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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진정한 회개의 삶  
 
진정한 회개의 삶
설교날짜 2020.4.19
설교자 박동찬 목사
본문말씀 빌 3 : 5 - 12
 

200419 박동찬 목사님

진정한 회개의 삶

빌립보서 3장 5-12절


귀한 찬양에 감사를 드립니다. 큰 은혜 받으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도 가정가정마다 우리 가족들이 모여서 실시간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는 줄 압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함께하겠다." 우리 예수님 말씀하셨는데 오늘 우리 성도님들 예배를 위해 모인 그 가정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가족들과 우리 예수님 지금 우리 집에 함께 하십니다. 인사 한번 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고난주간 새벽기도와 또 부활주일 예배를 이렇게 마치면서 많은 성도님들이 참 영상으로 예배를 드렸지만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참 많이 해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는 못하지만 그래도 가정에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은혜받았다는 그 말씀이 저에게 얼마나 위로가 됐는지 모릅니다. 고난주간에 예수님의 고난을 당하셨나 묵상을 하고 부활주일에 승리하신 주님을 찬양하고 우리가 이제 새로운 한주간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여전히 우리의 삶에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지요? 그래서 그런 문제들을 대하면서 '오늘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될까?' 생각을 하다 보니까 사실은 우리 주변에 문제는 항상 있어왔다는거예요. 시대가 바뀌고 이번에 새롭게 국회의원들도 바뀌고 했지만 그런다고 해서 우리의 삶의 문제가 없어지느냐? 그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중요한 것은 '환경이 어떤 환경이 되어지느냐.' 이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어떤 삶을 가지고 어떤 믿음을 가지고 어떤 자세를 가지고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이것이 사실 가장 중요하다라고 하는 것을 오늘 우리가 알게 되지요. 

저는 오늘 그래서 우리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제목을 '진정한 회개의 삶'이라 이렇게 잡았는데 회개의 삶이라고 하는건 "하나님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하고 뉘우치는 것을 회개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달라진 삶, 거듭난 삶, 변화된 삶을 의미하는거죠. 우리가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을 지나왔다 그러면 오늘 우리의 삶은 그냥 그때 은혜 받은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변화된 삶을 살아가야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변화의 삶, 진정한 회개의 삶, 그것이야 말로 거듭난 삶인데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얻는 유익이 참 많아요. 어떤 분들은 "진리에 대해서 큰 깨달음을 얻어서 참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씀하는 분도 있고 어떤 분들은 "지금 내가 무엇을 선택해야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말씀을 읽다보니까 지혜가 생겨서 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거, 어떤 지혜를 가지고 어떻게 무엇을 선택할 지를 알게되니 너무 좋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분들도 계세요. 또 이렇게 노력해도 안되고 저렇게 노력해도 안되고 이런 분들은 절망 가운데 의기소침해서 지나다 "말씀을 읽다보니 용기가 생겨요. 소망이 생깁니다. 살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분들도 계시는 것을 봅니다. 이게 신앙 생활이 주는 유익이라고 하는거죠. 그런데 거기서 끝나면 안된다는거예요. 여기까지는 어떻게보면 종교 생활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신앙 생활, 거듭난 삶, 진정한 회개의 삶을 살아간다라고 하는 것은 깨닫고 용기 얻고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는 삶, 그 삶이 어디냐 하면 바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죠. 변화된 삶이라 하는 것입니다. 왜 변화된 삶이 중요합니끼? 이렇게 질문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변화된 삶이 중요한 이유는 내가 진짜 예수님을 믿고 거듭났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거듭난 삶이 중요하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보면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믿기 전과 후의 삶이 전혀 다르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 과거와는 전적으로 달라진 그런 사도바울의 모습을 보게 되는거죠. 오늘 본문 말씀, 이 고백의 내용이 뭐냐하면 전과 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이더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고난 그 후와 전이 전혀 다른 삶이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나는 어떠한가.' 돌아봐야 된다는 거예요. 오늘 우리 성도님들은 어떻습니까? 내가 예수님을 믿기 전과 예수님을 믿고 난 후가 달라졌느냐 이말이지요. 달라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저는 사도바울의 이야기를 통해서 진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인생을 산다라고 할 때 어떤 삶을 살아야되는가, 세 가지 말씀을 잠시 전하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는 과거에 안주하지 말아야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사는데, 이 과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돼요.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죠. 과거에 내가 얼마나 잘나갔든 못나갔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있어서 진짜 중요한 것은 현재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현재. 현재가 중요하고 미래가 중요한 거죠. 과거는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교훈으로 삼을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근데 우리의 과거들을 보면 주로 세 종류로 나눠볼 수 있는데, 이 과거가 안좋았던 분들이 있어요. 실패하고 절망하고 좌절하고 죄 짓고 방탕하고 이런 분들은 '아 진짜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 생각이 돼서 변화된 삶을 살고자 노력을 하는거예요. 근데 성경 말씀을 듣고 보니까 [보라. 너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전것은 지나갔으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몰라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과거에 지은 모든 죄가 사함받았습니다, 씻음받았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을 때 과거를 청산해버리고 앞을 바라보면서 열심히 달려가는 그런 성도님들이 많이 있지요. 이런 분들에게는 참 이 복음이라고 하는게 말 그대로 복된 소식이 되고 미래가 정말 새롭게 펼쳐져가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번째는 어떤 사람이냐하면 과거가 그냥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이런 분들은 뭐 과거에 대해서 집착할 필요가 없어요. 과거를 돌아보려고 하면 과거가 뭐 별로 그렇게 내세울 것도 없고 그냥 그렇게 살았다는거죠. 그래서 위험하다는 거예요. 이런 분들은 과거를 대충 살았기 때문에 현재도 대충, 미래도 대충 살 가능성이 많다는 거예요. 이런 분들에게는 자극이 필요합니다. 과거에 그렇게 살다가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책망받는 인생이 된다는 거예요. 그걸 깨닫고 돌아서서 이제 현재에는 내가 무엇을 해야될것인가, 새로운 목표를 정하고 다시 열심히 달려가야되는데, "내버려 두세요, 과거에도 이렇게 대충 살았어요." 현재에도 대충 살고, 미래에도 대충 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시간을 귀하게 여기지 못해요.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 하나를 땅에 묻어뒀다가 나중에 주인이 왔을때 "당신이 줬던거 도로 가져가세요. 누가 달라그랬습니까? 왜 나에게 인생을 주시고 열심히 살라고 합니까?" 하나님 앞에 책망받기 쉬운 사람이라는 겁니다. 세번째 종류는 과거가 화려했던 분들이 있어요. 내가 왕년에 진짜 잘나가던 그런 분들. 이런 분들은 '나 때는 이랬다. 내가 그 때는 이랬다.' 과거를 생각하면서 과거의 영광 속에 사로잡혀 있는 분들이 있죠. 이런 분들은 자꾸 과거에 매이려는 경향이 많이 있다는거예요. '예수님 안믿어도 잘 살았는데, 예수님 믿고나니까 내가 이렇게 어려워지는 것 아닌가? 오히려 내가 종교를 바꿔서 그런가?'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다는 거예요. 이런 분들이 참 위험하다고 하는것입니다.

근데 사도바울도 과거를 보면 이 사도바울은 과거가 화려했던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이 사도바울을 본받고 싶어하고 부러워하고 '사도바울이 가진 것들을 나도 가졌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 이 사도바울의 과거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사도바울은 자기에 대해서 소개를 할 때 화려하게 하는거예요. [나는 8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고 베냐민 지파고 히브리인이고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고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 가문도 좋았고 로마 시민권도 가지고 있었어요. 재력도 있었습니다. 지도자의 자리에 서기에 충분했던 사람이 사도바울이었다는거죠. 그랬으나 자기는 거기에 매어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2절에 이렇게 얘기하죠.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오,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 나는 과거에 집착하지 않는다.] 미래를 향해서 예전에는 이 세상적인게 좋은건줄 알았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내가 이제 더이상 돌아보지 않겠다. 정말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이제 알았으니 나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달려가는 인생을 살겠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사도바울의 모습을 오늘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되더라는 이야깁니다. 그러면서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좋은 일이 있을 수도 있고 어려운 일이 있을 수도 있고 나쁜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근데 그런 일이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진짜 중요한 것은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중요하다, 그 안에서 내가 발견된 것, 그것을 쫓아가는 인생,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인생,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사도바울은 강변하고 있는것을 보게 된다는 이야깁니다. 

이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예화 가운데도 밭에 감추인 보화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천국에 대한 비유를 하면서 어느 밭에 보면 별로 귀하지도 않아 보이는 평범한 밭이었지만 길을 지나다 보니까 그 안에 정말 귀한 보물이 그 안에 뭍혀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거예요. 그 사람은 어떡하겠느냐는 거죠. 그냥 그 밭을 보면서 '야 저 밭 주인은 밭 안에 보물이 담겨있으니 참 좋겠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떠나가는 존재냐하면 그거 아니라는 거예요. 그 안에 진짜 보화가 있는 줄 알면 집에 가가지고 내 재산을 다 판다는 거예요. 내가 가진 걸 다 팔아서라도 그걸 가지고 달려와서 그  밭을 산다는거죠. 왜? 그 밭 안에는 보물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근데 그런 것들 그 안에 그 밭 안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그 사람이 가가지고 그냥 평범한 밭으로 보이는데 그것을 위해서 자기 재산을 다 팔아가지고 그 밭을 사는 그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어 보이는지 모른다는거죠. "왜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십니까?" 이렇게 얘기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왜? 내 재산과 모든 것을 다 팔아도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라고 하는 것을 안다면 그게 어떻게 어리석은 것이 되겠습니까? 더 나에게 유익이 되고 이익이 되고 가치가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왜 이런 비유를 하셨을까하면 오늘 우리의 인생이 너무나도 비슷하다는 거예요. "평범해 보이는 많은 종교 가운데 하나 그런 기독교를 선택해 예배를 드리고 헌신하고, 세상에서 바보같고 어리석어 보여요. 그래서 거기 뛰어들지 않아요. 나는 그냥 세상에 좋아 보이는 것,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을 향해서 나는 달려가겠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은 정말 신앙 안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담겨있는 보물, 그 보화가 얼마나 귀한것인지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얘깁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향해서 너희들이 진짜 귀한 것이 뭔지를 모른다는 거예요. 진짜 귀한 것을 발견하게 되면 모든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든 자기의 그물과 고기를 잡고 내 생계의 수단을 다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습니까? 그 보물을 얻기 위해서라면 내 모든것을 바쳐서라도 그 밭을 산다는 거예요. 왜? 그 안에 진짜 가치 있는 보물이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 성도님들 신앙 생활 하면서 내가 믿는 하나님 안에 이 보화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사도바울도 똑같은 맥락에서 자신의 과거를 얘기 하는 거예요. 학벌, 재력, 모든 배경, 이 모든 것들이 탁월했다는 거예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 이게 자기의 과거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7절에서는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 세상에 자랑거리가 되던 것, 세상 사람을 만나면 내가 자랑할 수 있었던 그 모든 것들, 그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겼어요. 더 나아가서는 "그것을 배설물과 같이 여겼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나에게 유익한 것, 내가 자랑삼던 것, 그것을 해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절대 포기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귀한 분이고 그 분을 위해서라면 내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고 드릴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이지요. 얼마나 그 가치가 대단한 것인지 상대적으로 보니까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싶어하던 그 모든 것들이 상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가 너무 귀하다 보니까 비교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한편으로 보면 배설물처럼 여겨지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꼭 기억하셔야 될 것이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싶어하는 것들이 있어요. 이루고 싶어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것을 이루었든 못 이루었든 우리가 열심히 살다보면 이루는 사람도 있고, 못 이루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것이 이루었느냐 못 이루었느냐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도전했다는 것이 중요하고, 도전하는 그 길 가운데 내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 그런 인생을 살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 주님으로부터 얻은 천국의 기쁨과 그 천국의 능력, 천국의 지혜, 이것이 내 안에 있다는것, 이것으로 인해서 우리가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다라고 하면 오늘 12절에 사도바울이 고백하는 것 처럼 이제는 앞만 바라보는 거예요. 내가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바라보고 푯대를 향해서 달려가는 겁니다. 오늘 그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뒤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앞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그런 인생 되시기를 축원을 드립니다.


두번째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거듭난 인생, 진정한 회개의 인생은 사람들을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실 사순절에 예수님 고난당하시고 고난주간에 죽임 당하시고 부활하셨어요. 그 모든 이유가 왜 그러셨는가? 뚜껑을 열어보면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있다는 거예요.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신 거예요. 근데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그 은혜를 입었다고 하면 우리도 마땅히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에이 목사님 저는 사람이 싫어요. 그냥 저 혼자 사는게 좋아요. 그냥 귀찮아요. 혼자 살고 싶어요. 사람들 만나면 번거롭고 얘기 들어줘야하고 불편해요.' 이런 생각 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집에서 나 혼자 요즘에는 뭐 핸드폰만 하면 그 안에 모든 정보가 다 있고 그 안에 즐거움이 있고 오락이 있고 모든게 다 담겨있어요. 그냥 핸드폰 하나 들고 있으면 됩니다. 사람 만나고, 누구를 돌아보고, 아우 귀찮습니다.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고 배려하며 살아야됩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아 목사님 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피곤해요. 나 혼자 살기도 바쁘고 힘들어요." 맞죠. 정말 나 자신만을 위해 살기도 바쁘고 힘든 것이 우리네 삶의 모습이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아야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우리가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그렇게 사는게 가장 가치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또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도 결국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 본을 보이셨으니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하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하는 것이죠. 우리가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동참한다, 참여하는 자가 된다, 오늘 사도바울의 얘기처럼 그리스도의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의 참회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그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동참하는 삶이라고 하는게 도대체 무엇이냐. 그건 다른게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거예요.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동참하는 일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목사님 어디까지 사랑해야 됩니까?" 오해를 받고 멸시를 당하더라도 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는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신 내용이 바로 그런 내용이라는 거예요. "에이 목사님 그렇게 정답만 말씀하시면 어떡해요. 그게 뭐 쉬운 일입니까? 그렇게 사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맞아요. 어려운 일이에요. 힘든 일입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을 가만히 돌아보면 참 세상이 얼마나 삭막하고 끔찍해가는지 모르겠어요. 한편으로는 무섭기까지 합니다. 세간에 뉴스로 알려져 있습니다만은 N번방, 박사방 그 내용을 보면 참 끔찍스러워요. 읽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 뉴스를 그냥 대충 그런 줄만 알고 더 읽을 수가 없더라구요. 다 읽지도 않았어요. 근데 더 놀라운것은 그것을 주도한 사람들, 나중에 범인을 잡고 보니까 어린 청년, 청소년이에요. 10대 아이, 그렇게 잡혔다는 거예요. 근데 겉으로는 멀쩡해요. 사회봉사도 하고 건실하다고 칭찬도 받고 좋은 대학에 합격도 했어요. 전교 부회장도 했다고 하고 말이죠. 참 어떻게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보여지는 모습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행사하는 그 모습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참 끔찍하죠.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이 있어요. 그건 뭐냐면 일반인들의 반응입니다. 얼굴을 공개하라, 악마다, 부모까지 처벌해라, 입에 담지 못할 그런 욕설들이 끊이지 않고 죽여라, 처형해라, 이런 얘기들을 하는 거예요. 물론 그 참 상상하기도 힘든 그런 일들을 했다라고 하는것은 범죄, 참 끔찍한 범죄라고 하는 것을 부정하는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짓을 한 사람을 죽여라 처벌하라 부모들까지도 그래야한다 이런 반응들은 사실 섬뜩한 반응이 아닐 수가 없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요즘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렇게 분노하는가? 뭔가 이 분노가 가득 차있다는 거에요. 어디 하나 분출구가 있으면 그것이 터져나오는 겁니다 범죄도 범죄지만 그렇게 분노하는 현대인들을 보면서 무엇이 문제일까. 그 누구도 이런 죄를 저지른 사람들, 청년들, 청소년들 하나같이 잡히고 나면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잡히고 나면 다 하나같이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거짓말일까요? 자기 과거를 후회하는 거예요. 자신들이 왜 그랬는지도 모르는 거예요. 오늘 우리가 정죄하기 이전에 '왜 그랬을까.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이런 것들을 한번쯤 생각해봐야 하는데 우리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죽여야한다. 어찌보면 나도 그 사람의 입장에 서있을 수 있을 터인데 그런건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고 그냥 마구잡이로 그들을 향해서 분노와 욕설을 퍼부어대는거죠. 우리 예수님이라면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이렇게 범죄하고 이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른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실까. 예수님도 너희같은 인간은 죽어야된다 그러셨을까? 어떤 마음이실까. 

제가 이렇게 오늘 얘기를 하니까 굉장히 참 제가 인격자인것같아요. 우리 성도님들 우리 목사님 참 목사님이셔서 그러십니다. 아니에요. 저 절대 그런 사람 아니에요. 저도요, 요즘 일본 사람이 그렇게 싫어요. 설교에 이런 말씀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일본 사람 진짜 싫습니다. 모든걸 그냥 우겨요. 잡아떼요. 역사적 근거를 대니까 역사를 바꿔버려요. 자기 후손들에게 거짓을 가르쳐요. 독도가 어떻게 자기네 땅입니까? 말도 안되죠. 제가 그 근거를 찾아봤어요. 찾아봤더니 일제 시대가 끝나고 난 다음에 태평양 전쟁 패전국이 되고 나니까 1951년에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이라는걸 해요. 거기서 조선 땅 수탈했던 것 다 돌려준다. 그러면서 거기다가 사인을 하는데 그 사인에 보면 제주도 울릉도, 거문도 및 모든 도서들을 다 반환한다. 그렇게 빼앗았던 것을 다 돌려준다. 이렇게 돼있어요. 근데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이유가 뭐냐? 거기에 독도는 안써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독도는 여전히 자기네 땅이다" 라고 하는 얘기에요. 말이 되는 얘깁니까? 어린 여학생들을 좋은 곳에 취직시켜 준다고 해서 그 당시에 얼마나 정조라던지 그런것을 생명같이 생각하던 시대에 데려가서 어린 애들을 데려가가지고 군인들의 위안부로 삼았어요. 얼마나 끔찍했겠습니까? 그 어린 소녀들이. 얼마나 죽고 싶었겠습니까? 아마 죽은 사람도 많이 있었겠죠. 그런데 100배 사죄를 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돈을 벌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따라왔다고 우기는 거예요. 요즘도 일본 뉴스를 보면 한국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하는지 몰라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좋게 봐주려고 해도 좋게 봐 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일본에 선교사들보고 "다 철수해라! 복음 전하지 마라!" 거기 그냥 아주 한편으로는 어려워졌으면 좋겠고, 잘못됐으면 좋겠고, 이런 마음이 생기는 거예요. 이게 저의 모습입니다. 분노가 생기는 거예요. 화가 나는거죠. 근데 제가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이 저에게 그런 마음을 주시더라구요. 박목사야 너는 저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느냐?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충격인 거예요. 나는 낫다고 생각을 했는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나은게 아니더라구요. 똑같다는 거예요. 똑같이 분노하고 기회가 주어졌다고 하면 만약 저 자리에 너가 있었다고 하면 너도 똑같은 짓을 했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우리 인간이란 존재는요, 선한 존재가 없어요. 다 거기서 거기에요. 착한 것 같아도 거기서 거기.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행하는 우리의 모습과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행하는 우리의 모습은 다르다라고 하는것입니다. "박목사야, 너는 그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런 너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었다. 네가 잘나서 내가 너를 위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너도 똑같은 존재이지만 그러나 내가 너를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었다"는 거예요. 지금 니가 비난하는 그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세상에 그런 일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어요. 그러나 그들을 위하고 그들을 위해서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라고 했을때 세상 사람과 우리가 달라야 되는 부분은 어디냐? 세상은 비난할 지 모르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그 영혼을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깁니다. 제가 그 순간에 얼마나 부끄럽고 무안했는지 몰라요. '이제 하나님 제가 이렇게 둔하고 무식하고 옹졸하고 부족한 사람입니다. 주님 용서해주세요. 세상에는 우리 마음에 안드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 사람도 마음에 안들고 저 사람도 마음에 안들고 그런 사람들이 참 많이 있죠. 그럴때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이해하면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무조건 사랑은 안되지만 이해하면 사랑하게 되더라구요. 우리 먼저 '왜 그 사람이 그랬을까?' 한번 이해를 하면 사랑을 할 수가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아니 목사님 엔번방, 박사방 이거 어떻게 이해를 합니까?" 영적인 세계를 알면 이해가 되는 거예요. 영적인 세계를 모르면 우리는 이해가 안돼. 그러나 영적인 세계를 알고나면 이해가 돼요. 예수님은 사탄의 권세를 밟아버렸어요. 깨뜨려 버렸어요. 사탄의 권세를 꺾어버리셨는데 사람은 누구든 어떤 사람이든 사람이 틈타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악한 일을 할수가 있다라고 하는 거예요. 어찌보면 박사방, 엔번방보다 더 악한 일을 할 수도 있어요. 사탄에게 사로잡히면 그 사람이 악해서가 아니라 사탄에게 사로잡혀 노예가 되면 더 악한 일을 할 수도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안는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의 731 부대가 있었고, 독일도 그렇구요. 얼마나 이 인체 실험을 하고 사람들을 다 죽이고 말이죠. 그러면서 악한 일을 했습니까? 그것이 엔번 방보다 못하다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에요. 더 악한 일을 했어요. 사람이 악해지기 시작하면 사람을 죽이면서도 웃으면서 죽일 수 있더라구요. 그런 사진들을 볼때마다 얼마나 섬뜩해지는지 몰라요. 어떻게 이럴수가 있을까? 어느날 깨닫게 되는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닌라 악한 영에게 사로잡히면 그런 일을 하고도 남는다는 사실입니다.

요즘에 순진한 젊은 청년들, 또 건실한 가장이었던 사람들, 큰 기업의 회장이었던 분들까지도 한순간에 성적 범죄, 성폭력 이런거로 한순간에 다 무너지잖아요. 아니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그럴 수가 있느냐. 사탄이 틈 타면 그럴 수 있다는 거예요.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그런 점에서 신앙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와의 싸움이예요. 더 나아가서 악한 영과의 싸움입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악한 영아 물러가라. 성령님 오시옵소서.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을 붙들어야만 우리가 사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우리가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워하기 이전에 먼저 그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오늘 우리 성도님들 내가 진짜 진정 회개하는 삶의 모습을 살고 있다라고 하면 또 더 나아가서 거듭난 인생으로 거듭난 존재로 하나님께 사로잡힌 존재로 그렇게 살아간다라고 할 때에는 우리 이웃들을 사랑하며 원수를 사랑하며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며 미워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우리 일산광림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세번째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 성도님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고 노력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 무슨 말입니까? 많이 들어서 아는 것 같은데 잘 몰라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 그것은요 우리가 어떤 일을 선택할 때 내 유익이 되고 나의 욕심을 충족시켜주고 나에게 기쁨이 되는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것을 선택할 때 하나님께 기쁨이 되겠는가. 나에게 아무리 유익이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일이라고 하면 그 일을 돌아보지 않는 것입지요. 그리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선택하는 거에요.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길인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의 사도바울은 이전과 완전 변화된 삶을 살았어요. 회개의 삶입니다. 회개라고 하는건 메타노이아 가던 길을 가다가 아 이길이 잘못됐구나 유턴해서 돌아오는거죠. 이게 회개란 말이죠. 내가 부산을 가려 그랬는데 잘못해서 영동선을 타고 가는거에요. 그러면 가다보니까 이길로 가다가는 강원도가 나오지 부산이 나오는게 아닙니다. 그럼 어떡해야합니까? 그 길을 가면서 부산으로 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건 절대로 부산으로 갈 수가 없는거죠. 돌아서 방향을 전환해야 되는거죠. 오늘 내가 죄인의 삶을 살았지만 이제 선하게 하나님의 뜻을 쫓아 살겠습니다, 그러면 가던 길에서 삶의 방향을 바꾸는것이 진짜 회개라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내가 좋은것 내 욕심을 충족시킬 것, 내가 세상에서 좋아하는것, 그것을 향해서 내가 달려갔다라고 하면 이제는 거기서 돌아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가는거예요. 사도 바울의 삶의 고백이 바로 그것 아니겠습니까? 예전에는 내가 좋은대로 내 의를 충족하기 위해서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 하는 것, 이런 것들을 가지고 내가 세상 사람들보다 앞서 가는 것, 그것이 나의 기쁨이고 그것이 나의 자랑이었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나니까 이제는 그런거 배설물과 같이 버려버리고 나는 이제 하나님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며 살겠습니다. 매일 매 순간 우리는 선택을 해야하는데 그 매일 매순간순간 선택 할 때마다 내가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것을 선택할때 이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겠는가 그것을 선택하며 우리가 살아갈 때 우리는 실수하지 않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하나님 기뻐하시는 그것을 택하다보니까 핍박이 있고 어려움이 와도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거예요.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가서도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거예요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고 제자들을 세우고 교회를 건실하게 만들고 그들을 향해서 편지를 써서 보내요 내가 몸이 갈 수 없으니 편지를 써서 보내는거죠. 감옥에 갇혔을때도 옥중서신을 씁니다 애베소서를 쓰고 빌립보서를 쓰고 골로새서를 쓰고 내가 가지 못하니까 이 편지를 가지고 전달을 해달라고 그의 제자들을 시켜가지고 편지를 전달을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거예요 예수님처럼 오해도 받고 핍박도 받았지만 그 길이 영광의 길이라고 하는것을 사도바울은 알았다는거예요 세상사람들은 그런 사도바울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바보같다 어리석다 왜 좋은 길 버리고 고난의 길을 택하느냐 지금이라도 그만둬라 근데 사도바울은 그런 사람들의비난에 조금도 사람들의 조롱이나 비난이나 멸시나 이런거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어요 확신이 있었어요 자신의 길이 옳다라고 하는 확ㄱ신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달려가는거죠. 제가 이 사도바울의 모습을 볼때 확신가운데 달려가는 멋있는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소신있게 살아가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고 축복이라고 하는것을 알아야된다는것입니다. 소신있게 살아가다가도 누군가가 얘기를 하면 그래 맞아 내가 왜이렇게 살아야하나 내가 왜 교회를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고 내가 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아니요. 그렇지 않다는거에요 진짜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위해서 내가 이 세상것을 택할 것이냐, 하나님의 나라를 택할 것이냐 했을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으로 내 삶을 우선으로 살고 남으면 하나님의 삶을 돌아보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삶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확신을 가지고 달려갈 수 있는 우리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님들이 예수님 잘 믿고 교회를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면서 그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위해 사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살게 될 때 그 일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가치있는 길이라는거애요. 마지막 날에 후회하지 않는 그런 삶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일산광림교회 성도님들 우리 앞에 위기와 어려움도 있지만 성경을 보면 여호수아도 그런 위기와 갈등을 이겼어요 믿음으로 이겼죠 그 순간에는 어려웠어요. 포기하고 싶고 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이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근데 그걸 이겼어요. 특별한 존재가 됐어요.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골리앗 앞에 서있는 다윗도 사람들처럼 그냥 무리가운데 숨어있을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고 도전했어요.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고, 다니엘도 마찬가지구요. 그 모든 사람들이 도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금 피하고 싶지만 피하지 않았어요. 확신을 가지고 나아갔다는거죠.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세상을 살지만 나 혼자 사는게 아니죠. 나와 우리 예수님이 함께하신다 이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 주님과 동행하시면서 가치있고 복된 삶을 늘 그 가치있고 복된 삶을 선택하세요. 그러면 내 인생이 마지막에 가치있고 복된 인생이 되는 거에요. 그냥 내 욕심을 따라 그것만 선택하며 살다보면 마지막 날에는 내 욕심을 쫓아사는 그런 후회하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 주님이 온르도 우리 옆에서 우리를 응원하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세상앞에 기죽지 마시고 주님과 동행하시면서,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용서하면서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달려가시는, 확신 속에 승리하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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