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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기 생명을 끝까지 지키는 성도  
 
자기 생명을 끝까지 지키는 성도
설교날짜 2020.8.2
설교자 박동찬 목사
본문말씀 계 3 : 1 - 6
 

200802 박동찬목사님


요한계시록 3장 1-6절

자기 생명을 끝까지 지키는 성도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성도, 기독교인, 크리스천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받은 축복 가운데 가장 귀한 축복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죄로 인해서 죽을 수 밖에 없는 나를 대신해 죽으시고 그것을 내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 죄의 짐이 다 벗겨지고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래서 하나님 예비하신 영생의 삶, 구원의 삶을 살게 된 존재입니다. 라고 하는 고백이 내가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라고 하는 그 고백과 동일한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결코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길에서 사는 길로 걸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이지 그저 주일에 와서 교양의 말씀 좀 듣고 내 마음을 수양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말씀을 듣고 가는 그것이 신앙 생활이 아니에요. 그래서 이 크리스천이 된다고 하는 것,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은 한순간에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이 결정된다고 믿는 것이 구원파이죠. 내가 몇 날 몇 일 몇 시에 구원받았다고 하면 더 이상 회개 할 것도 없고 교회 다닐 것도 없이 막 사는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절대로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한 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닌 천성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가는 순례자의 여정입니다. 그 여정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그 여정 가운데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하는 사탄의 공격이 얼마나 심하게 덤벼드는 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존 번연이 천로역정이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성경의 내용을 가지고 그대로 알아듣기 쉽게 만든 소설이지요. 천로역정은 지금까지도 베스트 셀러입니다.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린 책이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존 번연의 천로역정의 모든 과정을 정원으로 잘 꾸며놓은 곳에 몇몇 존경하는 목사님들과 함께 정원을 다니며 그 앞에 서서 잠깐 묵상하면서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가 되는지요. 개인적으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Graceless>라는 순례자가 있습니다. 말 그대로 은혜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죠. 어느날 '이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알 수 없는 죄의 짐이 나를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고민하게 되는데 그 때 전도자의 전도를 받아서 멸망성을 떠나 순례의 과정을 걷게 됩니다. 하지만 걸어가면 걸어갈 수록 죄의 짐이 나를 더 강하게 짓누르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느 날 십자가의 언덕에 가 십자가 밑에 서게 될 때 죄의 짐이 다 끊어져 언덕 밑으로 굴러 떨어져 내려가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거기서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새 이름으로 얻게 됩니다. 그 후 자신이 입고 있던 허름한 옷들을 다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순례여정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천로역정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부터 시작이 됩니다. 본격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됐으면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지 "그리스도인이 됐으니 이제 다 끝났다." 이렇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 이전보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다음이 더 힘들다는 거예요.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는 여정을 출발 한 것입니다. 

내가 죄의 종으로, 어둠의 자녀로 있을 때에는 사탄이 우리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어차피 멸망의 길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천성을 향해 걸어가는 그 여정가운데에는 어둠의 권세가 우리를 어떻게 해서든지 끌어내리기 위해 공격합니다. 그러다보니 나태함이 있고, 거만함이 있고, 고난의 벽이 있지요. 순례의 여정을 가는 크리스천들이 그 자리에 머물러 깊은 잠에 빠져버리는 모습들도 조각으로 표현이 되어있지요. 세상적인 허영의 유혹에 빠져서, 세상 환락과 쾌락에 빠져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어렵고 힘든 일로 인해서 절망의 감옥에 갇혀 도저히 절망의 감옥에서 헤쳐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열쇠가 떨어져 있습니다. 이 열쇠로 말씀의 문을 열고 나오는 거예요.

또 어려운 순간들이 많이 있지만 소망이라고 하는 친구가 옆에 있어주어 그 모든 환경들을 다 이겨나가게 되는 거죠. 마지막에는 세상 지혜자들이 마지막 관문 앞에서 속삭입니다. "그 길이 옳은 길이 아니라 이쪽 길이 옳다. 이 길로 가면 죽음 뿐이다. 되돌아 가야 한다." 그때 또 거기서 믿음이 약한 자들은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죠. '내가 정말 이 길을 계속해서 나아가야 할 것인가, 아니면 지혜롭다고 말하는 저 들의 말을 듣고 돌아서야 할 것인가.' 이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혜자의 속삭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나아가게 될 때 죽음의 강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 죽음의 강에는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두려워하면 그 강이 깊어지고, 내가 소망 가운데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서게 되면 그 강의 깊이가 낮아지는 거예요. 죽음의 강을 건넜을 때 마지막에 천성을 바라보며 환희에 찬 승리의 모습도 조각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그 강을 건너 마주해야 천성을 마주해야 하는 크리스천입니다. 

천로역정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 모든 크리스천은 천성을 향해 가는 순례자이다. 하지만 그 길은 쉽지 않다.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도 있고, 절망에 갇히는 사람도 있고, 게으름과 나태함의 깊은 잠에 빠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고난의 벽에서 안절부절 하고 뒤로 돌아서서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끝까지 가야 할 길이 있지만 그 길을 다 가지 못하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을 수 있다. 그러니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믿음으로 끝까지 가야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니면 다 구원받을 것이다 하는 생각입니다. 가만히 서있어도 쭉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구원의 여정은 에스컬레이터가 아닙니다. 가만히 있어도 쭉 올라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우리 구원의 여정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사데교회에 주시는 경고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 가운데 다섯번째 교회입니다. 사데교회에 주는 경고의 메시지는 1절에 나옵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자로다.] 참 두려운 이야기입니다. 나는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보실때에 나는 죽은자라면 얼마나 절망적이겠습니까? 저는 오늘 사데교회의 이야기를 통해서 정말 살아있는 존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세가지 말씀을 잠시 전하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는 이름만 크리스천이어서는 안됩니다. 

명목상의 크리스천이라고 얘기합니다. 명목상의 크리스천이 크리스천입니까 아닙니까?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명목상의 크리스천은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흰 백지에 굵은 매직을 가지고 빛이라고 쓰는 거예요. 그리고 이것을 읽어보십시오 하면 모든 사람이 다 "빛이요!"라고 읽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흰 도화지 속에 쓰여진 빛이라고 하는 것이 글자로는 빛이지만 진짜 빛이냐? 그것은 아닙니다. 쓰여진 글씨일 뿐이지 그것이 진짜 빛이 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명목상의 크리스천은 이름만 크리스천 일 뿐이지 진정한 크리스천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 1절의 말씀 [내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자로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구원의 이름을 가진 자라고 너 스스로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것보다 두려운 말씀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중 하나인 사데교회는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데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는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자이다. 우리는 언젠가 다 하나님 앞에 서야 할 때가 옵니다. 꿈에 그리던 예수님께 달려가지만 예수님께서 "그런데 너는 누구냐,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라고 말씀하시면 인생은 끝난 것입니다.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어요. "어찌 저를 모르십니까?"하는데도 모른다고 하신다면 절망입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23절의 말씀에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 갈 것이 아니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만 들어갈 것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선지자 노릇 했다, 참 마음에 와 닿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많이 아는 것 같이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다 아는 것 처럼 이야기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시면 선지자 노릇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을 보면 정말 하나님의 종인가 싶지 않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참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나님의 관심은 능력을 행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이 아느냐에 있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법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옆에 제쳐두고 내 마음과 뜻대로 세상의 방식을 따라 사는 것이 불법입니다. 그래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세상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 올 수 없다. 예수님이 나를 반겨주실 줄 알았는데 나를 모른다고 하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망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영적으로 살아있는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이 나를 죽은자로 평가하신다. 얼마나 가련한 존재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 성도님들이 고민하고 두려워 해야 할 부분이 무엇이겠습니까? 코로나가 두려운 것이 아니에요.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요. 진짜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이 보실 때 내가 죽은 자 인가 산 자인가?' 이것이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명목상 크리스천>이 되는 것입니다. 매우 위험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크리스천이라고 부르니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실 때 나는 진정한 real크리스천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 할 때 비로소 진정한 크리스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법이 아닌 법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이야깁니다. 

몇일전 어느 목사님을 만났는데 이분의 교회가 '지금 코로나 시대에 아무것도 못하나보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자.' 하며 찾은 일이 지역 주민들을 찾아 다니며 하얀 방역복을 입고 가게마다 들어가서 방역을 해드리는 일입니다. 이 더위속에서 방역복을 입고 땀투성이가 되도록 방역을 해드렸습니다. 땀이 식으니 옷이 하얗게 되는 것입니다. 땀이 마르니 소금기가 보이게 된 것이지요. 그 분이 보시고 "아 이거 소금이네?"하며 우스갯소리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목사님께 하는 이야기가 "목사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빛이요 소금이 되라고 하신 말씀이 이런 것입니까?"이렇게 땀이 흘러 소금으로 젖는 이 모습을 보니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라"는 이야기가 가슴에 와닿는 것입니다. 웃자고 한 이야기지만 단순히 웃을수만 있는 얘기는 아니었습니다. 맞는 이야기였으니까요. 

우리가 세상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땀을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빛이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그런다고 우리가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빛은 비춰줘야 빛인 것이고 소금은 맛을 내야 소금인 것이지요. 썩어지는 것을 막어내야 소금이라는 이야깁니다. 내가 진정한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것은 이름만 가진 크리스천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살면서 정말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갈 때 그것이 진짜 그리스도인이지요. 살았으나 죽은 자가 아니라 정말 살아있는 생명력을 가진 크리스천이 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스스로를 생각하실 때 어떻습니까? 내 생각에는 살아있는 것 같은데 혹시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며 너는 죽은자라고 말씀하시게 될 때는 절망이라는거예요.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명목상의 크리스천이 아니라 진정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두번째는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에게 깨어있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절 말씀에 보면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라고 나와있습니다. '일깨어'라는 말이 영어 성경에 보니 'wake up'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깨어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주저 앉아있지 말고 깨어 일어나라.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재림 하실 때에 대한, 종말에 대한 징조들이 기록되어있습니다. 24장 42절에서도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생활 함에 있어서 깨어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원수 된 사탄은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 우리를 농락하고 공략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을 가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옛날에는 경주로 수학여행을 많이 갔죠. 가보면 다른 학교 수학여행 학생들도 많이 모여있는 곳에 우리가 섞여있습니다. 그 때에 한 가지 절대 하면 안되는 것은 잠드는 것입니다.(웃음) 잠들면 친구들이 와서 얼굴에 치약을 뿌려놓습니다. '이게 뭔가...'싶어서 잠결에 만지면 온 몸에 묻게 되는 것이지요. 유치하지만 그렇게 하고 놀았습니다. 표적이 되면 위험한 거예요. 누군가를 쿡쿡 찌르며 표적을 삼자고 하지요. 표적이 되면 웃자고 하는 일이지만 온통 치약에 절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꼭 사탄이 하는 일과 똑같습니다.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져들게 될 때 사탄이 우리를 공격합니다. 우리를 공격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전쟁중에 졸리다고 잠에 들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영적 생활 인 줄로 믿습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어떤 일이 일어날 때 그것을 볼 수 있고 생각 할 수 있고 느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잠들어있는 사람은 급한 위기가 닥쳐도 볼 수 없고 생각 할 수 없고 느낄 수 없어서 대처가 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깨어있지 못하기에 자기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실상은 잠들어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순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 [살아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죽은자라]는 표현은 우리가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져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우리가 깨어있지 못하다면, 살아있어도 산 것이 아니라 죽은 것과 다름없다는 거예요. 분명히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은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것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겠지요.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영적으로 민감하게 깨어있을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은 내 자신이 어떤 상황속에 있는가를 알게됩니다. 내 자신이 얼마나 가련하고 비참한 존재인지를 알게 됩니다.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하나님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허황된 이야기로 듣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라고 이야기 해도 가슴에 와닿지 않으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게 되는 거죠. "예수님 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을 의지하고 믿어야합니다." 그래도 한 귀로 들어왔다 한 귀로 나갑니다. 가슴에 오지 않는 것이지요. 잠들어있는 사람에게 무슨 소리를 한들 깊은 잠에 빠지면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해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 하나님의 말씀에 깨어있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깨어있고, 귀를 여셔서 들었을 때 감동이 와야 합니다.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들어야겠다. 마음에 찔림이 있다면 회개하고 돌아서는 역사가 우리 매일의 삶 속에 나타나야 된다는 이야깁니다.


세번째는 거룩을 지켜야 합니다.

오늘 4절 말씀에 보니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라고 말합니다.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는 세속에 물들지 않은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가 옷을 입고 진흙탕에 가면 진흙물이 다 튀어 옷이 더러워집니다. 우리는 거룩이라고 하는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크리스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옷을 입고 세상에 나가서 세상 방식대로 살면 세상의 흙탕물이 튄다는 얘기에요. 옷이 더럽혀지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가 현실의 옷, 깨끗한 옷을 입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옷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옷을 우리는 입은 존재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너는 기독교인이다."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죠.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 기독교인으로써 기독교인의 가치관, 성경의 가치관을 지키며 사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세상의 가치와 풍조를 따라 산다고 하면 그것이 바로 옷을 더럽히는행위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은 신앙이고, 생활은 생활이죠. 신앙과 생활을 혼동하면 안됩니다." 라고 말합니다. 맞는 이야기 같지만 틀린 이야기입니다. 한 번 생각 해 보세요. 여러분들이 이웃과 잘 지내다 싸움이 벌어졌어요. 이웃과 욕을 하며 싸워요. 그럼 그 사람이 나중에 집에 돌아가서 뭐라고 말씀하시는 줄 아십니까? "하여튼 기독교인들 상대하면 안돼. 못써." 그 사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상점에 가서 한푼이라도 더 깎으려고 싸워보십시오. 그 사람이 나를 욕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은 깎쟁이들이야. 상대하면 안돼." 이렇게 욕합니다. 

우리는 어느 틈엔가 내가 생각하지 못한 순간에 크리스천이라는 옷을 입고 살게 됩니다. 우리는 기독교를 대표하는 존재로 세상에 서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의 옷 입고 사는 존재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올바른 것을 추구하고 사는 것을 잊으시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3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생각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성,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성을 주신 것은 잘 생각하고 잘 판단하라고 주신 선물입니다. 내가 영을 쫓아 살 것이냐, 세상 육신을 쫓아 살 것이냐 생각해야합니다. 

우리는 생각 없이 감정에 충실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감정에 충실하다보면 거의 100% 후회하게 되어있습니다. 감정 따라 살아 잘 됐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따르다 보면 나중에는 반드시 후회하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한 행동 한 행동을 할 때 마다 생각하고 실천하는 성도님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수하게 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와 하나님을 욕되게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목회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없습니다. 직분이 나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살다보면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생각 없이 몸이 원하는 대로 행동한다는 뜻이지만 100% 후회하게 됩니다. 써도 생각을 해보니 이것이 약이면 삼켜야합니다. 달아도 이것이 나에게 독이된다고 하면 생각 한 후에 뱉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정직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게 될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기적의 역사를 보여주시고 그것을 통해서 위로하시고 보호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됩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 하나님의 기적과 은총이 임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크리스천중에서 기독교인의 삶을 이야기하면 성도님들 가운데에서도 "아우 그건 너무 편협하게 사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말씀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그냥 자유로운게 좋아요."
여러분 자유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자유가 좋은 것 같지만 결국 내 삶이 정결한 삶,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자유로움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몸은 가만히 내버려두면 절대로 성화를 향해 갈 수 없는 몸입니다. 인간의 몸은 가만히 내버려두면 나태해지고 더욱 더 편한 것을 추구하고 결국에는 망가져버리고 마는 것이 인간의 몸입니다. 운동 하기 싫어도 일어나서 운동 하셔야합니다. "내일부터 할래" 제 얘기이지만 이렇게 내일부터 하겠다고 미루다 보면 점점 관절이 시리기 시작하고 배도 나오기 시작합니다.(웃음) 몸이 비둔해지다가 결국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편한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좋은 삶처럼 느겨지겠지만 그곳에는 결코 성령의 임재가 있지 않습니다. 열매도 없고 승리 할 수도 없습니다. 오늘 그래서 우리가 살면서 얼마나 편하게 사는가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안되고 정말 중요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은총을 향해서 나아 갈 것인가 말 것인가 ' 생각하고 결단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아니하면 다 불못에 떨어진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 5절에도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나와있습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야 하는 거예요. 그러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다 할 지라도 우리가 세상으로 나아가게 되면 지워지는 거예요.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한다는 것이 지울수도 있다는 이야기지요. 하지만 이기는 자 만이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지 않고 승리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쁜 세상 살이를 하는 속에서도 정말 중요한 것, 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가. 이것을 위해서 오늘도 내가 피곤하고 하기 싫어도 그 자리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의 뜻을 쫓아 살아가야 합니다. 진짜 크리스천, 살아있는 존재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일산광림교회 성도님들이 돼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시지만 우리가 내 몸이 원하는 것을 쫓아가다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결코 가만히 있으면 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달려 가야 합니다. 두 주먹을 쥐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따라 살겠다고 결단하며 일어나서 천성을 향한 구원의 길, 진리의 길, 승리의 길로 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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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7.19
박동찬 목사
 계 2 : 12 -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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