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며 섬기는 교회 (렘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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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환난 중 나의 믿음을 돌아보자  
 
환난 중 나의 믿음을 돌아보자
설교날짜 2020.3.15
설교자 박동찬 목사
본문말씀 고전 3 : 10 - 15
 
20200315 박동찬목사님
고린도전서 3장 10-15절

벌써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3주째 이렇게 실시간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에 있습니다. 한 주가 지나고 두 주가 지나고 이제 석주째가 되다 보니까 걱정이 되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하면 이런 일로 인해서 ‘혹시라도 신앙을 잃어버리는분은 없을까 또 교회에 다니다 안다녀보니까 이것이 더 편해서 앞으로도 이렇게 집에서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면 안됩니까?’ 혹시 그런 분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염려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전에 나와서 우리가 함께 예배하고 공동체를 의식하고 함께 기도하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라고 하는 것을 잊지 마시고 또 우리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상황은 언제든지 바뀌게 되어있습니다. 내일은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또 일년 뒤에는 어떤 상황이 펼쳐지게 될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상황은 언제나 바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성도님들의 믿음은 언제나 변치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정금같은 믿음이라는 얘기를 하는거예요. 순금같은 믿음이 되어야 한다. 금이라고 하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혼할 때도 결혼반지로 이 금반지를 하는 이유는 ‘변하지 말자’ 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금같은 믿음을 가지려고 하면 그냥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금이라고 하는 것이 순금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에게 붙어있는 불순물들을 다 제거해야 하는데 그것이 그냥 제거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되기 위해서는 풀무불 속에 1000도가 넘는 불속에 들어왔다 나왔다를 계속해서 반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고통을 통해서 나에게 붙어있는 불순물들을 다 제거하고 나는 값비싼, 정금으로 순금으로 되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과 이런저런 상황의 어려움들, 그런 과정들이 있지만 그것을 우리가 다 견뎌내고 이겨내는 것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은 더욱더 순금같이 변하게 될줄로 믿습니다. 이번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가 된 것도 어찌보면 우리의 믿음을 더욱더 견고하게 하는 그런 기회가 되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근데 이런 우리에게 주시는 신앙을 연단받는 이런 기회 가운데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승리하고 일어날 수 있는 우리 모든 일산광림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사람을 때로 이런 어려움이 오게 되면 정신을 못차리게 될 때가 있어요. 이성이 마비가 되고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한국 속담에도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을 차리면 산다.” 그런 얘기가 있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어려움으로 인해서 이런 초유의 사태를 우리가 맞이하게 되었어요. 6.25 이후로 예배가 멈춰진 적이 없었습니다. 교회에 출석을 못하게 하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이런때에 이것이 생긴 이유는 또 무엇인가 또 우리의 신앙은 지금 어떠한 신앙인가 한번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로 삼으면 이것이 우리에게 좋은 약이 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 성도님들 오늘 저는 <이런 환란을 만났을 때 나의 믿음을 돌아보자> 라고 하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나의 믿음의 상태는 어떠한가? 나는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런 존재로 사는가?’ 한번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세가지 꼭 기억해야할것이 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잠시 나누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는 ‘우리 신앙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오늘 우리의 터를 예수 그리스도라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마치 건축자가 집을 짓는것과 같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다는 거예요. 어떤 건축자들은 설계를 아름답게 하는 건축자가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튼튼하게 하기도 하구요. 가장 좋은 것은 아름다우면서 튼튼하면 더 좋겠지요. 그래서 자기가 살 집을 건축가가 자기의 그 원하는 방식을 따라 이렇게 설계를 하고 집을 지어 나간다라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신앙의 집을 짓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름답게 이렇게 꼼꼼하게 튼튼하게 잘 집을 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든 것이 귀찮아서 그저 대충대충 쉬운 방향으로 모든 것 그냥 빠르게 이렇게 진행시키며 집을 짓는 사람도 있을거예요. 뭐 물론 자기의 마음대로 나에게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기 때문에 본인 마음대로 집을 지을수는 있겠지요.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살다보면 태풍이 올때도 있다는거예요. 태풍이 몰아칠때도 있고 또 산불이 터질때도 있고 홍수가 올때도 있고 여러 가지 자연재해가 우리의 삶을 엄습해올때가 있다라고 하는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내가 집을 짓고 지금 사는 것. 평범할 때 아무런 일이 없을때는 살아가는데 문제가 없었다 할지라도 그런 재난의 때를 만나게 되어졌을 때 약하게 지은 집 터전이 약한 집들은 그냥 무너져 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 안에 살던 그 사람은 상처를 받게 되어 있는거죠. ‘해를 당하게 되어있다.’라고 하는 그런 이야깁니다. 그래서 우리가 집을 지을 때에는 튼튼하고 아름다운 것도 좋지만 안전해야 되는거죠. 튼튼해야 합니다. 어떤 재해가 와도 무너지지 않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기초입니다. 기초가 튼튼란 집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를 보면 공사를 시작하고 나서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건물이 올라가지를 않아요. 그래서 “왜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공사를 하면서도 건물이 올라가지 않습니까?” 라고 물어보면 공사를 하는 분들이 “기초를 튼튼히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땅 깊숙이 터전을 단단히 만들어 놔야 그 다음에 우리가 얼마나 높고 아름다운 그런 건축물을 만드느냐가 기초에 달려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기초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예요. 우리의 삶의 기초도 튼튼해야 우리가 아름다운 신앙의 집을 지을수가 있는데 감사한 것은 뭐냐하면 우리 신앙의 기초는 하나님이 마련해주셨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초를 닦아주셨는데 그 기초가 누구시냐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의 터전이 된다 라고하는거죠. 우리가 신앙의 집을 지을 때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위에 신앙의 기초를 놔야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변을 돌아보면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도 안믿습니다. 나를 믿습니다.” 자기 자신을 내 삶의 기초로 삼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꽤 많이 있다는 거예요. 근데 우리가 잘 아는 바처럼 인간은 약한 존재입니다. 바람이 불면 그 바람이 부는 것 조차도 우리가 견뎌내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내 생명도 보전을 못하는 것이 인간이죠. 그런데 우리는 나 자신에게 나 자신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내 위에 내가 뭔가 계획을 세우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에 그저 뭐 작은 사건만 터져도 그의 인생이 다 무너져내리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는 것이지요. 또 우리가 이단들을 보면 요즘 이단 이야기가 매스컴을 통해서 많이 오르내리고 있는데 보면 이단들은 다 자기들이 믿는 교주를 자기들의 삶의 터전으로 삼고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볼수가 있습니다. 자기 교주의 말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 이렇게 받아들이는 거죠. 그러다가 또 이렇게 작은 문제가 터져도 다 붕괴돼버리고 어려움 당하게 되고 본인들이 속았다 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그런 일들은 한순간에 오게 되어진다 라고 하는 이야깁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참 감사한 것이 있어요. 그건 뭐냐하면 말씀드린 것 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의 터전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위기가 와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것입니다. 이건 너무나 감사한 일이라고 하는거죠. 그리고 또 하나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우리가 구원을 얻는 길이라고 하는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구원의 조건이 되신다 라고 하는거죠.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됩니까 이런 질문을 하게 될 때 정답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나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내 죄가 사함받았습니다.’ 이것을 믿는 믿음으로 오늘 우리가 구원에 이르게 되는줄로 믿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런 표현을 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다.] 구원을 받는데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 외의 또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율법을 지켜야 하고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고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라고 얘기하는 그런 이야기에 넘어지지 말아라. 우리가 구원받는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이 다른 복음을 전하게 되면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다. 아주 단호하게 이렇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그런 사도바울의 모습을 우리가 볼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고 하는 이 메시지가 얼마나 감사한 메시지인지 모른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너무나도 쉽지 않아요? 또 공평합니다. 누구나 믿고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열어놓으신 구원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넓다는 거예요. 누구든지 와서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라고 하는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세상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길이 너무나도 좁다.’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너무 편협하다. 왜 너희들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그러느냐?” 이러면서 우리의 복음을 거부하는 이런 사람들도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세요.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노력하는 것처럼 그렇게 ‘공부하고 시험 쳐서 합격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세상에 아무리 내 마음속에 구원받고 싶은 열망이 있다고 할지라도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불공평하다는 거예요. 똑똑한 사람은 구원받고 똑똑하지 못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거죠. 또 기준을 세상적으로 ‘어느정도 이상 지위를 얻어야한다.’ ‘세상적으로 성공해야 구원을 받는다.’ 그러면 그것도 불공평한 거예요. 누구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공 못하는 사람은 구원을 못받는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죠. 내 노력으로 안되는 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건다고 하는 것은 매우 불공평하고 불안정한 처사가 아닐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돈을 많이 벌어야한다.’ 이것도 불공평 한거죠. ‘돈을 많이 벌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라고 하면 구원을 못받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수밖에 없다 라고 하는것입니다. 근데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는 거예요, 그건 뭐냐하면 예수님을 믿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든 아니든 돈이 많이 있는 사람이든 아니든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것은 내가 하나님을 믿는, 신뢰하는 그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는 구원에 이르게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닦아두신 신앙의 기초, 터가 된다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참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는 거죠.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사실을 늘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영광 돌리시는 복된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죽음과 핍박의 위험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 모른다는 거예요. 그때 그 위협이 무서워서 변절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배도했던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 안 믿고 사는 길을 선택하겠습니다.” 그랬던 사람들도 있죠. 근데 그들은 그 순간에는 ‘자기의 선택이 옳았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고 난 다음에는 후회하게 되어있다는 이야깁니다. 그 순간에 내가 신앙으로 이기지 못한 것 그거에 대해서 얼마나 후회하겠습니까? 반면에 두렵고 떨리는 중에도 “나는 이 신앙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나를 위해서 죽으신 그 분을 배신할수 없습니다. 나는 이 믿음을 지켜나갈 것입니다.” 그러면서 죽음을 불사하고 신앙을 지켰던 사람들은 그 순간에는 두렵고 떨리는 일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나중에는 그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은 없다라고 하는 것에 하나님께 오히려 감사하는 그런 삶을 살게 되는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어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어떤 위기가 온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 믿음을 져버리지 않는 우리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증명하기를 원하세요. 시험을 통해서 확인하기를 원하신다라고 하는것입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믿었어요. 그랬을 때 그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너의 아들 독생자 이삭을 나에게 바쳐라] 시험했던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저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바치려고 할 때 죽이려고 할 때 칼을 들어서 내리치려고 할때 주의 사자가 급하게 “그러지 말아라” 막으면서 “이제야 니가 나를 진짜 사랑으로 진짜 믿는줄 알겠다.” 그것을 아브라함의 의로 여기셨다는 것이지요. 오늘 하나님도 우리의 믿음을 시험 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바로 그것을 얘기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우리의 삶의 신앙의 터전으로 삼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음으로 받은 후 그 후의 우리의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될 것이냐, 이것을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누구는 그 집을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집을 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누구는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그렇게 집을 짓는 사람도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모양이든지 내 기호에 따라서 내가 짓고 싶은대로 짓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그 집이 잘 지어진 집인지 아닌지 확인할 때가 오는데 무엇으로 확인하느냐 오늘 성경에 보면 [불]로 확인을 한다는 거예요. 불로. 불을 붙였을 때 다 타서 없어져 버리면 나의 그 모든 수고가 헛수고가 되고 마는 것이지요. 그러나 불을 붙였을 때 타 없어지지 아니한다 라고 하면 그 집은 견고한 집 잘 지어진 집이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3절 14절에 보게되면 [불로 시험하게 되는데 온전하게 집이 남아있으면 상을 받게 될 것이고 그것이 다 불타 없어지게 되면 해를 받게 된다.] 해를 받는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책망을 받게 된다 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 말씀을 통해 증거하는 내용은 뭐겠습니까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지은 집은 불로 태울 때 때워지지 않는거죠. 타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무나 짚이나 풀로 집을 만들면 불을 붙이면 다 타서 없어지게 되는거예요. 우리가 수고해놓고 열심히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런 내 삶의 방식을 쫓아서 신앙을 뒤로하고 열심히 나는 세상에서 성공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노력을 하면서 내 나름대로 멋진 집을 지었는데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불로 시험을 할 때 그것이 다 타서 없어져 버리고 마는거예요. 나에게 주어져 있는 인생의 기한이 요즘은 뭐 100년을 산다고 해요. 100년이라고 하는 기간을 줘서 100년간 뒤돌아보지도 않고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한순간에 나무로 지은 집이고 풀로 지은 집이고 짚으로 지은 집이어서 한순간에 없어져 버리고 만다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100년의 세월이 너무나 허무하지 않을수가 없다 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 믿고 신앙생활을 할 때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금이나 은이나 또 보석으로 내 신앙의 집을 지어갈 수 있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그래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갈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씀을 전하고 있어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여야 천국에 간다. 무슨 말이냐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은 천국에 다 못 간다 이런 얘기가 아니지요. 우리 다 주여 주여 하면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 중에 누구는 천국에 가고 누구는 천국에 못 가는 그런 일들도 일어날 수가 있다 라고 하는 이야깁니다. 주여 주여 하고 우리가 부르짖는 그 우리의 입술의 고백이 나를 구원받느냐 못받느냐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정금같은 믿음이냐 어떤 상황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냐 아니냐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느냐 못 받느냐의 척도가 되어진다 라고 하는 것을 오늘 우리 성도님들이 분명히 알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여 주여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천국에 가는 사람이 있고 못 가는 사람도 있다. 끝까지 정금같은 믿음으로 시험의 때를 지나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해를 받게 된다는 거예요. 해를 받게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구원을 못 받는다는 의미인가? 아니오. 그렇지는 않아요. 해를 받는다는 것이 구원은 받지만 상급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해요. 또 해를 받는다는 것이 말 그대로 구원을 못 받는 경우도 있다 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주여 주여 하는 사람들중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 구원은 받지만 상급은 없는 경우. 그런 경우가 있다는 거예요. 이것을 오늘 성경 15절에는 [불가운데서 구원을 받은 것처럼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다]는 거예요. 여러분 집에서 잠을 자다가 불이 나면 어떻게 됩니까 살기 위해서 뭐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없어요. 맨발로 뛰쳐나오고 속옷바람에 뛰쳐나와야 한다는 거죠. 불가운데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바로 그런거예요. 살기는 살았지만 부끄럽다는 이야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분명하니 구원은 받지만 그러나 내 집을 지을 때 불이 나면 다 타서 없어져버리는 안전하지 않은 그런 신앙의 집 그런 생활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세상을 기웃 기웃 거리면서 내 편리주의에 따라서 신앙 생활 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거예요. 그랬을 때 우리가 구원은 받지만 분명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님이 내 죄를 사해 주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구원은 받지만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시험의 때를 이기지 못하고 자기 갈 길로 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내 터를 부인해버리게 되면 아무리 우리가 주여 주여 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믿음은 바른 믿음이 아닌 까닭에 구원을 받을 수가 없게 된다고 하는거죠. 성경에는 여러 인물들이 나오지만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라고 하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뽑혔던 유다였지만 그는 구원을 받지 못했어요. 가룟 유다가 구원을 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팔아서 입니까? 예수님을 팔았기 때문에 구원을 못 받은 것이 아니었어요. 가룟 유다가 구원을 못 받은 이유는 예수그리스도가 내 구원의 터전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내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를 못하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을 오늘 우리는 알아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17세기의 일본에 기독교가 전파가 됐는데 17세기, 오래전이지요. 그런데 그 일본에서는 일본의 관리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그렇게 두려워했어요.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두려움이 없는데 꼭 예수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두려움이 생겨서 그렇게 철저히 핍박을 하고 박해를 하면서 예수를 못 믿게 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17세기 일본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모진 고문을 하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 뭐 일본여행을 갈 때 많이 가는 그 후쿠오카라고 하는 곳에 가면은 벳부 온천이 있고 거기에 온천지대가 많이 있어요. 사실은 그곳이 다 뭐냐면 그 17세기 18세기 예수 믿는 사람들을 고문해서 죽이던 그런 장소였다는 거예요. 뜨거운 70도 80도가 되는 그 뜨거운 그 온천 물 가운데 사람을 집어넣었다 뺐다를 한 것이죠. 그렇게 고문을 해서 죽이는 것입니다. ‘배교한다’라고 할 때 그 위협이 그 핍박이 두려웠기 때문에 배교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겠죠. 배교하게 될 때 그 배교의 상징으로 일본 관리들이 요구 했던건 뭐냐면 예수님의 성화를 땅바닥에다 놓고 이것을 밟고 지나가라는 거예요. “네가 진짜 배교했다는 증거로 예수님의 얼굴을 밟고 지나가야 된다.” 그러면 그 자기가 살기 위해 예수님의 얼굴을 밟고 지나가는 거죠. 이것을 모티브로 해서 만든 소설이 엔도 슈샤크의 <침묵>이라고 하는 소설입니다. 한 내용을 잠깐 말씀을 드리면 정말 유명한 정말 존경받을 만 한 그런 신부님이 일본에 선교를 갔는데 이분이 배교했다는 얘기를 들으니 그 제자들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럴 리가 없다는 거죠. 그래서 그의 제자가운데 한사람이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오는 거예요. 와서 그도 복음을 전하고 선교의 사역을 감당을 하게 되는데 나중에 보니까 내가 고문을 당하는 것은 나도 견뎌낼 수가 있는데 내가 정말 전도해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기로 했던 그 사람들을 일본 관리들이 고문하기를 시작을 하는 거예요. 이 신부가 보는 앞에서 고문을 하는데 너무나 처참하게도 고문을 하게 되니까 견딜 수가 없는 거죠. 그때 일본 관리가 요청을 하는데 “니가 배교를 하면 저들을 살려주겠다.” 이럴 때 망설이게 되면 고민을 하다가 결국은 예수님의 그 성화를 쳐다보고 ‘밟아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을 할 때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거예요. [밟아라 나는 밟히기 위해 이 땅에 왔다.] 그 음성 침묵가운데 있던 하나님의 음성을 그 순간에 듣게 되고 예수님의 얼굴을 밟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이 소설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정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순교를 택한 사람들도 있고 순간적으로 두려움가운데 마음으로는 믿지만 배교를 했던 안 믿는다고 예수님의 성화를 밟았던 사람도 있고 나는 충분히 순교할 수 있지만 그러나 내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살리기 위해서 내가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의 성화를 밟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옳은 것인가 하는 그런 물음을 우리에게 주는 그런 소설입니다. 대학시절에서도 그 책을 읽으면서 참 큰 감동을 받고 오늘 우리가 이렇게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해서 이런 ‘사회적인 책임을 지는 것도 무관하지 않은 일이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의 어떤 그런 배교든 순교든 어떤 것을 선택한다 할 때 무엇이 옳으냐 이것을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리 이건 이렇고, 저건 저래서 이렇습니다” 아무리 얘기를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그 모든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이 믿음 가운데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기도하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감사한 것은 지금 우리는 그런 배도의 시대를 핍박의 시대를 지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거죠. 근데 앞으로 또 그런 시대가 닥쳐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마지막 때가 오면 이런 고난과 환란의 때가 닥칠 것이다 이렇게 우리에게 예고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자로써 ‘그런 날이 안왔으면 좋겠다.’ 이것이 저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그런 핍박의 시기가 아니니 예수님을 잘 믿고 있는 것인가 한번 돌아보게 된다는 거예요. 지금은 그런 배도의 시대나 핍박의 시대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배도자와 같은 그런 대충 대충의 그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코로나19사태가 오면서 이제 많은 성도님들이 예배를 드리지를 않고 집에서 인제 실시간으로 영상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안타까운 마음에 “목사님 눈물이 났어요.” 이런 분도 계셨지만 이제 한주가 지나고 두주가 지나고 하면서 점차 이 상황에 익숙해지는 거죠. 그러다가 인제 3주쯤 되니까 지나고 보니까 “이렇게 예배 드리는게 참 좋은 것 같네요. 주차 문제도 없어도 되고. 그저 누군가의 눈치 볼 것도 없고 이렇게 영상으로 예배 드리는 것 참 좋은 것 같습니다.” 혹시 이런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 성도님들 계십니까? 우리 일산광림교회 성도님들 없을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라고 하면 나는 지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있어서 정말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내 신앙의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짚이나 풀로 나는 지금 내 신앙의 집을 짓고 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지금이 조금 쉴 수 있는 기간이다. 하나님께서 이제 그동안 너무 수고했으니 이제 좀 쉬라고 우리에게 이런 기회를 주셨다.” 혹시라도 이렇게 생각하는 분 계십니까? 또는 매 주일 교회오기는 싫은데 그저 아내의 강건함에 의해서 또는 누군가의 강권함에 의해서 이렇게 나오다가 지금은 눈치 안 보고 이렇게 그냥 집에서 편안하게 혹시 지금 또 소파에 누워서 예배 드리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어요. 그러면서 이것이 정말 편하고 좋구나. 그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더라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들 드려야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거예요. 우리가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속에서 집에서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우리 집으로 주님이 오시는 거예요. 주님 앞에 우리가 예배를 드린다는 마음을 가지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반면에 이런 상황이 너무 안타깝고 예배가 그립고 우리 성도님들 함께 신앙생활 하던 것이 그립고 또 보고싶고 이런 마음이 있고 그래서 우리가 예배 회복을 위해서 기도하는 성도님들 그런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내 신앙의 집을 짓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참 감사한 것은 우리 여러 성도님들로부터 격려의 문자가 오기도 하고 사진이 오기도 해요. “목사님 우리 가정 이렇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가족들이 가족 3대 4대가 모여서 예배하는 모습, 책상을 놓고 그 가운데 정면에 모니터를 켜 놓고 이렇게 정성을 다해서 예배하는 그런 성도님들의 사진을 받게 될 때 얼마나 감동이 되는 줄 몰라요. 우리 성도님들 어느 곳에 있던지 최선을 다해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하는 것이 저에게 참 격려가 됩니다. 또 어떤 분들은 문자로 “목사님 힘내세요.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보고싶습니다.” 이런 얘기를 이렇게 전해오는 그런 성도님들의 문자를 볼때에도 참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각자가 다 흩어져 있지만 우리가 영으로 영적인 가족공동체인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이럴 때 일수록 신앙이 나태해지는 것이 아닌 하나님 앞에 내 신앙이 정말 정금같은 신앙입니다 라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그런 일산광림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세 번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더욱 주의 일에 열심을 다해야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더욱 열심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누차 말씀드리듯이 마태복음 10장 29절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 말씀이 있지요. 이런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도 결코 우연은 아니라고 저는 믿습니다. 더욱 어떻게 보면 이 좋은 상황속에서 예배하면서도 예배에 감사를 잃어버리고있던 우리에게 이 예배가 얼마나 감사한 건지, 주의 성전에 모여서 기도하고 예배할 수 있는 성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너희들이 알아라. 마치 우리에게 권면하시고 권고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있는 그런 시간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더욱 깨어 있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인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살다 보면 사람은 늘 상황에 금방 익숙해져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이 사태가 언제까지 지속이 될지는 모르지만 결코 이 상황속에 익숙해지지 않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냄비속의 개구리라고 하는 우리가 알고 있죠. 냄비속에 개구리를 넣어 놓으면 그 안에서 헤엄치며 ‘아, 정말 살기 좋은 곳이다.’ 이런 생각을 해요, 그런데 그 밑에서 불을 떼기 시작하면 서서히 서서히 물이 따뜻해 지다가 나중에는 뜨거워지게 되는 거죠. 그러나 그 안에 사는 것이 익숙해 있던 개구리는 뛰쳐나와야 하지만 뛰쳐나올 줄 모르다 나중에는 서서히 자기가 목숨을 잃게 된다 라고 하는 이야기죠.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어진 상황에 익숙해지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상황을 이겨 나가는 우리 모든 일산광림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지난주간에 여러 목사님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들은 말씀입니다. 어떤 분이 “이건 하나님께서 우리가 너무 수고를 했으니 ‘잠시 쉬어 가라는 싸인’인 줄로 믿는다.” 이렇게 얘기하는 분이 있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런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마태복음에도 없고 마가복음에도 없어요. 누가복음, 요한복음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은 이것이 좀 쉬어 가라는 하나의 싸인으로 받는다. 그 말씀은 어디 있냐 하면 <내가복음>에 있어요. 내가 쓰고 내가 믿는 내가복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생각을 합리화시키고 그것을 복음서의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럴수록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우리에게 권면하는 말씀에 귀 기울이는 우리 지혜로운 일산광림교회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목사님 예배를 다음주에도 실시간 예배를 해주세요. 교회 와서 예배 드리는 사람은 드리고 또 집에서 드릴 분들은 집에서 드릴 수있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요. 지금은 특별한 상황이기 때문에 이렇게 드리는 거지 집에서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을 온전한 예배라고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사태가 끝나면 저희 교회는 실시간 영상을 끊습니다. 교회로 나와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전에서 얼굴과 얼굴을 성도님들이 서로 맞대고 그리고 서로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올려드리는 그런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는 우리 성도님들로 돼야 할 줄로 믿습니다. <내가복음>에서 벗어나야 하는 거예요.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상황일수록 더욱 열심을 내야한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도 바울은 뭐라고 얘기합니까?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오,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사도 바울은 엄청나게 많은 일을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좀 쉬었다 가겠다 이런 얘기를 한적이 없습니다. 이미 이루었다 함도 아니다.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다.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부름의 상을 향해 달려간다고 했어요. 오늘 우리 신앙인의 삶의 모습은 달려가는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거죠. 이런 상황속에 살아도 더욱더 우리가 믿음의 힘을 가지고 달려갈 수 있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즘에 어찌 보면 이제 모임도 많이 없어지고 가정에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그래요. 가정에서 성경 보시고 하나님의 말씀 붙잡고 그리고 더욱더 하나님 앞에 기도함을 통해서 주님과 교제하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지난번에 제가 부흥회를 갔는데 어느 교회의 성도님께서 “목사님 저는 평생 너무 열심히 달려왔어요. 이제는 좀 나이도 들고 했으니 좀 쉬어도 되지요?” 그러고 저에게 물으셨습니다. 식사를 대접하는 연세가 많으신 권사님이셨는데 70대 중반이 되신 권사님이셨어요. 제가 뭐라고 했을까요? “네, 그렇게 고생을 하셨으니 좀 쉬세요. 그랬겠습니까? “아뇨. 지금까지 잘 달려와 놓고 마지막에 쉬면 어떡해요. 마라톤을 그 먼 거리를 열심히 달려와 놓고 지금에 와서 골인지점을 눈앞에 두고 쉬시면 어떡합니까? 제일 어리석은 겁니다. 끝까지 달리셔야 합니다. 우리가 이제 어느 때가 될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시면서 아무개 권사야 너 뭐하다 왔느냐? 예수님 제가 열심히 달리다 마지막에 좀 피곤해서 쉬다가 왔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하셔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 저는 평생을 주님 영광위해서 마지막 순간까지 달리다 왔습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까? 나중에 예수님 앞에 섰을 때 어떻게 말씀 전하는 것이 후회하지 않는 삶일까요?” 그러고 제가 얘기를 했더니 그분이 가만히 생각하시더라구요. 그러시면서 “열심히 달리겠노라.” 이렇게 결심하는 그런 모습을 봤습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달리는 거예요. 쉬는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이럴 때일수록 또 우리가 교회가 해야 할 일을 찾아서 이렇게 기쁨으로 감당해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가만히 묵상하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나중에 죽어서 천국에 가면 각자의 집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처소를 예비해주신단 말이죠, 그런데 그 재료는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가지고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신다는 것인가? 제가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아 재료는 우리가 이 땅에서 올려 보내는 것 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짚을 자꾸 하나님께로 올려 보내는 거예요, 하나님께. 어떤 사람은 나무를 올려 보내고 또 어떤 사람은 풀이나 이런 것을 자꾸 올려드려요. 예수님은 받으신 대로 그걸 가지고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시는 거죠. 나중에 그것이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집에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이 땅에서 재료를 올려 보내는 거예요, 금을 올려 보내고 은을 올려 보내고 보석을 올려 보내고 불에 타지 않는 것. 견고한 것. 우리 신앙생활을 통해서 그런 것들을 올려 보낼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천국에서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시는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무나 풀이나 짚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대충대충 신앙생활 하는 것을 의미하는 거죠.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시련속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것을 또 최선을 다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공평하시고 정의로우신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절대로 성도님들이 착각해서는 안되는 것은’ 내가 이 땅에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든지 천국에서는 똑같다?’ 천만의 말씀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결코 우리 주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말씀할 수가 없는 거죠. 정의로우신 하나님이라고도 얘기할 수가 없는 거예요. 성경은 심은 대로 거둔다고 말합니다. 절대로 대충대충 신앙생활 하는 사람과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똑같은 대우를 받을 수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난을 당하고 돌에 맞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고 죽은 것 같이 그렇게 기절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주변에서는 그러지 말라고 만류를 헸지만 사도 바울은 “지금 당하는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에 비교할 수가 없다.” 하늘나라에서 주님 앞에 그 영광스러운 날을 생각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려갔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어떻게 지금 이 사태를 맞이하면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십니까? 한번이라도 더 교회를 위해 기도하시고 또 말씀 묵상하시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시고 또 주변에 만나는 이들에게 더욱더 서로 격려함으로 이러한 때 우리가 믿음이 나태해지지 않도록 또 이런 상황에 익숙해지지 않도록 서로 격려하며 나아가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언서 중에 <학개서> 라는 것이 있습니다. <스가랴서>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대로 BC586년에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고 예루살렘 성이 다 훼파가 되고 무너져버리게 되는 거죠. 그리고 포로로 다 끌려가게 됩니다. 그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를 하게 되는 거예요, 이 예레미아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던 것처럼 70년이 차니까 이제 페르시아의 고레스라고 하는 왕이 바벨론을 무찌르게 됩니다. 그 후 이 고레스 왕이 처음으로 시행했던 것이 뭐냐면 “모든 포로로 끌려왔던 사람들은 본토로 돌아가라.” 이렇게 명령을 내리게 되는 거예요. 정말 70년만에 이스라엘 땅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는 거죠. 그때 처음으로 1차 돌아왔던 사람들의 숫자가 에스라서 2장에 보게 되면 42360명이라고 하는 숫자가 돌아오게 됩니다. 42360명이 돌아오게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와서 스룹바벨 총독의 지휘 아래 제일 처음에 했던 것이 뭐냐하면 무너졌던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회복하는 거예요. 스룹바벨 성전을 짓는 거죠. 포로로 살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수많은 사람들은 이미 그 바벨론 그 땅에서 살던 것이 익숙해져서 돌아올 생각조차 안하는거예요. 깨어 있는 42360명이 깨어서 그 예루살렘 땅으로 돌아오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성전 기초를 놓고 이제 다시 무너진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는. 선민사상이 강했던 유대 민족이기 때문에 다시 그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며 얼마나 감격이 됐겠습니까? 눈물을 흘리며 찬송을 하게 되는 거죠. 그러고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일에 동참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때 그 땅에 살던 사마리아인들이 와서 훼방을 놓고 방해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너희 이곳에 성전 지으면 안된다.” 이러고 못 짓게 하니까 그 감격속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려고 했던 그 사람들이 그 상황이 상황인 만큼 성전 짓기를 멈추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차일피일 성전 짓는 일을 안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게 언제까지 지속이 되냐 하면 16년동안 하나님의 성전을 짓지 않아요. 그러고 그 이스라엘 백성들 처음에는 눈물을 흘렸던 그들이 나중에는 하나님 성전을 짓기 위해 그런 재목을 가지고 뭘 하냐하면 자기의 집을 짓는 거예요. 자신들의 집을 짓고 편안하게 살면서 하나님의 성전이 어떻게 되든지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 이것이 학개서와 스가랴서에 나타나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를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는 내용이 뭐냐하면 [하나님의 성전을 저렇게 버려 두고, 너희는 너희들의 집을 짓는 일에 이렇게 수고를 다하고 있다.] 책망을 하게 되니까 그제서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다시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열심히 방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서 4년만에. 16년동안 멈춰 있던 하나님의 성전이 4년만에 아름답게 지어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성전이 지어지게 됐을 때 봉헌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통곡을 하면서 기뻐하는 그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하고 흡사한 것은 아닌가 이런 염려를 하고있습니다. 첫 주가 지났을 때에는 참 안타까운 모습으로 “목사님 우리가 성전에서 예배 드리는 것이 너무 그리웠어요.” 이렇게 얘기하는 분들이 많이 계셨어요. 두 번째 주가 지나면서 “어쩔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이런 얘기가 나와요 이제 세 번째 주를 우리가 맞이하면서 “이제는 지나고 보니까 이것도 좋은 것 같아요. 오히려 이것이 더 좋은 것 같아요.” 혹시 이렇게 점점 이 상황에 익숙해지며 예배를 멀리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 이럴 때 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다시 돌아보면서 우리 신앙을 다시금 점검해볼 수 있는 우리 성도님들이 돼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제도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 한 분 하고 만나서 대화를 하면서 “목사님 이런 사태가 언제까지 이렇게 지속이 될까요? 점점 성도님들 가운데에는 교회를 멀리하고 신앙을 버리는 사람도 있을 것 같고 이런 사태가 일어난다고 하면 어떻게 할까요?” 제가 질문을 했어요. 그랬더니 그분이 의외의 답변을 하세요. “어쩔 수 없지요.” 그러더라구요. 아니 지도자가 되시는 분이 어쩔 수 없다고 얘기를 하시면 어떡합니까? 뭔가 답을 주셔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근데 그분의 마음속에는 이런 마음이 있다는 거예요. “이 사태가 지나고 나면 정말 예배를 사모하는 사람들만 교회에 나오시겠지요.” 그러더라구요. 그분들과 함께 정말 지금 우리가 각자의 가정에서 내 삶을 돌아보면서 내 신앙을 다시한번 점검하고 진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 생명을 바칠 각오로 예배를 드릴 준비가 된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하게 되는 그 일을 통해서 한국교회는 새로워질 것이라고 이렇게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제가 그 말씀을 들으면서 제 마음에 큰 감동이 있었습니다. 바라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낙오하는 분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모두가 다 정금같은 믿음을 가지고 기쁨가운데 나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저에게 있어서 제가 새벽마다 성전에 나와서 기도하는 첫 번째 기도 제목은 다른 것이 아니에요. ‘코로나19사태 해결해 주시옵소서.’ 이것이 첫 번째 기도제목이 아닙니다. 저의 첫 번째 기도제목은 ‘이러한 상황속에서 우리 성도님들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이것이 첫 번째 기도 제목 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코로나사태가 속히 진정이 되도록 하나님 붙들어 주시옵소서.’ 왜 이렇게 기도를 하냐하면, 저에게 있어서는 우리 성도님들의 신앙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래요. 코로나 19 바이러스 사태는 하나의 상황일 뿐입니다. 상황은 바뀌게 되어있어요. 변하게 되어있어요. 앞으로 또 어떤 상황이 올지 몰라요. 그럴 때마다 우리의 연약한 믿음 이것을 붙잡고 상황이 좋아지기 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이 온다 할지라도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우리의 믿음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 이러한 때에 우리가 더욱더 정말 믿음으로 이 상황을 이겨 나갈 수 있는 우리 일산광림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몰라요. 이러한 때 우리 믿음을 잃지 않는 성도님들이 되시고 더 나아가서는 이 사태가 조속히 해결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고 그리고 또 이런 기회를 축복의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서로 격려하고 문자나 전화를 통해 우리 서로 안부를 전하면서 더욱더 견고한 그런 믿음의 동역자의 그런 관계를 쌓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러할 때 이번 위기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기회로 변화가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도 우리 성도님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고 이 상황속에서 우리가 기도하며 찬송하며 감사하며 그렇게 믿음으로 승리하는 저와 우리 일산광림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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