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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금 더의 신앙 자세  
 
조금 더의 신앙 자세
설교날짜 2020.5.17
설교자 박동찬 목사
본문말씀 눅 19 : 1 - 10
 

누가복음 19 : 1-10

'조금 더'의 신앙 자세

오늘 거룩한 성일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우리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 가정가정에 충만히 임하게 되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깨닫게 되는 진리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하나가 심은대로 거둔다고 하는 진리입니다. 내가 사과씨를 심으면 사과열매를 맺게 되는것이고 또 배 씨를 심으면 배가 자라게 되는거죠. 꽃씨를 심으면 꽃을 피우게 되는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그런데 믿음을 심게 되어질때, 교회를 다니지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부정적인것을 심는 사람에게는 부정적인 것들이 열매 맺혀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긍정적인것을 심고 내 믿음을 심고 하나님의 말씀을 심게 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약속하신 것들을 거두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지금은 은퇴하신 목사님이신데, 제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잘 알지는 못하나 그 분이 참 얼마나 열심히 목회를 하셨는지 모릅니다. 교회를 크게 세우시고, 학교도 하시고 그러면서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전도에 열정을 가지셨던 분이십니다. 그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중에 "내가 믿은대로 될 지어다."라는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내 믿음대로 될 지어다." 라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이야깁니다. "단순하게 믿으면 단순하게 응답이 오고 복잡하게 믿으면 복잡하게 응답이 오고 안 믿으면 국물도 없다는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크게 믿으면 크게 이루어주시고 작게 믿으면 작게 이루어주시고 안믿으면 국물도 없습니다." 목회자들 세미나의 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언뜻 듣기에는 재미있는 말씀처럼 그렇게 들리지만 가만히 곱씹어보면 이 말씀이 참으로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삭개오의 이야기입니다. 삭개오는 세금을 거두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는 일, 세금을 거둬서 누구에게 주느냐하면 그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로마에게 갖다줘야하는거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 유대인들 입장에서 볼때는 이 세금을 거두는 자들은 적군의 편에서 우리의 돈을 빼앗아가서 저 적군에게 바치는 그런 존재로 비춰질수밖에 없다라고 하는거죠. 그러니까 세금 거두는 자들을 보면 유대인들은 아주 본능적으로 반감을 갖게 되고 그들을 밀어내는 그런 마음이 있다는거에요. 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늘 배척을 받는 tax collecter죠. 삭개오가 바로 그런 사람 이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 삭개오가 그러면 로마사람들에게는 인정을 받았느냐?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항상 그 많은 사람들이 잘 주지도 않는 세금을 억지로 뺏고 걷어서 로마에 갖다 바치게 될때 그 로마의 관리들은 또 이것밖에 못걷어왔느냐 너는 왜 하는 일이 그러느냐 칭찬하기보다는 책망하고 비난하고, 이런 소리를 늘 들었을거라는 거죠. 그래서 그 당시에 세금 거두는 사람들은 같은 민족인 이스라엘백성으로부터도 환영을 받지 못하고, 또 로마인으로부터도 환영을 받지 못하고. 그러다보니까 내가 아무리 잘 먹고 잘 산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기쁨이나 만족이나 내가 산다는게 이게 도대체 뭔가 언제까지 내가 이런 대접을 받으며 살아야되나, 이게 늘 괴롭고 고통스러울수밖에 없더라는거죠. 이것이 바로 그 유대인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산다는게 무엇인지, 내가 이렇게 계속 살아야될것인지 이런 저런 고민을 하고 있던 차에 들려오는 소문이 있었어요. 

나사렛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여리오에 살던 삭개오가 결단을 해야 될 때가 온 것입니다. '예수님 한번 만나보고싶다. 어쩌면 내 인생의 모든 갈등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이 예수님이실수 있겠다.'는 마음을 갖게되는거죠. 예수님이 오시는 길목에 나갔지만 오늘 성경에 있는 표현처럼 삭개오는 키가 작았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으니 또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다는 이야깁니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예수님을 너무나도 보고싶은 그 간절함때문에 다른 방법을 찾을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그 동선을 보니까 저 앞에 돌무화과나무 (예전에는 뽕나무라고 성경에 기록이 되어있었죠. 뽕나무 위에 올라갔다. 그런데 그 나무의 종류를 다시 잘 보니까 돌 무화과나무라고 알려졌어요. 그래서 우리 개역개정 성경에는 돌 무화과 나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돌 무화과나무는 아직도 여리고에 가면 있습니다. 거기에 올라가가지고 그 위에서 내려다볼수가 있으니 '예수님 지나가는 모습이라도 볼 수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돌 무화과나무 위로 삭개오가 올라가게 됩니다. 결국에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데 예수님이 지나가시다가 그 돌 무화과 나무에 올라가있는 삭개오를 보면서 "삭개오야 내려와라. 네가 나를 보기 위해서 거기까지 올라가는 그런 노력 하지 않아도 된다. 내려와라. 오늘 내가 너의 집에 있을것이다." 그래서 그 집에 가가지고 같이 식사도 하고 교제도 하고, 그러는 가운데 삭개오가 변화된 삶을 살게 되는거죠. 삭개오의 변화된 삶이 오늘 8절 말씀에 나오는데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나누겠습니다. 만일 내가 누구의 것을 속여서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배로 갚겠나이다.] 이렇게 고백을 하는거에요. 이걸 보면서 예수님이 기뻐하시면서 축복의 말씀을 선언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삭개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너희들 이 삭개오를 비난하지 마라, 죄인이라고 하고 업신여기지 말고 이 삭개오가 비록 세금거두는 일을 하며 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아브라함의 잃어버린 자녀다." 그 이야기를 선언을 해주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근데 오늘 우리가 이 삭개오의 얘기를 들으면서 오늘 삭개오가 이런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하는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 교제하기까지는 두번의 이 결정이 있었습니다. 선택을 하게 되어있다는거죠. 그게 뭐냐하면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을 들었을때 <나갈것이냐 말것이냐> 결단을 해야 하는 거예요. 나가기로 결단을 했죠. 나왔는데 보니까 키가 작은데 군중이 많이 있으니 이거 어떻게 해야하나, <돌아가야할것인가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가야 할 것인가> 이것을 갈등하지 않았겠습니까? 갈등 했겠다는 것이지요. 근데 그 상황속에서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만나는 그 길을 선택을 하게 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두 번의 그 불편함을 감수하기로 결정을 하는 거에요. 그리고 결국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축복을 받는 그런 존재가 되었다는 이야깁니다. 성경에 다른 모든 이야기들이 동일합니다. 가만히 있는데 어떤 하나님의 역사가 생기는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얘기는 오늘 우리 성도님들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자세에 달려있다는 거예요. 선택, 결정, 여기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이 용기있는 자세, 믿음의 자세를 갖는 사람들은 믿음의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이고, 용기를 포기하고 좌절하고 두려움의 그 길을 선택하게 되면 우리는 아무것도 이룰 수 있는 것이 없게 됩니다. 도전하는 자는 결과를 얻게 됩니다. <에베레스트 산, 8800미터가 넘는 그 곳에 올라가겠다>, 사람으로선 엄두를 낼 수가 없었지만 그러나 용기를 가지고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계획을 세우고 도전 한 사람은 끝내 그 정상을 정복하는 그런 사람으로 역사에 남게 되더라는 이야깁니다. 오늘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사실 어디서부터 중요하냐 우리의 자세에서부터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자세가 너무나도 중요하다는 이야깁니다.  군인은 군인의 자세를 유지할 때 군인다운 군인이 될 수 있습니다. 지도자는 지도자의 자세를 갖춰야하는 것이구요. 우리 신앙인, 크리스천들은 크리스천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자세를 유지하게 되어질 때, 우리는 바른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기적과 역사를 체험하는 그런 존재로 살아갈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런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워져 갈 수가 있습니다.

근데 이 신앙의 자세에 대해서 여러가지를 얘기할 수가 있겠지만, 한가지만 말씀을 드린다고 하면, 오늘 설교의 제목과 같이 '조금 더'의 신앙 자세입니다. 이런 신앙 자세를 갖게 될 때 우리는 위기를 극복하는 놀라운 일을 만들어내는 줄로 믿습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비교급이죠. "남들보다 조금 더.", "과거보다 조금 더.", "내 생각보다 조금 더." 이 조금 더의 신앙자세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거예요. 이런 자세를 갖게 될 때 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놀라운 기적의 역사를 맺는것을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저는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조금 더 해야하는가, 세가지 말씀을 잠시 전하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는 조금 더 큰 믿음을 갖자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것은 '믿음'입니다. 근데 이 믿음이라는 것은 어느 한순간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서 어떤 분들은 와서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아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하시며 대성통곡을 하고 회개하고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러시는 분들이 있더라구요. 어떤분들을 10년이 지나서 하나님을 만나는 분도 있고, 그런 감격을 체험하는 분도 있지만 오자마자 체험하시는 분들도 있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오자마자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깨닫기 때문에 그래서 눈물 흘리고 내가 회개하고 돌아섰기 때문에 내 신앙이 성장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아요. 그것은 그 순간의 감격일 뿐이지 신앙의 성장은 그렇게 오는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씨앗을 심고 나서 그 곳에 싹이 자랐을 때 모진 비바람이 불기도 하고 폭풍우가 불기도 합니다. 그것을 다 견뎌내면서 흔들리면서 성장하는 거예요. 시간이 지나다보면 또 맑은 날씨도 있지만 또다시 이 폭풍우가 불어닥치는 그런 날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것들을 다 맞아내면서 성장을 하게 되는거죠. 그리고 나중에는 큰 나무가 되어지는 것 처럼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는 결코 하나님 버리지 않으리 그러다가도 큰 위기가 닥쳐오면 내가 무너지고 넘어지고 이것을 경험하게 되는거죠. 좌절도 했지만 그 다음에 또 말씀 붙잡고 또 일어나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점점 더 성장하는 신앙인이 되어져가는것을 볼 수가 있다는 이야깁니다. 그래서 우리 어린아이들이 자랄때 성장통이라고 하는것이 있지요. 근데 우리 신앙생활을 할 때에도 그런 성장통이 있어야 한다는 거에요.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위기가 닥치고 저런 아픔이 오고 이런 어떤 문제를 통해서 내 본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그 잘못된 부분들을 수정해 나가면서 온전하게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해 가는것을 볼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삭개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앞에 이 결단한 모습이 그의 믿음의 결정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거죠. 평소처럼 예수님이 지나가신다고 하는데 우리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뛰쳐나가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지나간다고 해도 '아 예수님이랑 나랑 무슨 상관이 있나, 집에서 편하게 쉬는게 좋지, 다 헛수고야. 만나봐야 뭐 별 거 있겠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절대로 만날수가 없어요. 그런데 옷을 입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 많은 군중 앞에서 내가 나아가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결단하게되면 이 마음의 자세가 '내가 오늘은 꼭 예수님을 만나야되겠다.'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불편할수도, 귀찮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자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그 길을 삭개오가 갔지만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단 말이에요. 그러면 '아 아까 생각했던대로 집에서 나가지 말 것을...' 이러고 후회하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그런데 삭개오는 '아냐, 이런다고 내가 포기할수는 없어.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만나야해.' 보니까 앞에 돌무화과나무가 있으니 거기로 올라간단 말이에요. 

여러분 나무에 올라가 보신 적 있으십니까? 제가 예전에 한 번 우리 목사님들과 함께 제주도에 갔는데 거기 나무가 있었습니다. 얼핏보면 올라가기 쉽게 생긴 나무였습니다. 한 목사님이 어린시절을 추억하면서 막 올라가시더라구요. 그리고 아주 잘난척을 하시니까 다른 분들도 올라가겠다고 올라가는데 저도 도전해봤지만 쉬운것이 아니더라는 거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살도 찌고 몸이 둔해져 어린시절의 날렵함이라는것을 찾아볼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이 있더라도 올라갈 수가 없어요. 제가 올라가면서 삭개오 생각이 나더라구요. '이야, 삭개오가 여기에 어떻게 올라갔을까.. 돌 무화과 나무를 어떻게 올라갔을까...?' 힘들었겠지만 올라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떤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라도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지 올라가자!"이런 마음을 가지고 부자의 체면같은 것도 다 잊고 올라갔단 말이에요. 삭개오는 키가 작은 사람인데...... 안그래도 비난을 받는 존재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키 작은 삭개오가 나무를 타는것을 보고 얼마나 비웃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비웃음조차도 내려놓는거예요. '나는 지금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했을때 이 삭개오와 같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그런 모습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이야깁니다. 우리는 그저 예전에 예배를 늘 드리던 매너리즘에 빠진 자세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을 드리는 예배를 드릴수가 없다는거죠.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고자 하는 삭개오는 결단을 가지고 올라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변화된 삶을 살게 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존재가 되었다는 이야깁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기적 이야기도 마찬가지에요. 결국 무너뜨리는건 하나님이 무너뜨렸지만 하나님께서 그 기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조금더의 믿음이 있는지 그것을 테스트 하는거에요. 그래서 말씀을 주시는것이 "하루에 한 바퀴씩 6일동안 돌고 7일째 되는 날은 7바퀴를 돌아라. 그리고 나서 함성을 외쳐라." 여러분 이게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끼? 그런다고 무너지겠습니까?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은 그렇게 해서 무너지지 않는다는거에요. 때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은 터무니 없어 보입니다. 이런다고 해서 이것이 합리적으로 무너지겠습니까? 차라리 돌을 모으고 진흙을 모아 큰 돌을 만들어 말려서 그것으로 대포를 쏘는것이 합리적이고 다들 '아 그러면 무너질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을 하겠지만 조용히 말도 없이 한바퀴씩 6일을 돌다가 7일째에 7바퀴를 돌고 다 돌고 난 후에 신호가 오면 "와!"하고 외치는 그 함성소리에 무너져내리는 그 여리고성이 종이성이지 무슨 돌로 만든 난공불락의 성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이유는 무엇이냐? 거기에 대한 믿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능치 못할일이 없다는 믿음이 있느냐 이말이죠. 그 믿음이 있는지를 보시기 위해서 그런 말씀을 주시는거예요. 

오늘 우리는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고 배우고 세상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그 한계가 있단말이죠. 그 한계 안에서는 우리가 다 믿어요. 무슨 얘기를 해도 믿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근데 내 지식과 내 경험의 한계를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되면 우리는 그 부분에 대해서 동의하지 못하게 되고 "그런일은 일어날수가 없습니다." 하고 결론을 지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아는 범위를 넘어선 이야기를 하는 분은 '이상한 사람이다. 맹신하는 사람이다. 저분은 좀 허무맹랑하신 분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들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도 여리고성을 점령하실때 그 말도안되는, 우리의 지식과 경험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을 요구하시는 이유는 믿음으로 너의 지식과 경험의 한계를 뛰어넘으라는 거예요. 거기를 넘어서라는거죠. '조금 더'의 믿음을 가져야 된다는 이야깁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 '조금 더'의 믿음을 갖게 되고 여리고성이 무너지게 되는거죠. 그런데 이 여리고성의 경우에 참 감사한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여호수아라고하는 믿음의 지도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지도자. 그 믿음의 지도자의 명령이에요.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명령을 거역할 때가 있지만 세상적인 지도자의 말씀에 대해서는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게 되는거죠. 여호수아가 그런 방법을 가르쳐주고 "그렇게 해라, 사인이 오면 함성을 질러라."라고 말 할 때에는 순종했습니다. 믿음의 지도자가 참 중요합니다. 믿음의 지도자를 따르는 거예요. 아마 그 원을 돌면서도 이게 뭐하는 짓인가 반발을 하는 이스라엘 군사들이 없었겠습니까? 수도 없이 많았겠죠. 그러나 지도자가 돌라고 하니까 말을 들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지도자가 있는거죠. 감사하게도 그 지도자가 믿음의 지도자였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명령을 통해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그런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거죠.

신약에 보면 열두해 동안 혈루증 앓았던 여인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열두해를 하혈하고 "너무 힘이 들어요. 가진 재산을 치료비로 전부 탕진했습니다. 그런데도 낫지 않아요."라고 하지만 마지막 소원은 '너무나도 힘이 들고 내가 죽게 되었으니 예수님 지나가신다고 하는데 내가 거기에 따라가서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뒤에서 잡아야겠다.'하는 것이었습니다. 보통 사람은 가지지 못하는 믿음. 그 보통 사람들의 믿음을 넘어서는 조금 더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지요. 그리고 가서 많은 군중들을 헤치고 나아갔습니다. 삭개오는 그 군중들을 헤치지 못하고 돌 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가는데 이 여성은 어찌된 일인지 그 사람들을 밀치고 어떻게 해서든 헤치고 나아가는거에요. 그런데 이 여인에게는 문제가 있었어요. 내가 하혈을 하고 그렇게 혈루증 여인이라고 하면 그 당시 유대의 법은 이게 부정한 여인이란 말이죠. 부정한 여인이 내가 다른 사람을 만지면 그 사람도 부정하게 되는거에요. 그래서 그렇게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부정한 여인이라는것을 군중들이 알게 되면 나를 밀쳐내고 나에게 돌을 던져서 내가 그 자리에서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그 위험속에서 차라리 그 위험속에서 죽는것이 내가 지금 이 병을 가지고 고생하며 사는것보다 낫다는 그런 마음이 있었던거죠. 헤치고 나아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지 않습니까? 그러한 남들보다 조금 더의 믿음. 그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서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게 될 때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런 위기중에, 지금이 많이들 위기라고 얘기합니다. 경제적으로도 위기고, 코로나로도 위기이고, 이것도, 저것도 위기이고 앞도 캄캄해보이지만 이럴때일수록 우리 하나님 말씀을 의지하고 조금 더의 믿음을 갖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인간이 아무리 탁월하고 달나라에 가고 인공지능을 만들고 컴퓨터를 만들며 인간의 대단함을 자랑한다고 하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작은 바이러스로 인해서 사람들이 다 맥없이 쓰러지고 넘어지는 모습을 보고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교만할 것이 없다는 거에요. 이럴 때 일수록 우리의 교만한 옛 모습들 다 내려놓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갔던 삭개오처럼, 예수님 앞으로 나아갔던 혈루증 여인처럼 우리도 예수님앞으로 하나님 앞으로 한 걸음 더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 일산광림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두번째 우리가 가져야되는 자세는 조금 더 노력하는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조금 더 큰 믿음, 두번째는 조금 더 노력하자는 거예요. 우리가 아는 격언중에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말씀 다 공감을 하시지요. 모든것이 다 우리의 노력으로 인해 결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동물은 가만히 내버려둬도 동물이 돼요. 망아지는 자라면 말이 되고 송아지는 가만히 내버려둬도 나중에 소가 됩니다. 토끼는 토끼가 되고. 모든 동물은 다 그렇게 되지만 사람은 가만히 내버려두면 사람이 되지 않고 짐승같은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서부터 인간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인간을 교육합니다. 근데 요즘 뉴스를 통해서 들려지는 사건 사고의 이야기들을 가만히 들어볼 것 같으면 사람이 좋은 교육을 받고 일류대학을 나오고 해도 인간 이하의 행동, 경악할 만 한 그런 행동을 저지르는 우리가 뉴스를 통해서 보게됩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되는것이 무엇입니까? '아 세상 교육으로는 안되는 것이구나. 세상 교육 가지고는 사람이 사람이 되는것이 아니구나. 많은 지식을 가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지식을 가지고 인간다운 존재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구나.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앞에 고꾸라지고 이렇게 살면 안된다는 구구절절한 회개의 고백이 내 입에서 흘러나와요.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렇게 약한 존재로구나. 정말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존재로구나. 다시 신앙교육이 제대로 우리의 심령가운데 박혀지지 않으면 그 어떤 좋은 세상 교육을 받는다 할지라도 내가 세상으로부터 받은 그 교육으로 인해서 결국에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다보면 후회하는 결과를 낳을 수 밖에 없겠구나.' 

사람은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아십니까? 그 답은 바로 내가 노력하는 만큼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남들 놀 때 나도 놀고 남들 잘 때 나도 자고, 그러면서 어떻게 앞서갈수가 있고 그러면서 어떻게 지도자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크리스챤, 내가 크리스찬으로, 하나님의 부름받은 자녀로 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네가 이 세상의 지도자로 서라"는 말씀이에요. 지도자라는 것은 어떤 지위적으로, 세상적인 지위로도 내가 지도자의 자리에 설 수가 있지만 그것 보다는 지도자 답게 살아가는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크리스찬들을 부르시고 네가 세상의 지도자로 살아라, 어떤 회사나 사회적인 지위를 가지고도 지도자가 될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도 크리스찬 답게 사는 그 모습을 통해서 이 어둠의 세상을 비추는 빛의 사명을 가지고 살아야한다는 이야기를 하는거예요. 그래서 우리 크리스찬들은 남들보다 조금 더 노력해야합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더 노력해야합니다. 어떻게 노력합니까? 바르게 살려고 노력해야하는거예요. 하나님 말씀 따라 살려고, 어둠이 되는것이 아닌 빛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사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깁니다. 항상 본이 되는 삶, 그것이 크리스찬으로 크리스찬 답게 살아가는 비결인 것을 우리 성도님들이 분명히 기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제가 청년들을 지도할 때 늘 하는 말이 있어요. "너희들 남들보다 빨리 승진하고 인정받고 영향력을 미치는 그런 존재가 되기를 원하느냐? 그러면 두가지를 하면 된다. 첫째는 회사에 다닐 때 남들보다 10분 일찍 출근하고 10분 늦게 퇴근해라. 그리고 두번째는 남들이 하기 꺼려하는 일, 이거 그냥 눈 질끈 감고 내가 하겠다고 나서라. 이거 두가지만 잘 하면 인정받는다." 제게 이런 얘기는 너무나도 지극히 단순한 이야기죠. 그 사실을 모르는 분은 없지만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지요. 제가 그렇게 살아라, 그렇게 사는것이 본이 되는 삶이다. 너무나도 플러스 마이너스 계산 따지면서 손해와 이익을 따지며 사는것은 크리스찬으로서의 삶을 살아갈수가 없다는 거예요. 크리스찬의 삶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듯이 우리도 나누고 베풀고 헌신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타인을 위해 살겠습니다." 라고 다짐하는 모습이 돼야 된다는거죠. 제가 이 두가지를 청년들을 만나면서 빨리 성공하고 싶으면 이 두가지를 몸에 베게 해야한다고 말합니다.

지난 화요일에 청년으로부터 카톡이 왔어요. "목사님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지금 어려운 시기에 제가 40명을 이끄는 부팀장으로 승진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지금 어려운 시기라 구조조정도 되는데 저는 오히려 승진했습니다. 목사님 설교중에 제일 먼저 출근하고 제일 마지막으로 퇴근하라 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저는 남들보다 두시간 일찍 출근해서 책상에서 기도하고 노력했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 회사에는 유학파 사람들도 있고, 일류대학 출신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보다 제가 먼저 승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카톡이 왔습니다. 제가 이 문자를 받고 참 기뻤습니다. 기뻤던 이유는 이 형제가 이렇게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승진하는 자리에 올라간것이 기쁘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도 '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때 말씀 붙잡고 그저 주일 예배 때 강단에서 선포되어지는 그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 칠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구나.' 그 몸부림치는 행동 자체가 사랑스럽고 감사했습니다. 
내가 노력하는 만큼 성장합니다. 노력하는 만큼 남들보다 앞서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어려운 위기상황이라고 말들을 합니다. 마치 군중에 막혀서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삭개오처럼 답이 없어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삭개오처럼 돌 무화과 나무 위에라도 올라가려는 노력을 해야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처럼 우리도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고 기적을 만들어가는 그런 존재로 이 위기를 헤쳐나가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실 줄로 믿습니다. 조금 더, 과거보다 조금 더, 내가 여지껏 했던 것보다 조금 더, 조금 더 노력하는 자세를 가지고 다시 낙심하지 않고 도전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와 축복으로 우리를 붙드시고 이끌어가시는 역사를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셋째로는, 조금 더 사랑하는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가장 귀하고 가치있게 여겨야되는것은 무엇이냐면 바로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절에서 3절 말씀을 보면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또 내가 내게있는 모든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편지를 띄우면서 그 고린도 교회에 얼마나 놀라운 성령의 은사들이 있었는지 몰라요. 방언을 하고 천사의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기도 하고 능력을 행하기도 하고 산을 옮길만 한 믿음이 있기도 한 역사들이 많이 나타는데 그런데 오늘 이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는 한마디는 "너희들 그렇게 천사의 방언을 하고 여러가지 예언을 해도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할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거예요. 사랑이 성령의 은사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겁니다. 우리 신앙생활 하면서 성령의 은사와 능력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것이 있다면 사랑이라는 얘기입니다.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거죠. 구제하는것, 내 모든것을 다 나눠주는 것도 위대하고 훌륭한 일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건 사랑이 없다면 그 일들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은사보다 귀한 것이고 사랑은 구제하는 행위보다 중요한 것이다. 무슨 얘깁니까?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것이죠. 요한일서 4장 8절에도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오늘 삭개오의 집에 가셨어요. 그와 더불어서 식사도 하고 가르침도 주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봤어요. 그 사람들 중에서는 그것을 가지고 수군거리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오늘 7절말씀에 보면 [뭇 사람이 보고 수근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아니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의 메시아로 오셨으면 죄인을 버려야지 저렇게 죄인의 집에 들어가 어울리시고 밥도 먹고 저게 도대체 뭔가?"라며 사람들이 수근거리고 비난했다는 거죠. 예수님은 삭개오도 앞에 있었고 그 주위에 모여있는 사람도 있었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고, 이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삭개오의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고 가르쳐주고 싶었던 부분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 모든 사람들이 비난하고,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도 비난을 당하고, 로마의 사람들로 부터도 비난을 당하는 삶. 그래서 삶의 기쁨과 행복, 만족이 없어요. 부자이고 돈이 많을지라도 그 기쁨이 없이 늘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하는 삭개오를 보면서 주님이 주고 싶으신 것은 "나는 너를 사랑한다.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신다. 너를 잊지 않는다. " 라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고 예수님이 가르쳐주고 싶었던것은 "사람은 사랑을 필요로 하는 존재다. 누구랄 것 없이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필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삭개오의 삶과 모습에 예수님께서 주고 싶었던 것은 사랑이고, 옆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싶었던 것은 사랑의 행위입니다. 이것을 너희들도 실천해라. 이것을 가르쳐주고 계시는 거죠. 

오늘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내 나름대로 기준을 가지고 사람들을 평가할 때가 많아요. 그런데 사실 우리는 내가 누구를 평가할 만큼 그렇게 대단한 존재이냐, 완전한 존재인가 하고 물으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사람을 평가합니다. 오늘 로마서 3장 10절에 보면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누가 누구를 평가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이야깁니다.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적어도 내가 세상 사람으로 있다가 예수님을 믿고 이제는 예수님을 따르는 크리스찬이 되었다고 하면, 적어도 내 삶의 태도중에 하나는 바뀌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제 이후로는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이든 또 뭐 잘난 사람이든 누가 되었든 "사람을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이것 하나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꼭 지켜나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깁니다. "목사님 어떻게 사랑해야하는지 모르겠어요. 원수도 사랑해야하는것입니까? 원수도 사랑 못하겠고 그냥 내 주변에 지나치는 사람도 사랑 못하겠어요." 하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라는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세 가지를 말씀을 드린대로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첫째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게 사랑입니다. 평가부터 하려고 하면 안돼요. 평가부터 하려고 하면 사랑할수가 없습니다. 그 순간부터 원수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 시작은 모든 사람을 봤을 때 평가보다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이게 사랑의 첫 번째 첫 걸음 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이해하려고 노력해야해요. 두번째, 평가하지 말고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고 공감해주어야 합니다. 평가하려고 하지 마세요. 자꾸 우리의 생각속에는 평가가 떠오릅니다. 왜저래야 하는가? 왜 이래야 하는건가? 이룰 수 있는데 왜저래야하는가? 그저 우리 보면서 평가가 되는거죠. 평가하려고 하지 말고 이해하고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고 공감해야합니다. 그 다음 세번째는 섬겨야합니다. 아 저 친구에게는 내가 이것을 좀 더 도와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대단한 것이 아닌 도울 수 있는 작은것을 도와주게 되었을 때,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전해주고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부분들을 도와줄 때 사랑할 수 있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이해하지 말고 노력해야합니다. 평가하지 말고 공감해줘야 합니다. 도울 수 있는것을 도우며 섬겨줄 때 사랑이 시작됩니다.> 그러다보면 나도 모르게 내 안에서 그를 향한 사랑이 싹터오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지금은 위기의 시기라고 얘기를 합니다. 늘 말씀드리듯이 위기는 기회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시고 조금 더 큰 믿음, 조금 더 노력하는 자세, 조금 더 사랑하는 마음 이것을 갖게 될 때 오늘 우리는 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 하나님의 도우심의 역사를 경험할 뿐만 아니라 기적의 열매를 맺는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질줄로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한주간 승리의 삶을 걸어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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