 학생이 1번 문제를 못 풀면 한 대 엉덩이를 맞게 됩니다. 그 소리만 들어도 아주 공포스러운 소리죠. 얼마나 강하게 때리시는지 몰라요. 그러면 11번은 긴장이 되는 겁니다. 어떤 문제가 나에게 떨어질지. 그 문제를 내가 풀수 있으면 사는거고, 못풀면 죽는거죠. 죽음의 두려움을 가지고 자기의 순서를 기다리게 됩니다. 21번도 그렇고, 31번도 그렇고, 41번도 그렇고, 두려움 가운데에 기다리고 있는거죠. 어떤 문제가 나에게 올지 예측할 수 없으니 두려움과 이 죽음의 공포가운데서 자기에게 제발 내가 아는 문제 풀게 해달라고 기도가 절로 나오는 그런 모습들을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불안감이라고 하는게 바로 그런 종류가 아닌가 싶습니다. 앞으로 닥쳐올 문제를 우린 기다리면서 살아가는거죠. 근데 그 문제를 내가 해결할만한 그런 문제라고 하면 우리가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거죠. 그러나 ‘혹시라도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면 어쩌나.’ 이것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하게 되고 더 나아가게 되면 공포속에 살아가고 있는 이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코로나19 사태도 마찬가지이죠. 나에게 걸리면 어떡하나. 이 두려움속에서 우리가 집 밖에 나가는 것이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나에게 걸리면 어떡하나.’, ‘혹시라도 그걸 통해서 폐가 상하면 어떡하나.’, ‘이걸 통해서 내가 죽으면 어떡하나.’ 그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오늘 사람들이 이렇게 활동을 자제하고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하는 그런 가운데에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주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두려워하지 말라는 거예요. 두려워하지 말라. 6절에 보니까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이 어두울때 퍼지는 전염병. 참 이시대를 얼마나 잘 표현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밝을 때에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얘깁니다. 성경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얼마나, 누가 그래요 제가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366번이 있다. 일년은 365일인데 왜 366번이 있습니까?어떤분이 그러더라고요. 윤달이 있는 해는 일년이 366일이라는거예요. 그래서 그 날까지라도 하나님은 다 계산을 하시고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니까 매일 매일 두려워하지 말라. 아침에 일어나면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 약속의 말씀을 주신다는 거예요. 오늘도 내가 너와 함께할것이기 때문에, 오늘도 내가 너를 보호할것이니, 두려워할 것 없다. 아니 하나님은 그냥 한번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지 왜 이렇게 많은 부분에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유가 뭐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매일 매일 매순간 순간 두려워하면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 매일 매일 이와같은 약속의 말씀을 주신다는 이야깁니다. 근데 사실 두려워한다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믿음이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짜 나와 함께하신다라고 하는 것을 믿는다고 하면 우리가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는거죠.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두려워요. 그 이유는 ‘진짜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실까?’ 하는 그런의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분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목사님 저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는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두려워요.” 이렇게 얘기를 해요. “아니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을 믿으시면서도 두려워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면 “하나님이 나를 안 도와주실 것 같아요. 함께는 하시지만 안 도와주시는 것 같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그동안 수도 없이 많이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이 도와주신 적이 없어요. 이런 위기 속에서도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은 내가 알겠는데 함께 하시면서 돕지를 않으시는 그런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얘기를 들어도 제 마음속에는 이 두려움이 있습니다.”라고 하는 이야깁니다. 어찌보면 이 분의 이야기에 많은 분들이 납득하실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어떨 때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목놓아 불러도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응답해주지 않는 것같고, 그러니 ‘정말 이 위기속에서 나를 진짜 지켜주실까’하는 그런 의심이 생길 수 밖에 없다는거죠. 근데 이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하는것입니다. 하나님을 오해하는 생각이라는거예요. 우리 자녀들 중에 보면 자녀들이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어릴 때는 부모의 이야기를 그저 진리라고 철썩같이 믿으면서 성장을 합니다. 그런데 방황하는 청소년기에 접어들게 되면 부모의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자녀들이 많이 있지요. 그래서 때로 “우리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요.” 이런 얘기를 할 때가 많이 있어요. 가출하는 청소년의 대부분이 “부모가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가출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을 수가 있습니다. 부모가 힘들게 일해서 어려운 생활 속에서 자녀 학비도 대주고,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들을 공급을 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돈을 벌고 그렇게 산다는 게 어렵고 힘이 드는거죠. 그런데 어느날 아들이 와 가지고 “아버지 나 이거 필요한데, 이거 사주세요.” 부탁을 할때가 있다는 거예요. 부모가 여유가 있으면 왜 안사주겠습니까. 여유가 없어요. 지금 먹고 살기도 힘이 드는 순간에 이런 쓸데없는 것을 사달라고 하면 누가 그걸 사줄 수가 있겠습니까. 철없는 얘기에 대해서 그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는거죠. 그래서 못 사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니 이 녀석아 그런 것이 왜 지금 필요해.” 그러면서 거절을 할 수가 있다는 얘기에요. 또 때로는 여유가 있어도 그것이 자녀교육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 오히려 해를 끼치는 것이라고 하면, 여유가 있더라도 사줄수가 없는 것이라고 하는거죠. 근데 그것을 자녀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는거예요. 자기의 친구의 아버지들은 다 그걸 사주는데 우리 아버지는 왜 안사주는거야. 지금 상항이 어떤지, 부모의 마음이 어떤지를 헤아리지 못하는거죠.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아버지에게 아무것도 요청하지 않아요.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뭘 요청해도 사주는 분이 아니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되는거죠. 그러면서 어느날 누군가가 너희 부모님에게 왜 이런걸 부탁을 하지 그러느냐 그랬을때 “아이 우리 아버지나 우리 부모님은 내 삶에 관심이 없어요.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이런 얘기를 그 부모가 듣는다라고 생각을 해보세요.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렇게 오해하는 성도님들도 없지 않아 계시는 것 같아요.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은 누가 뭐라해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육신의 부모의 그 사랑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의 사랑이라는거예요. 그래서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잘 보여주는 부분이 성경이 여러곳에 있는데 이사야49장 1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것이라.]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느냐] 남자들은 이걸 잘 모르죠. 그러나 아이를 출산해 본 경험이 있는 어머니들은 이 마음을 이 말씀의 뜻을 알거예요.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는가.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제가 만나본 성도님들 가운데 제일 기쁨이 큰 기쁨을 가진 사람들을 손 꼽으라 그러면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어요. 태어난지 얼마 안되는 애기를 안고와서 목사님 이제 우리 아기가 처음 교회에 나왔어요. 우리 아이를 축복가도 해주새요 그러면서 자기의 품에 안겨있는 그 어린 아기를 바라보는 어머니보다 더 큰 기쁨을 가진 사람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아기를 바라볼 때 모든 기쁨이 그 아기에게 쓰여 있어요. 어떤면에 있어서는 제가 기도하는 기도소리도 듣지 않는것같아. 아기를 쳐다보면서 그렇게 기뻐하고 그러고 그 아이가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그렇게 생각하며 기뻐하는 그 엄마의 모습. 그 모습보다 더 기쁨을 가진 사람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49장 15절에 보면 [그런 엄마의 사랑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 오늘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고있다는거예요. 우리를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보면 우리를 보호하실 것이다.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이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세상에서 가장 강한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세상에서 제일 강한사람은 어머니에요.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진짜 강해서 강한 것이 아니라 자식을 위해서라면 내 생명도 불사하는 존재라는 이야기입니다. 내 생명도 아끼지를 않는거예요. 물불을 가리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강한것이지요, 근데 그 어머니보다 강한분이 누구시냐 하나님이시라는거예요. 에이 목사님 하나님이 당연히 어머니보다 강하죠. 그런 차원의 강함을 얘기하는게 아니에요. 어머니가 강한 것은 자식을 위해서 생명을 내어줄수있기때문이에요. 물불을 가리지 않아요,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적이 누구든지 두려워하지 않고 덤벼드는 것이 어머니입니다. 근데 하나님의 사랑이 그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강하다는 것은 하나님역시 마찬가지시라는거예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하나님도 물불을 가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거예요. 어떻게 그렇게 얘기할수있습니까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게 얘기할수가 있는거죠. 그것이 사랑이에요. 사랑한다면 논리를 따지지 않아요. 사랑한다 그러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거예요. 근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와 같은 사랑으로 사랑하신다”라고 얘기를 했을때 누가 우리를 해할 수가 있겠느냐, 이 말인거죠. 시편 91편 10절 11절에 보면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천사들까지라도 다 동원을 해서 우리를 지키도록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지키시려고 하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계시다라고 하면 두려워하지 말라 말씀하시는 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을 오해하지 말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시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깊은 감사와 영광으로 하나님앞에 영광돌리는 우리가 되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로 오늘 지존자의 은밀한곳에 거하는곳에 베푸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강하고 존귀한 자가 되게 할 것이다라고 하는 약속입니다. 강하고 존귀한 자가 되게 할 것이다. 시험이나 어려움이라고 하는 것이 꼭 나쁜것만은 아닌것같아요. 물론 그 순간에는 피하고싶고, 때로는 원망도 되고 그러는 것이 맞습니다. 근데 놀라운 것은 지나고 보면 내가 그만큼 더 강해져있는 나를 보게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작은 것에도 놀라고 힘들어하던 내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강해지는 거예요. 이것을 성장이라고 얘기하고 성숙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오늘 13절에 보니까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여러분 이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독사가 앞에 나타났는데 발로 밟을 수가 있겠습니까?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요. 독사야 뭐 내가 피하면 된다고 하지만 젊은 사자는 어떡하겠습니까. 제가 어느 나라인지 기억은 안나지만 어떤 나라를 갔는데 이 동물 우리에 갇혀있는 사자를 본적이 있어요. 사자들을 이렇게 큰 케이지에 가둬뒀는데 제가 고 앞에 20센치까지도 가까이 갔어요. 이렇게 가까이 가서 이 울타리를 앞에 두고 제가 얼굴을 마주대하고 있었죠. 굉장히 가까운 곳입니다. 근데 그 울타리 너머의 사자가 저를 노려보면서 으르렁대는데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오금이 저린다는 게 뭔지 제가 경험을 했어요,. 분명히 나를 해할 수가 없는 상황이에요. 근데 그 안에서 나를 노려보면서 으르렁대는 그 사자의 눈빛을 봤을 때 그저 얼어붙는다는 이야기가 뭔지를 제가 알겠더라고요. 거기서 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런 사자를 발로 밟는다구요. 있을 수가 없는 이야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믿는 것은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 힘 주시면 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거예요. 어떤 분이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삼손이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세요. 사자를 때려서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삼손 밖에는 없습니다. 근데 그 삼손은 그 영화나 이런 것을 봐도 대단한 근육을 가진 근육질의 사람으로 이렇게 묘사를 할 때가 많이 있다는거예요. 그러면서 그 어떤 분이 어떤 목사님이 설교하는 걸 들으니까 여러분 삼손이 근육이 있었다고 생각하냐는 거예요. 우리는 다 당연히 힘이 쎄니까 근육질의 몸매도 좋고 그렇게 힘도 쎄고 그럴 줄 알았는데 정말 그렇다라고 생각하느냐.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얘기에요. 한번도 그렇지 않다라고 하는걸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그 어떤 목사님의 방송을 통해서 나오는 얘기를 들으니까 삼손은 그 힘의 근원이 그의 근육에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에요.제가 그 얘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어요. 만약에 그의 힘의 근원이 자기가 그동안 열심히 운동을 하고 해서 만든 그 근육으로부터 나오는 힘이었다라고 하면 머리가 잘렸을때 그렇게 무기력하게 끌려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힘은 근육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그 힘을 가졌기 때문에, 그는 이길 수가 있었다” 이렇게 얘가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힘주시면 아무리 연약해보인자라 할지라도 놀라운 일을 행할 수가 있다라고 하는 이야깁니다. 여러분 골리앗 앞에 서있는 다윗의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다윗이 어떤 의문이 생겨가지고 내가 저 골리앗을 이겨야되겠다. 이게 평소의 다윗의 마음으로부터 나온것이라고 생각하면 잘못된 생각이라는거예요. 하나님이 그 순간 다윗의 마음에 그와 같은 용기를 주셨기 때문에 다윗은 싸우고자하는 마음을 가질수가 있었다라고 하는 이야깁니다. 그에게 지혜를 주셨고 힘을 주셨고 그를 도구로 삼으셨기 때문에 골리앗이 넘어지는 것이지 그 세상의 어떤 사람도 작은 꼬맹이가 큰 용사와 싸우겠다고 할때 싸워서 이길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제로 퍼센트라고 하는것입니다. 그러나 제로퍼센트, 거의 불가능한 그 일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용기를 주시고 마음을 주시고 힘을 더해 주시면 이기게 된다라고 하는 이야깁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요즘의 이 코로나19 사태가 우리에게 발생한 것, ‘하나님 왜 이런 사태를 주셔서 우리가 예배도 못 드리고 이렇게 다 흩어지고 이런 일들을 허락하셨습니까. 이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사태를 맞게 하셨다라고 하는 것은 뭔가 우리가 본질을 돌아보라 라고 하는 것을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예배를 돌아보고 우리가 평소 귀하게 여기지 못하던 것들을 귀하게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또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몰라요. 그러나 이 일을 통해서 우리가 위기상황에는 무엇을 어찌 해야할지 대처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는 기회라고 저는 믿습니다. 처음에는 허둥대던 우리들이 한 주가 지나고 나니까 이제는 이런 일이 닥쳤을 때 무엇을 대비해야 하고 무엇을 어찌해야 할 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지금 알지 못하지만 분명히 우리를 연단시키시고 강하게 훈련시키시고 이것을 통해서 더욱더 강한 존재가 되게 만드시고 더욱더 위기 가운데 대처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가진 교회로 하나님이 세워가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얘기입니다. 거기에 더불어서 더욱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하면 오늘 마지막 절을 보면 14-16절에 보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강하게 만드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존귀하게 만드신다는 거예요. 14절에 보면 [그가 내 이름을 안 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15절에 보면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16절에 보면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에서는 이런 일 저런 일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믿어야 되는 것은 결국은 우리는 웃게 되어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 끝은 고난으로, 실패로, 절망으로, 패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웃게 되어있다라고 하는 이야깁니다.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주시는 그 주님의 말씀을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세상에서는 코로나 19가 왕인 것처럼 행세를 해요. “내 기세 앞에 너희들은 다 무릎을 꿇어라. 다 복종을 해라. 내가 최고다. 나를 대적할자 누구냐?” 그러면서 그 위세를 떨치고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주고 있는 것이 코로나 19입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마치 자기가 왕인것처럼 행세를 하고 있어요. 또 얼마 전에는 신천지의 이만희씨가 왕인 것처럼 84년부터 시작해서 불과 한 35년만에 30만성도를, 30만 그 신자들을, 자기를 추종하는 세력들을 그렇게 만들었어요. 한마디 엄포를 놓으면 모든 그 30만 신도들이 두려움에 벌벌 떨어요. 자기를 왕이라고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왕인것처럼. 그러나 이 코로나19 사태로 인해서 뉴스를 보니까 그 왕이 세상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더라는 것이지요. 또 세상 정부는 그런 신천지를 수색하고 색출하면서 마치 그 권세를 깨뜨린 정부가 최고의 힘을 가진 것처럼 나오는 모습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다 왕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이런 저런 세력들이 자기가 왕인 것처럼 자기의 세력을 과시하려고 하는 그런 모습들을 우리가 보게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왕 되신 분은 살아역사하시는 천지를 창조하신 우리 하나님이 유일한 왕이신 것을 오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할 것을 믿습니다. 오직 천지를 만드시고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는 우리 왕 되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그 분의 날개 아래 그 분의 보호 아래 우리를 품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맗아라. 내가 너희를 강하게 할 것이다. 담대하게 할 것이다. 또 전염병이 너희를 해치지 못하도록 내가 전염병의 위기 속에서 너희를 건져낼 것이다. 이렇게 약속하시는 우리가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분명히 믿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 사랑하는 일산광림교회 성도님들, 하나님을 믿는 이 믿음으로 세상 앞에 당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조심은 하되, 두려워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실 줄로 믿습니다. 화가 변하여 복이 될것이오, 슬픔과 탄식이 변하여 새 노래가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위기는 마치 계속 될 것처럼 세상은 이야기 하지만 우리 하나님이 다스릴 것이고 얼마 가지 않아서 이 문제는 해결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고 근심할 것이 아니라 감사와 찬송 가운데 우리가 다 몸은 떨어져 있지만 함께 연합해서 합심해서 기도함을 통해서 놀라운 기적의 역사, 정말 하나님의 도우심의 역사를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될 줄로 믿습니다. 주의 크고 놀라운 은혜가 오늘도 우리 성도님들 가정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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