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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빈 무덤의 의미  
 
빈 무덤의 의미
설교날짜 2020.4.12
설교자 박동찬 목사
본문말씀 요 20 : 1 - 10
 

20200412 부활절 예배 from 일산광림교회 on Vimeo.


200412 박동찬목사님

요 20:1-10

빈 무덤의 의미


할렐루야 귀한 찬양에 감사드립니다. 큰 은혜 받은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예수님 부활하신 ‘부활주일’ 입니다. 가정에서 우리 성도님들 또 예배를 드리시는 줄 압니다. 멀리 해외에서도 우리 예배 시간을 기억하시고 우리 일산 광림 가족들 예배를 드리시는 줄 압니다. 어느 곳에 계시든지 또 어느 곳에서 우리가 주님을 예배하든지 그곳에 우리 하나님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손길로 우리를 붙드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가족과 함께 예배 드리시는 분들 옆에 있는 가족들과 함께 인사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한번 인사하시죠. 예, 우리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감사를 드립니다. 


기독교의 절기는 뭐 많은 절기가 있지만 그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는 ‘성탄절’이고 또 하나는 ‘부활절’입니다. 성탄절은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날이고, 또 부활절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근데 이 둘 중에서 어떻게 보면 신앙적으로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을 한 가지 고르라고 하면 사실은 "성탄절보다 부활절이 더 중요한 의미가 있는 날이다." 이렇게 얘기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없이는 우리의 믿음이 헛 것이 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하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에요. 남들에게 존경 받으면서 사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얼마나 세상에서 성공하며 살았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 받았느냐. 내 죄의 문제가 해결을 받았는가? 아니면 내가 여전히 죄 가운데 거하는 그런 존재로 살아가는가?'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문제가 내 죄의 문제가 해결함을 받지 못하면 내가 세상을 다 가졌다 할지라도 우리는 구원을 받는 존재가 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내 죄의 문제가 해결 받아야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내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는 길은 뭐 돈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지식으로 공부해서 해결 되는 것이아니고, 세상에 성공한다고 해결 되는 것이 아니고 죄를 지었으면 반드시 죄는 그에 따르는 형벌을 받아야 되는 거죠. 죄의 삯은 사망이라 그랬어요. 세상에서도 마찬가지 이치 아니겠습니까? 죄를 지었는데 그냥 살아가며 그걸 우리가 "불의하다." 라고 얘기합니다. 죄를 지었으면 반드시 벌을 받아야 된다. 죄에는 그 죄 값을 치러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근데 성경에 의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거에요. 아니 뭐 그렇게 성경에서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그렇게 무섭게까지 얘기할 것 있습니까? 세상에서도 죄를 지으면 그 가볍고 무거움에 따라서 형량이 달라지는데 왜 꼭 기독교에서는 죄를 지으면 죽어야 된다고 얘기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뭡니까?

한번 가만히 생각을 해 보세요.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분 할 때 두 가지 라는 거에요. 죄가 있느냐 없느냐 아니면 죄의 문제가 해결된 의인이냐 아니냐, 죄인이냐 의인이냐, 둘 중에 하나로 나뉘는 거지 뭐 적당한 죄인, 큰 죄인, 작은 죄인, 이렇게 나눌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죄의 삯은 그 죄가 크든 작든 죽을 수밖에 없다라고 하는 것을 오늘 우리는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어야 되는데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죽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받을 사람은 없다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구약성경은 이 원리를 우리에게 잘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구약에는 이 제사가 참 많이 있어요. 근데 구약 제사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뭐냐면 죄사함의 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내가 죄를 지었을 때 어린 양, 흠 없고 점 없고 깨끗한 양, 제일 순전 해보이는, 뭐 많은 양이 있지만 상처입은 그런 양 아니라 제일 깨끗한 양, 제일 순전해 보이는 온전한 양을 가지고 오는 거예요. 그 성막이 있는 데로 가지고 오면 그 성막에서 제사장이 보는 앞에서 내가 가져온 그 양의 머리에 내가 손으로 얹지 않습니까. 손을 얹게 되면 내 죄가 다 이 손을 통해 가지고 그 양에게로 전가가 되는 겁니다. 그랬을 때 제사장은 사정없이 그 양을 죽이는 거에요. 죽이고 다 내장을 긁어내고 각을 떠가지고 재단 위에 올리고 불을 짚혔을 때, 그 그 재물이 타는 그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게 될 때, 그것이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 향기로운 제사가 되는 거죠. 그걸 통해서, 우리는 그런 제사를 통해서 내가 죄 사함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의 제사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바로 회개의 있다는 게 죄사함에 있다는 것이죠. 예. 그래서 이 제사를 드렸는데 이런 구약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이 위한 하나의 예표가 되어 진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를 잃고 절망 가운데 살게 될 때 언젠가 힘이 있는 메시아가 나와 가지고 자신들을 이방의 압제에서 구원하고 자유를 줄 것이고, 다윗의 그 번성했던 나라를 다시 세울 것이다. 그래서 메시아가 와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어떤 타민족에게 압제를 당하는 이 압제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다. 그것을 대망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특이하게도 성경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수백년 전 예언자였지만 이사야서 53장에 보면 앞으로 나타날 메시아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꿈꾸던 그런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힘을 가진 메시아가 아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자기의 예언 말씀 속에서 어떻게 예언을 하느냐,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 지시고 죽음의 길을 가야 되는 어린 양과 같은 존재로 묘사를 한다는 거예요. 그 어린 양이 무엇입니까. 구약의 제사에서 나 대신 죽어야 되는 그 어린 양을 묘사를 하는 거죠.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보았을 때 세례 요한이 했던 얘기는 뭡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 모든 성경이 참 놀라운 것은 이 성경에서는 구약의 제사와 또 이사야 선지자의 앞으로 나타날 그 메시아를 어린 양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나 이런 것들이 결국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시는 메시아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실제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모든 죄 짐을 짊어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성경의 이 얘기가 되어 지고 있는 그 내용들이 보면은 일맥상통한다는게 어떻게 이렇게 정확하게 누가 마치 짜 맞춘 것처럼 이렇게 정확하게 이 성경의 이야기가 이렇게 정확할 수가 있느냐, 혹 이 성경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이거야 누가 그렇게 계획적으로 의도하고 이 작품을 구상을 해 가지고 이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맞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의 얘기라는 거에요.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성경 책이라고 하는 이 성경책은 약 1000년 에서 1500년으로 추정을 합니다. 1000년에서 1500년의 세월 동안에 약 40여 명의 시대를 달리하고 기억을 달리하고 생각을 달리하는 그런 저자들이 기록한 책들을 모아 놓은거란 말이죠. 근데 보면은 이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그 내용이 이 주제가 일맥상통하고 있더라는 것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오실 메시아와 오신 메시아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 바로 구약 성경 이라는 거예요. 그 왜 메시아가 오셨냐,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 이것이 성경의 주제라고 하는 것 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거죠. 그래서 이 성경의 메시지를 한 단어로 이야기 한다 그러면 예수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의 주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이것이 복음이라는 거죠. 복음. 복된 소식 기쁜 소식.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데 있어서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을 얘기하자 그러면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지 아니하시면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깨어져 버리고, 말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가는 그런 존재가 될 수 밖에 없고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그런 존재로, 저주받은 존재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이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없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럼 이 부활 죽음은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죽음은 참 내 신앙 생활 하는 데 있어서 의미가 있다라고 하는 것을 내가 알았다라고 하면 그러면 부활은 뭘 의미 합니까? 그냥 죽음으로 끝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렇게 질문할 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됐다는 건 알겠는데, 부활 하시는 것은 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저는 오늘 본문 말씀 보니까 제자들이 안식 후 첫날에 이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가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 가지고 보니까 예수님이 시신이 없어진 거, 이거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어디 다른 데다가 치운 줄 아는 거죠. 그래서 놀라 가지고 와서 제자들에게 와서 "예수님의 시신이 없습니다. 누가 옮긴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실망과 좌절 가운데 있던 예수님의 제자 중에 그래도 수제자였던 베드로와 예수님의 가장 사랑했던 요한이죠. 여기서 그 다른 제자라고 얘기하는 것은 요한을 얘기합니다. 이 베드로와 요한이 달려가는 거에요. 그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서 달려가는데 오늘 성경 해보니까 요한이 조금 더 빨랐던 것 같아요. 요한이 먼저 그 무덤에 이르게 되었다. 무덤 문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무덤 밖에서 이렇게 들여다보고 있는데 베드로는 뒤쫓아 와가지고 그냥 요한을 미치고 넘고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이 두었던 곳을 바라보게 되는 거예요. 들어가서 보니까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요. 그러니까 요한도 따라서 다시 들어가서 보니까 정말 없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다, 무덤에 있어야 할 예수님의 몸이 없어졌다, 비어 있었다는 얘기죠. 빈 무덤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부활을 의미하는 데 이 저는 오늘 이 무덤이 비었다는 것 속에 담겨 있는 3가지 의미를 잠시 말씀을 전하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는 죽음이 끝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을 증거하는 거죠. 사람들은 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입니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근데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이 결국 끝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 "죽음은 다 끝이에요." 하는 그 말, 그 말이 믿을수 있는 말이냐 이 말이죠. 사실 그 누구도 죽으면 끝인지 아닌지 아무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짜 확인을 해보려고 그럼 내가 죽어 보면 알 일인데 죽으면 그 다음에 이게 진짜라고 하는 걸 말할 기회가 없어지는 거죠. 오늘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서도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존재, 당신의 존재와 영원한 나라가 존재한다는 근거를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계 속에 담아 주셨다는 거에요. 그래서 로마서 1장20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 치 못 할 지니라.] 몰랐어요. 그리고 핑계할 수가 없다는 거에요. 모든 만물을 다 그 당신이 살아있음을 이 만물 속에 담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얘기가 뭡니까. 우리가 자연을 보게 될 때 경외의 힘이라고 하는 걸 느끼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 하시면서 그 안에 이 거룩한 신성이 있다고 하는거 하나님의 존재가 살아 계시는 분이라고 하는 거에 대한 그런 신성들을 담아 둬서 우리로 하여금 자연을 보게 될 때 어떤 신적인 존재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미술 작품을 볼 때 렘브란트의 작품이 있고 뭐 내 작품 있고 피카소의 작품이 있고 또 먹어 고흐의 작품이 있고 샤갈의 작품이 있었는데, 그것을 보면 '아 이건 샤갈의 작품이고 이건 고흐의 작품이구나.' 자기들 만의 독특한 화풍이 있다는거죠. 그걸 통해서 누구의 작품인지를 아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 천지를 만드시고 이것이 하나님 외에는 이런 것을 할 수 없는 존재, 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라고 하는 것을 알게끔 만들어 두셨다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 조차도 신적인 경외감을 느낀다는 거죠. 우리가 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저 동해안으로 몰려 갑니다. 왜 가느냐 해뜨는 걸 보겠다는 거예요. 뭐 매일 뜨는 그 해를 그 마지막 날 또 새해 첫날 때는 그 해를 본다고 해서 뭐 달라지겠습니까? 그것을 보기 위해서 주위 속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저 바다 건너편에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본다 말이죠.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것으로 끝나냐? 그것이 아니잖아요. 그 바라본 떠오르는 그 해를 바라보면서 모든 사람이 자기의 소원을 빈다는 거에요. 올해는 잘되게 주세요. 올해는 이렇게 되게 해주세요.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자신들의 소원을 빌어요. 그러면서 내가 지금 이 해에다가 이것을 소원을 빌고 있으면서 '내가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이 바보 같은 짓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까? 없다는 거에요. 그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도 뭔가 알 수 없는 신성함 경외감을 느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그런 소원을 빌게 되는 거죠. 그런 것들이 무엇이냐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 창조의 섭리, 이 피조물 된 이 피조된 이 세계 속에 하나님의 신성이 담겨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직접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어떤 그런 심적인 경외감 속에 자신들도 모르게 기도를 하게 되어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이 말씀이 바로 이 로마서 1장 20절에 있는 이 말씀이 바로 우리는 뭐 해를 바라보고도 어 빌고 또 다른 어떤 신성한, 별을 바라보면서도 기도를 하고 또 다른 어떤 신기한 것을 바라보게 될 때 기도하는 그 사람들의 이 본성을 통해서 오늘 우리는 로마서 1장 20절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우리는 알게 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에 대해서얘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15장 51절 52절에서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의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 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 되리라.] 그러면서 고린도전서 15장 44절에 이르기를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영의 몸도 있느니라.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요. 사도 바울이 이렇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도대체 뭡니까? 사도 바울 당신이 어떻게 압니까? 육의 몸이 있고 신령한 몸이 있는 것을 당신이 어떻게 안다고 이런 얘기를 합니까? 이렇게 질문할 수 있겠죠.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세계를 직접 보고 왔던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12장 2절에 자기에 대해서 고백을 하면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자기를 얘기하는 거죠. 그는 14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높은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낙원 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가가지고 너무나도 신비한 체험들을 하고 왔다는 거예요. 아니 목사님 그 사도 바울이 하는 얘기를 어떻게 믿습니까? 그야 그냥 거짓말일 수도 있고 그냥 우리로 하여금 믿으라고 이렇게 지어낸 얘기 일수도 있는데 사도 바울이 한 그 얘기를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가 있습니까. 사도 바울의 말을 믿을 수 있는 이유는 사도 바울의 삶이 전적으로 달라졌다고 하는 것 변화되었다 라고 하는 것,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이 진실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는 거에요. 누구를 속이기 위해서 핍박을 하던 사람이 핍박을 받는 자리에 서게 된다. 그래서 자기의 생명 결국은 순교 하고 목이 잘려서 죽는 그 그자리에 이르게 된다. 단지 누구를 속이기 위해서? 내가 이걸 속여서, 사람들을 속여서 내가 부자가 되거나 잘 먹고 잘 살았다 그러면 그 사람이 하는 얘기가 거짓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자기가 잘 먹고 잘 살던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함으로 말미암아서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결국은 죽게 되는 그 자리에까지 이르면서 까지 누구를 속이는 바보는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천국에 가서 그 신비한 세계를 보고 영적인 세계를 경험했기 때문에 자기의 목숨을 걸고 이 100% 확신을 가지고 얘기하는 거에요. 육의 몸이 있은 즉 영의 몸이 있다. 신령한 몸이 있다. 주님의 부활이 없다라고 하면 우리 믿는 자들이 제일 불쌍한 자다. 이런 이야기들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많은 사람들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저는 이 사도바울의 육의 몸이 있은 즉 신령한 몸도 있다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어요. 그게 뭐냐면 배추 흰나비 애벌레입니다. 배추흰나비 애벌레. 애벌레죠. 송충입니다. 이렇게 기어다니면서 배추 잎사귀를 먹고 그 나무 잎사귀를 먹는 그 애벌레에요. 근데 이 애벌레가 땅에서 송충이처럼 기어다니면서 그저 열심히 하는 일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먹는 일이에요. 그저 먹는일. 그저 나무 잎을 갉아먹으면서 그렇게 하루종일 땅에서 기어다니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게 어찌보면 참 인생이 무상하다. 그냥 살아가는 게 어떤 의미 있는 일도 아니고 그저 살기 위해서 그 남은 잎사귀를 갉아 먹으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그렇게 며칠을 사느냐 15일에서 한 20일 정도를 그렇게 살아 간다는 거예요. 근데 어느 날이 되면 갑자기 몸이 굳어지면서 번데기가 되는 거죠. 움직이지 않습니다. 색깔까지 표현해 줘 처음에는 초록색이 어떤 것이 점점점점 이 갈색으로 밤색으로 이렇게 변하게 되는데 이 번데기가 되는 거에요. 그럼 죽은 것 같아요. 요동하지 않습니다. 그 번데기 같은 모습으로 며칠을 사느냐 7일에서 10일 동안 번데기의 모습으로 살아 간다는 거예요. 죽은 것 같이 보인다는 거죠. 근데 그 죽은 것 같은 관에서 한 10여일이 지나고 나면 갑자기 그것이 갈라지면서 거기서 나비가 되어서 하늘로 날아갑니다.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거예요. 어떻게 이 송충이가 애벌레가 이 나비가 돼선 땅을 기어 다니던 이 존재가 어떻게 날아가는가. 근데 그 과정이 그냥 하루 아침에 변화 되는게 아니라 이 관속에 들어가는, 이 죽음과도 같은 모습을 거친다는 거에요. 그러면서 전혀 새로운 존재가 되어서 날아가는 그 모습을 볼 때 아 하나님께서 이 자연의 섭리 속에 우리의 죽음 이후에 그 모든 세계에 대한 것들 힌트를 다 담아 두셨다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된다는 거죠.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 라는 것입니다 .똑같은 과정을 거치는 거예요. 처음에는 우리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얘기를 하면 믿기 힘들어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느냐. 그런데 이 배추 흰 나비 애벌레에 대해서 알고 나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어쩜 그렇게 정확하게 일치가 되는 지요. 그러고 보니까 성경에는 죽음이 끝이 다 이런 얘기가 없어요. 세상에 그 어떤 경전도 죽음 이후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지 않지만 성경에는 보면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얘기를 합니다. 유독 성경만 그런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되는데 그 이유는 뭐냐면 정말 중요한 것이 죽음 이후에 삶이기 때문에 그렇다는거에요. 죽음 이후의 삶이 중요하니까 성경에서는 계속해서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얘기. 예수님도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몰라요. 구원에 대한 이야기. 수많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이 세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가 중요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고 복음을 전하는 그런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있지요.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한 부자가 살고 그 부자 집 문 앞에 거지 나사로가 사는 그 얘기를 합니다. 죽었는데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고 이 부자는 음부로 떨어졌다. 그곳에서 목이 너무 말라 가지고 물 한 방울만 좀 떨어뜨려달라 사정을하고 애원을 하는 그 부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이런 비유를 예수님은 말씀 하셨을까요? 여러분 왜 예수님은 수많은 비유 가운데 이런 비유의 말씀을 우리에게 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이런 비유를 하셨을까? 그것은 정말 죽음 이후에 그 세계가 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 세계를 만드신 분이기 때문에 아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정말 죽음 이후에 그런 세상이 없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실 이유도 없다라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지 그저 죽음 이후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 이런걸 가지고 우리를 겁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냐, 그건 절대로 그럴 수가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죽음은 절대로 끝이 아닌 것을 분명히 깨달으시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죽음이 우리 인생을 전부 끝내버리는 종착역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셨어요. 이 부활의 사실을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분명히 확신하시고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두번째로 이 빈 무덤 의 의미는 사탄의 권세가 완전히 꺾였다라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그 원수 우리의 가장 큰 원수는 누구냐? 마귀 사탄 이라는 거에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늘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고 결국에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구원받지 못하는 존재가 돼서 자기들이 망할 때 같이 망하는 존재가 되도록 하는 것이 마귀 사탄의 이 계략이라는 것입니다. 억울하다는 거에요. 원통 하다는 거죠. 왜 나만 죽어야 되느냐?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저희 인간들도 내가 다 끌고 내려서 죽어야 되겠다. 그래서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서 수많은 공격 무기가 이 사탄에게는 있다는 거에요. 전략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 사탄이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덤벼들면 넘어지지 않을 사람이 없다라고 하는거예요. 근데 그 마귀 사탄이 사용하는 가장 큰 무기 가운데 가장 강력한 무기가 뭐냐? 죄와 저주와 죽음이라는 거에요. 죄와 저주와 죽음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은 바로 죽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죽음이에요. '예수님도 자기가 죽여 버리면 그 다음에는 그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다 무너질 것이다.' 이 생각을 한 거예요. 처음에는 유혹을 했어요. 세가지 유혹을 가지고 예수님을 유혹해도 안넘어져요. 그러니 죽이는 수 밖에 없겠다. 그 예수님의 제자로 하여금 배신하게 만들어서 예수님을 죽게 만들어 자기의 가장 강력한 공격 무기인 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사역을 꺾어 버리려고 했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죽음의 권세까지도 무너뜨려 버리신 우리 주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그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죽게 되었다 이런 얘기들으면 좌절하게 되고 두려워하게 되고 낙심하게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 사실이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쉽게 얘기할 수있는 부분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죽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으면 모든 것이 다 끝이다. 이제 뭐 죽으면 끝인데 뭘 더 소망 하겠느냐?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시고 다시 살아 나셨다는 이 이야기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거에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크리스천들의 경우는 이 사실을 믿기 때문에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을 수가 있는 거죠. 영원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평안하게 웃을 수 있는 존재,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크리스찬 기독교인인 것이죠.


성금요일 성찬 예배 때도 말씀을 드린 것처럼 마귀 사탄은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서 우리에게 접근해요. 그래서 예수님 말씀 하시기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일서 3장 8절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함이라. 하나님은 이 마귀의 계략 하나하나 조목조목 그 세세한 부분까지 다 깨 부숴버린 우리 예수님이신 것을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보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마귀의 일이 무엇입니까? 결국 우리를 공격해서 죽게 만드는데 육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영적인 죽음 까지 영적인 파멸 까지 그것이 마귀 사탄의 일 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마귀 사탄의 일 십자가에서 깨트려 버리시고 우리에게 소망과 생명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죄 짓게 만들고 서로 저주하게 만들지만 예수님은 우리 죄를 사해 주시고 저주가 아니라 축복하게 만드시는 거죠. 마귀는 병들게 만들고 서로 미워하게 만들지만 예수님은 치유 하시고 서로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예수님의 방법이죠. 내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다. 병들고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치유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지라는 얘기에요. 마귀 사탄은 우리를 공격해서 세상살이 또 어렵게 만들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게 만들지만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게 만드셨어요. 그래서 희망이 넘치고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살게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마귀 사탄을 생각할 때는 답이 없어요. 모든 것이 절망이죠.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가 답이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거에요. 예수님이 해답이십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는 거죠. 그리고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이 사탄의 가장 큰 권세 무기라고 할 수 있는 그 죽음까지도 예수님은 부활하심을 통해서 그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증명해 보이시는 우리 예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에서 열까지, 다 마귀의 일을 멸하시는 일을 했더라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했을 때 그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뱀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저주 하실 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고,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을 얘기하는 거에요. 그저 예수님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그것이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 여자의 후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발 뒷꿈치를 상하게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서 자기가 승리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부활하심을 통해서 이 마귀 사탄의 권세 머리를 밟아 버리시는 거죠. 이 예언의 성취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을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 아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렇게 부활하지 못하시고 죽는 것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끝난다라고 하면 진정한 승리라고 얘기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근데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마귀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죽음을 깨트려버리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더 이상 마귀 사탄의 공격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아요.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승리의 삶, 소망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빈 무덤의 의미 세번째는 지금도 우리 가운데 일하고 계신 예수님을 의미하는 거에요. 부활하신 예수님 무엇을 하시느냐? 지금도 우리 가운데서 일하고 계시는 우리 예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대로 하나님 나라로 가셔서 "이제는 모르겠다.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이렇게 우리를 그저 방관 하시는 그런 예수님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줄로 믿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어디가 하셨습니까?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어요. 성경의 말씀을 가르쳐 주세요.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낙심 가운데 빠져 있는 낙심한 채 빠져있는 그 제자들에게 찾아가셔서 그들을 위로 하십니다. 그들을 위로하시고 다시 격려 하시고 기도하는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시고 의심많은 도마에게도 나타나서 "도마야, 잘 안 믿어지느냐? 니가 말한것처럼 이 내 손과 발에 너의 손가락을 넣어 봐라. 그리고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말씀을 하시죠 그렇게 예수님은 40일 동안 이 땅에 거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부활, 승천 하셨어요. 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 부활, 승천 하셨어요. 그 왜 그랬느냐? 너희들이 본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신다. 이 재림에 대한 약속을 주시는 그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이제는 내 할 일 다 했으니까 너희들 앞으로 열심히 살아봐라 그런 예수님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여전히 제자들을 향해서 긍휼히 여기시고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바라시면서 믿음을 가르치셨던 주님은 오늘 우리 옆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시고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로 하여금 넘어 지려고 하는 우리를 붙잡아서 다시 일으키시고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응원하시는 우리의 좋으신 예수님이 되심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우리가 잘못된 신학 지식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어요. 구약은 하나님이 역사 하시던 시대고 예수님이 오셨을 때는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시대고 예수님 부활 승천하시고 나서는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시대다. 그래서 각 시대별로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시대, 예수님이 역사하시는 시대, 성령이 역사하시는 시대를 이렇게 구분을 져요. 이게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걸 알아야 해요.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는 그 순간부터도 하나님 혼자하셨느냐?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그 우리가 성경에 보면 창세기 1장26절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천지를 창조하실 때도 ‘우리가’ 하나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같이 활동을 하셨다는 거에요.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때도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 하시느냐, 요한복음 5장 17절에 보면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 나한테 모든 걸 맡기시고 손놓고 계신 하나님이 아니시고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예수님이 역사하실 때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그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더라는 거죠.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우시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기적으로 역사하시고 일 하시는 하나님이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마찬가지 라는 거에요. 예수님은 지금 뭐 하나님 보좌 우편에 가만히 앉아 계시지만 하시는 예수님이시냐? 아니라는 거에요. 하나님이 일하시지만 예수님도 지금도 일 하세요. 성령님도 일하시고, 그 어느 때보다도 마지막에 가까워 오니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열심히 일 하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힘 주시고,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마귀 사탄의 권세를 꺾어버리도록 만드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얼마전까지 선교지에서 많이 듣던 간증들이 있어요. 얼마전에 난민 선교의 밤을 하면서 저희 교회에서 난민들 중에 이제 예수님을 믿기로 했던 그런 사람들이 간증하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이슬람 사람들이 개종을 한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일이 아닐 수가 없어요. 그들은 생명을 내놓는 거예요.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요, 내 아버지가 나를 죽여요. 그것을 거룩한 죽음이라고 얘기해요. 샤리아 법 이슬람의 법에 의하면 그건 살인 죄에 해당하지 않아요.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을 받는, 그러니까 이슬람 사람들이 무슬림이 개종을 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제 나는 순교의 위기 속에서 누가 죽여도 그것은 이슬람 법에 의하면 살인 죄가 적용이 안 된단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개종을 한다는 것은 나에게 분명한 확신이 있지 않고는 무슬림들은 개종을 할 수가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근데 난민 선교의 밤 때 보니까 개종 하시는 분들, 그분들이 그 이슬람의 지도자 급에 있던 사람들, 그 목사들과 같은 존재들이죠. 그런 임암에 있던 그런 사람들이 개종을 하고는 간증을 하는 거에요. 자기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어떤 사람들이 코란을 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줄줄 암송하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개종을 했단 말이죠. 그 이유가 무엇이냐? 예수님을 만났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고, 만남이라고 하는 그 강렬한 체험이 있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개종을 하지 않을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란을 비롯한 여러 이슬람 국가에서 예수님을 믿는 이런 무슬림들이 급증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요. 근데 하나같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예수님을 만났다는거에요. 꿈속에서 만난 사람도 있고 실질적으로 길거리에서 만난 적도 있어요. 누가 자기에게 복음을 전해 가지고 화를 내면서 당신이 지금 내가 누군 줄 알고 복음을 줄 전하느냐? 그리고 어느 교회를 다니냐 그러고 가가지고 그 교회 찾아가 가지고 말이죠. 그 사람을 찾으면서 나한테 그런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이 교회를 들어가는 걸 봤는데 당장 끄집어 내라. 아무리 찾아도 안 나오는거에요. 근데 거기에 걸려 있는 예수님을 사진을 보면서 저 사람이라 그러더라는 거에요. "저 사람인데 저사람 어딨냐?" 바로 예수님이라 그러니까 거기서 다 무너지는거죠. 예수님을 믿겠다는 거에요.


 작년에 제가 터키를 방문했을 때 안디옥에 잠시 들렀어요 안디옥 개신교회 들려서 예배를 하는데 거기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한 명이 있어요. 얼마나 열심히 봉사하고. 근데 거기를 담당하는 목사님이 저에게 와서 귀뜸을 하면서 "저 사람이 누군지 아시냐?", "누구냐." 그랬더니 저사람이 이슬람 테러리스트라는 거에요. 이슬람 테러리스트 저격수 였다는 거에요. 수 많은 사람들을 총으로 쏴서 그렇게 죽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핍박하던 그런 사람이었다는 거에요. 근데 저 사람이 어떻게 와서 이렇게 예수를 믿게 되느냐? 그랬더니 예수님을 만났다는 거에요. 긴 얘기를 듣지 못했지만 짧은 시간 얘기하는데 저 사람이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완전히 이제는 가족과 친척을 다 버리고, 그리고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이 교회로 왔다는 거예요. 고향을 떠나서 왔다는 거예요. 고향에선 자기가 실종된 줄 안다는 거죠. 자기가 여기 있는 줄 알면 또 자기를 잡으러 오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는 거에요. 신분을 숨기면서 거기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그런 분들을 봤어요. 제가 그걸 보면서 이야 중동지역에서 지금도 이 선교사님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런 간증이 넘쳐나는데 하나같이 그들이 개종을 하게 된 배경에는 예수님을 만났다는 거에요. 그 얘기가 무엇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는 거에요. 지금도 한 영혼이라도 더 살리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우리 예수님의 그 모습을 오늘 우리가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한 지 모른다는 것이죠.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의 부활은 그저 단순히 빈 무덤처럼 공허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죽음 이후에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이 그 빈 무덤 안에 있다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우리들이 돼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 빈 무덤이 의미하는 것.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고 또 우리로 하여금 타락하게 만드는 그 사탄의 권세를 죽음으로 위협하는 사탄의 권세를 짓밟아 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그 빈 무덤 안에 있음을 오늘 우리는 알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 우리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우시고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라도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시는 우리 주님이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거룩한 부활절 아침에 이 빈 무덤에 놀라운 의미가 우리 성도님들의 삶 속에 영원한 진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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