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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진정 부요한 성도  
 
진정 부요한 성도
설교날짜 2020.7.12
설교자 박동찬 목사
본문말씀 계 2 : 8 - 11
 

200712 박동찬목사님


요한계시록 2장 8절-11절

진정 부요한 성도



오늘은 소아시아 7교회중의 두번째 교회인 서머나교회의 이야기입니다. 감사한 것은 이 서머나 교회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가운데 우리가 성경을 보면 다섯 교회는 책망을 받고 두 교회가 칭찬을 받게 되는데 그 칭찬 받은 두 교회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서머나 교회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때로 칭찬받는 교회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감이 오십니까? '그까짓 칭찬 받는게 뭐가 중요해, 세상에서 내가 큰 것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지 칭찬받는 것이 대단한 것인가?' 혹시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가장 귀한 것이 있다고 하면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 칭찬을 받는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귀한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칭찬을 받는 것 보다 세상에서 칭찬받는 것을 더 좋아하지요. 세상에서 나를 과시하는 것을 더 좋아하고 남들이 나를 보면서 부러워하는 것을 더 좋아하며 더 앞서가는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노력을 하며 달려가는지 모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이 세상에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빨리 지나갑니까? 정말 가면 갈수록 시간이 빠르다는 것을 우리가 절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칭찬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순간적이고 찰나입니다. 또 '기분이 좋다.' 생각하면 어느 틈엔가 그것이 다 지나가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그래서 잠깐 기쁘고 마는 것이 세상에서의 칭찬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 인간의 존재를 생각해보면 인간의 존재는 영원히 사는 존재입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 그대로 우리의 몸은 흙에서 만들어졌으니 죽으면 몸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사는 존재가 됩니다. 소멸되지 않습니다. 몸은 죽어서 흙으로 가고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 앞의 심판대 앞으로 가게 되는거죠. 

히브리서 9장 27절에 보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을 열심히 잘 살아야 되는 이유가 바로 우리가 살면서 행했던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평가를 받아야 하는 시간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세상 사람들은 그냥 비웃습니다. '에이, 그런게 어디있다고. 죽으면 끝이지.'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 영원한 세상을 직접 경험했던 사도바울은 그 세계를 경험하고 와서 보니 '아 이 성경의 말씀이 진리로구나,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 대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끝이 아니구나. 영원한 세상이 있구나.' 이것을 확신하게 되니 그동안 자신의 학식이나 가정 배경이나 자기가 가졌던 모든 것들,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던 그 모든 것들, 나도 갖고싶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었고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영원한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복음을 전하고 복음과 함께 고난을 당하는 일 가운데 앞장서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어려움 가운데 살던 사람이 너무 어렵게 사니까 내가 더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 내가 좀 열심히 내 자손들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서 뭔가 성공해야겠다. 하는 마음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세상앞에서 잘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갖는 세상을 사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반대로 잘 살고 있던 사람이 이거 아니야 그러고 고난과 핍박을 당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돌아섰다는 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에요. 어떻게 그럴수가 있냐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변화된 삶, 복음과 함께 고난을 당하는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것이 바로 "나는 예수님을 만났다. 내가 무시했던 예수님, 그런 존재는 거짓이라고 얘기했던 예수님은 살아계시고 부활하신 그 예수님을 만났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삼층 하늘에 올라가서 천국의 영원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직접 봤다는 거예요. 그러고 나니까 이제는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 마라, 그것은 어리석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사도바울의 귀에는 그런 이야기가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보니 이 세상에서 내가 조금 더 잘 살아야 하겠다, 조금 더 많이 가져야 하겠다 하며 아둥바둥 사는 삶이 얼마나 무의미 한지 심지어는 어리석게까지 여겨지더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삶을 알게 되니까 진짜 가치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고 나니 이 땅의 것만 바라보고 그것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깨닫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사도바울에게 "그만하세요, 그렇게 고난당하지 마세요, 쉽게 갑시다. 잘 갈 수도 있잖아요. 이런 상황은 피해 갈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권면하는 사람에게마저 "내가 지금 당하는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에 족히 비교할수가 없다. 내가 지금 고난당하는 것으로 인해서 내가 천국에 갔을 때 받게 되는 상급에 비하면 내가 고난 조금 당하고, 매 몇 대 맞으며 어려움 당했지만 천국에 가서 받게 되는 보상은 어마어마 한 것이다. 이 귀한 것을 안하고 사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다."라고 설명하는 사도바울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도 사도바울이 이야기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하면, 죽어서 이 세상이 전부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어리석고 비참하고 가련한 존재이다. 그러나 반대로 영원한 세상이 있다고 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야 말로 이 땅에서 내가 어떻게 살던지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우리 그리스도인, 내가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르른 그 그리스도인 만큼 복된 존재는 없다"고 합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가 주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 그 자리에 선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나중에 이 세상에서 편하게 살던 사람들이 너무나도 부러워하는 존재가 되어질 수 있다고 하는 이야깁니다. 

이런 성경의 신비를 깨닫고 나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칭찬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칭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이것보다 더 값지고 가치있는, 더 감사하고 행복한 일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소 아시아 일곱 교회중에 영적으로 부요했던 서머나 교회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 일산광림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이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서 칭찬을 받는 교회, 칭찬을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칭찬을 받는 다는 것은 가만히 있는데 칭찬을 받지는 않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칭찬 받는 교회가 되는 것은, 칭찬 받는 삶을 살았다고 하는 것은 어려움을 견디고, 세상을 잘 분별하고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깁니다. 저는 오늘 서머나 교회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배우고 따라야 할 두 가지 교훈의 말씀을 잠시 전하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영적으로 부요해지기 위해 힘써야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부요한 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영적으로 부요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다 세상에서 부요한 자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며 전력질주하고 있는지 몰라요. 그런데 진짜 부요함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세상에서 노력해서 내가 세상적인 것을 많이 갖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가져봐야 만족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영적으로 부요해 질 때 나는 내가 세상에서 남들 만큼 많은 것을 가지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내 마음 속에는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진정한 부요함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 부요함 가운데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는것은 내 안에 영적인 부요함이 있게 되어질 때 만이 누릴 수 있게 되는 축복이라는 이야깁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신기한 존재입니다. 그저 작은 존재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사람의 존재는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작은 존재이지만 사람의 속은 우주를 다 품어 안을 만큼 큽니다. 마치 블랙홀과 같습니다. 인간의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블랙홀과 같은 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아 저것만 가지면 내가 만족하겠다.' 생각하지만 가져보십시오. 그게 만족이 됩니까? 단지 그 순간 뿐입니다. 또 지나게 되면 우리는 이내 또 다른 것을 갈망하게 되어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갖는다고 해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이내 또다른 무언가를 추구하고 그것을 얻어내려고 사는 모습들을 우리가 보게 된다는 이야깁니다.

세상의 모든 권력과 부귀영화를 다 가지면 만족하고 살 것 처럼 보입니까? 보이기는 그렇게 보일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간에 비통한 뉴스를 들었어요. 서울 시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저는 정치적인 선호도와 상관 없이 그 소식을 들으면서 참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강하고 단단한 사람처럼 보여졌어요. 그런데 무엇이 도대체 저 사람을 저렇게 극단적인 결론에 이르게 했을까? 세상적으로 다 가진 사람이었어요. 유력한 대통령 후보 물망에도 오르는 분이었죠. 그동안 세상의 역경, 위기 다 이기고 숱한 역경과 공격을 이기고 그 자리에 오른 것이었을 텐데 왜 무엇 때문에 그런 선택을 했을까요? 
세상에서는 뭐 이래서 그렇다 저래서 그렇다 많은 말들이 있습니다. 이유야 있겠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지면 안되는 것 아닙니까?

세상의 많은 유명 연예인들도 마찬가지잖아요. 우리가 볼 때는 얼마나 화려합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지내옵니까? 그런데 어느날 보면 자살이라고 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 분들도 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요. 그 가운데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담당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런데 그러지 못한 분들도 있고, 누구는 이렇게 멋지게 인생을 살고 세상에서 본이 되고 섬기고 나누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삶을 사는가 하면 한순간에 극단적인 결론에 이르게 되는 그런 연예인들도 많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속이 허전하기 때문입니다. 술로 달래보려 해도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고. 괴로운 문제도 있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목숨을 끊을 만큼 큰 문제냐 하면 목숨을 끊을 만큼 큰 문제는 세상에 없습니다. 저는 지금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모든 인간은 이렇게 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약함은 세상적인 것들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고급진 것으로 내 몸을 치장한다고 해서 내가 단단한 존재로 서 있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붙들어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그 누구도 내일을 장담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세상 속에서 단단한 존재로 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실상 필요한 것은 내가 단단한 존재로 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위기가 닥쳐와도, 어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내가 가야 할 길, 바른 길을 걸어가는 존재가 될수 있다는 이야깁니다. 그런데 이런 삶은 외적인 풍요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풍요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즉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영적인 충만함이 없이는 우리는 내적인 풍요함을 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블랙홀 처럼 깊은,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은 우주를 넣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이것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은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들어오게 될 때 채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오게 될 때 우리는 만족합니다. 그제서야 끝이 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채워지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갈망하며 살게 됩니다. 

우리 어렸을 때 먹던 공갈빵 아시지요? 속이 다 채워져 있는 줄 알고 잡는 순간 바사삭 부서지면서 속은 다 텅텅 비어있잖아요? 우리 인생이 마치 공갈빵 같이 겉으로만 부풀려진 인생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서머나'라고 하는 지역의 이야깁니다. 지금은 터키의 이즈미르라고 하는 도시입니다. 그곳에 성지 순례를 가볼 수가 있습니다. 터키의 세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에게해 지역의 가장 큰 항구도시이고, 우리가 잘 아는 일리어드라고 하는 유명한 소설을 쓴 호머 시인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유명한 역사학자 키케로는 이야기하기를 아시아에서 가장 발전하는 도시 중 하나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요한계시록이 쓰여지던 당시만 하더라도 이 서머나라고 하던 지역은 에배소와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번성했던 도시입니다. 풍요가 아주 넘쳐 흐르는 그런 도시가 바로 이 서머나라고 하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풍성한 지역에 있는 교회, 서머나 교회는 아주 궁핍하고 가난하고 어렵고 환란과 핍박이 끊이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세상에서 이 교회를 볼 때 참 어리석어 보이겠지요. 이렇게 부요와 풍요가 넘치는데 세상것을 끊어버리고 신앙을 지키겠다고 사는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어 보였겠습니까? 황배를 숭배하던 1순위 도시가 바로 서머나였기 때문에 황배를 숭배하지 않는 종교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공식적으로 박해하고 핍박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서머나 지역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머나 교회는 고난과 핍박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이 말씀을 가만히 묵상하다가 서머나 교회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봤어요. 이들이 세상을 부러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잘 따르는 성도가 되고자 결단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세상의 풍요와 즐거움을 참아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았다고 하면 적어도 우리 생각에는 '이 땅에서 세상 사는 사람들보다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에 더 풍요롭고 명예롭게 살아야 하는 것 아냐?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칭찬은 못받더라도 고난이나 핍박이나 조롱은 없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더 열심히 더 잘 살려고 할수록 더 가난하고 더 궁핍하고 세상사람들로 부터 더 큰 핍박을 받아야 되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도대체 내가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이런 회의가 생길 법도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이런 상황속에 처한다고 하면 우리는 어땠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을 믿겠다고 따라 갔을까요? 우리 성도님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축복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축복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지요. 영원한 생명을 얻고. 예수 믿었으니 이 세상에서 잘 되어야 합니다 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자세입니다. 잘 살 수도 있고 못 살 수도 있고 어려울수도, 궁핍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삶과 우리의 신앙은 무관한 이야깁니다. 

요즘 방송을 보면 코로나19로 인해서 교회에 확진자가 늘어난다는 소식이 종종 나오고는 합니다. 객관적으로 가만히 봤는데 세상에서는 교회를 마녀사냥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마녀사냥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공평성이나 어떤 분명한 한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너!" 라고 부르면 두들겨 맞는 것이지요. 통계적으로 제가 보니 교회에서 확진자가 나온 것은 전체 확진자 가운데 1.8%밖에 되지 않습니다. 전체 인구가 아닌 확진자중의 1.8%가 교회에서 확진된 사람입니다. 물류센터, 콜센터, 방문판매, 클럽, 운동시설, 병원, 식당보다 적은 수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만 모임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못하게 하는 것에서 그치면 좋겠지만 300만원이라는 벌금도 부과합니다. 여전히 극장, 유흥시설, 피시방, 학원, 동호회, 동창회, 커피숍, 식당같은 곳에는 일주일 내내 사람들이 바글바글 합니다. 거기는 뭐 코로나가 피해갑니까?

뉴스를 보니 수천명이 출석하는 교회에 확진자가 생겼다고 합니다. 실제 검사를 해보니 외부에서 걸린 사람이 한 명, 두 명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다 조사해봤더니 없어요. 그 사람 하나에요. 그것은 교회확진자가 온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뉴스에 내보낼 때에는 수천명 교회 성도중 확진자가 생겼다고 하면 일반적으로 듣기에 무슨 느낌이 드느냐? '이야 또 교회에서 확진자가 수천명이 나왔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검사해보면 다 멀쩡하고 외부에서 들어온 한 사람이 확진인 것입니다. 하는 보도는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아니면 말고~합니다. 그러고서는 교회가 마치 전염병 집단인 것 같이 말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 '참 형평성에 어긋난다.'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왜 교회에서만 벌금을 물릴까? 이게 과연 옳은 지침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구요. 

시민들은 뉴스를 보면서 교회를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궁금한 것이 있었어요. 이런 비난의 소리, 교회를 궁지로 모는 이런 소리를 들었을 때 우리 성도님들은 어떤 생각을 하실까요? 안타까워하는 분이 있습니다. 왜 교회만 가지고 그러나. 또 어떤 분들은 더 나아가서 분노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뉴스가 이렇게 교회를 핍박 할 수 있어. 교회가 가만히 있으면 안됩니다. 하는 분이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세상의 편에 서서 교회가 그러면 안된다, 이럴 때는 교회가 절제해야 한다, 세상 이야기가 옳다. 고 하며 세상의 편에 서는 분들도 있습니다.  세상 편에 설 수도 있겠지요. 교회가 조심해야한다는 말 자체가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동기가 교회를 비난하는 대열에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본인도 성도면서 교회를 비난하는 자리에 들어가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이런 핍박과 세상의 조롱을 나는 듣기 싫다.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칭찬을 듣고 싶지 내가 세상으로 부터 비난을 듣고 싶지 않으니까 세상에게 더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실상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교회가 잘못하는 것이 있다고 하면 당연히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이 맞지요. 우리 성도님들 아시다시피 우리 일산광림교회는 정부의 방역 지침을 누구보다 잘 따르는 교회입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저처럼 순종 잘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냥 바로 안합니다. (웃음) 오늘 2부 3부 성가대도 없어요. 솔리스트로 대체합니다. 하라는 것은 지킵니다. 그런데 적어도 우리 마음만은 지키라는 것은 지키지만 우리의 마음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동기가 되어야지 세상 사람들의 비난의 이야기나 이러면 안된다고 하는 세상적인 여론에 휩쓸려 교회를 비난하는 자리에 서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저는 요즘에 요한계시록을 연구하며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기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그런데 이기는 자가 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냐면 그것은 세상 정부에 대항해서 기독교국가가 되도록 만들어야하고 세상 정부가 이야기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억울하니 그것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이 세상에서 교회는 손해나 억울한 일을 당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보면 세상 사람들과 정부로부터 교회는 억울한 핍박을 당했습니다. 고난과 비난을 당했지만 교회는 그런 비난과 핍박을 다 감수했습니다. 그러면서 신앙을 지켰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향해서 너희들 신앙 다 틀렸다고 말할때에도 그들은 자기의 신앙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핍박이 오고 어려움이 오고 환난이 와도 신앙을 지켰어요. 하나님은 그런 서머나 교회를 향해서 이기는 자가 되었다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쩌면 요한계시록에서 이 마지막 때가 다가옴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깨어있는 자가 되어야하고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에 따라 구원을 받을 것인지 심판을 받을 것인지 이야기 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주된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때에 다 악한 것들이 처벌당하게 되고 마지막에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기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부요하고 번성하고 잘 살고 교회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핍박과 환난이 오면 올 수록 사탄은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그런 공격을 줍니다. 이 요한계시록의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지켜야 할 것을 지켜야합니다. 세상이 뭐라고 하든 내가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요한계시록은 하고 있습니다.

요즘에 일어나고 있는 이런 일들을 보면서 이제 요한계시록에서 권면하고 있는 이런 일들, 우리가 준비해야 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계시록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더욱 더 영적으로 단단해지는 그런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두번째는 세상의 시험과 위협에 굴복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삶은 영적 전쟁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계속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기는 자가 되어야한다, 그래야 구원과 심판이 결정된다. 사탄은 우리를 넘어뜨리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버리는 것이 제일의 목표입니다. 그를 위해서 사용하는 여러가지 공격방법중 잘 사용하는 방법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여러분 사탄이 우리를 공격할 때 무서운 모습으로 다가와서 죽이겠다고 덤벼들지 않습니다. 사탄이 잘 쓰는 공격 방법 세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합리화시키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모든것을 합리화시킵니다. 우리 인간의 생각은요, 정확한 기준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내 생각을 가지고 내 생각이 옳다는 것 하에 모든것을 합리화 시킬 때 그 모든 것들은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먹을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으로 먹어도 될 것 같으니 그냥 먹었습니다. 스스로의 생각이지요. 스스로의 생각 때문에 무너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탄은 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말도 안되는 것 같은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도 돌으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을 틈 타 사탄은 우리에게 늘 합리화시킵니다. "내 죄가 많은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하면 사탄은 "거봐, 네 생각이 맞아. 그래가지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다." 늘 합리화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게 만듭니다. 합리화시키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Yes이면 Yes이고, No이면 No인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죄를 짓게 만들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떨어지게 만듭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한 것을 맹신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을 맹신으로 취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기가 지키고 싶은 대로, 내가복음을 만들어 내가 하고싶은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은 교양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방법은 세상과 잘 어울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좋은게 좋은것 아니겠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보다 늘 세상 이치를 따르게 되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좋은 상황이면 그냥 거기에 어울려서 좋은 상황에서 먹고 즐기고 놀자, 나쁜 상황, 핍박의 상황이 닥치면 아 지금은 상황이 안좋으니까 내가 예배도 드릴 수 없고 지금은 상황이 안좋으니까 멀리 피해있어야 할 것 같고. 이러면 이래서 안되고 저러면 저래서 안되고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배교라고 이야기합니다. 

진짜교회와 가짜교회가 나오는 것이 배교입니다. 세상을 따르고 자신들의 생각이 옳다고 이야기하는, 교회같은 곳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가짜 교회인 것이 배교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세상의 이치를 따르고 좋은게 좋다는 식으로 내가복음을 만들어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죽음앞에서 "내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믿지 않습니다." 하는 수준의 배교가 아닙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누차 말씀드리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의 제 1 원칙으로 삼고 살겠다는 결단이 없으면 그 누구도 세상의 유혹과 시험 앞에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 내가 내 중심을 잡지 않고 그저 되는 대로 살겠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이야말로 사탄의 생각에 물들어 있는 것입니다. 절대로 이길 수 없어요. 내 앞에 어떤 상황이 펼쳐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법이라고 생각하고 내 삶의 제일 원칙으로 삼고 살겠습니다 하며 결단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오늘 서머나교회에 닥쳐온 시련은 핍박이었습니다. 10절에 보니 마귀사탄의 공격은 성도들로 하여금 감옥에 갇히게 만들고 순교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상황이 아닐수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에게도 이런 상황이 닥친다면 배교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감사하게도 서머나교회는 이런 위기에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순교자의 전통을 이어가는 교회가 된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서머나교회를 축복하시고 칭찬하시는 이유가 그곳에 있습니다.

지금도 서머나라고 하는 곳에 가보면 폴리캅기념교회가 그 가운데에 있습니다. 폴리캅은 사도요한의 제자로 알려져있습니다. 그리고 서머나지역의 초대감독, 그 지역의 영적인 지도자로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 당시가 핍박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폴리캅이 어느날 꿈을 꾸게 되는데, 자신이 베고 자던 이 베개에 불이 붙는 환상을 보게됩니다. 지도자였던 폴리캅을 잡으려고 애 쓰던 정부는 결국 폴리캅을 잡게 됩니다.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 지방 총독은 폴리캅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입니까?"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게 세상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목숨을 잃을수도 있는데 너의 신앙을 고집해? 이것처럼 맹목적인 일이 있을수가 없다.' 얼마나 바보같이 보이겠습니까? 그 후로 한다는 이야기가 "한 번만 부인해라, 나도 너를 죽이고 싶지 않다. 존경받는 사람인데 살아서 더 큰 일을 해야지. 한 번만 부인하면 살려줄게."하며 요청하지요. "내 인생 86년을 살아가는 동안에 그 분은 단 한번도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는데 내가 어찌 목숨을 조금 더 연장하겠다고 그 분을 모독할 수가 있겠는가?"라며 폴리캅은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86년동안 그분은 단 한번도 나를 배신하지 않았어, 그런데 내가 조금 더 살겠다고 그 분을 어떻게 배신 할 수가 있겠어. 폴리캅은 그 후에 묶이지도 않은 채로 화형에 당합니다. 그 후 영광가운데 순교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폴리캅 기념 교회가 있습니다. 벽면과 모든 것에 상황이 그림으로 묘사되어있습니다. 누구를 만나고, 마지막에 고난을 당하다가 화형에 처해지는 그 모습들이 나타나있지요. 그런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던 서머나교회 성도들의 모습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과는 어찌보면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우린 조금만 손해가 되고 고난이 되면 "시험 들었어요..." 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교회를 떠나가는 모습들이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인지 모릅니다. 우리 성도님들 내 신앙을 내 옆에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목사님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지혜로운 사람은 내 신앙을 성경의 인물들과 비교합니다. 초대교회를 살아갔던 그들의 삶의 모습과 나를 비교하십시오. 그러실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성경의 인물들의 위대한 신앙을 본받는 자들이 되어야합니다. 마치 냄비속의 개구리처럼 못 이기는 척, 좋은게 좋다는 식으로 있다보면 냄비속에 불을 땔 때 그 속에서 익어가고 죽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과 타협하는 우리의 모습이 냄비속의 개구리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에는 세상을 이기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져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영적으로 부요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리고 어떤 비난과 핍박이 온다 할지라도 세상적으로 법정에 서서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그 모든 것들을 다 끌어안고 기도하고 이 안에서 내 정금같은 믿음을 지켜 나갈 수 있는, 그래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승리하는 우리 일산광림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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