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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설교날짜 2020.3.29
설교자 박동찬 목사
본문말씀 사 53 : 1 - 9
 

200329 박동찬 목사님


할렐루야 귀한 찬양에 감사를 드립니다. 큰 은혜 받으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우리가 실시간으로 영상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우리가 예배 드리는 그 자리에, 또 가족들 또 두세명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함께 하겠다 말씀하셨는데, 오늘 우리 성도님들 예배하는 자리에 우리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가족들과 함께 인사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인사 한번들 하시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감사드립니다.

금방 잡힐 줄 알았던 코로나19사태가 계속해서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진행이 되다 보니까 여러가지 삶의 변화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삶의 패턴이 먼저 달라지는 것 같아요. 사람을 만날 때 반가운 마음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거리를 두고 만나게 되어있고, 또 평소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던 그 마스크가 요즘에는 제일 중요한 그런 물품으로 이렇게 우리가 여겨지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또 사재기를 하는 그런 나라들도 생기게 되는 것을 볼 수가 있구요. 삶의 패턴들도 이 달라짐에 따라서 또 우리가 미래가 불확실해지다 보니까 두려운 마음, 염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을 만날 때도 '저 사람은 괜찮은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고 모든 것이 다 조심스러워지고 이렇게 위축되어지는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제가 이제 대학교 강의도 하는데 강의할 때에도 강의도 뭐 예전 같으면 가서 자유스럽게 학생들 얼굴을 보며 즐겁게 강의를 하겠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인터넷으로 강의를 합니다. 그래서 촬영을 해서 올려야 하고 또 그것을 또 편집도 해야 하고, 이제 소규모 어떤 회의를 할 때에도 화상으로 이렇게 회의를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영화에서나 보던 그런 일들이 실제로 우리 사회 안에서, 집 안에서 화상으로 보면서 여러 사람들이 같이 강의를 하기도 하고, 소규모 회의를 하기도 하고 그러는 모습들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 생활 방식이 한 5년에서 10년은 당겨지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 만큼 모든 것이 빠르게 어떤 삶의 패턴과 방식이 달라져 가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또 사회적 갈등도 심화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신천지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저럴수가 있느냐." 이렇게 분노했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이상하게 초점이 기독교에게로 이렇게 맞춰지는 그런 느낌을 받게 됩니다. 왜 세상에서는 우리가 예배드리는 거에 대해서 마치 중범죄자를 다루듯이 하고 있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실질적으로 우리 주변에 보면 구청이나 시청이나 또 많은 곳에서 연극이나 극장, 이런데는 가보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이렇게 자기들의 문화를 즐기는 그런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 드리는거에 대해서만 "예배를 강행한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젊은이들은 춤추는 그런 클럽이나 이런데 가보면 "그 안에서 난리도 아니다." 이런 얘기를 많이 들어요. 근데 그런 것에 대해서는 일절 제제를 가하지 않고 일주일에 한번 예배 드리는 교회 예배에 대해서 "예배를 드리지 말아라.", "엄히 단속하겠다." 이런 모습을 볼 때 이것은 뭔가 불공평한 처사가 아닌가 하게도 된다라고 하는 것 입니다.

얼마 전에 뉴스를 보니까 민속촌에서는 이 코로나19 사태가 빨리 종식되기를 위해서 그렇게 무슨 기원제를 드린다 그러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그것을 기원제라 하는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일절 하라 마라 얘기가 없어요. 그런거에 대해서는 오히려 장려하는 그런 느낌을 받게 되는 그런 분위기를 우리가 감지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게 될 때 '참 뭔가 불공평하다. 모든 것을 적용하려면 똑같이 해야하는데 비록 이 교회에 대해서만 비단 이렇게 제제를 가하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까 화도 나더라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때는 2미터 간격을 두었는지 안두었는지 그것을 확인하러 오겠다." 뭐 이런 얘기들도 하구요. 근데 막상 시청이나 구청에 가보면 일미터 이미터가 아니라 뭐 50센치 80센치 이렇게 붙어서 그렇게 업무를 보는 그런 모습들도 우리가 보게 되는거죠. 그런걸 보면서 '이런 것이 모순이 아닌가.', '이건 너무 뭔가 이 지금 사회의 이 문제에 대해서 희생양이 필요한데, 그것을 지금 교회에 두고있는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혐오 집단인 것처럼 이렇게 방송을 할 때 불공평하게 느껴지고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정말 '이 세상이 교회를 우습게 여기는 것인가' 아니면 '무슨 의도를 가지고 공격을 하는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드는 생각이 그렇다라고 하면 '교회가 그냥 가만히 이대로 있어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무슨 데모라도 해야되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새벽에 이런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 제 마음 속에 주시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 이사야서는 특별히 메시아의 탄생에 대해서 오실, 너희들이 기대하는, 너희들이 대망하는 메시아 그 분이 오실 것인데. 그 분이 어떤 분으로 오시는가 하는것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는 것이 이사야 53장의 말씀입니다. 이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게 되면 굉장히 정치적 군사적인 힘을 가진 메시아로 그렇게 와가지고, 모든 것을 다스리고 다윗의 나라와 같이 번성한 그런 이스라엘을 세워주실 것이다. 이렇게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오늘 이사야 예언자가 그 예언했던 그 내용은 그런 메시아가 아니라 고난당하는 메시아의 모습을 이렇게 소개를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고 이 선포가 있은지 수백년이 지난 다음에 정말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셨고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정말 어린양, 저항하지 아니하는 어린양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는, 오늘 이 본문 말씀과 똑같은 그런 일을 하시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우리 상황 가운데 또 우리가 사순절을 보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게 될 때 오늘 이 이사야 53장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해답이 교훈이 크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이런 상황속에서 어떻게 하셨을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두가지 예수님의 성품을 잠시 생각해보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잘 아는대로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 당하시고 죽임 당하신 예수님이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 당하사고 죽으신 그런 예수님. 사람이 살면서 어떤 고난을 당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죠. 때로는 두렵기도 합니다. 그런데 내가 잘못해서 그 책임으로 고난을 당한다그러면 그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겠지요. "내가 잘못했으니 내가 그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고난을 당해야 된다라고 하면 그것은 참고 견디기가 힘든 그런 일이 아닐 수가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가 잘 아는대로 화성에 연쇄 살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들었던 그런 사건이었지요. 6년동안 열차례에 걸친 그런 살인 사건이 있었어요. 희생자들 가운데에는 13살짜리 어린 여중생에서부터 71살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열차례에 걸쳐서 살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자료에 의하면 180만명의 경찰이 동원이 됐고, 3000명의 용의자를 찾아내가지고 조사를 받았지만 범인을 잡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한사람이 용의선상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 사람은 성실한 한 가정의 가장이었습니다. 2남1녀를 둔 아버지였어요. 누군가의 제보에 의해서 끌려가게 되고 누명을 쓰게 되었다라고 하는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이 고문을 심하게 당하고 하다 보니까 결국에는 너무 억울하니까 1997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분이 얼마나 억울했으면 그렇게 극단적인 그런 결론을 내리게 되었을까. 또 그 가족들은 아직도 그 아픔을 안고 지금까지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억울하지요. 참 그 마음속에 있는 그 한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벗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픔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그런 안타까운 소식을 우리가 접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근데 그러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범인을 잡게 되는 거예요. 이 사람을 잡아가지고 무기징역이라고 하는 무거운 중벌을 내리게 되는데, 감형이 되가지고 20년을 옥살이를 하게됩니다. 근데 이 분은 옥살이를 하면서도 "나는 사람을 죽인적이 없습니다." 윤모씨라고 하는 분인데 "나는 사람을 죽인 적이 없습니다." 항변을 하지만 아무도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20년형을 살고 나서 몇 해 전에 이분이 풀려나게 된거지요. 20년을 그저 뭐 무기징역에서 20년형으로 감형이 됐다가 20년을 다 살고 이제 만기 출소를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근데 만기출소를 하고 났는데 놀라운 일은 작년인가 진범이 잡혔다는 거예요. 진범이 잡혔는데 그동안 범행 현장에서 수거해온 그런 물품들, 거기에 있는 DNA와 이분의 DNA를 조사해보니 일치하더라는 것입니다. 진짜 범인이 잡혔다는 거예요. 그랬을 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그럼 20년 동안 무죄하면서 옥살이를 살았던 이 분의 억울함은 도대체 어디서 보상을 받고, 누가 이 분에게 보상을 해줄 수가 있겠느냐." 이제 이런거죠. 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끔찍한 일입니다. 만약에 나에게 이런 일이 닥쳤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겠느냐 라고 하는 거죠. 분해서 살 수가 없을거죠. 이런 일이 나에게 닥쳤다고 할 때 상상하기도 싫은 그런 상황이더라는 이야깁니다. 근데 세상 살면서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는 사람들이 의외로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분들의 삶을 보면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고 난 다음에 삶이 피폐해지고 망가지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근데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중에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분이 있다는 거예요. 그 분이 누구냐하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시라고 하는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당연한 죽음이 아니에요.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억울한 죽음이라는거죠. 매를 맞아야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이 무슨 잘못한 것이 있는냐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다라고 하는 것이죠. 오늘 본문 말씀 4절과 5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렇게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가만히 묵상해보면 참 가슴 아픈 이야기가 아닐 수가 없다라고 하는거죠. 우리 주변에 보면은 뜻하지 않은 재난과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보니까 외국에서 축구에 외국사람들 축구를 너무 좋아하는데 이 축구의 광팬들이 모여가지고 응원을 하는데 뭐 얼마나 열정적으로 응원을 하는지 모릅니다. 응원을 하는데 자기 자리에 앉아서 응원을 하면 좋은데, 그러지를 않고 올라가서는 안되는 곳에 올라가가지고 사람들이 응원을 하기 시작하니까, 군중 심리에 의해서 또 다른 사람도 거기에 올라가고 올라가고 이렇게 하면서 거기에 사람들이 많이 올라가게 된 거예요. 근데 많이 올라가서 거기서 뛰면서 응원을 하는데 거기는 사람이 올라가면 안되는 곳인데 올라간거거든요. 그 얼마 지나지 않아 가지고 그, 단이 무너져 내리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기도 하고 죽기도 했다는 그런 기사가 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랬을 때 사람들은 눈군가에게 자신들이 잘못해서 그런 사고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반응은 "누가 이렇게 이 자리를 약하게 만들었느냐." 라고 하는 거예요. 그 사람을 마치 범인 취급을 하면서 남탓을 하는 그런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다는거죠. 우린 살면서 어떤 면에 있어서는 내가 실수하는 그런 부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잘못한 것이 없고 누구 탓이다, 누구 때문이다."라고 얘기하면서 그 사람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우는 그런 일들도 우리가 보게 될 때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누가 원인을 제공한 범인이냐 거기에 관심이 많다는거죠. 그러고 그 사람이 누군지 이렇게 소개가 되면 그 다음에는 그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고, 또 손가락질하고 그러는 것을 볼 수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요즘 툭하면 청와대에 청원을 하는 그런 일들이 참 많이 있는 것 같아요. 국가적 차원의 분노가 전국민적인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런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근데 그 대체적으로 그 내용 청와대에 청원을 하는 그 내용을 보면 중벌에 처하라 뭐 그런얘기들이에요. 중벌에 처하라. 근데 사실 이런 상황에서 진짜로 잘못한 사람이 있다라고 하면 처벌을 받아야되겠지요. 근데 이 상황에서 우리가 세가지를 생각을 해봐야하는데 잘못하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소개가 돼가지고 마치 그사람이 진범인것처럼 처벌을 받게된다라고 할 때는 어떻게 할것이냐. 우리가 누구를 얘기를 할 때 확실한 사실을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거죠. 그리고 입장을 바꿔서 두번째로는 그 잘못한 사람들. 수많은 사람들이 중벌을 내리라고 그렇게 지적을 하는 그 사람이 바로 나라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 역시도 나를 보면서 중벌에 처해야된다라고 그렇게 얘기할 수 있겠는가. 그 부분을 우리가 크리스쳔으로서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세번째로 만약에 나 대신에 누군가 엉뚱한 사람이 잘못은 내가 했지만 엉뚱한 누군가가 범인인 것처럼 죄인인 것처럼 그렇게 잡혀서 내가 치뤄야 될 그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대신 겪는 사람이 있다라고 할 때 나는 도대체 어떻게 반응을 할 것인가. 이런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라고 하는것 입니다. 우리는 때로 예수님의 사랑 그 놀라운 사랑을 이야기 할 때 '그 사랑이 나를 위한 사랑이다. 나를 대신하여 고난당하신 그 예수님의 사랑이다.'라고 하는 그 사실을 우리가 망각하고 있을 때가 참 많이 있다는 거예요. 그럼에도 우리는 마치 나 자신은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고 그냥 바르게, 그렇게 잘  살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 조금만 실수를 하게 되면 그 사람을 중벌에 처해야된다고 난리를 치고 있는 그런 모습들. 그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때로 예수님,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지만 우리가 잘못해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셔야하는 그 예수님, 그래서 십자가를 지려고 하는 그 예수님을 향해서 우리는 마치 나와는 상관없고 나는 정의롭게 살고 나는 의롭게 살면서 예수님은 죽어 마땅하다는 식으로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라고 외쳤던 십자가에 처형해야 한다고 외쳤던 그 수많은 군중들의 모습. 그 모습이 어떻게 보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은 아닌가 우린 이 사순절의 절기에 다시 한 번 우리가 무엇을 그렇게 잘했는가, 우리가 그렇게 조금의 지탄이나 비판을 받을만한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는 그런 깨끗한 존재로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인가. '한번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돌아보는 그런 기회가 되어야 되지 않겠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니 목사님, 목사님은 그럼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냥 넘어가자는 말씀입니까?" 이렇게 얘기하는 분들도 없지 않아 계시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저도 분이 나죠, 화가 납니다. 어떨 때는 저 자신을 보면서 '내가 목사가 맞나.'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분노하고 있을 때도 있다라고 하는것입니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이 '우리 예수님은 안그러셨는데,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실까?' 이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누가 잘하고 잘 못하고 시시비비 따지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너 때문에 그랬다. 니가 원인을 제공했다." 그러면서 시시비비를 따져요. "나는 옳고 니가 잘못했다. 그러니 니가 십자가를 져야한다. 니가 처벌을 받아야한다. 책임져라." 이런 이야기들을 우리가 쉽게 할 때가 너무나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근데 우리 예수님은 그런 우리들을 바라보시면서 그 모든 상황과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보시는 우리 주님이시지요. 그러시면서 주님은 우리에게 시시비비를 따지시는 것이 아니라, 말 없이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를 대신 지신 분이 우리 예수님이시다 라고 하는 것을 오늘 우리는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 바보이시기 때문에? 아니면 세상 물정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는가. 아니라는 거지요. 오늘도 세상은 여전히 시시비비 따지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서로 책임을 가하려고 하고 서로 누구 때문이라 탓하기를 좋아하는 것이 세상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이런 세상을 향해서 오늘 성경은 뭐라고 증언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그 고난을 감수하신 것처럼 그래서 세상의 책임을 다 짊어지신 것처럼 너희도 예수님을 따르는 너희 제자들도 너희 크리스쳔들도 세상을 향해서 품어 안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을 겸손히 짊어질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목사로서 오늘날 정부가 교회에 취하는 조치에 대해서 억울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저에게 오늘 우리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억울할 것 없다." 이렇게 말씀하시는것 같아요. 그런 세상을 더 사랑하고 품어야한다. 그것이 예수님이 너희에게 보여주신 본이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아요. 그리고 오히려 이럴 때 일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알도록 너희는 더욱 더 섬기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 이 말씀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지금이야 말로 어떻게 보면 진짜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상으로 하여금 알게 하기에 좋은 때가 아닌가.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지요. 오늘 날 한국 교회는 어떻게 우리가 그동안 그렇게 입버릇처럼 되뇌이던 그 사랑을 세상을 향해서 어떻게 실천할것인가. '지금이야 말로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을 찾아가야 할 때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는 것 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주변에는 참 좋은 교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교회는 갔더니 교회 카페에서 성도들이 모여 가지고 주중에 내내 마스크를 만들더라구요. 뜨개질을 해가지고 마스크를 만드는 분도 있고 재봉틀을 가져다 놓고 마스크를 만들어서 그것을 또 주위 이웃들에게 나눠주는 그런 교회들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교회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교회에서 는 생활 필수품을 작은 박스에 꼭 필요한 물품들을 이렇게 넣어가지고 어려운 가정들을 찾아다니면서 그 선물 박스를 나눠주고 있는 그런 교회 모습들도 보았습니다. 또 대형 교회에서는 지금 너무 어려우니까 월세를 못내는 그런 작은 교회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교회를 대신해서 월세를 내줘야한다. 그래서 월세 내주는 그런 운동을 하는 그런 교회들의 모습도 보게 됩니다. 주변에 참 자랑스러운 교회들이 많이 있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요. 코로나19로 인한 이런 상황속에서 오늘 우리 일산광림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또 우리 일산광림교회 성도님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바라기는 섬김의 모습을 통해서 누구를 지탄하고 원망하기보다는 축복하고 섬기고 사랑하면서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이 칭찬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수 있는 우리 일산광림교회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두번째로 오늘 본문속에서 우리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것은 오해 속에서도 아무런 항변을 하지 않으신 예수님이시다 라고 하는거예요. 오해를 받으면서도 아무런 항변을 하지 아니하시고 그저 도수장으로 끌려가시는 그런 어린 양처럼 그렇게 잠잠히 말없이 끌려가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신 그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시다 라고 하는 것이지요. 사람이 살면서 참 참기 힘든 상황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오해를 받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다 너때문이야." 이런 얘기를 들으면 참 억울해서 밤잠을 자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살면서 감사한 것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저에게 입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물론 맛있는 것을 먹을 수도 있고 대화를 할 수도 있고 그래서도 감사하지만, 내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그런 기능이 바로 입이기 때문에 참 감사한 것 같아요. 저희 집에는 강아지가 한 마리 있고 고양이가 한 마리 있습니다. 

오래 전에 벌써 10여년이지난 그 어느 날, 길거리를 가다가 보니까 이 상점에 작은 강아지가 있는데 얼마나 이쁘던지 그것을 그냥 이성적으로 생각하기에 앞서서 너무 예쁘니까 딸과 더불어서 그것을 덜컥 사가지고 왔어요. 그래서 10여년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나이가 들었죠. 그렇게 강아지를 키우는 데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운다는 것이 처음에는 너무 사랑스럽지만 키우다 보면 참 힘들어요. 자식 키우는 것 만큼은 아니더라도 신경을 써야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음식도 제대로 줘야 하고 끙끙거리고 있으면 어디가 아픈가 싶기도 하고, 염려가 되고, 걱정이 되고, 한 마리 그 강아지 한 마리 키우는 것도 그렇게 쉽지가 않더라구요. 그런데 어느날 아들 녀석이 고양이 한 마리를 어디서 가지고 들어온 거예요. 그래서 강아지 한 마리,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게 됐습니다. 근데 이 고양이도 나이가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 나이 든 강아지 한 마리와 나이 든 고양이 한 마리를 이렇게 키우게 됐는데 가끔 가다가 보면 사고를 치는 거예요. 물컵이 쏟아져 있기도 하고, 또 이런저런 크고 작은 사건들을 치르게 되는 거예요. 제가 어느 날 해외 선교 여행을 가야 해서 가방에 짐을 싸느라고 펼쳐놓고 있는데 짐을 덮으려고 보는데 갑자기 이상한 냄새가 나서 보니까 거기다 어느 녀석인지는 모르겠지만 둘 중에 하나가 실례를 하고 간 거예요. 그래서 또 짐을 다 꺼내가지고 시간도 없는데 짐을 다시 싸고 그랬던 기억도 있습니다. 근데 어느날 또 실수를 한거예요. 강아지 아니면 고양이가 실수를 했는데 제가 아무래도 고양이가 한 것 같아 가지고 그녀석을 앞에다가 놓고 제가 나무랬어요. "니가 이런 나쁜짓을 하면 어떡하느냐." 그러고 야단을 치고 그랬더니 이 고양이가 뭐라고 항변을 하더라구요.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항변을 하는데 "야옹." 그러더라구요. 제가 그 얘기를 알아들을 수가 없는 거예요. 속으로 그것을 보면서 제가 그 고양이에게 뭐라고 했냐면 "니가 억울하냐? 니가 그런게 아니라 저 강아지가 그랬는데, 너 아니라고 지금 항변을 하는거냐?"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너도 참 할 말이 많겠지만 그걸 제대로 표현을 못하니 너도 참 답답하겠다.' 그러고 나서 생각하니까 우리는 이 항변할 수 있는 이  입이 있다라고 하는게 얼마나 감사한지요. 누가 뭐라고 하면 "내가 안 그랬어요." 하며 자초지종을 따질 수 있는 이 입이 있다라고 하는 것이 참 너무 감사한 일이더라는 것입니다. 

근데 누구나 그렇듯이 이  말을 참는다라고 하는 것은 참 힘든 일인 것 같습니다. 한 동네에 작은 호수가 있었는데 그 호수에는 자라가 많이 살았어요. 근데 그 자라들이 어느 날인가 가뭄이 들어가지고 호수에 물이 점점 줄어드는 거예요. 호수에 물이 점점 줄어드니까 이제 자라들도 말라서 죽게 되고, 물을 못 먹어서 죽게되고, 그러니까 지도자 급의 자라 한 마리가 이 까마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겁니다. "까마귀들아, 너희들은 날 수 있으니까 한 번 좀 이렇게 세상을 좀 날아다니다가 우리가 살 만한 호수가 발견이 되면 좀 알려달라." 그랬더니 이 까마귀들이 날아다니면서 발견을 한 거예요. 와 가지고 그 자라한테 하는 얘기가 "이 산만 넘어가면 아주 넓은 호수가 있는데 거기에는 아직 물이 풍족하게 있으니까 거기에 가면 살 수가 있겠다. 그러면서 이제 내가 너희들을 옮겨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겠다."고 하니까 이 지도자 자라가 얘기하기를 "너희 두 마리가 막대기를 서로 물고 날아라. 그러면 우리가 중간을 물고 가면 우리를 그 호수에 떨어뜨려주면 우리가 살 것 아니냐." 아주 기가막힌 아이디어를 낸 거지요. 그래서 이 까마귀 두 마리가 거기있는 자라들을 하나씩 하나씩 날라서 옮기기를 시작을 하는 겁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 지도자 자라를 이제 옮겨야 될 때가 되어가지고 옮기는데, 그렇게 자기는 이렇게 물고 그 나뭇가지를 물고, 그렇게 이제 공중을 날라가는 중이지요. 근데 밑에 있던 다른 동물들이 그걸 보면서 "야 참 기가막힌 아이디어다. 도대체 저 아이디어를 누가 생각을 했을까?" 그러고 막 자기들이 웅성거리는 그 소리를 이 지도자 자라가 듣게 된거지요. 거기서 말을 하면 안되는데 거기서 말이 하고 싶어 가지고 "그 아이디어는 내가 낸겁니다~" 그러고 자기 자랑을 하다가 그 자라는 떨어져서 죽었다는 이야깁니다. 이 이야기가 웃자고 하는 이야기지만 사실 그 이야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뭐겠습니까? 이 이야기 속에 담긴 교훈은 사람은 누구나 내 목숨을 걸고라도 자기를 자랑하고 싶은 그런 이야기가 있으면 자랑을 하는 존재라고 하는 그런 이야깁니다. 사람은 늘 뭔가 자기를 자랑하고 싶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 항변을 하고싶고 그것이 인간의 모습이라는 이야기지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내 자랑을 하는 것을 참는 것이 어렵겠습니까. 내가 오해를 받아서 항변을 하는 것이 어렵겠습니까. 둘 다 어려워요. 둘 다 어렵지만  더 어려운 것이 있다고 하면 내가 자랑하고 싶은 것을 참는 것은 오히려 쉽습니다.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한거에 대해서는 반드시 항변을 해야 해요. 왜냐면 내가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지요. 자랑이야 참으면 그만이지만 오해가 생겨서 불이익 당하는거에 대해서 항변을 하는 것, 이거는 참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항변을 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본인에게 불이익이 생기는 그런 가운데에도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지 않는 그런 경우들도 있다는 거예요. 내가 불이익을 당하는데도 나를 항변하지 않고 자기를 변호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래서 그런 경우가 어떤 경우인가 봤더니 사랑하는 경우에는 자기가 오해를 받더라도 변호를 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부모님의 사랑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예전에 뉴스에 어떤 기사가 났냐하면 자녀가 살기가 너무 힘이 드니까 부모를 저 먼 다른 도시에다가 갖다 버린거예요. 거기서 어떻게 사시던지 뭐 어디 양로원에서 구해주시면 거기서 사시던지 이제 그렇게 사시라고 버리고 가는 그런 기사가 뉴스에 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근데 그 경찰서에서 "자녀가 있느냐?" 묻는데 그 분은 절대로 자녀의 이야기를 얘기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뻔히 알면서도 '내가 혹시라도 얘기하는 걸 통해서 자녀가 불이익을 당하면 어떡하나.' 그런 것 때문에 자녀의 이야기를 하지를 않는 그런 부모를 안타까워 하면서 뉴스에 소개했던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자신의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서 항변을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모습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7절 말씀에 보면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며,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를 방어하는 그런 방어 기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경우들도 많이 있다는 거지요. 사회적 실험  카메라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물컵을 놓고, 꽃병을 놓고, 누군가가 그것을 떨어뜨려서 깨뜨리는 거예요. 깨뜨리고 난 다음에 전혀 이 상황을 모르는 한 사람, 그 사람을 다 같이 쳐다보는 거예요. 그러면 이 사람의 반응이 어떻게 나올 것 인가. 자기가 잘못한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떤 반응이 나올것인가 그것을 보는 반응이었습니다. 이런 반응에 대해서 한번 그 실험을 해봤느데 열이면 열 사람이 다 그 많은 사람들이 꽃병을 깬 사람으로 지목을 할 때 자기는 아니라고 아주 적극적으로 이 손사래를 치면서 자기가 아니라고 자기를 변호하는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근데 오늘 우리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다는거죠. 우리를 불쌍하게 여기셨고 긍휼히 여기셨고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7절말씀. [그가 곤욕을 당하려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렇게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당하심. 그것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향한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사랑인가.

세상은 서로를 헐뜯고 상처주고 싸우고 이것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근데 우리 예수님은 그런 세상을 향해서 오히려 책임지고, 그러고 보듬어 안으시고, 그러고 대신 죽으시는 자리에까지 나아가셨던 것이 오늘 우리 예수님의 모습이라는 거죠. 이 예수님은 오늘 어찌보면 교회가 세상 속에서 오해를 받고 억울한 일을 당한는 것 처럼 여겨지는, 그래서 마음에 분이 가득한, 화가 나기도 하고,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여 하는 우리들을 향해서 오늘 예수님 이 사순절에 주시는 교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우리 예수님, 교회를 향해서 "너희도 세상을 품어라. 사랑해라 섬겨라."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은 아닌가. '억울하다고 항변하기 보다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세상이 잘 되기를, 바르게 가기를 축복하며 기도해야 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일산광림교회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떨어져서 각자의 자리에서 예배하면서 사순절을 지나게 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 있을까? 특별히 참 이 사순절이 시작하면서부터 우리가 대예배를 드릴 수가 없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지금 이렇게 사순절을 우리가 보내는 가운데에 있습니다. 다음주면 종려 주일이고 그 다음주면 이제 부활 주일이 됩니다. '이 사순절에 이런 고난 속에서 이 고난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어찌해야 될 것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명하고 계시는가.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행하셨을까.' 이것을 우리가 다시 한 번 묵상하면서 지나는 사순절 절기가 되야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 참으시고, 항변하지 않으시고, 고난 당하시고, 죽음의 자리에까지 나아가신 우리 예수님의 그 모습을 통해서 오늘 우리도 더욱더 성숙의 자리,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세상을 비난하고 원망하기보다 예수님의 그 큰 사랑, '주님은 어떻게 이 고난을 다 참으셨습니까.' 그것을 우리가 깊이 묵상하면서 오늘 우리도 더욱 더 성숙의 자리에까지 나아가고 세상의 빛과 소금, 또 기 본이 되는 그런 우리 교회와 성도님들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려고 힘쓰고 애쓸 때 우리 하나님, 우리에게 힘 주시고 능력 주셔서 능히 넉넉히 그렇게 세상을 이기는 자로 살아가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번 한 주간도 있는 자리에서 말 없이 섬기며, 또 사랑하며 기도하며, 그렇게 세상을 이기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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