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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십자가의 길로 들어가신 예수님  
 
십자가의 길로 들어가신 예수님
설교날짜 2020.4.5
설교자 박동찬 목사
본문말씀 요 12 : 12 - 16
 

일산광림교회 4월 5일 영상예배 from 일산광림교회 on Vimeo.


200405 박동찬목사님


아멘, 할렐루야! 귀한 찬양에 감사드립니다. 큰 은혜 받으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이렇게 실시간으로 영상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 성도님들 계신 그곳에 우리 하나님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 가족들과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는 줄 압니다. 이 시간에 우리 옆에 있는 우리 가족들과 함께 하나님 오늘 이곳에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서로 인사하시면 좋겠습니다. 인사하시겠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 입니다. 이제 오늘이 종려주일이라 함은 다음 주일이 부활주일이 되겠습니다. 우리 부활주일에는 다 모여서 함께 예배드리기를 원하지만 지금 사회에서는 더 심각하게 이제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해야 한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어서 다음 주에 함께 모여서 예배 드리는 것 조차 쉬울 것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곳에서 예배드리든 하나님 그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종려주일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제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게 될 때에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여겼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메시아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오해를 했을 뿐이지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했는데 그 당시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기대하던 메시아의 모습은 이제 다윗과 같이 큰 군사력과 능력을 가지고 와서 자신들을 괴롭히던 로마의 군인들을 다 쫓아내고 그 다윗의 그 위대한 그 나라를 형성했던 것 처럼 이제 다시 나라를 잃고 주권을 빼앗긴 이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 시켜주실 그분을 메시아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이야깁니다. 근데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일으키고 죽은 자도 살리시고 병든 자를 고치고 또 오병이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가지고 오천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를 남기는 그런 기적이 일어나게 될 때 ‘저분이라고 하면 충분히 하늘의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로마의 군인들을 쫓아낼 수가 있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된거죠. 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다는 얘기를 듣게 되니 ‘이제 드디어 메시아가 일하실 때가 되었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수 많은 유대인들이 모여와서 예루살렘에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그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것이 바로 메시아를 의미하는거죠.) 찬송하리로다.” 하면서 그 예수님을 연호하고 환영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 그래서 종려주일이라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근데 요번 한 주간동안 사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결국 붙잡혀서 매를 맞게 되고 채찍질을 당하게 되고 결국은 십자가에 죽게 되는거죠. 고난을 당하는 주간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주간을 우리는 고난주간이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종려주일. 이제 내일부터 시작되는 고난주간입니다. 이번 한 주간 동안은 우리가 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고난 당하심과 채찍에 맞으신 그 모든 것들을 가만히 묵상하시면서 우리가 더 주님의 은혜의 자리에 한걸음씩 더 나아가는 그런 복된 은혜의 한 주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성경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은 작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합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가장 크고 화려한 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그곳에 보니 예수님께서 입성을 하는데 사람들이 모여서 환호를 하고 열광하며 반기니 얼핏 보면 대단히 예수님께서 성공해서 마치 고향에 금의환향해서 들어가는 그런 사람의 모습처럼 보일수도 있을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바라보는 어떤 사람들은 ‘부럽다. 나도 예수님처럼 저렇게 성공해야지, 사람들의 환영을 받아야지.’ 하는 마음을 갖는 사람들도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예수님은 이내 붙잡혀 가게 되고 사람들의 조롱과 모욕과 채찍을 맞는 고난을 당하다가 십자가에서 처참히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그 당시에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런 것을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을 부러워하고 예수님처럼 사람들의 환영을 받는 존재로 살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을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반면 예수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렇게 지금은 당신을 환영하고 맞이하는 그런 사람들이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저들이 이내 마음이 변하여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쳐대는 그런 성난 폭도들로 변화된다는 것을 예수님은 아셨다는 것입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환영한다고 해서 예수님의 마음이 기쁘지는 않으셨을 거라는 거죠. 오히려 씁쓸한 마음을 갖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 그 길, 우리는 어쩌면 화려한 도시, 예를들면 뉴욕이나 파리같은 곳을 상상해볼 수 있겠습니다만은 그러나 그 길이 환경이 어떠함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마음에는 죽음의 길이지요.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가야 하는 그 길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그 착잡한 심정을 오늘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알 수가 있다 라고 하는것입니다. 힘든 여정. 어찌 보면 가기 싫은 여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예수님은 그 길을 회피하신 것이 아니라 담대하게 그 길을 향해서 나아가셨던 우리 주님의 모습을 볼수가 있습니다. 저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그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길을 따르겠노라 결단하고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무엇인가 세가지 말씀을 잠시 전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는 욕망을 따라 살지 않고 사명을 감당하며 사실 예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자기에게 돈이 있거나 재능이 있거나 능력이 있거나 학식이 있거나 남들이 갖지 못한 무엇이 있다라고 하면 그것을 가지고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고 더 성공하고 더 높아지고 지위를 얻기 위해서 힘쓰고 애쓰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또 그런 부분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기도할 때도 있지요. “하나님, 남들이 가지지 못한 이런것을 나에게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이런걸 통해서 내가 한번 잘 살아 보겠습니다. 성공해서 지도자가 되겠습니다. 나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시고 은사를 허락해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경우는 자신의 꿈을 이루고 욕망을 이루고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 할 만한 그런 것들을 가지기 위해서 힘쓰고 애쓰는 그런 사람들을 볼 수가 있다는 거예요. 맞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존재이지요. 기승전결을 이야기할 때 기승전 ‘결’ 대신에 결국은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거예요. 기승전 ‘나’가 되는 것이지요. ‘어떤 상황이 있던지 어떤 일이 펼쳐지던지 결국은 내가 잘되어야 한다. 내 소원이 이뤄져야한다. 내가 성공해야한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향이 아니겠는가 생각해볼 수가 있다는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이 이렇게 살고 있을 뿐이지요. 하지만 가끔 보면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대의를 위해, 더 가치있는 일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나중에 위인이라고 부릅니다. “저분은 참 위인입니다. 위대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위인이라고 부르고 우리 어렸을 때 부터 위인전을 읽어요. 위인전을 읽으며 ‘나도 이렇게 위인들처럼 훌륭한 인생을 살아야겠다. 이들을 본받고싶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죠. 하지만 막상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위인처럼 그렇게 위대한 삶을 가치 있는 삶을 살겠노라 결단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고, 결국에는 어느 순간에 나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 인생을 살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될 때 나 자신을 위해서 살고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남보다 이 생존경쟁의 세상에서 지지 않고 살아야겠다면서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때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가? 위인들의 삶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삶을 살겠다는 그 결단에서부터 위인의 삶과 범인의 삶이 구분이 되어진다 라고 하는 이야깁니다. 때로는 더 가치있는 일을 위해서 나의 성공과 나의 욕망을 충족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 나에게 주어져 있는 한 번 밖에 없는 이 시간 이  인생을 나는 누구보다도 가치 있게 그렇게 살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추구하며 사는 그런 마음이 있어야 된다는 거죠. 그러려고 하면 결국 우리가 두가지를 다 가질수가 없는거예요. 나를 위하고 내가 가지고 싶고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그것을 나도 똑같이 원하며 위인들의 삶, 위대한 삶, 가치있는 삶을 살아갈 수는 없다는 거죠. ‘내 꿈을 이루는 것, 그것이 나쁜것이기 때문에 내려놔라.’가 아니라 그것보다 ‘더 큰 가치가 있는 것을 추구하고 싶습니다. 그런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라고 하는 결단에서부터 우리의 삶은 뭔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라고 하는 이야깁니다. 근데 그런 인생을 살아가려고 할 때 그래서 꼭 넘어야 하는 큰 산이 있는데 그 큰 산이 뭐냐하면 바로 ‘자아’라는 것입니다. 나를 넘어서지 않고는 내 욕심과 욕망을 넘어서지 않고는 우리는 그런 위인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더 가치 있고 보람 있는 더 거룩한 존귀한 그런 인생을 우리는 살아갈 수가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의 소원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죠. 


예수님은 그러셨다는 거예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일이 결국 나 자신에게는 ‘고통이요 죽음이다.’라고 하는 것을 아셨다는 거예요. 어찌보면 그 길을 피하고 싶죠. 나 자신을 희생해서 ‘내가 왜 저 사람들을 위해서 대신 죽어야 하는가?’ 이런 마음을 가질 수도 있다는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 마음을 갖죠.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죽음으로 인하여 저들이 살 수 있다라고 하면 내가 힘들고 무섭고 두려운 길이지만 나는 그길을 가겠다.’는 결단. 자기를 넘어서는 결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때에 두려움의 길이지만 죽음의 길이지만 꿋꿋이 예루살렘으로 두 발을 굳게 땅에 내디디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그 십자가의 길을 갈 수가 있게 된다는 이야깁니다. 저 같았으면 어땠을까요? 한번 가만히 생각을 해보게 될 때도 있었어요. ‘나 같으면 차일피일 미루거나 결국에 가서는 싫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내시옵소서.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러지 않겠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지요. 사람은 다 누구나 자기를 위해서 살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나 자신을 내려놓고 누군가를 위해 나를 희생한다는 것.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이야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길이 고난의 길, 죽음의 길. 세상적으로 보면 너무나도 허망한 죽음을 당해야 하는 그 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길을 가기로 결정하셨다는 거예요. 그러고 그 길을 가셨다는 것입니다. 왜그랬는가? 그것이 당신의 사명이라고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거죠. 예수님은 당신의 소원, 당신의 욕망을 쫓아 사신 분이 아니라 사명을 쫓아 사신 분이기 때문에 그 길을 걸어갈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 먹고싶은거, 쉬고싶은것, 육체의 본능을 따라가다 보면 결코 남을 위해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의지와 이성을 가지고 ‘내가 이런 삶을 살겠다.’ 결단하고 그러기 때문에 또다른 어떤 육체적인 유혹이 온다 할지라도 내가 그것을 끊어버리고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가치있는 삶을 살겠습니다.’ 결단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그 사명의 길을 걸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내 삶 속에 그런 결단이 있느냐, ‘내 욕심을 쫓아 살기보다 내가 편안함을 추구하며 살기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가치 있는 삶,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그 삶을 살겠다.’ 라고 결단하고 걸어가는 나아가는 그런 결단 그런 의지가 우리에게 있지 않고는 우리는 그저 세상을 사는 수 많은 사람들과 똑같은 인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라고 하는 것을 오늘 우리는 알아야 한다는 이야깁니다. 


사명이라고 하는 것은 ‘누군가로부터 어떤 일을 하도록 위임을 받은 것’을 사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사명의 특징은 거룩하다는 거예요.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나쁜 사람이 나쁜 일을 누군가에게 시키면서 “그것이 너의 사명이다.” 하는 사명은 없어요. 나쁜 일을 하는 사명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명의 기본은 가치 있고 선한 일이라는 거예요. 누군가가 국가로부터 나라를 살리는 위대한 사명을 받았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가문의 영광이죠. ‘그런 귀한 일을 내가 감당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귀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힘들지만 자랑스러운 일인거죠. 그런데 국가로부터 사명을 부여받는 것보다 더 귀한 사명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는 사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에게 어떤 사명이 주어졌다. 그 얘기는 사명은 아무에게나 맡기는 것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고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그 사명을 맡기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오늘 나를 선택하셔서 나에게 사명을 맡기셨다는 것은 내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 부터 사명을 부여받는 것보다 더 위대하고 귀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하는 것을 오늘 우리는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부여받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사명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의 죄 짐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거예요.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살 길을 열어주시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가지고 온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저런 사명이 있지만 예수님이 부여받으신 사명보다 더 위대하고 가치 있는 사명은 없습니다. 이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나의 유익이나 나의 편안함이나 나의 욕심이나 이런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는거죠. 예수님은 누가 뭐라고 한다 할지라도 꿋꿋이 어린 나귀를 타고 가야 할 길을 가고자 담대히 나아가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진정한 사명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더라는 이야깁니다. 


얼마전에 1917이라는 영화가 나왔습니다.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홥니다. 1차 세계대전때 영국과 독일이 전쟁을 하게 되는거죠. 영국이 수세에 몰리다 반격을 시작해 공격하게 되는데 갑자기 전쟁중에 잠깐 짬을 내서 나무 그늘에 앉아서 쉬고 있는 한 병사에게 사명이 떨어지는 거예요. 그건 뭐냐면 한 15km 떨어진 곳에 영국 군대가 있는데 이 군대가 내일 아침에 독일군을 공격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독일군의 계략이다. 공격하게 되면 1600명의 군사가 다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곳에 가서 내일 아침에 공격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리라는 거예요. 처음에는 이 주인공이 자신이 선발된 것에 대해서 굉장히 불만을 하는 거예요. 많은 사람 중 왜 하필 나입니까? 15km를 가야 하는데 그 안에 수많은 독일군과 적들이 있기 때문에 제대로 갈 수도 없어요. 그 상황 속에서 가다가 잘못되거나 죽을수도 있는 이 위험 속에 왜 나를 선택했습니까? 두 명이 선발되어 가게 되는데 중간에 결국 한 병사는 죽게 되는 거예요. 적에 의해 동료가 죽고 혼자 남았습니다. 혼자 남아 적진을 뚫고 내일 아침에 공격을 해서는 안된다는 얘기를 하러 15km를 가려고 하면 쉼 없이 가야 하는 거예요. 가다가 중간에 총을 맞고 기절하기도 합니다. 몸은 다 지치고, 그런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나아가는 그 모습입니다. 폭포에 떨어지기도 하고 죽음의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고 결국에는 영국군 진지에 도착을 합니다. “전진, 앞으로!” 하며 공격을 시작하려 하는데 이 청년이 총알이 빗발치는 그곳을 뛰어가며 멈추라고 외치는 거예요. “지금 이렇게 공격 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장교에게 가서 “지금 이것이 계략이니 당장 공격을 멈춰야 한다.” 이 소식을 알리게 되는거죠. 그래서 결국 1600명의 영국군의 생명을 살리게 되는 이야깁니다. 죽을 고생을 해서 그 적진을 향해서 사실을 알렸는데 그에게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저 “수고했네.” 한마디의 말이에요. “배고프면 식당에 가서 먹을것을 먹어라. 다친곳이 있으면 의료병을 찾아가 치료를 받으라.” 는 말이 전부였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참 억울한 일이기도 합니다. “아니 나 덕분에 당신들 1600명이 살았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 대우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같으면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 청년 병사는 보고를 마치고 난 다음에 다시 넓은 들판을 빠져나와 그 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나무 아래에서 쉬면서 이렇게 미소를 짓는 것으로 영화가 끝이 납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바로 그 장면이었어요. ‘억울하지도 않은가? 좀 뭔가 좀 나에게 보상이라도 하고 훈장이라도 줘야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제가 그것을 보면서 아 이 사명이라고 하는것, 자기의 목숨을 걸고, 가기 싫죠. 중간에 포기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곳을 끝까지 달려가는 그 병사의 모습속에서 사명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특별히 우리가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과 저 병사의 모습이 너무나도 흡사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1차세계대전, 1917년에 있었던 이야기를 가지고 그렇게 만든 영화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생명을 살리는 일을 위해서 이런사명감을 가지고 살고 있나, 우리 자신에 대해서 한번 돌아봐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훈장이라고 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봤어요. 이 사명을 완수한 군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훈장, 당신의 생명을 걸고 그렇게 들어가서 그래서 저들을 다 살렸는데 만약에 내가 장군이라고 하면 당신이 지금 원하는 훈장 어떤 훈장을 받기를 원하냐고 했을 때 나 같으면 뭘 원할까? 아마 “큰 훈장 열 개는 주세요. 이거는 훈장 열개 받아야 할 몫입니다. 이건 열 개로도 모자랍니다 백 개를 주십시오.” 그럴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 병사에게 있어서는 그런 것이 아무 의미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 진정한 가치. 1600명의 생명을 살린 그것이야 말로 이 병사에게 있어서는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가장 귀한 훈장이었기 때문이더라는 이야깁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의 욕망, 세상적인 쾌락, 성공을 얻기 위한 욕심, 욕망, 이런것들이 우리의 눈을 가려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임하신 이 사명의 가치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명을 따라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을 바라볼 때 어리석은 사람인 것 처럼 그렇게 생각 할 때도 많이 있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죽음의 길을 달려가신 분이십니다. 옆에 있는 누가 오해를 하거나 모욕적인 언사를 하거나 또 침을 뱉고 그런다 할지라도 또 때로는 사랑하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신하고 다 도망을 간다 할지라도. 또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는데 자신들을 대신해서 죽는 그 예수님을 향해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들의 소리. 예수님이 보실때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이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외침이 어떠하든 그것과 상과없이 예수님께서는 당당히 당신이 가야 할 십자가의 길을 가는거예요. 내가 지금 이런 모욕과 수치와 오해같은 어려운 일을 당하고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내가 저들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고 죽음으로 인해서 저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된다는 거죠. 예수님은 그 한가지 사명을 바라보면서 걸어가신 분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죽음을 죽으신분이 우리 예수님이시더라는 거지요. 이번 고난주간에 우리가 이 예수님의 사명과 또 그래서 나를 대신해서 당하신 그 고난의 크기와 무게를 다시한번 돌아볼 수 있는 깊이 묵상하며 주님께 감사를 올려드릴수있는 오늘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요즘에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보면서 참 안타까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반면에 감사한 일도 있어요. 그것은 뭐냐면 우리 주변에는 이 자신의 욕심이나 욕망을 위해 사는 사람들도 많지만, 우리 주변에는 사명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요즘에 미국 뉴욕 그 화려한 맨해튼과 그 뉴욕주가 너무나도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하급수적으로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진자가 늘어나는 가운데 있어요. 그러다 보니 뉴욕의 주지사가 외칩니다. “당장 뉴욕으로 와서 좀 도와달라, 지금 너무 우리는 위험 가운데에 있다.” 라고 외치니까 미국 전역에서 전직 의료 관계자들 8만 명이 한걸음에 그들을 돕겠다고 달려오더라는 것입니다. 참 그런 모습을 볼 때 위험한 곳이지요. 나도 잘못하다가는 죽을 수 있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달려가는 그들의 모습. 우리 대구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구가 여러가지로 어려워졌을 때 수 많은 의료진들이 돕겠다며 팔을 걷어붙이고 찾아가는 사람들, 그곳에 마스크를 보내는 사람들, 또 그곳에 작게나마 도움의 손길이 되고자 달려가는 그런 수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될 때 참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요즘에 대구를 간다는 것은 참 너무나도 불편한 일입니다. 저도 병원을 한번 갔는데 첫번째 질문이 “대구 다녀오신적 있습니까?” 였어요. 어떻게 보면 내가 대구를 다녀왔다고 하면 진료도 받을 수 없는 그런 상황인 것 같아요. ‘대구를 갔다온다’라고 하는 것은 불편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어려움 가운데 있을때 어려움에 처한 그들을 내팽겨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을 돕고자 달려가는 이들. 얼마나 감사한지요. 참 멋진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중에는 그리스도인들도 있고 주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도 많이 있더라는 거예요. 그럼에도 이들은 ‘인생을 가치 있게 산다.’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더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자신을 희생하는 그들을 보게 될 때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겠노라 결단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이라고 하면 우리는 세상의 그 누구보다 더 사명을 가지고 사는 자가 되어 져야 한다는 이야깁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은 어떠한가, 오늘 우리 한사람 한사람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다 사명을 가진 존재인줄로 믿습니다.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어요. 가정에서 우리가 지켜야 될,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고. 직장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고 교회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고 선교지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가 있는 자리에서 내가 감당해야 될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 세상에서 찾지 말고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며 우리는 내가 있는 자리에서 어떻게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것인지 내 욕심을 쫓아서 내 유익을 쫓아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돼야 될 줄로 믿습니다. 때로 그렇게 살려고 하다 보면 내 욕심과 욕망을 내려 놓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내가 다소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가치 있는 일이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적인 손익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우리는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 자리에 달려나갈 수 있는 그런 우리 복된 일산광림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본받아야 할 두 번째는 예수님의 용기입니다. 예수님의 용기를 본받아야 한다는 거예요.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사명을 다하시기 위해 담담히 그 길로 걸어가신 예수님의 그 모습은 한마디로 용기라.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용기와 만용을 구분해야 돼요. 만용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 과시이지요. 자기 잘난척 입니다. 쓸데없이 객기를 부리는 것을 만용이라고 얘기합니다. 할 필요가 없지만 나를 과시해보이고 싶은 것, 그것이 바로 만용이라는 것입니다. 힘이 없지만 힘이 있는 척 하고 그렇게 나서는 것, 이런 것들을 우리는 만용이라고 얘기하는 것이지요. 반면에 용기라고 하는것은 무엇입니까? 두렵지만 내가 감당 해야 될 책임이기 때문에 나아가는 것, 이것을 우리는 용기라고 하는 거예요. ‘나는 두려워요. 나는 정말 이것을 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이것이 옳은 일이고 내가 가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회피하지 아니하고 나는 그 길을 가겠습니다.’ 그리고 담대히 문제 앞에 직면해 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용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섭지 않은 것이 아니라 무섭지만 해야 할 일이기에 하는 것이 용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예루살렘으로 나아가신 그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우리에게 용기를 보여주신 것이라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는 이야깁니다. 이 진정한 용기를 위해 우리가 두 가지를 넘어서야 합니다. 


첫째는 두려운 환경입니다. 둘째는 사람들의 시선입니다

이 두 가지를 넘어서야 우리는 용기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두려운 환경,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그 환경이 안 두려운, 무섭지 않은 환경이었느냐? 그거 아니었다는 거예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두려운 환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합니까? “아버지여, 할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서 떨어지기까지 간절히 어떻게 해서든지 피하고 싶었던 거예요. 왜? 그만큼 무섭고 두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조차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렇게 기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끝까지 그 두려움의 자리였지만 피한 것이 아니라 결국 그 자리로 나아가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가셨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 ‘비아 돌로로사’라고 하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걸으셨던 그 코스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 많은 사람들이 이 사순절 절기가 되면 이스라엘에 가서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그 길을 따라 걸으면서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그런 일들을 행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그 길을 지나가다 보면 예수님이 쓰러졌던 장소에 표시를 해놨어요. 이곳에서도 쓰러지셨고, 이곳에서도 쓰러지셨고, 그래서 그런 것을 형상화 해가지고 동판으로 붙여놓은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이미 많은 매를 맞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는 힘이 없었어요. 쓰러지고 또 쓰러지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당신이 가야 할 일이기 때문에 있는 힘을 다해서 다시 일어나는 거예요. 십자가를 지고 내가 가야할 길을 끝까지 걸어 올라가시는 그 예수님의 모습. 그리고 결국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 말씀하신 그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될 때 예수님께도 그 십자가의 길은 두려운 길이었지만 그 두려운 환경을 극복해 가신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용기라,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용기의 모습을 볼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하나 진정한 용기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시선을 넘어서야 한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환영했던 그 수많은 사람들. 아마 별 얘기를 다 했을것 같아요. “예수님, 우리는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예수님 이제 오셔서 우리는 너무 기쁩니다. 평생에 내 소원이 이루어 졌습니다.” 이런 저런 소리 다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 예수님에게 기대했던 바는 다른 것이었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향해서 ‘자신들의 소원이 이루어 질 수 있다. 그동안 우리가 학수고대 했던 일들이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내 꿈이 이루어 질 수가 있다.’ 그것을 기대했다는 이야깁니다. 근데 이내 예수님께서는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게 되니 폭도로 변해서 “십자가에 못박아서 죽여버리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라!” 라고 외쳤던 성난 군중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찾아와서 간절히 소원을 얘기하면 나에게 능력이 없어도 마치 능력이 있는 것 처럼 어떻게 해서든지 저분의 소원을 이뤄주고 싶은 것이 사람들의 인지상정이라는 것입니다. 보통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라는 거죠. 근데 누군가가 나에게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고 나를 사랑한다고 얘기하고 나를 위해서 죽을 수도 있다고 얘기하는 그 사람을 외면하면서 ‘그건 너희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고 나는 내가 가야 할 길이 있다. 그래서 나는 그 길을 가야 한다. 그리고 그 길을 걸어간다.’ 라고 할 때 그것으로 인해서 받게 되는 눈총과 그들의 냉소와 그들의 조롱과 그들의 핍박과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다 견뎌낼 수가 있겠습니까. 근데 예수님은 당신을 향한 수 많은 사람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너희가 몰라서 하는 얘기다. 그것이 중요한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가야 할 길이 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들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시는 거죠. 세상 사람들의 그런 시선을 이겼던, 세상 사람들의 편견을 넘어섰던 우리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깨뜨리신 분이 아니라 끝까지 당신이 가야 할 길을 걸어가셨던 예수님. 그래서 저는 그 예수님이 십자가의 모습을 통해서 진정한 용기, 진정한 크리스천의 모습이 어떠해야 되는지를 배우게 되더라는 이야깁니다. 


이런 우리 예수님을 가만히 묵상하게 될 때 우리 예수님 얼마나 멋지신 분인지 몰라요. ‘소신있고 확신있게 살아간다.’라고 하는 것. 인생을 멋지게 사는 비결이라 믿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인생을 사셨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제자들, 연약해 보였던 제자들이지만 성령이 임하게 되니 예수님의 제자들도 소신과 확신 가운데에 자기들이 가야 할 길을 끝까지 걸어 갔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그 길을 걸어갔어요. 인류 역사를 바라볼 때 수많은 주님께서 택하신 주의 종들이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 수많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노라” 결단했던 성도들이 그 길을 걸어갔더라는 이야깁니다. 저는 오늘 우리 성도님들이 주님이 인정하시는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런점에서 세번째로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한다.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그 길, ‘아 그렇게 가셨구나.’ 깨닫는 것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우리도 예수님 보여주신 그 길을 가겠습니다. 그 길을 끝까지 가겠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온다 할지라도 그 길을 가겠습니다. 그 길이 나에게 손해가 되는 길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그 길을 가겠습니다.” 이런 결단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사명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 그것을 아는 사람만이 그렇게 갈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에이 목사님,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 가신 그 길을 갑니까?” 만약 이렇게 생각하신다라고 하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가르치시고 본을 보이셨던 것은 깨달으라고 그런 본을 보이셨던 것이 아닙니다. “너희도 너희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배운 것에서 끝나는 것은 바른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깨달음을 얻은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이제 깨달았으면 깨닫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예수님 가신 그 길을 따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우리 일산광림교회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에게 주는 복음이 크다는 거예요. 오늘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 19절 말씀에 보니까 [많은 무리가 따랐다.] 이렇게 기록이 돼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다는 거예요. 왜 따랐을까요?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동기가 잘못됐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통해서 이제 우리가 기대한 바가 이뤄질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분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신이 나겠습니까? 근데 오늘 우리의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수님을 따랐던 유대인과 같은 마음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합니다. 나는 예수님 가신 그 길을 가기 원합니다. 예수님과 항상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라고 외치는 우리들의 외침 속에 담겨있는 속 뜻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 기도하면 어려운 문제를 이길 수가 있고 예수님께 기도하고 예수님과 동행하다 보면 좋은 일도 많다고 하고 축복도 넘친다고 하고 그러니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한다고 하면, 그런 우리의 모습은 2000년 전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그분을 향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외치며 따라갔던 그 유대 백성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을 오늘 우리는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따름이 아니라, 정말 나도 주님처럼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그 길이 어려운 길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가겠습니다 하는 그런 따름이 되어야 된다는 이야깁니다. 

또 반면에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던 무리들도 있었어요. 바로 바리새인들이지요. 19절 말씀에 보면 바리새인들, 수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르는 걸 보면서 얘기합니다.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라고 얘기합니다. “쓸데없는 일들을 저렇게 하는구나.” 그러면서 학식이 있는 자신들, 지식이 있고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자신들은 그 모든 일들을 쓸데없는 일들로 치부해버리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식이 많아서, 세상 지위가 있어서 망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이야깁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특별히 과학자나 지식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이런 소리를 많이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거 의미 없다는 거예요. 그런다고 해서 달라질게 없다는 이야깁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 거기에 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지식과 철학과 과학을 저희들은 믿습니다. 당신들의 말이 옳습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따르고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다 쓸데없는 일입니다. 어찌 보면 이 바리새인들의 “쓸데없다.”는 이 이야기가 오늘 우리 주변에서 얼마나 수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면서 우리 교회에서 예배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소리로 들리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코로나19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얘기해도 쓸데없다고 얘기합니다. 사실 하나님께 답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실 해답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기도하며 예배하는 것에 해답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세상에서는 그런 예수님을 따르는 것,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것, 쓸데없는 일로 치부해버리고 있더라는 이야깁니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단언컨대 코로나 19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잡을 수가 없는 일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모든 것, 세상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거죠. 백신 개발을 하는 것에도 하나님이 지혜를 주지 않으면 우리는 찾을 수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지 않으면 우리는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작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서도 이렇게 세상이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조금 더 센 것을 보내시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신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랑하지만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는 ‘연약한 유리그릇’과 같다는 거예요. 떨어지면 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의 실체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조롱하고 하나님을 향해 예배하는 것이 쓸데없다.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쓸데없다고 얘기하는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세상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알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죠. 그래서 기도하기는 하나님 세상이 하나님을 향해서 영안이 열려지기를 원합니다. 저들이 가지고 있는 지혜와 학식으로 인해 그것이 걸림돌이 되어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저들이 진정 인간은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해답임을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저들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더라는 이야깁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예수님이라고 하는 존재가 한 사람, 연약한 하나의 인간으로 보일 뿐이겠지만, 하나님의 경륜을 깨달은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는 ‘구세주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요, 또 모든 문제의 해답이 되시는 분’ 이라는 것을 오늘 우리는 알더라는 이야깁니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나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으시고 내가 죽어야 되는데 내 죄를 대신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어요.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고 “이제 내가 죽었으니 너는 살아야한다.” 그러고 우리에게 살 길을 주셨다고 생각 해 보십시요. 우리는 사실 예수님에게 얼마나 큰 빚을 진 사람들이겠습니까? 근데 우리가 그 예수님, 그 사랑의 모습, 그 고난 당하신 그 모습에 대해서 우리가 외면하고 있다고 하면 그래서는 안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수님 앞에 미안한 일을 행하면서 살고 있는가?’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분을 인정하지 않고 조롱하고 있다면 그래서는 결코 안된다고 하는 것, 우리는 알죠.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절대로 쓸데없는 일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고 마땅히 그래야 하는 일이고 그 길이야 말로 우리가 축복받고 우리가 승리하는 길이라고 하는 것을 오늘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번 고난주간에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시간이 되고 그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그 사랑에 감격하시고 이제 주님과 더불어 우리도 사명을 감당하며 주님과 함께 세상을 걸어 나가는 그런 복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줄로 믿습니다. 교회는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결국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나와의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내가 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것을 분명히 붙잡고 주님과 동행하시는 복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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